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정신과 육체, 분리할 수 있을까?

아이루다 2012. 11. 29. 10:37

기억을 더듬어 생각해보면 어려서부터 지금껏 내가 나를 정의하는 것중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바로 나의 정신으로 생각된다. 물론 내 몸을 구성하고 있는 각종 신체기관 역시 나를 정의하는 것이며 소위 외모라는 것으로 나를 평가하는 수단까지는 된다. 그리고 실제로 인간관계나 애정행각에 있어서 꽤 중요한 요소이긴 하다. 특히 여자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육체라고 정의된 나의 구성요소는 여기까지가 한계이다. 물론 몸이 아프거나 불편하게 되면 정신이 온통 그쪽으로 쏠리게되는 상황은 벌어지지만 보통 일반적인 상황에서 나의 육체는 스스로 호흡하고, 피를 공급하고, 각 세포가 잘 살아가도록 보살핀다. 몸의 골격이나 근육, 지방과 같은 세부 구성물질들은 끊임없이 복제하고 노폐물이 되어 외부에 배출되며 수년만 지나도 과거에 나를 구성했던 세포들을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바뀐다. 그렇다고 해서 내 정신이 그것을 일일히 지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변화는 모두 알아서 일어난다. 그러기에 나는 나의 육체에 일어나는 변화에 거의 신경쓸 필요가 없다. 단지 내 육체가 보내는 특별한 신호, 즉 아프거나 혹은 문제가 생길 가능성에 대한 판단만 하여 병원게 가거나 운동을 하는 정도의 대응만 해준다.

 

육체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 이다. 물론 육체가 건강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운동을 열심히 하고 또 병원에 가서 검진도 받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자신을 육체라고 생각하지는 못하는 한계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지금 생각을 하고 있는 주체를 말한다.

 

정신적 문제인, 대표적으로 알려진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직장이나 학교 혹은 친구들 모임에서 조차 우린 스트레스를 받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그때마다 우린 내 기분이 좋지 않다고 생각을 한다. 실제로 누구나 그런 상황이 되면 신경질을 내거나 말투가 사나워지는 경향이 있다. 어떤 이들은 말수가 줄어들고 우울함을 느끼고 또 어떤이들은 건들면 터지는 폭탄같은 존재가 되어서 쌈닭처럼 굴기도 한다. 심지어는 자살을 시도하는 극단의 선택까지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스트레스란 온전히 정신에 가해지는 압력일까?

 

가끔 세상일이 매우 귀찮을 때가 있다. 주말에 해야할 집안일이 쌓이고 냉장고는 버려야 할 쓰레기가 한가득이고 싱크대엔 어젠 먹고 남은 설겆이 꺼리가 수북하게 쌓여 있으며 빨래도 해야하고 방청소도 해야할 때가 있다. 그런데 몸은 축 늘어져서 힘이 없고 머리는 어제 하다만 일때문에 정신없는 상황이라면.. 과연 그때부터 무신일을 해야 하는 것인가?

 

정답은 하나씩 하나씩 하는 것이다. 그때마다 피곤한 육체가 비명을 질러댈지 모르겠지만 또다른 면에서 육체는 행복함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몇시간 동안 모든 일을 끝내고 샤워를 한 후 커피 한잔을 할 때 느껴지는 행복감은 꽤 달콤하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떤식으로 내가 느낀 스트레스를 극복하고 현재 느끼는 행복감을 가져올 수 있었는가? 그 동안 내가 한 일은?

 

실제로 내가 한일은 모두 육체적으로 진행한 일이다. 나는 그 스트레스 받는 순간에 정신으로 스트레스를 극복한 것이 아니다. 물론 명상과 같은 고난이도의 정신 활동을 통해 극복하는 방법도 있긴 하겠지만 훈련이 안된 일반인들에게는 무리다. 그러니 결국 행동으로 뭔가를 해내면서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방법을 쓰는 것이다. 물론 이런 방법이 꼭 힘든 일을 하는 방식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땐 많은 음식을 먹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어떤 음식들을 잔뜩 사다가 먹으면서 좋아하는 영화를 보거나 방법도 스트레스를 푸는 좋은 방법 중 하나다. 단점은 살이 찌는 부작용이 있지만.

 

스트레스는 정신적 아픔이다. 그런데 스트레스의 해결은 주로 육체적 활동을 통해서 한다. 물론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떠는 등의 해결방법도 있으니 꼭 육체적인 방법만 있는것은 아니다. 하지만 또 지인들과의 만남이 오직 정신적 활동이라고만 가정하는 것도 좀 생각해 볼 일이다.

 

과거 데카르트는 정신과 육체를 두개로 분리한 이원론을 주장했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동조했다. 지금도 종교에서는 육체와 영혼의 존재를 분리해서 믿는다. 그래서 육체적으로 종말이 와도 우린 영혼이 있어서 영원한 삶을 살아간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것은 증명되지 못한 명제라서 뭐라고 말할 수 있다. 현재까지 증명된 사실은 심장이 멎으면 죽음이 찾아오고 죽고난 사람의 몸은 더이상 유지되지 못하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유기체에 의해 분해되어 썩은 후 흙속에 일부로 변해가는 것이다.

 

즉 죽음은 우리의 끝이며 정신은 육체가 최후를 맞은 그 후로는 그 존재조차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다. 내가 죽으면서 나를 정의했던 내 정신세계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니 말이다. 물론 당분간은 나를 아는 사람들의 기억속에 나는 존재하겠지만 그것도 한시적이다. 물론 유명한 사람이 되어 역사책에 혹은 위인전에 적혀 오랫동안 인류 역사와 함께할 사람들도 있지만 결국 그것 역시 시간의 문제이다. 인류가 멸망하면 그 후에 누가 그들을 기억해줄 것인가? 혹은 멸망하지 않더라도 지금으로 부터 100만년 후에 누가 그들을 기억할까? 자료조차 살아남기 힘들텐데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정말로 나를 정의하는 것이 정신일까? 아니면 정신 역시 육체활동의 일부일까?

 

기분이 우울한 날 땀을 흠뻑 내는 운동을 하면 기분이 나아지기도 한다.

몸이 아프면 기분이 우울해진다.

감기나 혹은 다른 병으로 인해 마음이 약해지기도 한다.

심한 고문이나 혹은 죽음에 이르는 상황에 놓이게 되면 사람의 정신세계는 급격히 파괴될 수 있다.

사람이 너무 심한 고통을 겪으면 일명 정신줄을 놓는 미친사람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이런 정신과 육체가 연동되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실제로 내가 생각하는 나의 정신세계에 영향을 주는 것이 온전히 정신세계 그 자체만이 아니란 것을 너무도 쉽게 예측 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실제로는 육체활동의 결과로 정신이 만들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잘생긴 외모나 뛰어난 운동신경은 사람을 자신감있게 해주어 성격이 밝고 명랑하거나 혹은 매우 공격적이고 의지적인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유도한다. 또 반대의 경우엔 사람을 심하게 억눌러서 어눌하거나 혹은 매우 소극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점들은 실제로 극복하기 매우 힘든 경향이 있다. 물론 추한 외모를 가졌으나 이것을 극복하는 남들보다 조금 좋은 두뇌를 가진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면 머리가 좋은 것은 정신적인 특성인가? 아니면 육체적인 특성인가?  당연히 육체적인 특성이다. 그러니 결국 외모를 뛰어넘는 두뇌의 능력을 가진이들 역시 육체적 결과라고 판단 할 수 있다.

 

물론 예외가 있다. 오래동안 체계적인 훈련을 한 스님들이나 혹은 정신적 지도자들..이런 사람들은 오랫동안 정신능력에 대해 집중해서 높은 경지의 정신세계를 구측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역시나 남들보다 좀 더 견고한 정신의 벽을 만든 결과이지 육체 그자체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그래서 해탈이란 말을 쓴다. 정신이 육체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나는 순간이다. 하지만 실제로 해탈이 존재할까?

 

물론 다른 종교인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 역시 믿음으로 능치않을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그렇다면 미쳐서 현실을 모두 부정하고 마냥 웃는 사람과 이런 종교의 가르침을 의심치 않고 마음으로 100% 받아드린 사람과 차이가 있을까? 결국 어떤 이유든 간에 정신이 현상을 부정하고 스스로 생각하고 싶은데로 생각하는 것인데.

 

나는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내 정신을 의심하지 못한다. 왜냐면 지금 글을 쓰는 것 자체는 내 손가락이 하고 있지만 그 손가락에게 어떤 글을 쓰라고 명령하는 것은 나의 정신세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정신세계가 나의 많은 뇌세포와 그들을 연결하는 수 많은 뉴런의 역할로 인해 일어난 육체적 활동이라면 과연 나에게 온전한 정신세계란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직은 그 답을 모르겠지만 슬슬 그 답은 찾아갈 수 있는 듯 하다. 많은 데이터를 통해 판단해 보건데 그것의 키는 무의식에 숨어 있다. 명상도 그렇고 또 내가 몸을 움직여서 내 기분을 나아지게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내 무의식을 스스로 조절할 수 없기에 무의식에 만들어 낸 결과 중 어디에 집중하는가만을 결정할 뿐이다. 몸은 끊임없이 활동하고 외부 자극을 받아들이고 만들고 소화하고 흡수하고 있다. 나는 그 활동 중 정말 일부만을 인식하여 나를 정의하고 있다.

 

기분이 좋다는 말이 무엇인가? 지금 소장이 2시간 전에 먹은 핫도그의 영양분을 흡수해서 몸에 많은 에너지를 공급해 내가 활력이 있어져서 기분이 좋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우숩지만 한번쯤 생각해보자. 혹은 오래된 변비 중 간만에 대박 똥을 누어서 기분이 좋은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