나의 이야기

잘못된 선택

아이루다 2013. 8. 25. 21:12

 

- 어떤 상황 #1

 

언니가 결혼할 사람이라고 한 남자를 데려왔다. 정식 소개를 받을 자리에서 본 언니의 남자는 일단 우리 사회 일반적 수준으로 평가하면 '상급'에 속하는 조건을 갖춘 사람으로 보였다. 좋은 직장, 준수한 외모, 약간 큰 키, 거기에 더해서 성격도 좋아 보였다. 특히 언니에게 집중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그 후 형부가 될 사람과 얼마간 어울리다 보니 언니가 참 좋은 남자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에겐 왜 저런 남자를 만날 행운이 따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언뜻 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언니가 좀 많이 부러웠다. 형부가 될 남자는 나 자신에게도 어느 정도껏 잘해주긴 하는데 언니에게 대하는 것을 보면 정말로 심각하게 생각될 정도로 잘했다. 그 후 결혼 전 몇차례 더 만남을 가진 후 가끔 '결혼 후에는 달라질거야' 라든가 혹은 '너무 심해서 보기 불편하다고' 까지 느낄 정도였다.

 

처음엔 형부에 대한 느낌 때문에 언니가 마냥 부럽다는 생각을 했는데, 요즘 형부가 될 사람을 보면 좀 과한다는 생각과 함께 남자가 너무 여자에게 메달린다는 느낌도 들곤 했다. 그래서 처음과 달리 형부가 될 사람에 대한 호감이 많이 줄었고 그런 남자를 만난 언니가 좀 덜 부러워졌다. 요즘은 그래서 같이 어울리자는 언니의 연락이 와도 핑게를 대고 안나가는 편이다. 자신은 좀 더 남자답고 여자에게 덜 매달리는 남자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로부터 1년 후 언니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졌고 자신은 원하던 스타일의 남자를 만나 요즘 한참 사랑의 즐거움에 빠져 있다. 그 남자의 성격은 약간 냉정한 느낌을 주는 편이지만 형부처럼 언니에게 마냥 메달리는 스타일이 아니라 깔끔해서 좋다고 느낀다. 물론 연락을 좀 자주 안하고 또 연락을 해도 그리 형부처럼 그리 살갑게 대하지 않아서 약간의 불만은 있지만 세상에 모든 것을 다 갖춘 남자가 또 어디있으랴.

 

- 어떤 상황 #2

 

30년을 넘게 살아온 삶이지만 특별히 뭔가 이룬것도 이루고자 한 것도 없었다. 남들처럼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고 그안에서 작은 이득을 얻고 또한 작은 손해봄을 감수하면서 그럭저럭 살아 온 셈이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들려오는 이런저런 소리들을 듣다 보니 뭔가 이 나라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그런 글들을 보다보니 뭔가 집히는 것이 생긴다.

 

알면 알 수록, 이 나라는 너무 큰 부조리가 지배하고 있는 사회가 아닌가? 그래서 꾸준히 인터넷 방송도 듣고, 가끔은 집회에 참석도 하고, 물론 투표는 절대 빠지지 않고 참가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시선을 주변의 사람들을 보니 과거 나처럼 아무 생각없이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새삼 놀란다. 그리고 틈만나면 그들에게 사회에 정치에 관심을 가지라고 말하면서 그동안 듣고 본 많은 부조리한 이야기들과 그리고 뉴스에 나오지 않는 각종 이야기들을 해주게 된다.

 

생각해보니 삶이란 것은 이렇게 뭔가 의식을 가지고 잘못된 것을 고치면서 살아가는 것이 옳다는 생각과 함께 이런 삶이야 말로 진정한 가치 있는 삶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자신이 주변에서 쉽게 보는 아무 생각없이 사는 이들과 다름이 너무도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 어떤 상황 #3

 

어려서 우연히 간 교회를 꾸준히 다니다 보니 깊은 신앙심이 생겼다. 그런데 결혼 할 나이가 되어서 제법 괜찮은 남자친구를 만났는데 문제는 남자친구도 종교가 없고 그 집안 역시 그렇다는 점이 걸렸다. 특히 아직도 매년 몇차례의 제사를 모신다는 말에 자신의 믿음과 충돌이 나는 것에 대해서 많은 걱정이 되었지만 이런 일로 이 남자를 놓치기엔 너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의 목사님이나 지인들에게 이 문제를 상의해봐도 제사는 절대 모시면 안된다는 말을 한다. 이것은 유일신을 모시는 자신의 종교에서 절대로 금하는 행위로 타협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결국 결혼을 하고 보니 이 문제가 그리 쉽게 해결되지 못한다. 물론 남편은 꽉 잡고 살기에 자신의 마음대로 남편을 조종할 자신이 있었지만 문제는 시어머니였다. 역시나 고부갈등은 자신이 아무리 잘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과 함께 이번에 다가오는 제사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통보를 남편을 통해 전달했다.

 

물론 실제로 시댁이 지방이라서 한번 다녀오는 것도 참 많이 번거롭고 이래저래 돈도 깨진다. 왜 저런 구식의 관습에 억메여 제사상 같은 것을 준비하는지 이해가 안간다. 실제로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은 매우 고달프고 힘든 노동이다. 그래도 다행히 자신은 종교적 믿음에 의해 제사에 참석하지 않을 수 있는 명백한 이유가 있음이 너무도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만약 종교가 없었다면 일년에 몇차례 이 끔찍한 행사에 참가헀어야 할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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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좋은 예를 적어보고 싶었는데, 머리의 한계가 있어서 이 정도가 내가 생각하는  적절한 수준인 듯 싶다.

 

아무튼 세가지 예에 대해 차례대로 한번 생각해보자.

 

첫 번째 이야기는 좋은 조건에다가 다정다감하고 착한 형부의 성격이 그리 탐탁지 않은 처제가 자신의 남친으로 조금 무뚝뚝한 남자를 선택한 이야기이다. 여기에는 표현이 되지 않았지만 이 처제는 실제로 형부를 많이 좋아했다.

 

그런데 그 형부가 당연하게도 자신에게보다는 자신의 언니에게 상대적으로 너무도 잘 해줘서 이것에 대해 질투가 났지만 본인은 그것을 질투로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형부와 같은 남자를 싫다고 생각하기 시작 한 것이다. 즉 자신보다 언니에게 너무도 잘해주는 형부가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질투로 인한 감정적 기복이 생기니까 그것을 질투가 아닌 남자 성격에 대한 호감으로 바꿔치기 해버린 것이다. 즉 형부를 차지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형부와 같은 성격을 가진 남자를 싫어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 온 것이다.

 

두 번째 이야기는 별 생각없이 살아가다가 어떤 자각과 함께 의식을 갖게 된 사람이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스스로 그런 삶에 대해 만족해 하는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이 사람은 자신의 변화 된 모습과 남들과 다르게 의식이 깨어있다는 점에 스스로 자존감도 높아지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 대해 자신감도 높아졌다. 그리고 자신과 다르게 아무 생각없이 사는 이들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들을 수준 낮은 삶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에게 자신이 느낀 것을 알려주려 애쓰게 된다.

 

그런데 이 사람의 경우 스스로 얻어진 자각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과 자존감을 얻었지만 문제는 정말로 자신이 그 스스로 믿는 것 만큼 정의나 공공성에 대한 신념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런 문제에 대한 의식을 하는 그 스스로가 남들과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믿는 것일까? 혹은 논쟁이나 토론에서 상대의 헛점을 파고들어 이기는 것이 즐거운 것일까? 는 다른 사람에게 바르게 정직하게 살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자신의 삶에서 이런 판단의 순간이 올때마다 늘 자신 역시 그런 공정함과 사회적 정의를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세 번째 이야기는 제사를 지내는 집안에 시집을 온 기독교를 믿는 며느리에 대한 이야기이다. 시댁이 지방이라서 멀기도 하고 또 제사 지내는 절차가 매우 심한 노동이기도 한데 다행히 자신은 이미 가진 종교의 원칙을 통해서 이 제사에 참가하는 것 자체를 거부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만큼이나 제사 참가를 귀찮아 하는 남편도 그녀에게 은근히 동조하는 분위기라서 공식적으로 시댁의 제사에 참가하지 않음을 통보한다. 그로 인해 시간, 돈, 힘든 노동, 불편한 시대 방문이라는 아주 큰 이득을 챙기게 된 것이다. 이 며느리에게 있어서 제사의 불참은 종교적 믿음에 대한 충성일까 아니면 자신의 편리함을 추구하기 위해 이용하는 대외적 이유가 될까?

 

이 세가지 이야기에서 각자의 이야기 주인공의 마음속에서 무엇이 진실인지를 알 방법이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작은 의문을 가지고 이 이야기를 바라 볼 수도 있다. 설령 두 가지 이상의 진실이 섞여 있더라도 남에게 이야기하는 진실과 자신의 마음 속에서 더 우선시 되는 진실을 다를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예전부터 남에게 말하는 진실을 '대의명분' 이라고 했으며 이것은 인간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꽤나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대의명분을 그 자신이 믿어 버리는 경우가 생긴다.

 

첫 번째 대의명분은 나는 다정다감한 남자가 싫다 라는 표현이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 진실은 언니에 대한 질투 있 수 있다는 의미이다.

 

두번째 대의명분은 우리 공동체의 삶에 적극적인 참여의식이다. 그런데 정말로 우리 공동체에 관심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런 관심 있는 태도를 통해 얻어지는 자존감에 관심이 있는것이지 모를 일이다.

 

세 번째 대의명분은 종교적 믿음에 의한 금기이다. 그런데 정말 그것 만으로 이런 행동을 했던 것일까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물론 답은 없는 문제이다. 이 모든 상황은 그저 예시일 뿐이고 실제로 일어난다고 해도 답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지금 우리가 착각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몇가지 예를 들어 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예는 정말 많다.

 

맞아가면서 울며 배운 바이올린으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연주자가 인터뷰에서 자신에게 바이올린은 최고의 행복이라고 자랑스러워 하는 모습이 돈을 벌어서 바이올린이 좋은 것인지, 바이올린을 좋아하다가 보니 돈이 벌린 것인지 혼란스럽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마다 사진을 찍어 이 음식을 먹어서 너무 행복하다고 말하는 친구가 정말 음식이 맛있어서 행복한 것인지 아니면 그런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자신이 자랑스럽고 또한 그것을 자랑할 공간이 주어져서 행복한 것인지 혼란스럽다.

 

학생을 상담하던 교수가 그들에게 들었던 많은 이야기와 그들에게 해준 좋은 이야기를 묶어 책으로 냈을 때 사람들이 그의 책에 감동하는 모습을 보고 그 스스로 상처입은 그들을 치유함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책이 잘 팔려서 돈이 생겨서 좋은 것인지 혼란스럽다.

 

우리는 삶에서 꽤나 많은 것들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살아간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사람에 대한 호불호, 자신에 대한 자존감, 행복의 조건, 종교적 믿음 등등 어떤 것들은 너무도 명백해서 도저히 그렇지 않을 가능성을 상상도 해볼 수 없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확신들이 정말로 아무런 착각도 없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가치일까? 실제로 이런 상황에서 이런 것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생각을 시작하기란 참 힘들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이 세상을 그나마 쉽게 살아갈 수 있는 요령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우린 늘 불안하고 혼란스럽고 그래서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기가 힘들다. 우리는 옳고 그른 것에 대해 빠른 판단을 할 때 마음의 결정을 쉽게 하고 그래서 다음 행동이 머뭇거리지 않고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엔 함정이 있다는 점이 문제다. 우리 인간은 자기 합리화 능력이 아주 대단한 수준이기 때문인데 그런 능력으로 인해 우린 분명히 어떤 행동에 있어서 여러가지 생각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됨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누군가에게 자신의 그런 행동을 설명할 때는 그 중에 가장 괜찮아 보이는, 그리고 남들이 수긍하는 이유를 내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면서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되면 나중엔 정말 그 스스로도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런 결정을 했다고 믿게 된다.

 

여기에서 자신이 자신 스스로에게 정의한 확신을 스스로 다시 생각해고 고민하고 그래서 그 밑에 깔린 내가 모르던 나의 진실을 알아내는 과정은 꽤나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어느 정도 선에서 이것을 잘라낸다. 내가 내 아이를 위해 돈을 벌어 학원을 보내는 것이 아이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아이의 성적을 옆집 사는 민정이네 엄마의 콧대를 꺽어놓기 위한 것인지는 오래 생각 할 필요가 없다. 만약 아이가 공부를 잘한다면 다 좋은 것이니까. 그래서 이 엄마는 죽는 그날까지 자신이 아이를 위해 선의로 많은 것을 했다고 평생 기억하게 된다.

 

그래도 삶에 대한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는 생각이 필요하긴 하다. 잘못하다간 스스로 만들어 낸 사고의 틀에 빠져서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가거나, 돌이킬 수 없는 판단 실수로 인해 평생 후회를 안고 살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그나마 스스로 손해를 보는 것이어서 낫지만 더 큰 문제는 이득 방향으로 일어나는 문제이다. 자신의 믿음을 통해 제사를 거부하는 며느리의 이야기 속에서 처럼 어떤 이득을 위해 자신의 확신에 대해 의문을 가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오기는 훨씬 더 힘들다. 굳이나 착각이나 잘못된 판단을 통해 더 큰 이득을 얻는데 왜 그것을 버리겠는가? 그리고 거기에 소속된 모든 이들은 이것이 맞다고 확정적 증인이 되어 주는데 말이다. 특정 종교를 가진 이들의 행동양식에서 이런 모습은 매우 자주 보인다. 식당이 잘되기 위해 근처 교회를 다니는 것이나 교회내의 인맥을 통해 사업적 이득을 얻는 것이 좋아서 교회를 다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절대 순순한 신에 대한 믿음이라고 의심치 않는 모습등이 바로 그런 좋은 예이다.

 

앞에서 말했듯 남에게 말하는 진실이라고 알려진 것은 대의명분이고 나 자신이 품고 있는 진실은 절대로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진실이다. 하지만 사람은 워낙 심리적으로 웃긴 성향을 가진 동물이기에 남에게 계속 자신의 대의명분을 반복해서 이야기하다가 보면 그 자신의 진실이 바로 그 대의명분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리고 그 후에 그 말을 지키려고 살아가다보니 결국 그 대의명분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된다.

 

여기에서 순서가 매우 중요하다. 원래 그런사람 -> 남에게 표현 -> 원래 그렇게 계속 사는 과정은 좋은 흐름이다. 원래 그렇지 않은 삶 -> 남에게는 다르게 표현 -> 표현을 했으니 지키려고 노력 -> 계속 말하고 노력하다가 보니 어느정도 그렇게 살아짐 -> 나이가 먹을 수록 더 잘함. 이 순서는 사람이 어떻게 고착화 되는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렇게 얻어진 삶의 태도는 완고함 그 자체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고 자신이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평생 동안 자신을 몰아 붙여서 얻어진 것이기에 그것에 대한 스트레스와 노력에 대한 보상심리로 인해 자신이 지키는 가치를 너무 높고 단단하게 평가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의 삶은 일반 사람들에게 참 많이 나타난다. 물론 절제나 혹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다는 극기의 차원에서 나쁜 것은 아닌데 문제는 자신의 착각으로 인해 사고의 유연성이 거의 없어져 버리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나만 옳고 다른 것은 다 틀리다는 생각으로 발전되어 결국 독불장군식 편협한 사람이 되기 쉽상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엔 이런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맛있는 음식은 그냥 맛 있다. 맛없는 음식은 그냥 맛없다. 아이들은 그냥 맛있으면 먹고 맛없으면 안 먹는다. 그런데 어른들은 몸에 좋은 음식을 끝없이 맛있다고 스스로에게 강요한다. 그리고 나중엔 정말 맛있다. 문제는 이 맛없는 음식을 잘 못 먹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이다. 왜 이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냐고. 그리고 그렇게 살면 건강에 해롭기도 하고 잘못된 삶이 태도라고 말한다.

 

물론 이건 단순히 음식의 예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런 종류의 것들이 거의 인생 전체에 걸쳐서 있다. 어떤 것들은 이 음식처럼 단순한 호불호의 기호적 측면에서만 도출되지만 또 다른 것들은 매우 무겁게 나타난다. 그것은 정치, 사회문제, 대인관계, 공동체 속의 삶의 태도, 가족에 대한 의무 등등 우리가 진짜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사회가 우리에게 무엇이 옳은지 가르쳐주고 그것을 진리로 삼아 평생을 살아왔다면 비록 그 시작이 남에 의한 이야기 일지라도 결론은 나의 아집과 독선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래서 우린 가끔 뒤나 옆을 봐야 한다. 과연 누가 나에게 이것이 옳다고 말해줬는지, 왜 나는 이것이 옳을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그리고 내 마음속에 가진 진짜 진실이 무엇인지를 봐야 한다. 그것은 어렵고, 그것은 두렵고, 그것은 고통스러울지라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평생을 자신을 속이면서 살아간다. 한번의 선택이 어떤 이의 인생 전체를 관통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선택이 주는 압박에 눌려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잘못된 선택일지라도 말이다.

 

우린 오늘도 자신의 주변사람들과 대화에서 인생에 있어서 옳고 그름에 대한 이야기나 어떤 선택을 할 때마다 그 기준이 되는 것들에 대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영향을 주고 받는다. 이것이 모이고 모이면 사회적 합의가 되고 관습이 되고 우리가 상식이라고 표현하는 것들이 된다. 하지만 우린 그 밑에 깔린 우리의 진실을 바라볼 줄 몰라서 왜 우리가 그런 것들을 상식화 시켰는지 유추할 능력이 없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를 많이 불행하게 한다. 공부하는 학생, 좋은 직장을 다니는 청년, 결혼과 아이 낳고 살아가기, 중년과 장년에 걸친 삶의 진행.. 이 모든 인생의 각 단계에서 우리는 자신이 가진 진정한 행복에 대한 힌트를 찾지 못하고 남들이 대외적으로 옳다고 말하는 것들에 자신을 끼워 맞춘다. 그리고 이것으로 인해 적당히는 살아가지만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것은 알지 못한채 살다가 죽어간다.

 

그래서 우린 그리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이 된다.

 

얼마 전 읽은 책에서 니체는 인간을 낙타, 사자, 어린아이 순으로 발전해 나간다고 한다. 맹복적이고 순종적인 낙타와 그것을 깨어부수고 능동적인 의지를 가진 사자지만 그 후로 무엇을 해야 할 지 모르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거쳐, 이로부터 한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하려는 어린아이의 순수한 의지까지의 변화되는 과정을 짜라투스라스의 이야기를 통해 설명해준다.

 

과거를 포함한 인간들 대부분은 낙타이다. 그런데 우리가 자신에 대해 조금만 주의깊게 생각하는 버릇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린 언제든 사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많은 시간을 자신에게 집중하면 어린아이 단계 까지도 도착 가능하다. 물론 인간 중 이 단계에 들어서는 이는 전체에서 정말 몇 안되는 소수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 혹시나 미래의 어느날 우리들 대부분이 어린아이의 단계로 올라 설 수 있는 그런 수준까지 우리 인간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면 아마도 우린 현생 인류를 진화적으로 뛰어넘는 수준으로 평가 할 수 있으리가 믿는다.

 

낙타로 살아갈지 사자로 살아갈지 어린아이로 살아갈지는 누가 결정해주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 각자 자신들 스스로 그것을 결정해야 한다. 그래서 그 변화들의 시작은 바로 나의 확신을 스스로 의심함으로서 시작된다. 아무리 누군가 그것을 해보라고 해도, 이것이 우리가 스스로 한단계 진보하는 길이란 것을 길거리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없다면 그리고 그런 것을 해봐야 현생에 무슨 도움이 되겠냐는 식으로 생각을 한다면 그것을 고칠 방법이 없다.

 

그래도 그나마 이런 작은 소리들이 이 사회에 조금이라도 메아리 칠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작은 기회가 사라지지 않고 희미한 명맥이라도 이어갈 수 있음에 희망을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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