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제목으로 정한 이 한마디를 제대로 이해하고자 참 오랜 시간을 생각하고 고민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는 꽤나 허무할 수 있는 답을 얻어냈다. 내가 오랫동안 찾고자 했던 사람의 삶에 대한 그리고 우리가 인생이라고 부르는 백년 남짓한 세월 동안 추구하고 의미하고 찾고자 한 답이 결국 주관식임을 지금이라도 깨달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축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대한민국에서 자란 우리의 대부분은 초중고의 교육 과정 동안 각종 시험을 통해 네개의 답 중 하나를 고르는 형태의 문제를 푸는데 매우 익숙해져있다. 이런 형태의 시험 방식을 사지선다형 이나 혹은 객관식 문항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문제를 낸 누군가가(학교라면 선생님) 이미 답을 정해 놓고 그 답을 맞추기를 바라는 형태여서 그렇다. 즉 거기엔 나의 주관적인 나만의 답을 쓸 수가 없다. 물론 주관식 이라고 알려진 시험문제도 있었다. 하지만 이 주관식 문제 역시 네개의 정답 후보가 없을 뿐 단 하나의 답을 맞추는 것은 거의 같은 형식이었다.
굳이나 그 시절의 주관식 문제를 꼽자면 학창시절 거의 하지 않은 글짓기, 그림 그리기 정도가 생각 난다.
아마도 객관식 문제가 우리나라에서 기본 문제 출제방향이 된 것은 아마도 주관식으로 개인별 생각이나 문제풀이를 하게 되면 그것에 대한 점수를 매기는 절차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또 더 많은 이의를 제기할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부모들의 대단한 교육열을 생각하면 이것이 절대로 비현실적인 문제가 아닐것이다. 또한 국가에서 공인하는 각종 자격증 시험 역시 이와 마찬가지니.. 실제로 우리가 평생을 통해 어떤 것에 답을 적어야 한다면 그것은 거의 99.99%가 객관식 혹은 주관식을 가장한 단 하나의 답만 요구하는 주관식일 것이다.
* 여기에서 어떤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과연 진정한 주관식 답을 요구하였더라도 누가 이것을 채점해 낼 수 있는 역량이 있겠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 따라온다. 우린 과연 그 채점자의 권위를 어떻게 인정하겠는가?
그런데 이 객관식 형태의 문제와 체점방식이 무엇이 문제가 될까? 물론 1+1 이 몇인지 묻는 산수 문제는 그 답이 명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렇지만 세상 일이 이렇게 명확한 것이 과연 얼마나 될까? 솔직히 어린시절 배웠던 흥부와 놀부에 대한 이야기 중 누가 더 사회에 피해를 주는 인간일까를 묻는다면 어린아이들과 어른들의 답 비율이 많이 다를 것이다. 어떤 누군가는 아기공룡 '둘리'에 나오는 고길동을 이해하는 날이 오면 어른이 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어떤 성인이 어느날 갑자기 자기집에 나타나 주인행세를 하면서 어질르고, 접시 깨먹기만 하면서 온갖 경제적인 피해를 입히는 이 빈대 새끼공룡을 그저 좋아만 하겠는가? 거기에 온갖 이상한 친구들이 점점 더 불어나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길동 보다는 둘리가 좋은건 사실이다)
물론 이 예는 좀 어거지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점은 바로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한 정답을 찾는 방법에서 누군가 예시해 놓은 네가지 답 후보군 중 하나를 고르는 방식은 세상을 너무 단순화 시키고 또한 그 단순화 된 분류 덕분에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관이 획일화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복지가 중요하다고 말하면 갑자기 아무런 근거없이 빨갱이가 된다. 반대로 국가의 공권력이 중요하다고 말하면 또한 수구꼴통이 되는 형국이다. 물론 나는 여기에서 정치적 양비론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누군가는 국가의 미래를 위해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 매우 훌륭하고 좋은 가치이면서 또한 사회 안정망을 위해 우리가 복지국가로 나가는 것을 적극 찬성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가치관을 갖는 것을 어떤 의미에서 금지하고 있다. 세상을 그저 단 두개로 나누어서 좌파와 우파로 분류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출처가 애매한 어떤 여론 조사용 문항에서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가치를 고르는 문제가 있었다. 이 문제는 객관식이었는데 선택하는 답 후보는 총 세개였다. '돈', '행복', '건강' 이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돈' 을 최 우선으로 뽑았다. 물론 이 문제의 특성은 정답을 고르는 것이 아닌 개인별 선택을 고르는 문항이었다.
물론 현대 대한민국 사회에서 많은 사람이 선택한 '돈' 의 가치는 실제로 모든 가치를 우선하고 있다. 그래서 난 이 부분은 딱히 더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난 단지 여기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도대체 우린 왜 '돈' 과 '행복'을 같은 등급에 놓고 선택하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다. 우린 왜 돈이 필요할까? 당연히 돈이 있으면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그 많을 것을 할까? 그 정답은 바로 행복하려고 한다. 그런데 돈과 행복을 같은 선상에 두고 선택을 하는 것은 왜일까? 그리고 이런식으로 이 과정을 유추해서 생각해 내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인가?
돈은 행복을 위한 수단이다. 건강 역시 행복을 위한 수단이다. 즉 돈과 건강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어느 정도 합리적이지만 돈과 행복 혹은 건강과 행복은 같이 비교해서 선택 할 수 있는 항목이 아니다. 어떻게 수단과 결과를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있다는 말인가? 같은 물감과 붓을 주고 보통 사람이 그린 그림과 피카소가 그린 그림은 결과물에서 그 가치가 완전히 달라진다. 수단은 동일해도 결과는 달라지는 것인데 우린 그 물감과 붓만 있으면 마치 우리 스스로가 피카소처럼 그릴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그런데 이 문제에서 더 웃긴 점은 이 문제를 출제한 사람의 생각이다. 결국 그 자신이 그 문항을 선택을 하도록 했다는 것 자체가 그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것을 종합해서 생각해보면, 문제를 내기 위해 세개의 후보 답을 선택한 사람이나 그것을 보고 아무런 생각 없이 '돈' 을 선택한 사람 모두 그런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는 점이다. 나는 그것이 이해가 가는데, 왜냐하면 나 역시 얼마전까지만 해도 돈과 행복에 대한 비교를 해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좀 더 확장해보자. 우리가 모두 자신만의 유일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개인별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우린 어떤 경로를 통해 우리 삶의 정답은 어떻게 내고 있는 것일까?
우린 어려서부터 부모님, 선생님, 선배,친구, 각종 이야기, 신문, 영화, 소설, 산문 등등을 통해 삶에 대한 아주 많은 것을 배운다. 이 많은 것들이 삶에 대한 다양한 정의를 해준다. 어떤 것은 삶은 정의로와야 한다고 말하고 어떤 것은 삶은 용기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또 다른 것은 돈을 많이 벌고 성공해야 한다고 말하거나 꿈을 꾸고 이루기위해 살아가야 한다고 설득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의 꿈은 매우 다양하고 삶을 꿈꾸는 방식도 매우 다양한데.. 결국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사회에서 끝없이 보고 듣는 다양한 삶의 사례를 통해 자신만의 삶에 대한 답을 찾게 되어, 그것이 바로 자신의 정의한 스스로의 정답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정해진 답만을 만들어 놓고는 성인이 되어가는 아이들에게 이제 '애들때 꿈꾸던 생각을 버리고 현실을 받아 들여라' 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어린 시절의 생각을 말하는 이들을 '철들지 못했다', '아직 세상 경험을 못했다', '더 살아봐라' 라고 말하면서 비웃는다. 그러면서 자신처럼 사회에 길들여지길 원하고 바라고 강요한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돈을 벌고 성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후에 폐지 줍지 않으려면 열심히 저축해야 하며 외롭지 않게 살려면 꼭 결혼하고 애를 낳아서 키워야 한다고 설득한다. 즉 우리 대한민국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삶의 정답은 직장을 잡고 열심히 일하고 결혼하고 애를 낳고 가정을 화목하게 꾸리며 노후에 먹고 살 수 있는 경제적 여유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것 중에 하나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그것을 '다른'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라 아니라 '틀린'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이 답이 정말로 우리가 네개의 답 중에 하나를 고른다면 어떤 경로를 통해 정답으로 인정되는 것일까? 좀 더 간단히 말해 과연 누가 이것을 채점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신인가? 만약 신이라고 믿는다면 더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냥 신이 있으니 그리고 신이 그렇게 말했으니 그렇게 살면 된다. 얼마나 좋은 객관식 문제인가?
나는 당연히 이 답을 정답이라고 채점해 줄 단 하나의 존재도 없다고 믿는다. 혹시 부모님이 우리가 이렇게 사는 모습을 좋아했다고 하고 만족한다고 해서 그것이 정답이 되진 않는다. 단지 부모님은 주변 사람들 누군가가 그들의 자녀에 대해 물었을 때 꺼리김없이 답해주고 싶은 욕망을 가진 것이다. 우리 아들과 딸은 잘살고 있으며 나한테 무척 잘한다고 말이다. 그 결과로 이번 여름에 이렇게 비싼 옷을 선물해줬다고 말이다. 하지만 남들이 그것을 부러워 한다고 해서 정답 까지 될 수는 없다. 그런 반응은 너무도 다양해서 도저히 가늠할 수 있는 기준점이 없기 때문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왜 삶에 대한 답을 결론 짓고 자신도 그렇게 살길 바라고 주변에 다른 이들 역시 그런 삶을 추구하길 바라는 것일까?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런 확신을 가지고 사회가 추구하는 그 획일화 된 가치, 특히 '돈' 에 대한 막무가네식 추구를 하면서 살아가는 것일까?
그 모든 이유는 바로 우리가 삶에 대한, 인생에 대한 정의를 바로 객관식으로 했기 때문이다. 누군가 예시 들어 놓은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가치를 '돈' , '행복', '건강' , '가정' 따위로 정의해 놓고 그 중 하나를 고른 것이기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만약 여기에 후보 답을 '우주여행', '세계정복' 따위로 해놓았다면 우린 벌써 우주여행을 하고 있거나 혹은 세계를 정복하려는 다양한 악당이 나왔을 것이다.
물론 돈 중요하다. 건강 중요하다. 가정도 중요하다. 세상에 중요하지 않는 것이 어딨다는 말인가. 나는 내가 가진 책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지 않는다. 하지만 누군가는 오래된 유서 깊은 책을 위해, 호랑이의 보존을 위해, 아마존 밀림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 있다. 나는 내 건강이 중요하고 내 행복이 중요하고 그것을 위해 살아가겠고 또한 인간의 세상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돈도 벌겠지만 누군가는 그냥 숲속에서 평생을 혼자 살아가는 이도 있을 수 있다. 그 삶이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것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오늘 우리가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이런 정도의 삶 밖에 살지 못하는 이유는 단하나 그 답을 하나만 정답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오천만명이 그 정답을 향해 달리니 그 중 만명만 그 정답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정답이 천개라면? 역시나 각자의 정답에 만명씩 도달하게 된다면 천만명이 정답에 도달하는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정답이 오천만개라면 당연히 정답 달성률이 100%가 되어 버린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왜 정답을 단 하나만으로 정해 놓은 것일까? 우리의 의도로는 절대로 어쩌지 못하는 인간 사회의 가장 근원적인 모습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 어떤 주관식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질문1-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행복이 가능한가?
질문2-꿈은 필요한가?
질문3-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질문4-지금의 나는 내 과거의 총합인가?
질문5-관용의 정신에도 비관용이 내포되어 있는가?
질문6-사랑이 의무일 수 있는가?
질문7-행복은 단지 한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인가?
질문8-타인을 존경한다는 것은 일체의 열정을 배제한다는 것을 뜻하는가?
질문9-죽음은 인간에게서 일체의 존재 의미를 박탈해 가는가?
질문10-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나?
질문11-행복은 인간에게 도달 불가능한 것인가?
이 질문이 어디에서 온 것인줄 아는가? 바로 프랑스 고졸 자격시험 문항 중 일부이다. 우리로 따지면 수능보다 더 밑의 등급인 고졸 검정고시 정도일 것이다. 수능은 대입 자격시험이니 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고등학생들 중에 이런 질문지에 답을 적을 준비가 되어 있는 학생은 몇명이나 될까?
우린 선진국을 일인당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라고 믿는다. 실제로 그건 맞긴 하다. 그런데 정말로 돈만 많으면 선진국이 되는 것일까?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돈을 추구하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우리가 국민 소득이 일인당 사만불 시대가 되면 우리나라 고등학교 졸업시험에 저런 문제가 나타나게 될까?
'돈' 을 추구하고 성공한 삶을 꿈꾸며 살아가는 것도 자신만의 답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능력은 아주 다양하게 발휘되기 때문에 누구나 이 시스템에서 성공할 수는 없다. 머리가 좋고 세상을 읽는 눈이 예리하며 타고난 집안이나 부의 역할이 있을 때 우린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런데 과연 이런 조건을 타고난 이들이 몇이나 된다는 말인가? 우리같은 일반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과연 삼성가의 후계자들 보다 경제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돈을 추구하는 삶이 혹시나 정답이라고 해도 왜 경쟁이 되지 않는 분야에 자신이 발을 들여서 결국 패배자가 되는 것을 경험하고 그렇게 될까바 평생을 두려워 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일까? 세상의 가치는 남이 정해주는 것이 아닌 나 자신 스스로가 정의하는 것이란 것만 알게 되면 그런 사회의 강요로부터 너무도 쉽게 벗어나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데 말이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스스로 인생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남들이 만들어 놓은 답만을 곰씹으면서 그 답속에 자신의 삶을 구겨넣어서 맞추고 난 후 왜 난 여기에 잘 맞지 않는가? 왜 난 둥근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네모난 모습을 가지고 태어난 것일까 하면서 세상에 대한 끝없는 불만과 자신에 대한 비하로 가득차게 되는 것일까? 그래서 결국 칼을 가지고 그 스스로를 깍아내는 참혹한 짓을 해대면서 살아갈까? 남들이 왜 쟤는 네모지? 라면서 비웃기 때문에? 그렇다면 비웃음을 당하는 내가 잘못인가? 아니면 둥글지 못하다면서 비웃고 있지만 결국 그 자신도 둥글지 못한 그들이 문제인가?
물론 나 역시 이 한계지점에 있어서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과정이다. 내 삶을 이미 타인이 정한 답에 맞춰서 살아가면서 그것으로부터 단 한발자국도 벗어날 용기도 없이 게으르고 아둔하게 살아가는 삶을 벗어날 방법을 전혀 찾지 않는 삶. 과연 그것이 정말로 정답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우리 스스로 창조한 가치란 단 하나도 없다.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종교, 사상, 철학 등에서 나온 이야기도 모두 과거의 사람들이 적어 놓은 이야기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믿고 따를 때 우린 결국 늘 과거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또한 내가 어떤 생각과 선택을 하든 상관없이 그것은 이미 누군가 만들어 놓은 틀안에서 다람쥐 챗바퀴 도는 형상처럼 그렇게 종속되어졌다는 점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매우 무서운 일이다. 나는 분명히 나를 독립된 개체로 인정하고 내 생각을 누군가 조종하려 한다면 그것을 끔찍히 무서워 할 일임이 분명한데 나는 실제로는 실체없는 어떤 이들이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태어나 자라서 살고 죽는 것이다. 즉 나는 영원한 어떤 누군가가 내 놓은 객관식 문제에 대한 정답 선택자일 뿐 내 스스로 그 문제를 만들어 타인에게 건내거나 혹은 나만의 주관식 답을 찾아 대답할 수 없다. 그런 행위는 스스로를 불안하게 만들고 또 자신이 틀 안에서 튕겨져 나갈 수 있다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한다. 그렇다면 결국 그 틀안에서 어떻게든 무엇인가를 부여잡고 버텨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인가?
이 글은 꽤나 길고 그 내용도 괜찮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단 하나 뿐이다. 그것이 바로 이 글의 제목이다. 우리의 삶은 주관식이다. 그 정답은 나만이 낼 수 있으며 누구도 그것의 정답 여부를 판단해 줄 수 없다. 그것이 내 삶에 있어서 내 자신이 주인이 되는 길이며,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의 종 노릇을 그만 두는 그나마 현명한 방법이다. 이것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 자신이 없다면 그냥 그대로 살아라. 그것 역시 남의 답을 베껴쓴 일종의 답일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주관식 문제를 푸는 것은 개도 고양이도 바퀴벌레도 아닌 지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가질 수 있는 누구나 가진 능력 중 하나이다. 우린 이것을 해보지 않아서 모를 뿐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설령 이번 우리 세대가 이런 능력을 갖지 못했다고 해도 우리 다음 세대 만큼은 그 스스로 삶에 대한 주관적 답을 내릴 수 있도록 사회를 만들어 주는 것은 지금 시점에서는 너무 요원한 생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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