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자유로움의 세 단계

아이루다 2020. 9. 26. 06:37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고 싶어한다. 사실 실제로 자유를 감당할 수 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들에게 있어서 자유는 영원한 목표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조금만 자유가 억압받는다고 느껴지면, 그것이 그렇게 답답하고 불안하다.

 

그런데 사람들마다 말하는 자유가 조금씩 다르다. 누구나 원하지만, 자유를 정의하는 것에는 서로 미세한 차이가 난다. 그리고 어느 지점이 되면 미세한 차이를 넘어서 아예 다른 차원의 개념이 되고 만다.

 

그래서 자유를 바라보는 우리들 각자의 시선은 생각보다 다르다. 그럼에도 크게 세 가지 종류 정도로 구분해서 생각해볼 수는 있다.

 

자유의 첫 번째 단계는 바로 노예의 자유이다. 이것은 집안에서 키우는 개나 고양이가 누리는 자유와 비슷한데, 물론 누군가는 그런 삶에 자유라는 말을 붙이는 것 자체를 매우 불쾌하게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일종의 자유이긴 하다. 도대체 무엇이 자유인지 되묻고 싶겠지만, 적어도 먹고 사는 일이 자유롭다. 그러니까 자신의 주인만 망하지만 않는다면 평생 먹을 것 걱정은 하지 않고 살 수 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먹고 사는 일이 힘들었던 과거엔 정말로 중요한 조건 중 하나였다.

 

그래서 과거엔 대감 집에서 잘 먹고 사는 종놈과 자기 밭을 일구지만 늘 배가 고픈 자작농 중에서 오히려 종놈이 더 행복하게 살았을 수도 있다.

 

대신 노예로 살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하는 것이 많다. 주인이 맺어주는 짝과 살아야 하며, 언제든 버림을 받을 수 있고, 폭력에 노출되어도 하소연할 방법이 없었으며, 심지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기까지도 했다. 개나 고양이의 처지도 비슷하다. 언제든 버림을 받을 수 있고, 중성화 수술을 당하고, 안락사를 당할 수도 있다.

 

다행히도 현대 사회는 먹고 사는 일이 그리 힘든 상황은 아니다. 그러니 지금 시대엔 노예로 살아갈 필요가 거의 없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지금 시대에도 노예의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이 제법 된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그렇게 살아간다.

 

독립할 나이가 충분히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그늘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식, 남편이나 아내의 경제력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아내나 남편, 스스로 돈을 벌 생각을 포기하고는 사회 복지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등이 바로 그런 노예의 자유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노예처럼 그렇게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는다.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을 가진 채 겉으로 보이겐 노예가 아닌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다른 것이 없다. 자신의 운명이 스스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먹거리를 책임져주는 사람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점은 동일하다. 그러니까 주인의 운명에 의해서 자신의 운명이 끝없이 흔들린다.

 

그리고 본인들도 그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삶이 불안해진다. 주인의 눈치를 보는 개처럼 끝없이 자신을 먹여 살리고 있는 존재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이런 태도가 삶을 좀 먹는다.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불안하게 만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두 번째 자유를 꿈꾼다. 바로 주인으로부터의 독립이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먹고 사는 문제를 혼자 해결하는 것이다. 혹은 스스로 경제 활동을 하지 못하더라도 정말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이다. 보통 부부가 그 역할을 한다.

 

그래서 똑같이 외벌이를 하는 부부라도 주인과 노예 방식으로 맺어진 경우가 있고 반대로 상호 동등한 관계로 맺어진 경우가 있다. 이 둘의 차이는 얼만큼 서로를 신뢰하고 있느냐 여부로 인해서 갈린다.

 

상대를 운명 공동체로 여기는 부부의 경우엔 한쪽만 경제 생활을 하더라도 독립적인 자유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상대방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거나 스스로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한 채 배우자에게 완전히 기대어 살아가는 삶의 경우는 그저 노예의 자유에 머무르고 만다.

 

일단 경제적 자유를 갖게 된 사람들은 두 번째 자유를 누릴 자격이 주어졌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필요한 것이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정신적인 독립이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독립성이다. 그래서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은 그 한계가 명확하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자신의 미래를 타인의 결정 속에서 살아가는 것도 결국엔 노예의 자유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요즘은 성인이 되어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마마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경제적으로는 독립했지만,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부모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이다.

 

경제적 독립과 정신적 독립, 이 둘이 어느 정도 완성되면 두 번째 단계의 자유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삶은 꽤나 고단하다. 스스로 먹을 것을 구해야 하고, 스스로 모든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래서 자유롭긴 하지만 힘들다.

 

그래도 원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버림을 받을 위험이 없으며, 억울하게 맞거나 죽을 일도 없다. 노예의 자유가 가진 단점을 모두 벗어날 수 있다.

 

첫 번째인 노예의 자유는 언제든 버림을 받을 수 있다는 무의식적 불안함을 만들어 내고, 두 번째 자유는 언제든 삶의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는 걱정이 무의식적 불안함을 만들어 낸다. 서로 불안함을 만들어 내는 원인은 다르지만, 모두 다 불안하다는 점은 동일하다.

 

첫 번째 경우, 그 불안함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주인이 자신을 얼마나 아끼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을 버릴 확률을 줄일 것이다.

 

두 번째의 경우, 최대한 많은 돈을 벌려고 한다. 그래야 미래에 닥칠 위험 요소를 최소화 시킬 수 있으며, 더해서 지금의 행복도 더 높일 수 있다.

 

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두 번째 자유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다들 그렇게 돈을 벌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돈을 벌수록 지금의 자유로운 삶을 버틸 수 있어서 그렇다. 하지만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불안함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모든 생명체는 언젠가는 죽기 때문에 그렇다. 더해서 죽지는 않더라도 아픈 것도 큰 문제이다. 멀쩡한 삶이 병으로 인해서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그것은 결코 돈으로도 해결이 되지 않는다.

 

병과 죽음이라는 육체적 한계로 인해서 돈이 불안함을 줄이는 것에는 한계가 생긴다. 그래서 두 번째 자유를 누리고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불안함은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두려움이다.

 

그런 배경 속에서 세 번째 자유를 꿈꾸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긴 하지만 그들은 생과 사의 한계를 넘고 싶어한다.

 

그래서 세 번째 자유는 죽음으로부터의 자유이다. 당연히 경제적인 독립이나 정신적인 독립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 오직 방법이 있다면 삶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다. 삶의 본질을 바라볼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해 자신의 존재에 대한 각성을 해낸다. 그래서 결국엔 생과 사를 초월한다.

 

그리고 만약 이런 자유만 얻을 수 있다면 이제 불안함과는 영원히 결별한다.

 

하지만 그런 시도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두 번째 단계의 자유를 보통 자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그런 태도는 평생 노예로 산 사람이 자신을 자유로운 노예라고 여기는 것과 비슷하다. 자신의 발에 채워진 족쇄를 당연하게 여기고 그것을 반짝이게 닦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자유를 누린 사람이 보면 그런 삶이 얼마나 비참해 보일 것인가? 자신이 누리고 있는 자유로움에 비하면 노예의 자유는 정말로 터무니 없는 삶이다. 하지만 그 역시도 세 번째 자유 단계에 이른 사람이 사람이 자신을 보면 결국 마찬가지로 자신을 보게 될 것이란 점을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

 

자신도 역시나 발버둥치고 있는데 그것이 조금 우아할 뿐임을 자각하지 못하기에 세 번째 자유에 대한 그 어떤 열망도 느끼지 못한다.

 

1차원에 살고 있는 존재는 앞, 뒤의 개념만 이해한다. 그는 결코 좌, 우를 이해할 수 없다. 2차원에 사는 존재는 앞, , , 우의 개념만 이해한다. 결코 상, 하의 개념을 이해할 수 없다. 3차원에 사는 존재는 앞, , , , , 하의 개념만 이해한다. 그는 결코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는, 시간의 앞, 뒤를 이해할 수 없다. 4차원에 사는 존재들은 우리가 위, 아래를 갈 수 있듯이 과거와 미래를 언제든 갈 수 있는 상상을 하기가 힘들다. 그렇다면 5차원엔 무엇이 있을까? 거기에서는 어떤 대상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까? 그것은 3차원에 사는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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