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시간에 대한 조금 다른 시각

아이루다 2012. 2. 25. 11:32

 

과학적으로 말하면 1초란 아주 정밀하게 정의되어 있다. 세슘(Cs) 원자가 91억9263만1770번 진동할 때 걸리는 시간이라고 한다. 물론 이후에도 더 정밀하게 규정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해불가이다.

 

시간이란 이런 1초들의 묶음이다. 우린 시간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나누는데 어떤 책에서는 현재의 의미가 뇌의 영역에서는 정확히 3초정도를 의미한다고 한다. 거기에 대한 몇가지 설명은 있었지만 그냥 쉽게 인정해본다. 3초면 어떻고 5초면 어떤가?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과거 현재 미래란 단어의 뜻을 정의할 수도 있다는 정도로 이해하도록 하자.

 

그런데 이 시간은 지구에서도 각 지역마다 다른 의미를 갖는다. 크게 분류를 하자면 보통 문명이 발달한 유럽이나 미국과 같은 나라들 그리고 한국,일본과 같은 동양의 나라들에서는 '단일시간형 문화'를 형성하고 중동이나 남미와 같은 나라에서는 '다시간성 문화' 를 형성한다고 하는데 각각 의미는 다음과 같다.

 

'단일시간형 문화' 는 시간이란 순차적으로 계획되어 진행되는데 도움을 주는 수단이다. 즉, 거의 대부분의 일은 시간에 의해 계획되고 모두 그 시간에 정확성에 의미를 두며 그 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사람들에게 사회적인 비난과 실제적으로 불이익이 돌아온다. 출근시간을 정하고 버스가 오는 시간이 정해지며 친구와 만나는 시간 내가 특정지역까지 가는 시간까지 모두 계획되는 것이다.

 

'다시간성 문화'는 단일시간형 문화에서 그토록 중요한 정확한 시간 맞추기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실제로 티벳에 다녀온 내 친구의 말에 의하면 거기 대중버스는 길다가 중간에 친한 상대버스 기사를 만나면 그자리에서 차를 세우고 몇분간 대화를 주고 받는다고 한다. 우리나라 같으면 엄청난 문제가 되겠지만 그나라에서 그나라 국민들은 그것을 크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시간에 대한 개념은 아주 크다. 하지만 또 간단히 생각해보면 아주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단일시간형 문화'는 보통 풍요롭지 않는 땅. 그러니까 먹고사는 문제가 아주 중요한 곳에서 시간당 효율성을 극대화 하기 위해 당연히 시간의 정확성에 그리고 일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집중을 하게 되었고 반대로 '다시간성 문화'는 먹고 사는 문제가 그리 심각하지 않는 땅. 그러니까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 행복을 추구하는 문화지역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결국 '단일시간형 문화'에 사는 사람들은 잘살게 되었고 그렇지 않는 지역은 그렇지 못한 상황이 벌어지고 만다. 최근 유럽에 있는 그리스의 위기를 보면 그 지역에 따른 문제가 얼마나 큰것인지 느낄 수 있는데 성실하고 근면한 북유럽과 불성실하고 나태한 남유럽 (이것은 북유럽 사람들이 주장하는 내용이고 실제 사실이기도 한것 같다)간의 갈등이 그것이다.

 

예전에 봤던 "인타임" 이란 영화에서는 모든 시간을 화폐로 주고 받는 배경을 가진 작품이었는데 25세가 되면 노화가 멈추고 팔뚝에 시간이 소비되기 시작한다. 그 팔뚝에 나타나는 숫자가 0이되면 언제라도 죽게된다. 따라서 사람들은 시간을 벌기 위해 일을하고 커피를 마시기 위해 시간을 지불한다. 따라서 부자들은 그 팔뚝에 수치가 수억년까지 있고 가난한 자들은 24시간도 채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부자들은 절대 뛰지 않는다. 왜냐면 뛴다는 것은 시간이 아깝다는 말이고 그 시간이 아깝다고 느끼는 사람은 바로 스스로를 가난하다고 인정하기 때문에 천천히 움직일 수록 부자인 것이다. 하지만 가난한 빈민촌 사람들은 늘 뛰어야 한다. 왜냐면 1초의 시간이라도 낭비를 하게되면 바로 자신의 죽음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그 어떤 나라보다도 '단일시간형 문화'로 발달한 나라이다. 물론 예전에 조선시대 양반들은 세월아 어디가니 하면서 유유자적인 삶을 추구했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런 삶의 형태는 게으른 사람이거나 혹은 의지부족형 인간으로 취급받기 쉽상이다. 빨리빨리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국민성이 되었으며 직장에서 근태(출근/퇴근시간 관리)는 업무평가에 중요 요소로 작용한다.

 

특히 작은 중소기업들인 경우 사장의 가치관에 따라 개인의 업무능력이 근태로 판별되는 경우가 많은데 따로 업무능력 평가 시스템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평소에 지각을 안하는지 또 퇴근을 얼마나 늦게 하는지가 개인의 업무능력을 간접적으로 평가하는 수단이 되는것이다. 아주 바보같은 상황이고 특히 자신의 바로 윗상사가 이런 태도를 가지게 되면 일찍 출근하고 할일이 없어도 상사가 퇴근한 후 퇴근하게 되는 비효율성이 극대화 되게된다.

 

여기서 과연 정말 출퇴근 시간을 제대로 지킨다고 해서 일을 제대로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할 필요가 있는데 이 부분은 이 글의 의도를 넘어가게 되니 따로 또 시간을 내어 그 부분에 대해 생각해보자.

 

결국 대한민국은 단일시간형 문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확성과 효율성의 의미를 제대로 적용하지 못하고 단일시간도 아닌 다시간도 아닌 아주 어중간한 문화를 형성해버린 것이다. 그것도 양쪽의 단점만 모두 가져온 듯 하다. 시간은 정확히 지키지만 비효율적이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과거에 비해 점점 척박해져 가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물질가치를 중요하게 여기게 되면  시간의 정확성과 효율적인 사용에 대해 극대화되고 정신적인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게 되면 인간관계 중심형으로 시간은 분배된다. 결국 이런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빨리빨리와 우리의 시간에 대한 강박관념은 물질적인 가치추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일까? 나는 개인적으로는 행복에 대한 추구만이 인간의 길은 아니라고 믿지만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있기 때문에 범용적인 관점에서 봤을때 톱니바퀴 돌듯 흘러가는 시간의 분배가 우리를 얼마나 행복하게 해주고 있는지 고민해볼 필요는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그런 가치기준을 얼마나 남에게 강요하고 있는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천천히 걷는 사람은 목적성이 없고 시간을 낭비하는 듯 보여도 주변에 피어있는 이름모를 꽃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여유가 있다. 빠르게 걷는 사람은 목적성이 명확하고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쓰고 있어 원하는 것을 얻기 쉽다. 그런데 어느날 시간이 갑자기 홍수처럼 밀려온다면 - 퇴직이나 실직 등등-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낼 수 있는가? 평생을 시간에 쫒겨 효율과 목적달성만을 위해 살아왔다면 말이다.

 

늙는 다는것은 단순히 육체의 노쇠를 의미하지 않는다. 노쇠한 이의 시간은 젊은이의 그것에 비해 훨씬 많고 주어지고 또한 느리며 자극적이지 못하다. 우린 이제 좀 자주 길가에 핀 들꽃을 감상해야 하며 내가 왜 효율과 정확성에 목메이고 있는지에 대해 스스로의 답을 천천히 찾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