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가족의 의미 - 경제력의 공유

아이루다 2013. 8. 19. 10:56

 

인간 혹은 사람이라고 일컬어지는 우리들 존재 뿐만 아니라 생태계를 구성하는 매우 다수의 개체들로부터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 하나가 바로 '만들어 낸 존재와 만들어진 존재와의 관계성'이다. 이 말을 우리 인간을 기준으로 하면 부모와 자식 이라고 칭하고 생태계에서도 어미와 새끼 등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대다수의 고등 동물군에서 이 관계는 꽤나 친밀하고 끈끈하며 또한 남다른 면이 있다. 그 중에서도 아마 지적으로 가장 발달한 인간은 그 어떤 동물보다도 월등하게 이 관계가 지속적인 특징이 있다.

 

실제로 보통 부모 자식 관계가 양육의 기간만 유지되는 동물들과 다르게 인간은 한번 맺어진 가족이란 관계를 아주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죽는 그 순간까지 유지를 하는 특징이 있다.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이것을 하늘이 맺어준 관계라고 해서 천륜이라고 하기도 하고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통해 다른 관계와는 상대적으로 더 깊은 관계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거기에 더해 우린 여러가지 목적하에 가족간의 일어난 일반적인 이득 관계를 초월한 다수의 감동적인 사례들을 전파시키고 그것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어내면서 가족애에 대해 무한한 절대성을 부여한다. 그래서 대부분이 사람들은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자연스러운 것이면서 또한 본능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는 절대적인 사랑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물론 간혹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게 천륜을 거스르는 강력한 사건들이 일어나긴 하지만 대다수는 그것이 매우 소수만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정말로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 자식이 부모에 대한 사랑이 우리가 믿는 것만큼이나 그렇게 순수한 것일까? 어쩌면 이런 질문을 하는 것, 그 자체가 불경스러운 짓인지도 모르겠지만 혹은 누군가는 당신이 가족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라고 나에게 말해줄 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가족의 절대적 관계에 대해 조금 회의적인 입장임을 부정할 수 없다.

 

내가 정의하는 가족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가족 구성원 개개인의 삶이 많은 영역에서 공동으로 공유되거나 소유되는 관계라는 점이다. 물론 그 시작은 유전자의 공유로부터 시작된다고 믿지만 실제로 꼭 그것만은 아니다. 설령 전혀 다른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이라도 그 마음속으로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일반 가족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관계가 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더욱 더 가족스러운 관계가 되기도 한다. 여기에서 더 중요한 것은 유전자가 아닌 서로 받아들임이다.

 

그럼 가족간 공유의 종류 중에 어떤 것이 있을까? 아마도 우리 사회가 좀 더 원시적인 사회여서 실제적인 안전을 위협 받는 험난한 자연속에서 살아간 원시인과 같았다면 우리에게 가족의 가장 첫번째 공유는 바로 '안전'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린 혼자보다 하나라도 더 신뢰할 수 있는 관계가 존재할 때 훨씬 많이 안정적이 된다. 밤에 누군가 자지 않고 불침번을 서야 한다면 혼자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우린 잠을 자야 하는데 둘이 되면 하루씩 번갈아 가면서 잘 수 있는 큰 이점이 생긴다. 또한 외부의 적이 쳐들어 왔을 때 사람의 숫자는 승패에 있어서 너무도 중요한 요소이다. 결국 안전은 바로 우리의 생존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이 안전이 확보된 후 다음으로 나타날 것은 무엇인가? 당연히 경제력이다. 우린 안전하게 살았다면 그 후엔 당연히 먹고 살아야 한다. 이것은 현대 사회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보통 외벌이 가장이 가족을 부양하는 경우 그 사람의 실직은 가족 전체에 큰 위기로 작용한다. 그리고 그 범위는 대부분 가족내에만 강한 영향을 끼친다. 물론 상황에 따라 이 위기가 그 가족의 형제들이나 그 부모까지 영향을 미칠 수는 있지만 보통은 한계가 있다.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인 관념에서 그렇게까지 위기가 번지는 현상은 자주 있는 편은 아니다. 물론 보통 결혼한 아들이나 딸의 문제로 인해 그 부모까지 영향을 받은 경우는 조금 있지만 형제만 되어도 솔직히 남과 다름이 없는 경우가 많다.

 

안전이 확보된 현대의 가족에서 이 경제력은 가장 일순위가 되는 공유 항목으로 명시되고 있다. 심지어 요즘 같은 경우는 부모의 경제력이 자식의 능력에까지 영향을 미쳐서 돈 많은 집 자식이 좋은 대학을 가는 현상이 일반적으로 상식화 되고 있는 지경이다. 이것은 부모의 경제력이 자식의 미래의 경제력까지 큰 영향을 미치는 상황까지 변화되어 온 것이다.

 

그 다음으로 나타나는 것은 바로 위기에 대한 공동 대처이다. 이것은 물론 경제력에 대한 부분과 연관되기는 하지만 이것은 조금 다른 면을 말한다. 예를 들면 가족의 누군가 아파서 수술이나 입원의 절차를 밟아야 한다면 그리고 누군가 거기에서 환자의 수발을 들어야 한다면 당연히 일순위는 가족이 된다. 이것은 돈과 연관이 되기도 하지만 또다른 면에서 연관이 없기도 하다. 그리고 어쩌면 이런 부분때문에 우리가 가족의 절대적 천륜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지도 모른다. 가족이라면 이득관계를 초월한 희생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이 생각은 이제 점점 사라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가족 중 누군가의 희생이 반드시 뒤따라야 하기 때문인데, 만약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 노망난 늙은 부모의 병수발을 들어야 한다면 그 사람의 삶은 정말로 피폐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예전엔 일종의 효부로서 인정받을 수 있었다면 요즘은 정말로 바보짓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돈을 벌어서 전문적인 요양기관에 맡기는 것이 서로에게 훨씬 이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크지 않는 질병에 대한 대처는 지금도 유효하다. 지금도 혼자 사는 많은 이들은 감기와 같은 작은 질병에 걸려 앓아 누웠을 때 자신을 돌봐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못견뎌 하는 경우가 많다. 즉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네번째 고려해야 할 감정적 공유로 연결이 된다. 즉 우린 외로움을 극복하는 매우 좋은 수단으로 가족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잘 느끼지 못하는 것 중 하나다. 왜냐하면 가족이 한데 모여 살면 장점과 단점이 같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장점에 대해 의식을 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보통 사람들은 어떤 일의 장점과 단점이 존재할 때 단점에만 불만을 토로하는 성향 때문이 그렇다.

 

가족이 모여사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혼자 사는 사람들보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경우가 많다. 외로움을 느낄 상황이 적어지고 싫든 좋든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들과 함께 살아감으로서 경제적으로는 비록 분리되어 있다고 쳐도 정서적으로는 밀접하게 유지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는 행복에 큰 영향을 미친다. 물론 이 부분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누군가는 혼자 사는게 행복이고 누군가는 가족과 함께 해야 행복하기도 하니까.

 

이것 말고도 여행과 같은 단체 행동, 명절이나 생일 챙김, 공동 취미, 가사활동의 분담 등등 여러가지 면에서 가족은 매우 좋은 결합이다. 그래서 우린 혼자 사는 것보다 가족을 이루고 함께 살아가면서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물론 여기엔 숨겨진 비밀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안정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가족 단위 하나하나가 모두 건전한 관계 속에서 유지되어야 한다는 사회 전체적인 공감대와 그것을 실행하는 정책의 방향성이다.

 

우리는 잘 인식하지 못하지만 각종 방송 드라마의 소재를 잘 살펴보면 대부분이 가족의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다. 물론 거기엔 출생의 비밀, 외도, 불륜 등등 각종 자극적인 소재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하지만 결국은 결론을 보면 늘 갈등의 해소와 그로인한 가족의 화해 그리고 행복을 주제로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 역시 이런 모습을 보면서 가족의 중요성, 가족의 무조건적인 사랑 등에 대한 개연성과 가치성을 찾고 자신들이 삶에서도 그것을 실천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이런 노력 하나하나가 모여서 결국 우리 사회에서 가족에 대한 의무와 권리의 범주를 형성한다.

 

그래서 우린 가끔 가족에 대한 의무와 가족끼리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한 범위들에 대해 매우 다양한 의견을 갖기도 한다. 예를 들어 결혼을 하는 자식에게 부모가 해줘야 할 일이나 회갑을 맞은 부모에게 해줘야 할 행사등에 대해 우린 사람마다 매우 다른 가치관으로 접근을 한다. 어떤 이들은 무신경하게 어떤 이들은 과도한 신경쓰임으로 그것을 대하는데 솔직히 이런 개별 사건에 대한 접근은 너무 다양해서 어떤 땐 그것을 정해주는 것이 그것을 대행해주는 상업적인 회사들의 상담가들의 역할이 되기도 하는 다소 우수운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아무튼 우린 그래서 가족에 대한 부분은 상당히 고지식하게 접근을 한다. 이것은 당연히 어려서부터 끝없이 주입을 받은 사회적 교육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우린 늘 가족의 정형적인 모습을 그리는 각종 매체와 또한 그것들로부터 같이 주입받은 주변 인들의 관념속에서 전혀 다른 생각 자체를 못한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착각을 강하게 유지시켜주면서 가족의 관계를 좀 더 밀착시키는데, 솔직히 말해서 현실에서 나타나는 것들은 이와는 다르게 상당히 부정적이다. 특히 우리가 모두 잘먹고 잘살땐 안나타나던 현상들이 우리가 힘든 시기를 보내는 시점이 되면 매일 뉴스로 도배가 된다. 

 

예를 들어 부모의 재산을 놓고 싸우는 형제들의 재산분쟁, 자식이나 부모에 대한 폭력, 친부의 성폭행, 존속살인과 같은 범죄 등은 대놓고 손가락질을 당할 수 있는 행위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판단을 하기가 조금 애매하지만 실제로는 위의 현상과 그리 다를 바 없는 것들도 있다.

 

잘 키운 자식을 앞세워 한몫 잡아보려는 부모들은 자식의 짝을 찾을 때 매우 완고한 모습을 보인다. 그것은 부양의 의무를 잘 실천할 며느리나 혹은 돈을 많이 벌어 평생 용돈을 줄 수 있는 사위등을 요구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린 부모의 사랑을 절대적으로 포장하지만 실제로 이런 부모들은 다수로 존재한다. 그리고 이런 부모들 덕분에 각종 가족 갈등이 나타난다. 기본적으로 시월드로 표현되는 시부모와 며느리들의 갈등이 이것의 아주 좋은 예가 된다. 그러면 부모만 그런 것일까? 아니다. 자식 쪽에서는 더욱 심하다.

 

부모에게 완전히 빌붙어 살아려는 빈대인생, 부모의 재산을 노리고 관계를 유지하는 일명 불효막심한 자식, 늙은 부모에 대한 부양의 의무가 싫어서 방치하는 자식들도 (솔직히 가족의 끈끈함을 강조하는 우리나라에 왜 이리 독거노인이 많을지 의문이다) 아주 많다.

 

이것은 부모는 기본적으로 자신을 낳았기 때문에 책임감을 갖는 반면, 자식은 낳아졌기 때문에 그로부터 조금 자유롭다는 차이로부터 생겨난다. 그리고 자식은 요구하는 것이 당연시된다. 그것은 어려서부터 그런 대접을 받고 자라서 그런데 결국 성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요구가 그리 당연한 것이 아님을 깨닳고서 부모의 사랑에 감동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때서야 효자가 되는 사람들도 있다.

 

결국 결론적으로 말하면 가족은 어떤 의미에서 매우 효율적인 최소 단위의 무리짓기이다. 너무 많으면 관리가 안되고 또 너무 적으면 효율성이 떨어진다. 밥 한끼를 준비하는 것도 한 명분과 두 명분 또는 세 명분을 준비할 때 그 비용이 순차적으로 증가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엔 한 사람의 식사분을 추가하기 위해서는 정말로 숫가락 젓가락만 놓으면 되는 경우도 생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효율성의 예가 된다. 여행을 가더라도 혼자 차를 끌고 가는 것보다 다섯명을 꽉 채워서 그 기름값을 분담하는 것이 싸다. 숙박이나 기타 많은 비용이 그렇게 작동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하는 것이 하나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부부의 관계이다. 부부는 유전자적 입장에서 보면 가족에서는 가장 먼 관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부는 가족 관계의 시작이 되는데 결국 우리가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아무리 강요를 해도 이것이 진실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이다. 어쩌면 부부는 인간관계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진실한 관계라고 단정할 수도 있다.

 

부부야 말로 정말로 기능성으로 맺어진 관계이다. 물론 우린 사랑하고 결혼을 하지만 우리가 꿈꾸는 사랑은 유효기간이 매우 짧다. 그리고 그후엔 우린 기능의 관계로 유지가 된다. 거기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경제력의 공유이다. 이 경제 운명 공동체는 공동의 부양책임에 대한 요구를 더해 너무도 강하게 작동을 해서 가족의 흩어짐을 막는 가장 강력한 도구로서 동작한다. 즉 부부야 말로 가족의 근원이다.

 

하지만 요즘 보면 남녀가 결혼은 하여 가족을 구성한 후, 아이를 낳게 되면 여자가 아이의 양육에 모든 것을 다 쏟아붇는 태도를 보이면서 실제로 남자는 좀 찬밥신세가 되기도 한다. 내 입장에서 물론 아이의 양육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부부의 관계보다 더 우선시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나는 기러기 아빠 현상은 정말 가족구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만든다.

 

아무튼 이 문제는 쓰다보면 또 한가득 글이 나올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에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이제 여기에서 왜 우린 우리가 믿는 가족의 관계에서 생각지도 않는 범죄나 인륜을 거스르는 사건들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우리가 그리 믿는 가족간에 정말로 왜 그런 끔찍한 범죄가 일어날까? 그런데 그것은 생각보다 단순한 원리로 결정된다. 그것은 바로 공유의 범위에 대한 개개인의 인식차이로 인해 벌어진다.

 

어떤 이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공유의 범위가 자신 이외로 넒어지지 않는다. 즉 부모 자식 간에도 결혼을 한 후에도 자신은 자신이고 자신 이외의 사람은 모두 나와 다른 존재들로 인식한다. 그러니 세상은 단순히 나와 내가 아닌 이들로 구분이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다. 그래서 가족을 구성하는 것 조차도 나의 이득을 위해서 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벌어진다. 즉 자신이 벌어들인 수입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속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니 부부간에도 그 경제활동의 열매를 공유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가족이란 관계에서 치명적으로 동작한다. 왜냐하면 가족은 어떤의미에서는 경제력이 유일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조금 후에 설명한다.

 

이런 가족에 대한 태도는 결국 가족을 파괴시키는 현상을 야기시킨다. 그리고 그나마 순화된 파괴가 이혼이며 심한 경우엔 폭력적 결말을 맞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보다 조금 공유 범위가 조금 넓어진 대다수의 사람들은 부모와의 관계에서 살아가다가 커서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독립이 되면 그 후엔 혼자의 범위로 다시 좁혀진 후 결혼을 하여 자신만의 가족을 구성한 후 자연스럽게 다시 현재의 가족까지 넓어진다. 그리고 평생 이 범위내에서 삶을 살아가다 마감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가족은 그 만큼이나 많이 정형화된 가족관계로 유지된다. 즉 가족에 대한 것들은 드라마에서 말한 그것처럼 고정이 된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가족간의 사랑이라고 표현하지만 실제로 외부에서 보여지는 모습은 바로 가족까지 넓어진 극한의 가족 이기주의로 보여진다. 물론 많은 이들이 이 범주에 속하기에 이런 모습을 그리 비난하지 않지만 실제로 우리가 가족간의 사랑이라고 떠 받드는 행동들은 단지 개인 이기주의가 좀 더 가족이란 책임감 하에서 직접적으로 표출되는 모습일 뿐이다.

 

그리고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 범위가 가족을 넘어선 공동체로 넓어진다. 이들은 공유의 범위가 가족을 넘어서는 바람에 가족 이외의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이득분을 공유하려고 한다. 즉 이런 종류의 사람들을 우린 이타적인 성향을 가졌다고 말하는데 실제로는 공유의 범위가 넓어진 이들이다. 그런데 이들 역시 범위가 사람에 따라 고정이 된다.

 

어떤 이들은 이 범위가 자신이 속한 사회나 국가로 한정되고 또 다른 이는 이것이 인류 전체로 확대되기도 한다. 거기에 더 넓어진 이들은 인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속한 이 생태계의 모든 존재들에게까지 넓어진다. 그래서 자연과 함께 하는 인간의 삶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이젠 지구를 벗어나 우주적 공유까지 그 범위가 넓어지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기본적인 가족의 관계가 아무 의미없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가족 범위에서 명백히 선이 그어진 다수와는 다르게 그 경계지점이 매우 흐릿한 특성이 있다. 즉 자신의 사는 이웃과는 어느 정도 가족처럼 지내기도 하고 혹은 친한 친구와의 관계 역시 가족과 비슷한 정도의 공유를 하기도 한다. 물론 당연하면서도 생각해보면 우수운 점은 가족이 아닌 관계에서는 명백하게 경제에 대한 부분은 빠진다. 그리고 여기엔 안전, 돌바줌, 외로움 등과 같은 돈이 거의 들지 않는 실제적이지 않는 것들만 대상이 된다.

 

그래서 어떤 의미로 가족과 가족이 아닌 관계의 가장 큰 차이가 바로 경제력이다. 즉 가족은 다른 관계와 달리 경제력의 공유 측면에서 가장 확실한 변별력을 갖는다. 그리고 이것은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보다 부부간의 관계에서 가장 강한 공유를 보여준다. 즉 부부만큼 경제력이 강하게 공유되는 관계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돈에 의한 관계를 부정하기도 하고, 현실적으로 돈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는 현실론을 펴지만 실제로 가족은 다른 관계와의 차이가 돈 밖에 없는 것이다. 즉 가장 순수해야 한다고 믿어지는 관계가 가장 돈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가족의 위대함, 가족애의 순수성을 말하는 드라마를 보고 그것에 대한 좋은 다수의 이야기를 듣지만 실제로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족의 중요성은 역시나 경제력의 공유라는 뜻이 된다. 그래서 결국 경제력이 무너진 집은 파탄이 나는 것이다. 이것들을 아무리 신문지로 덮어서 안보이게 하려고 해도 결국 수 많은 파탄난 가정에 대한 뉴스들이 쏟아져 다 들어난다.

 

이젠 정말로 동방예의지국이니 하는 소리를 우리 사회에서 없애야 한다. 우린 체면과 과시욕이란 삐뚤어진 자화상으로 가족이란 이 좋은 모임을 망치고 있다. 이혼이나 편부모에 대한 보이지 않는 사회의 부조리한 인식 역시 없애야 한다. 가족이 가족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땐 정말로 갈라서야 한다. 부부가 가진 최대 장점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그 부부 역시 헤어지는 것이 옳다. 왜 가족이 주는 최고의 가치를 부정적 사회시선이란 외적인 이유로 인해 누리지 못해야 하는 것인가.

 

우린 같이 살면 좋으니 같이 사는 것이다. 같이 살아서 좋지 못하면 혼자 살아야 한다. 하지만 우린 아직도 과거의 우리가 가족이라고 믿었던 가치들에 그리고 무조건적인 가족이 있어야 한다는 그 근거도 없는 믿음에 사로잡혀 타인들의 삶에 대해 무차별적인 편견을 쏟아내고 있다.

 

가족은 우리가 믿는 만큼 절대적 가치를 가진 것이 아니다. 가족은 우리 인간의 관계성 중 특수한 한가지 형태일 뿐이며 이젠 제발 좀 가족의 관계에 금칠 좀 그만하자.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소리나 남의 자식은 거두는게 아니라는 소리 좀 그만 해대고 우리가 어떻게 현명하게 이 가족이란 관계를 우리 각자의 이득에 그리고 그것을 더 확대해 우리 사회 전체의 이득을 위해 유지해 나갈지를 좀 생각해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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