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거기 있어야 하기에 거기 있다

아이루다 2013. 7. 31. 21:30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순위 1위에 올라 있는 '반지의 제왕'이란 영화가 십여년 전 3년에 걸쳐 총 3부가 상영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영화를 최근에 다시 한번 더 보기도 했었다. 이 영화에는 매우 매력적인 이야기와 캐릭터가 많이 나오는데 그 중 지금 이야기 하려고 하는 존재는 온전히 CG로만 만들어 진 '골룸' 이란 등장인물이다.

 

'골룸'은 원래 이 영화의 가장 큰 이슈가 되는 중요 아이템인 절대반지를 수백년간 지니고 있던 인물인데, 아마 골룸이 되기 전에는 호빗족이었다가 강가에서 이 반지를 동시에 발견한 사촌을 죽이고 탐욕스러운 그 본능에 휩싸여 서서히 오랜 시간에 걸쳐 괴물로 변해가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그는 오랜시간동안 혼자지내면서  원래의 선한 캐릭터인 '스미골' 과 탐욕의 화신인 '골룸' 두개의 자아를 가진 다중 인격자로 변화되는데 3부 왕의 귀환 편에서 프로도와 샘을 죽이려는 골룸과 막으려는 스미골, 이 둘의 싸움을 보고 있으면 정말 아카데미 상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골룸은 반지의 제왕 1편 반지원정대에서부터 등장하여 절대반지를 되찾으려고 반지를 들고 있는 프로도 일행을 쫒아 오는 과정에서, 발각이 되어 그를 없애려고 하는 반지 원정대원들을 제지한 마법사 간달프가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이런 비슷한 말을 했다. '자신도 잘 모르겠지만 그에게 주어진 역할이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3편에 가면 간달프의 이 예언은 실제로 이루어진다. 그는 반지를 되찾겠다는 일념에 프로도와 샘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그들을 속여 반지를 없앨 수 있는 모르도르의 화산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왔으며 화산에 반지를 빠뜨려야 하는 순간 반지의 유혹에 완전히 넘어간 프로도로부터 반지를 뺏으려고 하다가 결국 반지와 함께 용암으로 빠져버리면서 의도하지 않게 사우론의 중간계 정복을 방해하는 역할을 해낸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일지도 모르는 일을 해낸 것이다.

 

결국 그는 간달프의 말대로 정말로 그가 맡은 역할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이 반지의 제왕을 쓴 톨킨으로 부터 의도된 역할이라고 해도 말이다.

 

우리나라 영화인 '이웃집 남자' 라는 강풀씨의 만화를 영화화 한 작품에서도 이런 인물이 나온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연쇄살인범을 사정없이 패는 조직폭력배 남. 사람들은 어쩌면 그 깡패가 사이코패스 살인범이 위협하는 칼을 보고도 '그래서 어쩌라고' 하면서 마구잡이로 두둘겨 패는 그의 모습에 카타르시스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런 환타지 세계나 만화의 세계가 아닌 현실에서도 살아가다보면 정말로 많은 종류의 다양한 사람들을 보기도 하고 또 그들과 엉켜 살면서 그만큼이나 다양한 경험을 하기도 하면서 각자의 역할에 대한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거기에 더해 우리 인간종을 벗어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자연은 또 얼마나 다양한가.. 수 많은 풀,나무 곤충, 동물들까지 모두 제각각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누가 시킨것도 아니고 누구로부터 배운 것도 아니다. 모두들 자신이 타고난 몸과 본능 그리고 살아가면서 배운 것을 토대로 살아간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죽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고, 의도한 바도 아니지만 그 행동 하나하나가 마치 무대위의 배우처럼 각자의 역할을 하면서 서로에게 다양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데 골룸을 생각하던 오늘 갑자기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내가 정말로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이라고 느끼는 그런 사람들도 살아 갈 가치가 있는 것일까? 혹은 살아가면 절대 타인들에게 도움이 안될 것으로 보이는 쓰레기와 동급으로 여겨지는 아니 쓰레기가 더 나아 보이는 사람들도 이 세상에서 자기 역할이 있는 것일까? 마치 악의 역할을 하는 탐욕스러운 골룸이나 동내 깡패가 의도하지 않게 더 큰 악의 존재인 사우론의 절대반지를 파괴하거나 연쇄살인범을 사정없이 패서 잡은 것처럼?

 

예를 들어 우리 사회엔 '진상'이란 사람이 있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일단 안하무인의 특성을 지녔고 매우 이기적인 성향이 강하다. 나의 이득을 위해서 타인의 불편함이나 손해를 전혀 고려치않고 의무는 멀리 팽개치고 권리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그 주장하는 권리조차 적절한 것이 아닌 거의 떼쓰기 수준이니 큰 문제가 된다. 보통 사람을 상대하는 서비스업을 하는 사람들은 이 진상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사람과 사람이 얽히는 모든 장소에서는 의도하지 않는 사고가 생긴다. 가령 음식점에 갔는데 주문이 실수로 잘못 들어갔거나 혹은 서빙의 실수로 인해 물컵을 넘어뜨리기도 한다. 어떤 실수들은 복구가 가능하고 어떤 실수는 실제로 금액으로 환산해서 물어줘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그것이 보통의 사람 수준을 넘어서는 경우가 생길 때 갈등이 극대화 된다. 마치 물이 묻어서 옷을 살짝 버렸는데 세탁비로 옷값 수준을 요구하거나 주문이 잘못들어가 다른 음식이 나왔다고 해서 그것을 손해배상을 하라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아무튼 진상은 그리 많은 것은 아니지만 어딘가에 꼭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 나 역시 살아오면서 경험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사회에 암적인 존재와 같은 진상도 필요가 있다는 점은 아니러니하다. 적어도 이들이 있기에 서빙을 하는 사람들이 긴장을 하고 손님의 요구에 좀 더 친절하게 대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모든 손님이 서빙의 실수를 너무도 쉽게 용서하면 이 서빙은 언젠가부터 손님을 우숩게 보고 손님에게 마구 대할 수 있는 여지도 있는 것이다. 반대로 진상 서빙이나 주인도 실제로 존재한다. 손님을 봉으로 보고 안하무인식으로 대한는 우수운 광경도 실제적인 상황으로 벌어진다. 하지만 결국 어느정도의 진상 고객과 어느 정도의 진상 서빙이 있음으로서 서로 더 험한 꼴 안보려는 암묵적인 사회적 룰이 형성된다. 이것이 진상의 긍정적인 힘이다.

 

정부가 지원하는 각종 민원센터 역시 이 진상들로 인해 골머리 앓는 경우가 많은데 물론 이 진상으로 인해 사람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어마어마 하지만 또 이들로 인해 민원센터에서 일하는 공무원들이 일반 시민들에게 좀 더 친절하게 대하는 경우도 생기는 것이다. 누군가 작은 불편함에 대해 침소봉대해서 말 그대도 지랄을 떨때 그 작은 불편이라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슬프지만 사실이다.

 

각 조직내에서도 정말로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어떤 사람들이 반드시 존재한다. 진상일수도 있고, 모두에게 짜증을 유발하는 인간일수도 있고, 일을 극히 못하고 말만 많은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그 나머지 사람들이 그 사람을 제외한 서로에게 만족하게 만드는 도움을 주는 것이다. 적어도 그 진상과 같은 인간만큼은 아니니 상대적으로 서로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지면서 결국 호감도가 높아지는 것이다. 특히 새롭게 들어간 회사의 전임자가 완전 진상짓을 했었던 자리라면 그 사람은 아주 작은 마음 씀씀이에도 회사 사람들의 칭찬을 듬뿍 받을 수 있다. 이전 전임자와 현재 담당자, 이 두사람은 알게 모르게 계속 비교되면서 당연히 해야 할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조차 하지 않은 전임자의 배려(?)로 인해 사람들의 신임을 얻게 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예는 실제로 무한할 정도로 많다.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은 그것을 치우는 청소부의 존재를 유지시켜주고, 도둑이나 강도는 경찰의 존재 이유가 된다. 각 국가간의 처절한 전쟁은 또한 군대의 유지목적이 되기도 하고 집이 불타 망한 집도 소방서를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개인적 불행인 질병도 역시 그 많은 의사와 약국을 먹여 살리고 있고 개인간 혹은 수 많은 관계간의 다툼은 법원이나 그와 연관된 수 많은 직종의 밥벌이 이유가 된다. 이런 식으로 우리 사회는 불행일 수 도 있는 사건들이 모여서 또 다른 이들의 행복으로 동작하는 것이다. 결국 우린 누군가의 불행을 발판삼아 혹은 누군가의 행복을 발판삼아 또다른 불행과 행복을 창출하고 있다.

 

이것을 좀 더 확대하면 우리는 보통 살아가면서 어떤 식으로든 어떤 일이나 사람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모두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으로 연장이 가능하다. 즉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일은 좋은 면도 있고 나쁜면도 있다는 말이 되며 단지 우린 좋은 면이 많은 것을 본능적으로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원리라면 좋은 것에서 나쁜 것을 분리하는 것과 나쁜 것에서 좋은 것을 분리하는 것이 가능할까?

 

잘 생각해보자. 많이 듣는 이야기이긴 한데 만약 악이 없다면 선이 존재할 수 있을까? 선과 악중에 악은 나쁜 것이고 없어져야 할 것이지만 악이 없다면 선이란 용어 자체가 의미가 있을까?

 

이것은 빛과 어둠과도 마찬가지다. 빛이 있기에 어둠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어둠이 있기에 빛도 있다. 만약 현재 글을 쓰고 있는 이 방이 너무도 밝아서 온통 흰색만 있다면 내가 거기에 라이터를 하나 켠다고 해서 그 빛이 보이겠는가? 반대로 이 방이 깜깜하다면 라이터를 켰을 때 얼마나 밝게 보이겠는가.

 

우린 보통 태양이 떠 있는 낮에 활동하지만 결국 밤이 없는 낮이 계속 유지된다면 아마도 우린 얼마 되지 않아서 극심한 피로감과 함께 죽어갈지도 모른다. 거기에 그럴경우 실제로 지구의 온도가 사정없이 높아져서 방문에 다 어두운 커튼을 치고 잠은 잔다고 쳐도 결국 더워서 죽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낮이 지나고 밤이 와야 우리는 그 동안 차갑게 식은 지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고대로부터 전해 온 종교의 이야기를 봐도 천국과 지옥은 반드시 쌍으로 나타남을 볼 수 있다. 천국이나 극락은 뭔가 제대로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간다면 반대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만약 천국만 있어서 누구나 천국에 간다면 뭐하러 살아 생전 그 종교를 믿을 것인가. 그러기에 지옥의 존재는 반드시 필요하다. 천국이 천국이 되려면 지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원리는 신과 악마의 관계와도 완전히 동일하다. 신이 신이기 위해서는 악마가 필요한 것이다. 만약 악마와 같은 악이 없다면 사람들이 신을 찾을 필요가 있을 것 같은가? 나는 믿지 않지만 정말로 신이 존재한다면 신은 자신의 의지에 상관없이 사람들의 믿음을 얻어내기 위해 악마를 만들어 냈어야 했을 것이다. 우리는 늘 그렇듯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채워줄 때 고마움을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미 산소가 풍부한 지구에 아무리 노력해서 산소를 만들어 넣어주어도 고맙다는 한소리 듣기 힘들다. 그 산소가 없는 지구에서 우린 단 5분조차 살지 못하는데 말이다.

 

사람들 역시 어떤 종교를 믿을 땐 좋은 일이 많아서 믿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다가올 좋지 않은 운명으로부터 피하고자 혹은 설령 닥치더라도 마음의 안정을 얻고자 종교에 빠져드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 인간의 삶이 완전히 예측가능하고 위험요소가 전혀 없는 환경에서 살아간다면 그 누가 종교를 믿겠는가?

 

새끼를 낳은 개는 우리가 그 강아지의 존재를 어떻게 느끼건 상관없이 목숨처럼 귀하게 지키는 중요한 존재로 보호하려고 하며 우리를 여름마다 짜증나게 하는 모기도 알을 낳고 새끼를 부화시킨다. 물론 곤충들 중에서 새끼를 고등동물처럼 그리 애지중지 키우는 종은 별로 없지만 아무튼 모두 자신의 새끼를 최고의 배우자를 통해 다음 세대로 연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우리가 여름철마다 썩은 음식의 색깔이나 냄새만 맡아도 속이 뒤집어지고 코가 문드러질것 같은 고통을 느끼지만 결국 그런 썩은 과정이 있어야만 우리 지구의 자원이 재사용되는 것이다. 고열과 콧물 그리고 온몸을 아프게 만들어 우리를 끝없이 괴롭히는 감기와 같은 바이러스 역시 우리가 피곤하고 힘들때를 알게 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해서 육체가 너무 심각하게 허약해졌을 때 그것을 인지하고 쉬게 만드는 순기능의 역할도 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접하는 그 모든 것들은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가지면서 도저히 서로 어울릴 수 없는 극과 극에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서로가 서로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선은 악을 필요로 하고 신은 악마를 필요로 하며 빛은 어둠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절대로 양립할 수 없는 것 같은 것들이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 연결점을 갖고 있다는 점은 다시 해석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모든 것들은 입자처럼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파동처럼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인식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즉 우린 빛을 프리즘에 쬐여 나오는 그 일곱색깔 무지개의 빛처럼 스펙트럼의 모습으로 연결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주장도 할 수 있겠다.

 

나는 오늘 조금이나마 부처님이 말한 그리고 크리슈씨가 말한 자비에 대해 아주 미세한 눈을 뜬 기분이다. 설령 내가 잘못 이해했다고 해도 상관없이 나는 오늘 평소와는 좀 다른 느낌을 세상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아니 이 우주 전체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이 - 미립자 단위까지 -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서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이 세상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내가 오는 본 파란 하늘의 잠자리도 내가 오늘 본 어떤 아이의 미소 띤 얼굴도 내가 오늘 본 흐르는 한강의 강물도 모두 어떤식으로든 그 존재 자체가 있어야 할 이유를 가지고 그 자리에 있다는 생각으로 확장될 수 있다고 본다. 아니 실제로 그렇다.

 

진상고객이 필요한 것처럼, 이 나라를 온통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 기득권 세력이 필요한 것처럼, 외눈이 된듯 진실과 세뇌를 구별하지 못하고 자신만의 아집으로 가득차 그 헛된 망상을 끝없이 악다구니를 써가면서 되풀이 하는 어떤 애국자처럼, 아무리 생각해도 별로 존재해야 할 이유 따위는 발견하기 힘든 내자신도 필요한 것처럼 이 세상엔 그 어느것도 존재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그리고 또한 쓸모 있는 것도 없다. 모두 그 자리에 있든 사라져 없어져 버리든 그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실제로 중요한 점은 그 각자가 맡은 역할이 과연 선한 역할인 것이냐, 악한 역할인 것이냐에 대한 문제인데 그것을 나누는 방법 조차도 역시나 상대적이어서 어떤 경우엔 선한 역할을 한 일이 다른 한편으로는 악한 역할을 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함정이 있다. 생명의 소중함을 최우선해서 사람을 살리는 일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받친 어떤 의사가 살려낸 아이가 커서 히틀러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면 과연 결과론적으로 이것이 선한 행위였느냐는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다. 이렇듯 우린 역할에 대한 구분을 하면서 선악의 구분을 하고 있지만 그 구분조차 너무도 상대적이며 모호한 형편이다.

 

나는 지금껏 너무도 어리석게도 다른 존재들의 필요성이나 유익한지 해로운지를 나만의 입장과 지식을 이용해서 판단하면서 그것을 혼자서 절대화 시켜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반대로 나를 절대적으로 흔들어대는 이유가 되고 있다. 내가 근거도 없이 뭔가를 절대적으로 규정하는 순간, 나는 그 절대적으로 규정되어 움지이지 않는 것 때문에 결국 내가 흔들려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바람이 몹시 심하게 부는날 내가 들고 있던 날카로운 막대를 땅에 박아서 고정시키는 순간 그 막대를 꽉쥔 나는 바람에 의해 사정없이 흔들리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만약 반대로 내가 그 막대를 땅에 박지 않고 그냥 바람이 흘러가는데로 몸을 맡겼다면 나는 적어도 바람에 의해 이리저리 펄럭이는 존재는 되지 않았을 수 있었을 것이다.

 

모두가 거기 있어야 하기에 거기에 있고, 존재해야 하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유 없는 존재는 없다. 하지만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존재의 사라짐 역시 세상의 원리란 것이다. 결국 그래서 우린 모두 이유가 있는 존재이면서 언제고 사라질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우린 새로운 생명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기뻐하고 우리의 지인이,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날때 울음으로서 슬픔을 표현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는 동물이지만 결국 이런 인간의 생과 사 그리고 더 크게는 이 우주의 시작과 끝은 모두 거대한 하나의 스펙트럼처럼 연결되고 또 연결되어 있다. 생명은 죽음은, 죽음은 또다른 생명을 잉태하고 우리 태양계가 50억년 쯤 폭발한 거대한 초신성의 잔해로부터 만들어졌듯이 그런 창조적 파괴를 반복되어 이렇게 태어난 태양 역시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것보다도 더 오래전 시작된 우주는 아주 먼 미래에 결국 그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이 종말은 또 다른 새로운 우주를 만들어 낼 것이다.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겪고 또한 그것보다도 더 많은 사건들을 겪게됨은 인간으로서 어쩔수 없는 숙명이다. 우리가 인간사회를 벗어나 어디선가 혼자 살지 않는 한 우린 운명처럼 그렇게 살아가게 되어 있다. 이때 우리가 나 자신은 물론이고 타인들의 존재나 혹은 그들과 얽히는 그 모든 현장에서 그 자체가 모두 하나의 커다란 스펙트럼의 일부라고 볼 수 있는 진리의 눈을 갖게 된다면 우린 참 많은 것을 참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정말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렇게 생각할 줄 아는 것이 힘들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하고 나 역시 많이 부족함을 느낀다. 하지만 그렇다고 평생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너무 힘들지 않을까? 아무리 악의 역할을 하는 존재라고 해도 이해할 수 있다면 이해못할 것도 없을 것 같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마지막 진리일지도 모르겠다.

 

'인간과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간의 가치  (0) 2013.08.06
정의로움에 대한 단상  (0) 2013.08.03
인간을 행동하게 만드는 세가지 힘  (0) 2013.07.29
UFO, 신 그리고 인간의 오만  (0) 2013.07.24
인식의 세계  (0) 2013.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