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인간을 행동하게 만드는 세가지 힘

아이루다 2013. 7. 29. 13:31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판단할까? 물론 기본적으로 보면 의학적 판단 기준인 숨을 쉬고 있느냐 여부를 따지는 것이 가장 편리한 방법일 것이다. 아니면 내가 모르는 좀 더 전문적인 의학적 판단을 통해 할 수 있을텐데, 어디선가 본 장면처럼 눈을 뒤집어 보거나 혹은 목에 있는 경동맥을 살짝 눌러 맥박의 유무를 판단할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물리적 기준말고 인간 그 자체에 대해 좀 더 기준을 맞춘다면 어떨가? 그냥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아마도 현재 실제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삶의 존속성 여부가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 즉 어떤 생각을 하고 그 생각에 따라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존재하고 있는지 혹은 존재하고 있지 않은지 판단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타인과 전혀 교류하지 않고 행동범위도 매우 좁게 유지되고 있는 어떤 사람을 실제로는 멀쩡하게 먹고 싸고 호흡하고 있다고쳐도 그 존재가 우리로부터 전혀 인식되지 않는다면 그냥 죽었다고 판단해도 꼭 틀린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이런 예는 어딘가 무인도에 실종되어 수년간 혼자 살아간 남자와 그 남자를 잃은 가족이나 지인, 직장에서 나타날 수 있는 문제인데, 실제로 남자가 멀쩡하게 살아있다고 해도 그 생존 여부를 알 수 없는 다른 이들에게는 이미 죽은 사람으로 취급이 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존재가 어떤식으로든 주변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때 인정된다고 하는 것이 옳은 관점으로 정의될 수도 있다. 어쩌면 이런 인간에게만 일어날 수 있는 특별한 인식방법이 인간과 인간이 아닌 동물의 눈에 보이지 않는 차이점이란 생각도 든다.

 

좀 더 극적인 상황으로 이것에 대해 논의를 하자면 외부장치에 의해 그 삶을 유지하고 있는 '뇌사' 상태의 환에 대한 생존 여부 결정을 꼽을 수 있다. 식물인간은 육체적 활동을 하지만 단지 의식을 잃었거나 아니면 의식과 육체간의 연결고리에 문제가 생겨 사고는 하되 행동하지 못하는 상태일 수 있다. 하지만 뇌사는 분명히 사고가 멈춘 상태이며 단지 외부기계에 의해 육체만이 썩지 않는 상태로 간주할 수 있다. 그렇다면 뇌사상태는 죽은것인가? 산것인가? 나는 개인적인 의견으로 이것은 죽은 것으로 생각한다.

 

다른 말로 이 생각을 풀어본다면 우린 생각하고 행동함으로서 주변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통해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거기에 더해서 우린 우리의 행동이 주변에 얼마나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따져 그 삶의 가치를 판단하기도 한다. 이런 전제를 깔고 나서 우리 인간의 삶을 정의한다면 우린 과연 무엇을 위해 또는 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을까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해볼 수 있다.

 

나는 철학자도 아니고 어떤 명백한 학위를 가진 정신분석학 내지 인간학 전공자가 아니지만 단순히 경험으로만 생각해서 내 나름대로의 범주에서만 보면 인간을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이유는 세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판단한다. 근거는 없지만 이제 그것을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첫번째는 하고 싶은 것이다. 우린 기본적으로 식욕, 성욕, 수면욕, 배설욕구 등등 육체적 생존활동에 필요한 기초적인 행위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에 대한 욕구는 매우 강력해서 우린 이것이 만족스럽게 채워지는 순간 큰 행복을 느낀다. 따라서 우린 늘 이것을 최대한 잘 채우려고 노력하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결국 이것은 우리를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매우 커다란 이유가 된다.

 

인간에게 있어서 하고 싶은 것은 단순히 본능적인 욕구에서 끝나지 않는다. 우린 지식을 기반으로 그 본능을 좀 더 복잡하고 연계성 많은 행위들로 발전시키며 거기에 예측성 및 가능성 같은 요소들을 가미해 본능이 기반이긴 하지만 본능과는 좀 더 다른 행동들로 추가적인 행복을 얻어낸다. 먹을 것을 먹는 행복은 맛있는 것을 먹는 행복으로 발전되고, 성적 상대를 골라 아이를 갖는 행동은 좀 더 나은 짝을 고르거나 혹은 고를 능력을 갖게 되는 것, 즉 자기 발전에 대한 만족감으로 많은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발전한다. 수면욕 또한 더 좋고 안락하고 안전한 집을 갖게 되었을 때로 더 발전될 수 있다. 이런식으로 우린 본능과 별로 관련없는 듯한 행동을 하면서 '먹기 위해 사는가' , '살기 위해 먹는가' 와 같은 어리석은 질문을 한다. 우린 당연히 살기 위해 먹는다. 단지 지금은 풍족한 식량이 지원되는 사회이기에 이런 착각에 빠진 질문을 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첫번째 이유와 매우 유사하기도 하지만 첫번째는 능동적으로 바라는 것이라면 이것은 내가 별로 하고 싶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유지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일들이다. 맛있는 먹거리를 구해서 먹는 일은 매우 행복한 일이나 먹고 난 후 치우는 것은 상대적으로 힘들고 귀찮은 일이 된다. 즉 이 해야할 일은 첫번째 이유를 위해 파생적으로 발생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직장에 다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해야 할 일은 일종의 의무감이다. 그래서 우린 늘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일 사이에서 갈등을 하는데, 이것의 결정에 따라 개인의 성격이 나뉘기도 한며 삶의 패턴 역시 다르게 나타난다. 해야 할 일이 하고픈 일보다 우선으로 작동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책임감있고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그 스스로 그 해야 할일을 해야 한다는 스트레스 덕에 그리 정서적으로 건강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고 그리 행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은 또 이런 이들이 있어야 유지되기도 한다. 모두 같이 모여서 재미나게 놀았다면 그 놀이가 끝난 후 쌓인 쓰레기를 치워야 하는 사람도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세번째는 동정심이다. 이것은 내가 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내가 해야 할 일도 아니다. 실제로 어떤 면에서는 내가 그것을 했을 때 나에게 실제적으로는 시간적, 금전적, 에너지적 손해를 입는 일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린 이 세번째 행동을 통해 다른 의미의 깊은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은 첫번째를 통해 얻은 행복보다도 더 강력하기도 한데 그것이 바로 인간의 사회성이며 우리가 무리를 지어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우린 이 동정심을 좀 안좋은 단어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어서 이 동정심에 기반한 행동을 친절함, 배려심 등으로 다르게 부르기도 하지만 결국 모두 이것은 상대에 대한 일종의 신경써줌 현상이다. 즉 상대와 나의 감정적 상태를 비슷하게 맞춰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상황을 판단하여 이것에 대해 내가 가진 어떤 자산을 - 시간이나 돈과 같은 것을 - 사용하거나 쓰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 동정심은 모두가 자신만을 위해 사는 이 세상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게 많이 뚫려 있는 인간사회의 빈틈을 메꿔주는 역할을 한다.

 

사람은 그 성향에 따라 이 세가지 중 어느 하나나 둘의 혹은 셋 모두까지를 적절하게 혼합하여 세상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일단 첫번째 성향이 매우 강한 사람이라면 개인적으로는 큰 행복감 속에서 세상에서 살아 갈 수 있다. 하고픈 일이 많은 사람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에너지도 넘친다. 두번째 해야 할 일에 주로 집중하는 사람은 그 스스로는 그리 행복하지 못할지는 모르지만 모두가 자기가 하고픈 일만 하려해서 난리 법석인 세상에서 중심을 잡아 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두 성향이 적절히 어우러진 사람이 사회에서는 상대적으로 필요한 인재가 된다. 그리고 세번째 동정심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사람은 우리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약자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이미 출발지점부터 뒤떨어진 사람이나 아니면 경쟁에서 진 이들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끔 도와준다.

 

만약 사람이 이 세가지를 골고루 갖추게 된다면 그 사람은 사회에서 가장 적절한 존재가 된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은 처음 두가지만을 갖고 살아가고 있으며 그래도 충분히 타인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다. 단지 이런 이들의 문제는 너무 자신과 자신이 책임져야 할 존재들, 예를 들면 가족정도의 수준에서만 살아가기 때문에 사회 공동영역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며 그 결과로 인해 사회가 건강한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는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공공역할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문제를 간접적으로 발생시킨다.

 

거기에 더해 이런 부류에 속한 이들은 그들의 행동을 결정하는 세번째 요소, 즉 동정심에 대한 부분을 왜곡해서 해석하여 자신의 이득을 위해 주변인들에게 베푸는 친절함을 마치 동정심인 듯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자신이 매우 올바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착각과 함께 세번째 요소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개개인의 의무로서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반감을 갖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물론 세번째 항목인 동정심은 절대로 강요에 의해 생길 수 없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일단 기본적으로 자신이 가진 것들에 대한 감사함과 그것을 갖지 못한 이들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는데 전자인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한 감사함이 없기에 그것을 갖지 못한 이들에게도 아무런 감정적 공유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어떤 계기로 인해 자신이 신경쓰지 못하거나 혹은 느끼지 못한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깨달을 때 현 상태에서 벗어나 좀 더 타인들에게 진심어린 관심을 갖게되는 계기가 있어야 하는데 그저 현재 상태에서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해서만, 그것보다도 심하게 내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해서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우리 인간 개개인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에 대한 해답은 모두 그 자신에게 달렸다. 하지만 그 개개인 자신이 하고픈 일, 해야할 일, 타인에 대한 동정심을 어떻게 갖게 될지를 결정하는 것에서 사회 전체가 가진 통념의 수준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것이 잘 배분된 사회일수록 막말로 선진국 사회로 평가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회적 통념은 결국 개개인 하나하나의 생각의 합의 평균이므로 결론적으로 개개인이 변하지 않는다면 우린 늘 비슷하거나 혹은 더 나빠지는 통념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매우 이기적인 동물이다. 이것은 비단 인간만의 특징이 아니고 모든 동식물이 다 그렇다. 우리는 경쟁하고 이겨서 지금껏 이 지구상에 유지되고 있는 종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결국 우리와 같은 유전자를 최대한 많이 퍼트려서 이 지구상에서 가장 번성한 종이 되어야 하는 종의 의무를 지닌 존재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종에 대한 대한 끝없는 애정을 느낀다. 우리가 행동하게 되는 하고 싶은 것이나 해야 할 일이 가장 기초적인 우리 개개인의 생존과 보존에 대한 욕구라면 세번째 동정심은 우리 인간종 전체에 대한 욕구라고 판단할 수 있다. 우린 우리보다 약한 약자를 보호함으로서 우리종이 좀 더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지는 쪽으로 집단 지능을 발휘하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 인간은 우리 종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동물을 보호하거나, 지구의 환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정말 동물을 위해서나 지구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인간의 미래의 후손을 위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지구의 오랜 속살을 다 파먹으면서 마치 잎을 다 갉아먹어 메말라 죽는 식물처럼 지구를 메말라가게 하고 있다. 그리고 자연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은 그 잎이 새잎이 돋아나기 전까지 조금 참아서 식물 자체가 죽지 않게끔 하자는 논리와 비슷하다.

 

우리는 지금도 큰 착각에 빠져있다. 그것은 마치 내가 하고픈 일만 열심히 하고 살아간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이란 생각이나 혹은 내가 해야 할 일만이라도 잘 하고 살아간다면 나는 내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내가 남들과 더불어 사는 삶에 관심이 많다면 그 자신이 매우 괜찮은 가치관을 가진 삶이라고 만족해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좀 더 우리를 제대로 잘 들여다보면 우린 여전히 생명체 본연의 이기주의에 가득찬 존재일 뿐이다. 여기에서 이것을 인정하고 그렇기에 좀 더 덜 이기적이라고 노력하는 삶은 그나마 낫지만 자시 착각에 빠져서 이미 난 충분히 이타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믿는다면 현재의 상태가 절대 좋아질 가능성이 없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큰 불행이 되기도 한다.

 

모든 문제는 인정을 시작으로 해결 가능성이 보인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 대한 어리석은 환상을 깨고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고 인정하고 난 후 그 해결책을 공동으로 찾아나선다면 우린 그나마 조금이라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이런 시도는 너무 난제가 많다. 

 

 

특히 이시대의 대한민국의 사회는 특히 더 그런 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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