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꽤나 거창하다. 뭐 물론 지금까지 써왔던 글들의 제목만을 보면 다 그런 셈인데, 우숩지만 가끔 예전에 써 놓은 글들을 다시 읽어보면 내용이 많이 빈약해서 좀 부끄럽기도 하고 다른 면으로는 글에 나오는 생각을 했었다는 것 자체를 잊어 먹어서 내가 내 글에 어떤 영감을 받아 고개를 끄덕이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원래 오늘 쓰려고 하는 이 글은 인간 유전자의 존속행위, 즉 인간이 그 후손을 낳아 기르는 - 자식에 대한 본성을 이야기 해 보고자 생각했지만 글을 쓰기 앞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그 범위를 좀 더 확대하고 그 기준이 되는 지점을 가장 낮게 정했다. 그래서 결국 이 글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한 이야기로 촛점이 맞춰졌다. 그리고 이제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제목처럼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을 보기 전에 이 글을 읽고 있는 분이라면 한번쯤 스스로 잠시 생각해보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조건을 하나 달자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딱 하나만을 내야 한다.
아마도 잠깐 동안의 시간을 생각을 위해 쓴 후 단 하나의 답을 찾아냈다면, 내 생각과 다르지 않은 결론을 냈을 것인데 그것은 바로 너무도 당연한 '생존' 이다.
'생존' 이 답이라니.. 얼마나 웃기는 말인가? 우린 평소에 정말로 이 생존이란 말을 잘 쓰지 않는다. 생존은 소설에 영화에 다른 사람들의 특별한 이야기속에서만 나오는 단어이지, 내 주변과 내 가족과 그리고 나에게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 단어이다. 물론 평소에 워낙 남의 이야기들을 많이 보고 듣는 탓에 생존이란 단어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볼 기회는 있지만 정말로 나의 생존에 대해서는 생각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만약 혹시나 자신의 생존에 대해 자주 생각해보는 사람이라면 심각하게 자신의 처지에 대해 한번쯤 고려해 봐야 할 것이다.
실제로 생존은 우리에게 너무도 중요한 단 하나의 가치임에도 불구하고 우린 생존을 생각하면 그리 기분이 좋지 않게 된다. 그 이유는 생존은 그 생존이 유지된 상태, 즉 현재의 우리의 상태가 최고의 상태이며 노력한다고 해서 더 잘 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생존을 위해 더이상 어떤 추가적인 노력을 할 수 없다. 현재 이 순간에 숨쉬고 먹고 자면 생존이 유지되며, 여기에 더해 자신이 살아갈 적당한 이유를 찾게 되면 비로소 인간으로서 생존에 대한 조건이 모두 충족되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사는 그 자체가 바로 생존을 위한 최고의 노력이라는 말이다.
그나마 인간의 행동 중 생존과 직접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된 행동 바로 운동인데, 이 운동을 하는 사람들 조차도 단어 그대로의 의미인 생존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건강하게 살 수 있길 바라고 어느 날 병마가 자신을 찾아와 삶을 무너뜨리지 않길 바라기 때문이란 것이 더 중요한 이유이다. 물론 운동을 통해 얻어지는 장수는 바로 또 하나의 추가적 가치가 되겠지만 말이다.
자, 그러면 실제적으로 이 중요한 생존을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우리 인간은 두가지 중요한 본능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성욕과 식욕인데, 우선 성욕은 우리의 유한한 삶을 연장하기 위한 유전자적 선택이고 식욕은 우리의 몸에 에너지를 주입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 둘 모두 우리가 인간이라는 머리가 좋은 동물이기 때문에 추가된 새로운 역할이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 추가된 역할이 원래의 역할보다도 훨씬 중요해져 있다.
일단 성욕에 있어서 우리 인간은 원래의 성욕이 가지고 있는 목적과 달리 반드시 아이를 낳기 위해 섹스를 하지 않는다. 어쩌면 아이를 위한 섹스와 즐거움을 위한 섹스의 비율을 본다면 말도 안되게 후자가 다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1 : 수천 정도 비율이 나올까? (이 비율은 쉽게 남자나 여자나 평생 즐기는 섹스 횟수와 키우는 자녀의 비율을 생각해보면 된다)
아무튼 우린 뇌가 자손을 갖게 하려고 만들어낸 섹스에 대한 강렬한 마약효과를 지식적으로 알게되어서 이젠 따로 발정기가 없이 상시 발정을 가능하도록 진화가 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우리의 안전한 주거환경과 먹거리 환경이 크게 작용을 했을 것이다. 이런 우리와는 달리 우리가 속한 지구 생태계에서 대부분의 동물들은 그들의 자녀를 키울 수 있는 환경이 될 때 비로서 짝짓기를 하고 새끼를 낳아 키우게 된다. 하지만 우린 기술과 생산성의 발전으로 인해 이런 어려움을 스스로 극복해냈기 때문에 언제라도 자식을 낳아 기를 수 있게 되었고 또한 언제라도 섹스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요즘은 피임기술의 발달하고 있어서 더욱 이 현상은 심화될 것이다.
식욕은 성욕에 비해 좀 덜 지식화 되었지만 그래도 우리가 즐기는 수 많은 먹거리를 생각해보면 과연 우리가 살기위해 먹는지 먹기위해 사는지가 헷갈릴 만큼 우린 먹거리 행복을 즐긴다. 하지만 이것은 기왕이면 다홍치마이다. 아무리 먹을것을 즐기는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라도 열흘을 굶기면 평소엔 먹으려면 토할 수 있는 것까지 먹게 된다. 즉 우린 어차피 먹을 것이라면 좀 더 행복하고 즐겁게 먹길 바라는 것이다. 우리의 미각은 우리가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기 위해 진화되어 왔는데 우린 거기에 더해서 수 많은 조리법과 향신료, 요리재료 등을 발전시켜 미각을 통해 얻는 즐거움을 극대화 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이 본능 이외에 수면에 대한 욕구도 꽤나 강력하고 배설에 대한 욕구도 대단한다. 특히 배설은 길거리에서 진정하게 배가 아파 본 이가 아니라면 그 고통을 상상하기도 힘들 것이다. 그리고 이 둘 모두는 앞서 말한 성욕과 식욕보다도 훨씬 더 생존의 본능에 가깝게 있다. 수면은 우리의 몸을 복구시켜주며 장시간 수면을 취하지 않으면 우린 죽게되는 것인데 실제로 음식없이 버티는 것보다 자지 않고 버틸때 우린 더 먼저 죽는 현상도 보고 되었다. 뭐 물론 싸지 않고는 얼마나 버티는지는 모르겠다. 이건 실험 사례도 들어본 적이 없다. 생각해보면 실험 자체가 많이 재밌기도 하다. 실험자들은 과연 얼마나 오래 똥을 참는가 그런 테스트를 받아야 하나?
앞에서 말했듯 이 본능들 위에 추가적으로 얹쳐진 것이 바로 인간의 행복 추구에 대한 욕구인데, 이것 역시 일종의 본능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동안 글을 써 오면서 행복에 대한 정의를 꽤나 많이 해왔으니 오늘은 간단히 정의해보도록 하자.
행복은 인간의 뇌가 우리의 생존 가능성이 더 높아졌음을 판단할 때 주는 호르몬을 육체가 느끼는 과정이다. 즉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호르몬이 뇌로부터 분비되면 우리의 몸은 긴장을 풀고 편안해지면서 생존을을 위해 받던 스트레스 유발 호르몬을 제거해버리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너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했으니 이제 좀 쉬면서 회복해 라고 말해주는 우리 뇌의 휴가증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을 기존에 언급된 육체적 본능인 성욕,식욕,수면욕,배설욕 등에 대입시켜 생각해보면 우린 이것들을 충족시키는 일을 할 때 결국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앞에서 말한 네가지 요구는 뇌가 요구하는 채워져야 할 요구사항이며 이것을 열심히 노력해서 채어내면 뇌는 그 때 행복을 느끼라고 우릴 기분좋게 해주는 옥시토신과 같은 호르몬을 분비해 준다.
그리고 이것을 해결하는 것은 섹스를 하고 뭔가를 먹고, 자고, 싸는 아주 단순한 행위로부터 섹스를 할 기회를 얻거나 더 맛나고 좋은 먹거리를 먹을 가능성, 잠을 잘 잘 수 있는 안전하고 좋은 잠자리를 갖게 된 기쁨, 넓고 깨끗한 화장실 등등의 그 과정으로 가는 다른 추가적인 것들을 얻을 때도 원래 본능을 충족했을 때와 비슷한 기대 행복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본능 충족 같이 느껴지지 않는 행복을 느끼는 과정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가 착각하는 정신적인 행복 효과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기대만으로 행복을 느낀다는 것은 마치 주식시장과 비슷하다. 어떤 회사가 돈을 더 벌 가능성만 생기면 주가는 올라가 버린다. 쉬운 예로 남자들은 아주 아름다운 여자와의 데이트만을 통해서도 엄청난 성적 만족을 느낄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미래에 이 여자와 잠자리를 가실 수 있는 가능성이 1%라도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단순화 시켜서 설명하면, 아이를 낳기 위한 성욕 -> 실제 섹스 중 느끼는 쾌락 -> 이 쾌락을 얻기 위한 상대와의 만남 -> 쾌락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는 예쁘고 멋진 상대와의 만남 -> 이 예쁘고 멋진 상대를 만날 기대 -> 이 상대들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주는 나의 발전, 능력 성취, 이 순서대로 이어질 수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즉 기본적인 성욕에서 미장원에서 머리를 하고 난 후 찍은 셀카가 마음에 드는 것은 결국 동일한 욕구라는 것이다. 단지 우리는 이것을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이유로는 위로 올라갈수록 지식을 통한 두뇌의 판단능력이 중요해지는데 그럼으로서 단순히 출발한 성욕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기대심리까지도 추가되기 때문에 미장원에 다녀온 후 예쁜 자신의 모습을 가지고 단순히 하나만을 이해 좋아하는 것이 아니란 점이 존재한다. 이 경우 미모는 경제적으로 더 나은 배우자를 만날 수 있는 가능성도 높여주기 때문에 결국 돈이란 명확한 생존수단으로 연결되어 진다.
이 부분을 또다른 본능으로 연결시켜 보면, 나의 안전 확보 -> 안전한 쉼터에 대한 욕구 -> 안전한 쉼터를 제공하는 자에 대한 욕구 -> 더욱 안전한 쉼터를 제공할 자에 대한 선택 가능성 -> 이 선택을 좀 더 많이 할 수 있는 자신의 가치 -> 이 상대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주는 나의 발전, 능력성취, 이런식으로도 연결이 되어지는 것이다.
그런 과정중에서 우린 기본적인 욕구를 기반으로 해서 매우 다양하게 진화된 행위를 통해 행복을 느끼는데 흔한 예를 들어보면, 맛있는 것을 먹을 때, 연인과의 달콤한 스킨쉽, 자신의 승진, 원하던 대학 합격, 많은 돈을 벌 기회, 출산과 양육, 좋은 친구와의 만남, 예쁜 여자나 잘생긴 남자와의 인연맺음, 아픔 몸이 회복된 순간, 오랜 시간을 노력해서 달성할 목표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행동들 모두가 어떻게 생존과 연결이 될까?
흔히 우리는 행복을 느끼는 것을 매우 정서적인 과정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정작 우리가 행복을 느끼는 밑바탕에 있는 실체는 바로 육체적인 관점이다. 우린 발전된 지능을 통해 현재의 상태를 이용해 미래를 예측 가능하기에 현재의 상태를 최대한 이해해 자신의 미래 욕구 충족을 알아낼 수 있다. 결국 이런 행동으로 인해 우리는 일어나지 않은 욕구 충족에 대한 미래적 추정을 자신의 현재로 행복화 시키는 매커니즘을 작동 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 밤에 먹을 치킨과 맥주에 대한 기대는 하루를 상쾌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작은 행복감으로 작동한다. 이것이 큰 돈을 번 기회나 아름다운 여자를 만난 상태라도 동일한 원리로 동작한다. 하지만 이것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기대치란 이유로 우린 이것을 매우 정신적인 행복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엔 우리 인간이 정신과 육체를 분리하는 아주 오래된 낡은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아마 정신과 육체를 분리하는 이 오래된 사고방식은 영생, 즉 영혼의 존재를 믿고 싶어서 나타난 개념이 아닌가 싶다. 어떤 의미에서 영혼에 대한 믿음 역시 생존에 대한 욕구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육체가 죽은 후에도 생존을 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행위들의 더 중요한 공통점은 바로 모두 근본적으로 자신의 생존에 대한 가능성을 높였다는 점이다. 특히 돈을 번 행위는 앞에서 말했듯 다양한 추가적인 행복을 얻을 기회를 잡은 것이니 상당히 명백하게 그렇고, 우리가 돈과 대척점에 서서 끝없이 비교대상이 되는 우정, 사랑과 같은 것을 기반으로 한 사람과 사람의 만남, 즉 친구, 연인들과 관계 역시 상대적으로 정서적, 정신적인 역할로 보이지만 결국 우리의 인간관계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만큼 아름다운 관계는 아니며 잠재적으로 자신의 이득과 크게 관련되어져 있다.
즉 친구나 연인 모두 내가 잘 못하는 일을 대신 해줘서 나의 이득을 보장해줄 수 있으며 반대로 나는 내 친구와 연인이 잘 못하는 일을 대신 해줌으로서 나의 가치를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우린 많은 다양한 쓸모있는 능력을 가진사람들에게 명백하게 매력을 느끼게 되어 있다. 이 말은 바로 나 대신 해줄 수 있는 일을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사귀어 두면 평생 도움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평소에 나 자신도 내가 잘하는 것들에 대해 최선을 다해 그들에게 해두어야 한다. 이 최선은 너무도 주관적이라서 내가 실제로 한 일이 10이고 내 친구가 한 일은 100이라고 해도 서로 최선을 다했다면 서로 만족하게 되어 있다. 이 점이 우리가 돈보다 이런 가치를 더욱 중요하게 여겨야 할 숨겨진 진실이다. 즉 돈은 100을 주면 100을 받지만 이런 관계에서는 1을 주고 1000을 받을 수 있다. 그러니 얼마나 우리를 안정되고 행복하게 해주는 가치인가?
여기에서 어떤 이들은 나는 이런 사람들 다수가 선택하는 가치가 아닌 숨겨진 다른 가치들을 찾는다면서 나는 그들과 다르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그것 역시 매우 큰 착각이다. 예를 들어 어떤 여자들은 구석에 숨겨진 소극적이면서 인간관계에 매우 서투른 어떤 남자에 대해 매력을 느낄지 모르지만 그 경우 그 남자는 비록 그 능력이 떨어지더라도 그 여자와 사귀게 되면 그 집중도는 다른 남자에 비해 매우 큰 장점이 있다. 즉 능력은 남들의 10% 밖에 안되어도 집중은 남들의 10배가 넘어서 결국 남들과 같은 결과가 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능력보다는 배신을 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과거의 아픔때문에 그럴 수 있다.
행복의 또다른 과정인 출산과 양육은 우리가 가장 잘못 이해하는 생존욕구인데 그것은 바로 자식사랑이라는 우리가 만들어 낸 어떤 관념과 거기에 더해서 실제로 경험을 통해 자신이 느낀 감정으로 인해 그런 현상이 벌어진다. 여기에서 아이의 가치는 그 아이를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할 수 있는 부모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으로 인해 그 본질이 숨겨져버리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실제로 아이를 키우는 일은 일차적으로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남기는 본능적인 행위와 거기에 더해 자신이 아이를 키우면서 투여한 엄청난 가치에 대한 소중함 때문에 그런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어떤 일이든 오랜시간 많은 자신이 가진 가치를 투자해서 (돈, 노동, 보살핌 등등) 이룩한 일은 모두 자식과 같은 가치를 지닌다. 평생을 모은 책, 피땀 흘려 이룩한 사업, 평생을 다 받힌 어떤 과학자의 연구 등은 그 당사자들에게 모두 자신의 생명을 걸 만큼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일이다. 하지만 평범한 인간들에게 이런 다른 가치를 느끼게 할 대상을 찾을 기회가 거의 없으며 혹을 찾더라도 그것을 그렇게 해 낼 능력이 없어서 자연스럽게 그 대체품인 아이가 그 가치가 되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여기엔 참 재미있는 시기적 배경이 있다.
보통 사람들은 20,30대는 큰 고민없이 보내게 된다. 왜냐하면 그때는 자신이 커가는 시기이기 때문에 보통 자신의 레벨을 높이는데 많은 집중을 하게 되는 것이다. 즉 자신의 삶을 위해 앞만 보고 달리니 옆,뒤를 바라보면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이시기는 가능성과 희망의 시기인다. 하지만 인생의 중반부인 40대가 들어서면서 우린 자신의 삶을 가끔 되돌아보게 된다. 그래서 이미 탈락한 친구들이나 혹은 위태위태 보이는 친구나 그리고 그 자신을 생각하면서 우울해지기도 하고 내 자신이 왜 사는지에 대한 회의를 느끼기도 한다. 이 나이엔 뭔가 새롭게 시작하기도 힘들고 그리고 운신의 폭도 너무 좁아서 젊은 시절에 가졌던 꿈과 희망이 사라진 채 적나라한 자신의 현실이 눈앞에 널부러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자식은 정말 구세주 같은 존재가 된다. 그 스스로 어떤 대상에 대해 평생을 투자할 만한 가치를 따로 못찾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자식은 정말로 40대에 찾아 올 허무함을 넘길 수 있는 대단한 가치를 부여해 준다. 그리고 사람들은 어느새 아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통해 살아갈 이유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러니 어찌 아이가 소중하지 않겠는가? 누구도 이 정도의 노력을 했다면 그 대상을 위해 자신의 목숨쯤은 그리 어렵지 않게 내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말한 예중에서 성격이 조금 다른 목표달성이나 멋진 배우자를 만드는 일 역시 조금 종류가 다르지만 마찬가지 생존과 연결이 되어 있다. 물론 어떤 목표들은 생존 그 자체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인생의 목표를 거대한 탑 쌓기로 둔 어떤 사람들의 목표달성은 그런 예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다음에 나올 삶의 의미에 대한 대답찾기로 이어져 결국 생존과 연결이 되어진다.
우리 인간은 동물과 다르게 생존에 대한 기본적인 충족은 거의 된 채로 태어나 살아가게 된다. 물론 아직도 지구촌 곳곳엔 전쟁과 공포가 늘 상주하고 있는 곳도 있지만 그냥 우리나라만 보면 솔직히 사고나서 죽거나 병에 걸려 죽을 일 말고는 딱히 과거 우리 오래된 조상이 가진 공포를 가지고 살 필요가 없다. 우리 시대엔 호랑이도 없고 굶어 죽을 일도 많지 않다. 병에 걸려도 치료가 가능하고 사고를 대비해서 우린 많은 보호 장치들을 해두고 있다.
이런 상황에 인간의 두뇌능력이 하나 더해졌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것으로 인해 우린 참 많이 복잡해져버렸다. 그것은 바로 미래예측 능력이다. 우리는 그 자신의 삶의 끝이 어떻게 끝날지를 알고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물론 개나 고양이도 자신의 죽음을 알고 살아갈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리에게 있어서 미래는 완전히 안개속에 있는 모호함은 아니다. 우린 결국 죽는다. 그리고 미래의 어느 날일지는 모르지만 과학기술이 정말 많이 발전하면 죽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것 까지도 예측 가능하다.
우리의 예측 능력은 과연 어디에서 나올까? 조금만 생각해봐도 그것이 우리가 머리속에 담고 있는 지식을 통해 나온다는 것을 쉽게 생각해 낼 수 있다.. 즉 우리는 오랜시간 인간의 기록문화를 통해 누적된 많은 것들을 배우고 익힘으로서 과거의 역사를 이해하고 이를 이용해 미래를 추측해보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삶에 대해 그리 필요하지 않은 생각이 하나 선명하게 떠오르게 된다. 그것은 바로 왜 사느냐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우린 불행하게도 미래에 반드시 죽을 것을 명시적으로 알고 있게 되면서 반대로 현재 왜 존재해야 하는지, 또한 미래에도 계속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냥 사는것으로 만족하는 동물들은 왜 사는지 물어볼 필요가 없다. 하지만 우린 우리의 미래를 안다. 우린 결국엔 죽을 것인데 만약 삶을 유지하는 그 모든 행위가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우며 또한 거기에 미래에 대한 희망마저 없고 최악의 경우로 이 모든 것을 참아내며 지켜야 할 가치조차 없다면 우리는 과연 우리에게 주어진 수십년의 수명을 유지할 의지를 가질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자살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유가 되기도 하는데, 결국 우린 우리의 삶이 우리가 기대하는 수준에 있지 못하면 그 결론을 알기에 그 결론을 좀 더 앞당기는 능력을 가진 것이다. 그리고 이것에는 분명히 미래예측 능력이 한몫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거기에 더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마냥 행복하고 즐겁지만은 않은 불편한 진실이 있다. 언제 갑자기 사고가 생길지, 병이 찾아올 지,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할지, 직장에서 짤릴지, 돈이 없어서 전전긍긍댈지, 정성스럽게 키운 아이가 죽음을 맞이할 지, 자신이 공들여 쌓은 탑이 무너질지 모른다. 그래서 우린 실제로는 행복한 것보다 불행한 일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아니 본질적으로는 우리는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안도감을 느끼는 감정을 행복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에게는 이런 고난과 고통을 견뎌내는 힘이 있다. 그것이 바로 희망으로 부르기도 하고 의미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인데, 결국 이것이 우리의 힘든 현실을 극복해나가는 원초적인 힘이 되는 것이다.
아이에 대한 책임감, 사랑하는 배우자, 자신이 오랜 시간 정성을 쏟은 어떤 일들, 현재가 나아질 것 같다는 희망, 내가 꾸준히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가치.. 이런 것들이 바로 현재의 나를 극복하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꾸준히 나갈 수 있는 원천적인 힘이 되며 또한 이것은 또다른 의미의 생존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약 이런 가치들이 어느순간 다 사라진다면 우린 저울질을 통해 내가 더 살아야 할 지 혹은 이런식으로 살 가치가 있을지 고민하다가 결국 생존에 대한 본능을 끊어버리는 결정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즉 자살로서 우리가 가진 가장 중요한 가치를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인간만이 가진 능력인데 그것이 바로 우리의 미래예측 능력과 매우 깊은 관련이 있으며 그것은 바로 우리가 머리에 넣은 지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가 자살을 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 지능이 뛰어나서 그렇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잠시 곁가지로 말을 하자면, 같은 지식을 넣어도 사람마다 다른 반응이 나오는데, 그래서 누군가는 긍정적으로 누군가는 부정적으로 판단을 하는 편차가 나타난다. 결국 이런 편차들로 인해 성격적 차이가 나타나고 어떤 이는 심하게 긍정적으로 살아가고 어떤 이는 심하게 부정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린 이런 것들을 통털어서 성격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후천적 성격을 결정하는 요소가 된다. 즉 우린 기본적으로 유전적인 성격을 가지고 태어나 거기에 더해진 지식의 종류에 따라 후천적 성격이 결정되어 최종적으로 자신의 성격을 완성시키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 인간은 그 어떤 노력을 해서 자신의 삶에 대한 다른 해석을 하고싶을지 모르지만 결국 우린 단 하나의 단어로서 설명되는 너무도 단순한 존재일 뿐이다. 즉 '생존' 이 인간의 모든 가치이다. 물론 유전자 보존을 위한 자식에 대한 본능 역시 대단한 수준이긴 한다. 어쩌면 생존의 연장일 수도 있는 이것은 유일하게 자신의 생존과 다르게 작동한다고 가정할 수도 있다. 즉 상황에 따라 자녀를 위해 자신의 생존을 포기할 수 있는 부모들은 꽤나 다수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부분도 좀 더 생각해보자. 이것이 행복이나 가치의 문제가 아닌 생존과 맞먹는 수준의 본능적 욕구인 단순한 유전자 보존에 대한 본능이라면, 즉 더 오랜 생존을 위한 본능이라면 영화 '아일랜드'를 떠올려 볼 수 있다. 거기에서 우린 자신의 동일한 유전자를 가진 존재를 만난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심지어 아놀드 슈왈츠제너가 출연했던 '6번째 날' 이란 영화에서는 자신의 복제된 존재를 살인이란 행위를 통해 죽여버리기도 한다.
만약 아일랜드에서처럼 내가 매우 아프고 내 복제인간은 나와 100% 동일한 유전자를 가졌으며 건강하다고 해서 나는 내 유전자가 보존될 수 있으니 내 삶을 포기할 수 있을까? (영화에서는 실제로 그 아픈 사람이 자신의 장기 마련을 위해 그 복제인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만약 그 복제인간이 죽을 위기에 쳐했을 때 내 삶을 포기하면서 내 유전자를 구해낼 수 있을까? 어쩌면 50%의 유전자만을 받은 내 자식보다 훨씬 나와 밀접한 존재인데 말이다. 내 자식과 이 유전자 복제인간 중 하나만 살려야 한다면 과연 누구를 살릴 것인가? 물론 어른과 아이의 선택이라서 망설여진다면 나의 어린시절과 나의 아이 중 누구를 살릴 것인가?
답은 뻔하다. 바로 그것은 자신의 아이를 살리게 된다. 왜냐면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내 유전자 보존 본능역시 내 생존본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즉 그 자신이 살아야지 내가 아닌 남은 살아봐야 나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하지만 우린 아직도 피의 전달, 즉 자녀나 가문등에 대해 추상적인 가치를 부여하는데 너무 익숙해져 있으며 그로 인해 내가 낳은 자식이 아니면 키울 엄두도 내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얼마나 큰 어리석음인지를 스스로 인식하지도 못한다.
생존은 인간의 유일하고 최고의 가치이다. 우리가 심지어 자살을 한다고 해서 우리가 이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자살이야 말로 우리가 이 가치를 제일 잘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즉 우리는 최후의 선택으로 섹스를 금하거나 먹기를 금하거나 잠자기를 금하거나 행복하기를 금하거나 싸는것을 금하거나 하지 않는다. 우리는 최후의 선택으로 자살을 한다. 결국 가장 중요한 가치이기에 가장 마지막에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생존의 경계는 매우 명확하게 규정되는 바로 내 신체의 가장 외부에 노출된 피부, 머리털 같은 것들로 이루어진다. 결국 우리를 단순하게 물리적으로 규정하자면 우린 내 피부로 경계지어진 내부에 있는 모든 세포의 생존을 위해 단결되어 살아가는 다중세포를 가진 동물이다. 이 때문에 내 유전자를 100% 가진 존재라고 해서 내가 받아드릴 수 없는 것이다. 우린 매우 이기적인 세포들로 구성된 동물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가 우리 스스로 잊고 지내는 이 생존에 대한 근원적인 본능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린 많은 부분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거대한 착각이나 선입견 등에서 깨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우리가 가진 아집과 독선 그리고 잘못된 선택과 자기방어 논리를 깰 수 있는 힘이 된다. 그래서 우린 스스로 대해 진실해지고 솔직해지고 그래서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중독자가 중독을 벗어나느 방법이 첫번째는 바로 내가 중독되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우리가 가진 이 진실된 모습을 인정할 수 있다면 우린 좀 더 괜찮은 방향으로 향할 수 있다. 나를 위해 스스로 칠한 수 많은 분장을 제거하고 진정한 내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글에서 생존을 인간의 유일한 가치로 정의했다고 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가치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좋은 가치는 의도에 상관없이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여지가 많다. 우정, 사랑 같은 것들은 우리의 생존력을 더 높여준다. 공동의 노력도 마찬가지다. 우리 인간은 오래된 옛날부터 뭉쳐서 생존해 온 종이다. 즉 개미와 같이 군집생활을 할 때 최고의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런 공동의 이득을 위해 살아가는 삶을 선택할 때 나 자신의 생존에 대한 보장 역시 더 커지는 것이다.
'인간과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식의 세계 (0) | 2013.07.15 |
---|---|
동업자와 동반자 (0) | 2013.07.09 |
인간의 양면성 (0) | 2013.07.01 |
삶에 대한 정답은 주관식이다 (0) | 2013.06.20 |
여자에 대한 추가 보고서 (0) | 2013.06.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