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인간 사회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인간은 분명하게 인간의 가치를 구분했다. 멀지도 않은 우리나라만 봐도 백년전에 양반과 쌍놈의 구분이 있어서 그 근원적 가치를 처음부터 다르다고 규정했으며, 서양 역시도 왕족, 귀족과 평민으로 나뉜 신분사회가 인간이 문명을 일으키고 발전시켜온 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리고 그런 신분사회는 고대로 갈수록 어떤 면에서는 더 심했다. 인간 문명의 시대에 인간이 모두 평등하다고 인식된 기간은 그렇지 않은 기간에 비해 현저하게 적다.
우리 인간은 우리 존재와 우리를 둘러싼 환경을 이해하지 못할 때 신을 만들었고, 지배자는 스스로 신이 되거나 신의 대리인으로서 군림했다. 그래서 거의 모든 나라의 건국신화에는 하늘의 존재가 나온다. 그것은 태양이기도 하고 하늘에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천제님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단군신화 역시 웅녀와 결혼한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으로 기술되고 있다. 그리고 이 근본적으로 다르게 정의된 시작의 차이가 바로 인간의 가치 차이를 만들어 내는 배경으로 이용되었다.
그렇다면 인간이 모두 평등하다는 것을 인간 스스로가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역사적으로 보면 유럽에서는 영국의 명예혁명이나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서 인권에 대한 인식이 시작되고 사람과 사람이 원래는 모두 평등하다는 지금으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것을 모두가 인정하는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미국의 독립과 민주정부 수립은 어쩌면 인류사에 가장 큰 획을 긁는 사건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현대에 들어서서 대부분의 나라는 미국의 시스템을 따라서 대통령제를 하고 있다. 물론 아직도 영국처럼 왕의 존재가 형식적으로나마 남아있고 정치는 대통령이 아닌 수상을 통해 이루어지는 형태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대통령제와 거의 동일하다. 여기에서 조금 차이가 있다면 대통령제이나 아니면 내각제이냐 정도일 것이다.
21세기에는 이런 정치제도, 사회제도의 변화를 통해서 우린 인간이 모두 평등하다는 것을 인식은 하고 있다. 물론 지금도 인종차별, 남녀차별 등등 근본적으로 가진 우리의 선입견이 모두 없어진 것은 아니다. 아마도 이런 것들은 영원이 없어지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공식적으로는 모두 평등한 것이 맞다. 적어도 공적인 자리에서 차별적 발언을 했다가는 상당히 큰 곤혹을 치룰 수 있다. 이런 잘못된 차별인식이 없어지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이다. 바로 이 차별로부터 이득을 얻는 계층이 바로 기득권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남자는 여자를 자신보다 하등인 존재로 간주하면서 가정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그것은 참 달콤한 이권이다.
아무튼 그럼 이 질문을 하나 던져보고 싶다. 우리는 정말로 모두 평등한가?
나는 솔직히 말해서 이 이상적 생각에는 그리 동의하지 않는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인간은 근본적으로 불평등하다. 우리의 불평등은 우선 육체적 차이에서 야기되는데 결국 이것은 개인별 전체적인 삶의 유지기간 동안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은 각각 머리의 똑똑함이 다르고, 육체의 강인함이 다르며, 외모의 생김새도 모두 다르다. 어느 하나 완전히 똑같은 이는 아무도 없다. 비록 줄을 세워 순위를 메기진 못했도 우리가 모두 다르기에 우린 근본적으로 평등하지는 않다.
물론 평등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리면 우린 평등할 수 있다. 평등이란 말이 동등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기회의 평등이라면 우리는 법적으로는 평등하긴 하다.
이 법적인 평등의 근간이 되는 것은 바로 인권이며, 이 인권은 인간의 권리의 약자이다. 이 말은 말 그대로 우리가 평등하며 모두 같은 무게의 가치를 지였다는 기본 사상을 표현하는 것이면서 '사람 위에 사람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사상은 틀리지 않다. 우린 태어나, 자라, 살아가다가, 죽는다. 이런 인간의 삶의 유한성은 현재 기술로는 극복하기 어렵다. 그리고 만약 극복 할 수 있다고 해도 그때 우리에게 영생이란 삶이 주어졌을 때 나타날 전인미답의 세계는 솔직히 기대보다 두려움이 더 생긴다.
아무튼 우리가 모두 동일한 인권을 가지고 태어나 살아간다는 대명제를 근간으로 한다고 해도 우리가 과연 정말로 평등한 존재인가에 대한 답은 솔직히 조금 다른 관점으로 봐야 한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이미 출발도 다르고 도착지점도 다르다. 부잣집이나 좋은 머리, 뛰어난 육체를 타고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훨씬 괜찮은 삶을 살아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설령 그런 능력이 있다고 해도 어떤 나라에서 어떤 인종으로 태어났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완전히 다른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제목처럼 우리 인간의 가치는 개개인 모두가 완전히 동일하게 같은가? 아마도 우리 개개인의 가치가 다르다고 말을 하면 매우 비인간적인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린 알게 모르게 이 가치를 그 사람의 역할이나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나누는 것도 현실이다.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람 10명을 모아두고 이 중 한명이 죽으면 다른 사람 모두는 살고, 그런 사람이 없을 경우 모두 죽는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이 10명의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물론 당연히 큰 문제가 없는 한 죽을 한사람을 뽑을 것이다. 이렇듯 아무런 가정이 없다고 하면 단순한 제비뽑기를 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너무 자연스럽게 유도가 된다. 그런데 만약 살아남은 9명이 이후 어떤 미로를 뚫고 나오거나, 영화처럼 문제를 풀어야 하거나 혹은 육체적으로 힘든 싸움을 하거나, 힘을 대단히 많이 써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이 한명을 뽑을 때 우리는 단순히 제비뽑기를 하게 될 것인가?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조금 더 현실적으로 대응하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닥칠 미래에 더 도움이 되는 이는 최대한 배제를 하고 나머지 사람들만 대상으로 뽑지 않을까? 단순히 그냥 사람 수만 정하는 구명보트 타는 일조차도 남자보다는 여자가, 여자보다는 아이를 먼저 살리는 암묵적 룰이 있는데 말이다. 이 경우는 남자가 물에서 여자보다 조금 더 잘 살 수 있다는 가능성과 약자를 먼저 보호해야 한다는 신사정신이 있기 때문에 그렇지만 솔직히 남자가 살아야 나중에 더 살아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적어도 아이보다는 말이다.
우리가 믿는 세상과 실제적으로 살아가는 세상은 확실히 다르다. 물론 우리는 늘 우리가 믿는 세상으로 향해 갈 수 있는 방법을 늘 찾고, 막히며 뚫고 투쟁하고, 좌절하지만 또 다른 시도를 하면서 살아간다. 어떤 이들은 순응하고 멈추지만 또 다른 이들은 멈출 줄을 모른다.
우린 법앞에서 평등하다고 가르치지만, 법앞에서는 절대 평등하지 않다.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된다. 비싼 가격으로 부른 변호사는 대단히 교묘하고 말도 안되는 논리로 재판을 무효화 시키려고 한다. 심지어 법을 집행하는 검사나 판사도 믿을 수 없다. 우린 공권력 앞에서도 불평등하다. 누군가는 이득을 보고 누군가는 끊임없는 손해를 본다. 이득을 얻는 이들을 이 이득을 유지하기 위해 그렇지 않는 다수를 법으로 억압한다. 그래서 타고난 것부터 다른 우리들 모두는 사회 시스템이 보장하는 평등마져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모든 현상을 바로 부조리라고 통칭한다. 그렇다 세상은 실제로 부조리가 만연하고 있다. 물론 좀 더 발전된 사회 시스템을 가진 나라는 그나마 이런 부조리가 매우 좁은 범위만 적용이 된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아직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나라에서는 사회 전체가 부조리를 통해 돌아가고 있는 형편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우린 우리가 근본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철회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마치 도달 할 수 없는 목표이지만 그 목표를 버리는 순간 좌절하게 되는 이치와 비슷하다. 그래서 현실은 이런 상황이지만 우린 오늘도 보다 나은 내일을 꿈꾼다.
이런 사회 전체적인 관점에서 말고 조금 개인적인 관점에서 우리 개개인의 가치를 따져본다면 어떨까? 나 역시 한명의 인간으로서 측량하기 어려운 가치를 가지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로 측량하기 힘든 가치를 가지고 있다. 어떻게 사람의 가치를 수치화 시킬 수 있을까.. 결혼 정보회사도 아니고 말이다.
그렇다면 우린 무엇을 근거로 자신을 평가하고 남을 평가하고 있는 것일까? 똑똑한 머리? 좋은 성격? 뛰어난 육체능력? 전문적인 기술? 물론 많은 것이 모여서 결국 어떤 사람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우린 어떤 식으로 자신의 평가 수준을 높이는 노력을 하는 것일까?
좋은 직장과 많은 돈, 좋은 차, 예쁜 배우자 등은 남자들에게 매우 매혹적인 노력 대상이다. 예쁜 얼굴, 많은 돈, 좋은 남편과 안정적인 삶 역시 여자들이 선호하는 가치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다수가 선택했다는 공통점 말고는 더이상 의미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에게 우리의 가치를 절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기준점도 없는 것일까?
결론은 없다가 정답이다. 우린 어떤 가치기준도 없다. 그래서 우린 그냥 가치관만 가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 개개인이 가진 이 가치관은 그 자신에게는 매우 절대적 가치로 작동하는 독특한 특성이 있다. 그래서 그것을 기준으로 모두 각자의 생각에 따라 사람들의 순서를 메긴다. 여기에서 시간을 쏟을 대상에 대한 우선순위가 나타나고 삶의 형태와 방향이 결정된다.
우리는 처음부터 우리 자신을 가치 있다고 공식적으로 금칠을 한다. 하지만 개인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가치 있을 단 하나의 이유도 없다. 그렇지만 우린 오늘도 서로에게 얼굴을 마주하면서 '당신은 소중합니다', '당신은 존재 할 이유가 있습니다' 라고 서로 덕담을 주고 받는다.
만약 우리가 혼자가 되면 너무 외롭기 때문에 우린 서로가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가 이룩한 문명덕에 짧은 노동의 시간만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그래서 우린 너무도 많은 잉여시간에 허덕이고 있다. 그래서 그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타인들이 더욱 필요하다. 과거 원시시대엔 서로를 지켜주는 전우로서 그 가치가 있었지만 이젠 같이 살아가는 존재로서 서로가 필요해졌다.
다시 생각해보면 10명 중 희생할 한명을 고르는 순간, 거기에 속한 모두는 너무도 답답하고 어렵고 내가 걸리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겠지만, 거기에 속하지 않는 대다수는 엄밀히 말하면 거기에서 누가 죽든 원래 나하고 같이 시간을 보내던 사람이 아니라면 '고인을 애도합니다' 한마디만 해주어도 충분하다. 그리고 그런 죽음은 단지 몇시간의 기억만에 사라져버릴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은 매우 좋은 삶의 태도이지만 이 행위는 정확히 말하면 그저 삶을 조금 더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우리만의 선택이다. 이 부분에서 자신의 모든 행동과 그 행동이 가르키는 방향을 제대로 보는 눈이 생긴다면 적어도 어떤 행동을 하든 그것으로 인해 파생되는 좋지 않은 효과들을 어느 정도 제거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이것은 생각보다 매우 힘들다는 것도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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