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정의로움에 대한 단상

아이루다 2013. 8. 3. 08:37

 

내가 아는 지인들 중 사회, 정치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 꽤 된다. 내 성향이 그래서 그런지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주제에 관심이 좀 있다. 또한 그것은 나이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그들 거의 대부분은 현재의 집권 여당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나 역시 이것에서 다르지 않다. 어쩌면 싫어하는 정도로 따지면 내가 가장 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상태가 그렇다. 아무튼 정치는 우리 생활에 직접적으로 와닫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엔 모두가 영향을 받아야 하는 국가적으로 보면 매우 중요한 분야이다. 그래서 어떤식으로든 나랏일에 관심을 갖는 것은 절대 나쁜일은 아니다.

 

그런데 나는 가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혼란을 느낄때가 있다. 과연 사람들이 말하는 정의란 도대체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물론 현재의 시국처럼 너무도 명백하게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일들도 있다. 최근에 이슈화 되고 있는 국정원 사건 같은 경우는 말 그대로 큰 문제다. 이 사건의 배경을 둘째치고라도 한나라의 정보기관이 -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생상되는 모든 종류의 정보를 수집하는 막중한 임무를 가진 기관 - 이 정보를 특정 정치 세력을 위해 사용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 말고 좀 애매한 사건들도 많다. 솔직히 그 안에 숨겨진 그 많은 진실들을 제 삼자가 겨우 진실인지 소설인지도 모를 영혼없는 기자들이 써대는 기사만 보고 판단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물론 각종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그나마 이것을 분석하고 조금 더 보탠 정보를 제공함으로서 이해를 돕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계가 명백하다. 그래서 참 판단이 어럽다.

 

그래도 사람들의 판단은 내 입장에서 보면 매우 명백하다. 뭐 그리고 딱히 그것이 틀려보이지도 않는다. 아무튼 나도 그래서 대충 사람들의 생각에 대해 대충 공감하는 편이다.

 

나는 이런 종류의 정의로움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큰 정의' 라고 임의로 이름 짓는다. 왜냐하면 이제부터 내가 할 얘기는 바로 '작은 정의' 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사무실에서 일하는 알바생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이 군대에 갈 나이가 되었는데 아는 지인중에 해군에 있는 분이 있어서 해경에 지원하면 편의를 봐주겠다는 식의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물론 아직 이 알바생은 결정한 바가 없으니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긴 하다. 예전에 나 역시 내가 군대에 갈 무렵에 내가 아는 분 중에 일명 별자리를 달고 있는 분이 있어서 '어디로 배치되고 싶은지' 쓰라고 해서 최전방이라고 쓰고 실제로 어떤 입김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정말로 최전방에서 근무한 경험은 있다.

 

아무튼 이 알바는 군대를 앞두고 아마도 이런저런 불안함과 기타등등 많은 것들이 겹치면서 불안하니 그런 제안도 꽤나 솔깃했으리라. 그런데 이 일이 있고 얼마 후 또 이런 이야기를 했다. 대학교에서 시험을 보는데 학생들이 컨닝을 너무 자연스럽게 하더라. 그래서 그것을 교수에게 이야기 했지만 교수역시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라면서 불만을 토했다.

 

나는 이 알바생이 한 두가지 이야기를 한꺼번에 생각해봤다. 어찌되었건 인맥을 통해 자신의 군생활에 편의를 받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행동이다. 그리고 대학생들이 시험을 볼 때 공부를 안하고 컨닝을 하는 것 역시 문제가 있는 행동이다. 물론 전자는 그것이 잘 표시가 안난다. 한사람이 군생활에 편의를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얼마나 큰 영향이 있겠는가? 그리고 컨닝은 좀 더 크게 표시가 난다. 왜냐하면 바로 내 학점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만약 상대평가라면 더욱 그렇다.

 

좀 더 세분화 시키면 전자는 나에게 이득을 주는 부당한 행위이면서 그 여파가 잘 표시가 안나는 것이고 후자는 나에게 손해를 끼치면서 그 여파가 좀 더 잘 표시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알바생은 전자에 대해서는 그냥 선택에 대한 약간의 고민만 하고 후자에 대해서는 분노를 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내가 대화 중에 이 알바생은 전자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문제를 못 느끼고 어쩌면 자신의 부모에게 이런 인맥이 있음을 조금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살아가면서 이 알바생 뿐만 아니라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중 잣대로 세상의 정의를 말하는 모습을 너무도 자주 봐왔다. 솔직히 말해서 집안에 누군가 아프면 다들 병원 인맥찾기 삼만리에 나선다. 그리고 어떻게든 연결된 의사를 통해 좀 더 빠른 진료상담을 받고 입원을 하더라도 좀 더 신경쓰임을 받는 대접을 받게 된다. 하지만 정말로 그 병원에 줄을 서고 있는 그 사람들은 자신이 왜 밀리는지도 모른채 그렇게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은 절대로 머리속에 상상하지 않는다. 아마도 내 예상으로는 의사들은 자신의 이럴 수 있는 상황을 고려해서 처음부터 진료예약을 짜지 않나 싶다.

 

이런 '작은 정의' 혹은 '작은 공정함'을 벗어나는 개인적으로 이기적인 행위는 정말 수 없이 목격된다. 평소엔 국가 공무원이 뇌물을 받는 타락함에 대해 그렇게 침 튀기게 욕을 하다가도 자신의 친구의 아버지가 바로 그런 공무원이라서 친구가 용돈을 두둑히 받아 한턱 쏜다고 하면 세상에 그렇게 좋은 행복이 없을 정도로 달려가서 신나고 재미나게 논다. 그 순간만큼은 그 돈이 어디에서 왔는지 욕할 필요가 없다.

 

우리나라엔 좀 재미난 통계가 하나 있다. 우리나라 대기업의 대명사 삼성에 대한 이야기인데, 대학생의 70%가 삼성에 대해 그리 좋지 않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또 70%가 그 기업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통계는 근거도 없고 나 역시 어디선가 주어들은 것이긴 하다. 하지만 그럴듯 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나 역시 평소에 그 기업에 대해 그리 좋은 느낌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주변에 누군가 그 기업에 들어갔다고 하면 일단 명목상이라도 축하해 준다. 그 누구가 부러워하는 회사를 들어간 것에 대해서.

 

어떤 누군가는 이런 주장을 하는 나에게 그래서 당신은 그렇게 작은 정의를 잘 실천하고 사나요? 라고 물어볼 수 있다. 당연히 나 역시 마찬가지로 이중적 잣대를 가지고 살아간다. 할 말 없다. 단지 나는 그것에 대해 좀 부끄러워 하며 알면서는 안하려고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내가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수준도 그 정도이다.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그사람들이 가진 혹은 그 집안이 가진 연줄이나 혹은 여러가지 경로를 통해 남보다 조금 더 편의를 얻으려는 그 자체. 그것을 할 수는 있으나 그것을 부끄러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린 이것을 마치 자신의 능력인냥 자랑한다. 병원의 인맥, 법원의 인맥, 방송국 인맥, 경찰 인맥, 기자 인맥 등등 우리가 생활 속에서 마주치게 되는 수 많은 문제를 좀 더 쉽게 해결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자신에 대해 너무도 뿌듯해 하는 것이다.

 

심지어 열차표를 예매하는데 있어서도 편의를 받고 있으며 결혼식이나 기타 수 많은 행사에서도 어떤 인맥이나 혹은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냐에 따라 수 많은 근거없는 편의를 받는다. 그 예는 연예인 행사를 보면 너무도 쉽게 볼 수 있다. 어떤 이는 수백만원,  수천만원 들여서 하는 행사를 그들은 연예인이란 이유 하나로 모든 것을 공짜로 대접받으며 그것을 누구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라. 그 돈이 왜 공짜가 될지.. 그것은 바로 홍보가 되기 때문인데, 그 비용은 나중에 그것을 이용하는 모든 이들에게 나뉘어져서 부담이 된다. 세상엔 절대 공짜가 없다.

 

가끔 개념있는 어떤 연예인들은 결혼 할 떄 모든 협찬을 거부하고 조용히 치루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이 결국 '작은 정의' 를 실천하고 있는 이들인 셈이다.

 

이런 작은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문제라는 점은 나 역시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우린 눈앞에 놓인 나의 작은 이득이 크게 다른 이들의 이득을 해치지 않는 다면, 아니 그 계산 자체가 잘 되지 않아서 얼마나 해칠지 가늠조차 안된다면 그것을 거부하기란 참 어렵다. 그런데 그럴 땐 세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줄을 서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내가 병원에 인맥을 통해 빠른 진료를 받으면 나는 그 병원에 줄을 선 많은 이들 앞에 새치기를 하게 되는 셈이다. 열차표를 인맥으로 끊는것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거의 모든 일은 내가 약간의 우월적 지위를 가지고 그것을 행사하는 순간 그 피해는 그것에 관련된 모든 이들이 나누어 받게 되는 것이다. 단지 그것이 직시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세상의 원리는 동일하다.

 

이런 이득과는 반대로 내가 입는 작은 손해들은 참 참기 어려워한다. 그래서 뻔히 보이는 줄에서 누가 내 앞에 끼어들면 그것을 절대로 못참아 하는 것이다. 차 운전을 하다보면 이런 사람들 참 많이 본다. 그나마 차의 행렬은 이런 이득과 손해에서 자유로운 것 중 하나인데도 말이다. 그냥 관성처럼 싫어하는 것이다.

 

글을 시작할 때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는데 결국 내가 '큰 정의' 에 대해 말했던 것 역시 이런 '작은 정의'가 연장될 뿐이다. 정치에서 어떤 정책을 펴느냐에 따라 당연히 손해보는 그룹과 이득을 보는 그룹에 생겨나게 된다. 단지 정책 결정자들은 과연 누구를 위해 이것을 결정하겠느냐에 대한 근거만이 필요한데 당연하게도 그들에게 표를 주는 유권자를 위해 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만약 이런 정책들이 잘못 결정되어 우리 전체가 내는 세금이 엉뚱하게 쓰이거나 혹은 누군가 특정 그룹이 불법적으로 착복하는 돈으로서 작동하게 된다면 결국 세금을 내는 국민 전체가 손해를 입게 된다. 아마도 이런 식으로 입게 되는 손해가 매년 개인마다 수십만원 이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도대체 이 나라의 세금 중 제대로 쓰이는 것이 과연 얼마나 될지 기대도 안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그리 관심이 없다. 단지 내가 당장 손해를 입어서 백원, 천원, 만원의 손해를 입는 것에 대해 절대로 참지 못하고 과도한 의견을 표출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눈에 명백히 보이는 손해이기 때문이다. 내가 탄 택시가 평소엔 만원이 나왔는데 어떤 날 택시기사가 좀 길을 헤매어서 만천원이 나오면 이것이 그리 싫은 것이다. 계산이 되니 그렇다. 반대로 세금 낭비는 잘 계산을 못한다. 어리석지만 결국 이것이 우리의 한계일 것이다.

 

살아가다보면 상황이나 혹은 내가 예상치 못해서 생기는 이득이나 손해가 꽤 된다. 혹은 내가 남에게 주는 이득도 있고 손해를 주기도 한다. 그것이 의도한 바가 아닐것이라면 어느정도 선에서 손해와 이득에 대해 상대의 입장을 고려해주는 것이 좀 더 낫지 않을까? 결국 우리 자신이 이득에는 둔감하고 손해에만 민감한 이중 잣대를 가졌다면 내가 판단하는 그 모든 손해와 이득에 대한 공식이 이미 기초부터 틀린것인데 말이다.

 

'큰 정의'는 말하기가 쉽다. 그리고 딱히 실천을 안해도 된다. 하지만 '작은 정의' 는 인식도 힘들고 실천은 더더욱 힘들다. 그래서 요즘 나는 이 작은 정의를 실천하려고 애쓴다. 물론 많이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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