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노자

아이루다 2020. 6. 26. 07:28

 

예전에 읽었던 책 한 권에서 특이한 등장 인물 두 명이 나왔던 기억이 난다. 사실 등장인물이라고 보기보다는 그냥 주인공의 환상? 착각? 속에서 잠시 출현했던 존재들이다. 그 중 한 명은 예수이고 다른 한 명은 노자이다. 책의 제목은 '너무 시끄러운 고독' 이다. 아는 분의 추천으로 우연히 읽게 되었다.

 

이 책에서 예수는 젊음의 고뇌를 상징하는 인물로, 적극적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은 인물이지만 또한 그로 인해서 세상에 대한 절망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노자는 그 반대 편에서 예수가 바라보고 있는 세상을 똑같이 보고 있지만, 그는 예수와는 달리 별다른 표정 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예수는 미래이며 전진이지만 노자는 과거이며 후진이다. 예수는 고뇌하고 있지만 노자는 평온해 보인다. 예수는 붙잡고 있지만 노자는 모두 놓아 버렸다.

 

나는 책을 읽은 후 두 인물이 참 잘 표현되었다고 느꼈다.

 

개인적으로 내가 노자라는 인물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사실 나는 원래 노자보다는 장자가 좋았다. 물론 둘 모두에 대해서 쥐뿔도 몰랐지만 그냥 장자의 나비 꿈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뭔가 몽환적인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지금도 내 지식은 그리 바뀐 것은 없다. 단지 이런 저런 궁금증과 시간이 남는 탓에 그 두 사람에 관한 책을 몇 권 읽은 것이 전부이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장자보다 노자에 끌린다. 사실 노자는 정말로 실존했던 인물이냐에 대한 논의가 있을 만큼 그의 삶은 행적이 신비로운 구석이 있는데 아마도 워낙 남들에게 알려지기를 꺼려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가 썼다고 알려진 - 하지만 정말로 그가 썼는지는 정확히 모르는 - 도덕경을 대충이라도 보면 그런 그의 삶이 너무도 당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노자는 자신이 쓴 도덕경처럼 살았던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몇 천 년 역사 동안 많은 현자들이 있어 왔다. 하지만 냉정히 말하면 진짜 현자는 사실 몇 안 된다. 그리고 노자는 그 중 하나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그렇다.

 

그런데 현자들은 흥미로운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결코 스스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모두 그들의 제자나 주변 사람들에 의해서 기록되었다. 이 특징이 그저 우연인지 아니면 원래 그럴 수 밖에 없는지 정확히 알 방법은 없지만 왠지 그럴 것 같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에 의해서 기록되었고, 예수는 그의 열두제자에 의해서 기록되었다. 부처 역시도 그가 한 말을 그의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며, 아마도 노자의 도덕경도 그랬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도덕경에 관련된 흘러내려오는 이야기가 하나 있긴 하다.

 

도덕경이 쓰여진 이유가 평생 기록을 남기지 않았던 노자가 죽을 때가 다 되어서 중국을 떠나고자 국경을 넘을 때, 그의 제자였던 국경수비대가 그에게 가르침을 남기지 않고는 절대로 보내지 않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써야 했었다고 한다. 그러니 그 이야기에 따르면 자필이 맞다. 하지만 자의가 아닌 타의적으로 쓰였다. 더군다나 노자에 관한 이야기 중 그가 70년 동안 태아로 있다가 다 늙어서 태어났다는 설화도 있으니 도덕경을 그가 직접 썼다는 그 이야기도 그리 믿을만한 내용이 아니다.

 

진정한 현자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진리를 말한다. 반대로 말해서 진리를 말하고 있지 않다면 현자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그 현자들이 말한 진리는 모두 제 삼자에 의해서 기록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기록된 진리는 얼만큼이나 진리를 정확시 설명하고 있을까? 

 

슬프게도 결국 아무 것도 제대로 기록될 수 없다. 제 삼자를 통하는 순간 모든 것이 왜곡될 수 밖에 없기에 그렇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자가 받아 적은 글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이다. 그것은 마치 세계 물리학 학회에 간 초등학생이 기록한 글과 같다. 분명히 받아 적고는 있지만,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니 결국 엉뚱하게 해석되고 만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그 문제를 아주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道可道非常道(도가도비상도)"

 

도덕경에 처음 나오는 구절이다. 그래서 아주 유명한 구절이기도 하다. 사실 이 구절은 좀 난해하다고 알려져 있기도 한데, 그러다 보니 제법 많은 해석들이 있다. 그래도 대충 '도를 설명하면 더 이상 도가 아니다'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처음 들으면 좀 어처구니 없기도 한데, 그것에 대해서 좀 더 많은 시간을 두고 깊게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너무도 중요한 말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미 진리를 깨달은 자가 진리를 구하는 이들에게 왜 알려주지 못하는지 이해가 간다. 진리는 설명될 수 없다. 설명이 되는 순간부터 그것은 진리가 아닌 것이 되고 만다.

 

내가 친구에게 '엄마' 라는 단어를 설명해본다고 가정해보자. 그때 나는 어떻게 엄마에 대해서 설명을 할까? 물론 사전적 의미로 엄마를 설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표피적이다. 제대로 하려면 최대한 내 경험을 통해 말해야 한다. 어린 시절 나에게 맛난 것을 먹여줬던, 어른이 된 후에도 늘 차조심 하라고 말씀해주시는 엄마를 말해야 한다.

 

하지만 과연 내 친구가 엄마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물론 그 친구도 나의 이런 경험적 엄마에 대한 설명을 듣고 어느 정도 이해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역시도 엄마를 경험했기 때문에 그렇다. 비록 서로 경험의 종류는 다르지만 그때 느꼈던 감정은 비슷할 수 있기에 충분히 공감이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고아로 자란 사람도 그럴 수 있을까? 한번도 엄마를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엄마를 제대로 설명해줄 수 있을까? 그럼에도 간접적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 살아오면서 누군가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만나 본 경험이 한번이라도 있었다면 엄마의 존재가 어떤 감정을 가져다 줄 것인지 어느 정도까지는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따뜻했던 경험보다 훨씬 더 따뜻한 존재가 평생 함께 한다는 생각은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엄마라는 존재가 이해 갈 것이다.

 

그런데 만약 아예 단 한번의 경험도 없었다면 어떨까? 세상에 태어나서 평생 혼자 살아 온 사람에게 '엄마'를 어떻게 설명해줘야 할까?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보인다는 것' 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들리지 않는 사람에게 '들린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단 한번도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그것에 대해서 정확히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진리를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에게 진리를 제대로 설명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만약 억지로 그것을 하려는 순간 그것은 그 즉시 진리가 아닌 것이 되고 만다.

 

진리를 아는 자가 진리를 단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에게 진리를 설명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을 것이다. 노자에게 있어서 진리는 ''였고 그러니 도는 설명하는 즉시 왜곡되고 만다. 그러니 도를 설명하면 더 이상 도가 아닌 것이 되고 만다.

 

사실 인간이 꽤나 견고하게 믿고 있는 말과 글 그리고 그것을 통해 표현하고 있는 수 많은 논리들은 아무리 잘해봐야 본질에 근접할 뿐이다. 결코 본질 그 자체에 다가갈 수가 없다. 본질은 오직 각자의 개인적 경험에 의해서만 접근이 된다. 아무리 사과가 맛이 있다는 설명을 자주 들었어도 결국 내가 사과를 먹어봐야 사과가 얼마나 맛있는지 알 수 있다는 뜻이다. 경험만이 유일한 이해의 방법인 것이다.

 

노자는 처음에 그것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후 자신이 설명하는 그 모든 것들이 '도가 무엇인지' 가 아니고 '어떻게 해야 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지'를 설명해준다. 그러니 노자가 말하고자 한 도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그의 은유적인 설명을 듣고 스스로 깨우치는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이 아름답다 하니 아름다운 줄 알지만 이는 추악한 것이 있기 때문일 뿐이고, 선하다고 하니 선한 줄 알지만 이는 선하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일 뿐이다."

 

노자는 이 단 한 구절로 세상의 본질을 표현했다. 세사 사람들 모두 아름다움과 선을 추구하지만 사실 아름다움이나 선은 모두 못생긴 것과 악한 것이 있기에 생겨난다는, 진짜 진실을 말해주고 있다. 별 것 아니지만 이것은 거대한 역설이다.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은 배고픔의 고통이 있기에 그렇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는 못생긴 것, 악한 것, 배고픈 것 등을 모두 불행한 것으로 여기고 무조건 없애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확히 말해서 정말로 그것들이 없어진다면 그의 반대쪽에 있는 것들, 아름다운 것, 선한 것, 배부른 것도 사라지고 만다. 좌가 사라지면 우도 없어진다. 불행이 없다면 행복이 생겨날 수 없는 것이다. 부족함이 없다면 풍족함도 당연히 없고 못남이 없으면 잘남도 없으며 어둠이 없다면 빛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언제나 불행한 것들 처단하려 든다. 존재하면 안될 것으로 믿고 반드시 없애려고 든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 반대편도 사라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악마를 없애면 신도 사라지고 만다. 그러니 이 세상에 악마는 결코 사라질 수 없다. 신이 있는 한.

 

이 문구만 제대로 이해해도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뀔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진리를 얻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그저 수십 년 동안 너무도 당연하게 바라봤던 오래된 고정관점 하나를 바꿀 여지가 생긴다는 것이다. 물론 당장 안다고 해서 쉽게 바뀌지 않는다. 우리의 무의식은 원래부터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이니까. 그럼에도 시간이 쌓이면 지금껏 해 온 불행과 행복을 바라보는 관점, 잘남과 못남을 바라보는 관점, 선과 악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다.

 

"학문을 그만두면 근심이 없다. "

 

이 대목에서 노자는 공자와 격렬하게 충돌한다. 공자는 논어의 첫 구절에서 '배우고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 라고 말했다. 그런데 노자는 '배우지 않으면 근심이 없다' 라고 말하고 있다. 노자는 '아는 게 병이고, 모르는 게 약이다' 라고 말하고 있고 공자는 '아는 것이 힘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이 두 분의 말씀을 그리 단순하게 해석하기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매일 쌓아가는 삶을 강조한 공자와 매일 비우는 것을 강조한 노자 중에서 과연 누가 더 진리에 가까울 수 있을까? 물론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공자의 가르침에 더 끌리게 된다. 매일 뭔가가 쌓이는 것은 뿌듯함을 주니까. 그래서 우리는 틈만 나면 뭔가를 쌓으려고 든다. 지식, , 능력, 평판, 경험 등등은 우리가 쌓고 싶어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노자는 여기에 반대한다. 오히려 쌓지 말고 비우라고 한다. 비움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한다.

 

"굽은 나무는 수명을 온전히 마치게 되고, 자벌레는 몸을 굽힘으로써 뻗을 수도 있게 된다. 물은 우묵한 웅덩이로 흘러 모이게 되고, 옷은 낡아 헤어져야만 다시 새 것을 입게 된다."

 

노자는 이 설명을 통해서 앞에서 말한 선과 악, 좌와 우, 빛과 어둠의 역설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더해서 우리가 매일 추구하고 있는 '잘남'의 역설도 말해준다. 못난 굽은 나무와 달리 잘난 곧게 뻗은 나무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결국 잘리게 된다. 좋은 나무이니 당연히 집을 지을 때 써야 하기에 그렇다. 하지만 못난 굽은 나무는 아무도 관심이 없기에 천수를 누릴 수 있다.

 

매일 남들보다 잘 나려고 노력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것이다. 회사에서 능력을 증명하면 더 많은 일이 할당될 뿐이다. 누구나 일을 잘하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려고 하기에 그렇다. 그냥 일을 잘해서 하는 것이라면 별로 상관이 없지만 엄청난 노력을 다해 잘한 것이라면 더해진 일로 인해서 죽을 수도 있다.

 

물론 사람들은 그럼 못나게 오래 사는 것이 제대로 된 삶이냐, 라고 화를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의미가 아니다. 잘나게 태어났다면 그렇게 살면 된다. 또한 못나게 태어나도 그렇게 살면 된다. 하지만 이 세상 사람 모두는 잘나게 태어났든 못나게 태어났든 다들 잘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다. 단지 못난 사람들이 더 안달 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잘난 사람들에 비해서 올라야 할 길이 훨씬 더 길기 때문이다.

 

부자가 여유로워 보이고 착해 보이는 이유는 돈이 많아서 그런 것일 뿐이다. 그들이 특별히 가난한 사람에 비해서 인격이 뛰어난 것이 아니다. 돈 몇 푼에 괜히 안달을 할 필요가 없으니 그런 여유가 생겨난 것이다.

 

어떻게 태어나든 상관은 없지만 잘나기 위해서 무리한 노력을 하는 삶을 살지는 말라는 의미이다. 잘남과 못남은 각자마다 고유한 장점이 있다.

 

노자는 이렇게 자연스러움을 말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억지로 하지 말라고 한다. 그것을 무위자연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순리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러다 보니 의지나 노력의 중요성이 무시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결국 의지적으로 피나는 노력을 해서 자신을 잘난 존재로 증명하고자 하는 수 많은 사람들을 매우 기분 나쁘게 만든다. 그러니 노력을 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노자를 '거지의 사상' 이라고 말한다.

 

하늘이 지붕이고 땅이 방바닥이라고 믿는 거지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구걸만 하고 살아갈 것이기에 결국 자기합리화일 뿐이다. 하지만 정말로 하늘이 지붕이고 땅이 방바닥이기에 누군가 강남의 60평 아파트를 준다고 해서 아무런 갈등이 없이 거절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이 지구가 내 집이 될 수 있다.

 

노자가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노자를 거지의 자기합리화로 오해한다. 그리고 반대로 노력하고 쌓는 삶을 강조한 공자를 떠받든다. 몇 천년 동안 노자와 공자 중에서 공자의 가르침이 더 넓게 퍼진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진리가 표현되는 즉시 왜곡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이 대목에서도 증명이 될 뿐이다. 노자가 아무리 설명을 해주려 애써도 결국 사람들은 그의 말을 왜곡해서 들을 수 밖에 없다.

 

"세상에 물처럼 약하고 부드러운 것이 없다. 그러면서도 굳세고 강한 것을 이기는 데 물보다 더 나은 것도 없다."

 

노자는 물을 사랑한 현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물을 통해서 많은 것을 설명한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바다가 모든 물의 근원이 된다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올라가려고만 하는 우리들의 삶을 부드럽게 설득하고 있다. 결코 형체가 없기에 어디든 어떤 모양으로든 변하는 물에 대해서 표현하면서도 바위를 뚫는 물 한방울의 능력 또한 말하고 있다.

 

이렇듯 물은 어떤 면에서 우리가 살아가가야 할 진정한 삶의 태도가 된다. 흘러내려가다가 장애물을 만나면 돌아서 흘러내려가는 자연스러움은 장애물을 만나면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고 믿는 우리들의 고정된 생각을 바꿀 수 있게 해준다. 노자는 의지, 단단함, 강함, 노력, 극복, 극기 등으로 중무장한 채 세상과 전투 중인 우리들에게 그것이 아닌 오히려 형체도 없고 부드럽기 그지 없으며 흘러가는 대로 흘러가는 물을 닮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한다.

 

우리는 그저 전체의 일부로써 잠시 머물다가 가는 존재라고 한다. 그래서 죽음조차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노자는 살아 생전에 단 한번도 싸움에 진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단 한번도 싸우지 않았기에 그렇다. 이 말을 잘못 들으면 겁쟁이로 보인다. 누군가와 싸움을 하는 것을 피하는 사람을 보인다. 하지만 피하는 것과 돌아가는 것은 다르다. 똥은 바닥에 있으면 더러워서 돌아가지 그것이 무서워서 피하지 않는 것이다.

 

잘 생각해봐야 한다. 도대체 이 세상에서 무엇이 무서워서 피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그저 모든 것을 돌아가면 되는 것이 아닐까? 마치 흐르는 물처럼 말이다. 물론 그러다 보니 그 흐름이 굽이칠 것은 분명하다. 다들 고속도로처럼 뻗고자 하기에 그런 굽이는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끝없이 뻗은 고속도로는 지루하고 졸리기만 할 뿐이다.

 

우리는 빨리 도착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살고 있다. 그러니 돌아 돌아가더라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면, 그 돌아가는 길에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다면 도대체 돌아가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순리를 따르는 삶, 스스로 분리되어 나온 자연으로 돌아가 그 흐름 속에 사는 삶, 그것이 노자가 우리에게 해주는 진리에 관한 가장 자세하고 근접한 설명일 것이다.

 

도덕경은 노자가 들려주는 삶의 진리에 관해 별로 공감은 안가더라도 삶의 어느 시기쯤 한번은 읽어볼만한 책이다. 워낙 해석본도 많이 나와 있으니 그리 어렵지 않게 읽을만도 하다. 단지 무엇을 읽든 노자가 진짜로 들려주고 싶은 말의 어렴풋한 윤곽만 볼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스스로 진리를 경험하지 못한 상태라면 결코 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다. 그러니 노자에 관해 수백 권의 책을 읽었다고 해도 노자에 대해서 단 하나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이것을 잊는 순간 겸손함을 잃고 노자를 잘 안다는 '잘남'의 노예가 되고 만다.

 

역설적이게도 노자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될수록 노자의 가르침을 더 많이 어긋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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