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이 얻게된 하루의 휴식. 오늘 나는 사무실 사정으로 인해 하루를 쉬게 되었다. 그리고 아침부터 이래저래 집안 정리를 하면서 대청소까지를 해냈다. 어제 사무실 짐 정리하느라 육체노동을 제법해서 그런지 오늘은 오전 조금 힘을 써도 쉬이 피곤함이 느껴진다. 역시나 체력은.. 중요하다.
그래도 오랜만에 힘을 써서 일을 한 결과인듯 오늘은 점심 무렵이 되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린다. 평소 워낙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는 스타일이라서 보통 나에게 밥이란 것은 시간에 맞춰서 먹을 뿐 배가 고파서 먹는 일은 거의 드물기 때문에 이런 일이 흔하지 않은 편이다. 아무튼 배가 고프다는 것은 좋은 신호이다. 적어도 배가 고프면 왠만한건 다 맛있다.
점심을 먹고 잠시 누워서 다큐멘터리를 봤다. 오후의 나른함과 다큐멘터리의 잔잔함은 나에게 졸음을 가져다 주었고 잠시 존 듯 한데 한 30분 정도가 지나 있었다. 청소를 다 마무리 하지 못했기에 나는 다시 빗자루와 쓰레받이를 들고 거실과 부엌을 쓸기 시작했다. 참고로 말하면 나는 요즘은 진공 청소기를 쓰지 않는다. 이렇기 시작한지가 한 두어달 되는데 그 시작은 토끼를 키우면서 생겼다.
워낙 많은 똥을 사방에 싸놓고 다니는 그 녀석때문에 진공 청소기로 하기엔 너무 그 횟수가 잦았다. 그래서 아예 빗자루를 썼는데 정말 오래만에 써보니 제법 좋다. 일단 진공 청소기는 청소가 불가능한 영역이 너무 많아서 꼼꼼하게 하지 않으면 구석구석 먼지가 제법 쌓이는데 내 성격 상 꼼꼼함과는 거리가 멀어서 늘 나의 공간은 구석에 먼지가 한웅큼이다.
그런데 빗자루를 쓰니 이런 문제가 많이 해결된다. 그리고 청소를 전면적으로 하지 않아서 좋다. 일단 더러우면 더러운 영역만 골라서 쓸어 담으면 되니 이 또한 좋은 점이다. 하지만 역시나 단점은 있다. 일단 구부리고 다니면서 치워야 하기에 허리가 좀 아프고 먼지가 많이 날린다. 아무튼 우리집 진공 청소기는 연식도 오래되서 쓰기도 불편하고 집도 좁으니 당분간은 빗자루로 청소를 해야겠다.
대충 청소를 마무리 하고 청소에 썼었던 물건들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서랍에서 CD 두장을 찾았다. 한장은 뭔가 데이터 백업을 받은 듯 보이는 오래된 공CD 이고 다른 한장은 요즘은 참 보기 드문 오디오 CD 였다. 한 때 LP를 음반시장에서 밀어내고 새로운 저장 매체로서 영광의 시절을 보냈던 Compact Disc. 이젠 이 녀석도 mp3의 세상에서는 퇴물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이 오디오 CD는 놀랍게도 조지 윈스턴의 December 앨범이었다. 도대체 언제쯤 샀었던 CD 일까? 나는 밀려오는 시간의 역류 속에서 잠시 멍한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대학교 시절 그리 즐겨듣던 이 피아노 선율이 기록된 정규 앨범. 나는 CD를 플레이 해 볼 수 있는 유일한 장비인 컴퓨터에 이 CD를 넣었다. 그리고 큰 문제 없이 플레이가 되길 바랬다.
보기엔 스크래치가 좀 있었지만 다행히 CD는 잘 읽히는 듯 음악이 흘러 나왔다. 그리고 지난 몇 주동안 생각해왔던 한가지 글을 쓸 용기가 생겼다. 왜 이 오래된 CD와 나루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 연결되었는지 모르지만 자신이 없어 미루었던 그 아이에 대한 글을 쓰기로 마음 먹고 블로그에 접속을 했다.
어떤 것을 추억 한다는 것은 그 대상이 존재할 때는 그래도 아름다운 과거의 이야기꺼리이다. 하지만 그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이와는 완전히 다른 일이 된다. 나에게 나루는 그랬다. 나는 나루를 추억하는 것이 두려웠다. 너무 보고 싶을 것 같아서 그렇다는 상투적인 표현은 쓰지 않고 싶다. 그냥 나는 녀석이 그리웠다. 그리고 오늘처럼 우두커니 혼자 하루를 보내는 날이면 그 녀석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진다.
그래도 올해가 가기 전 나루를 보낼 수 있는 그리고 이 글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 좋다. 그리고 이젠 그 녀석을 보내줘야겠다.
나루를 처음 만난 건 성내천 산책길이었다. 퇴근하던 중 우연히 발견한 아주 작고 작은 토끼 한마리. 녀석은 풀을 뜯고 있었고 내가 다가가도 도망치지 않았다. 나는 그 토끼의 주인이 주변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재미삼아 사진만 찍었다. 그런데 사진을 찍고 난 후 주변을 보니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토끼를 거기에 버리고 간 것이다.
사진을 본 유진이의 성화와 그 녀석을 두고 가면 죽을 것 같다는 나의 노파심과 함께 손을 대도 도망가지 않는 토끼의 성품이 삼박자를 이루면서 나는 녀석을 가방에 넣어서 집으로 데리고 왔다.
1. 처음 나루를 만난 장소에서 찍은 사진.
2. 집에 데리고 온 후 줄게 없어서 사과껍질을 주었다. 잘 먹었다.
이 후 이 토끼는 우리집 가족이 되었다. 유진이는 이 토끼 이름을 '나루' 라고 짓자고 했고 나는 별 생각없이 동의를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꽤나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토끼를 처음 키워보는 나로서는 어찌해야할지 몰라 일단 마트에서 토끼 사료로 보이는 것을 샀는데 줬더니 제법 잘 먹었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건초도 신청하고 또 오고 가는 길에 먹을만한 풀을 뜯어서 가져다 줬는데 녀석은 잘먹고 잘싸고 잘 뛰어 댕겼다.
나루를 만나고 첫 영월 방문땐 녀석을 데리고 갔다. 그리고 우리들과 나루는 온종히 붙어 있었다. 물론 녀석은 처음엔 종이 박스로 만든 임시 우리안에 갇혔으나 엄청난 점프력으로 그것을 뛰어 넘어 나와서 돌아 다녔다. 결국 우린 녀석에세 자유를 주기로 했다. 그 결과로는 뜯어준 풀을 먹고 사료를 먹고 물을 먹고 사방에 똥을 싸면서 돌아 다닌 흔적이었으나 우리는 녀석이 자유로움을 위해 그 정도의 번거로움은 참기로 했다.
녀석은 밖으로 나와서 돌아다니기도 했고 그렇게 우리와 나루는 말 그대로 영월의 한때를 보냈다. 그 때 녀석의 사진을 좀 찍었는데 지금와 생각하면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이후로 제대로 찍은 사진이 없기 때문이다.
3. 나루 사진 중 제일 크게 나온 사진.
4. 내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나루 사진
5. 느낌이 참 좋은 사진
이후로도 나루는 우리와 한번 더 영월을 다녀왔다. 그리고 그땐 나와 나루 둘이서 며칠을 같이 붙어 있었고 나루는 나루대로 나는 나대로 시간을 보내었었다. 나는 목공과 하늘을 찍고 나루는 먹고 자고 뛰어 놀고 하면서 그곳에서의 삶을 즐겼다.
6. 나루가 지난간 자리엔 똥이 남는다.
토끼를 처음 키워보는지라 나는 토끼가 그리 활동성이 좋은 동물인지를 처음 알았다. 나루는 정말로 빠르고 활기차게 움직였다. 먹는 것도 엄청 먹었고 싸기도 많이 쌌다. 그래서 회사에 다녀오면 그 아이의 방은 온통 똥 천지였다. 나의 저녁시간는 늘 청소와 함께 시작되었는데 좋은 점은 덕분에 집이 더 깨끗해졌다.
7. 정말 활기찬 토끼, 나루.
하지만 나루와 우리와의 인연은 딱 한달 뿐이었다. 지금도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루는 11월 어느날 심하게 설사를 한 후 단 하루만에 그 삶을 놓아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참 많이 울었고 또 그렇게 그 아이를 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우린 그 아이를 영월에 묻어 주었다.
단 한달 간이었지만 많이 행복했고 많이 슬펐다. 2013년도 가을은 그렇게 나루의 추억으로 가득차버렸다. 유진이와 나는 많이 슬퍼했지만 나중에 꼭 토끼를 다시 키워보기로 했다. 그땐 좀 더 여유가 있고 좀 더 토끼에 대해 잘 알고 키우고 싶다.
정말 오래 잘 보살펴주고 싶은 아이였는데 그렇게 허무하게 떠나서 지금도 마음 한켠이 아리다. 그래도 시간이 약이라고.. 이젠 아련함과 그리움이 함께 온다.
고마웠고.. 미안하고.. 보고싶다.
오랫만에 듣는 디셈버 앨범의 'Thanks giving'은 참 부드럽게 귓가로 스친다. 그저 오늘은 이 음악이 좋다. 그것은 과거에도 그랬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또한 이 경험으로 인해 나는 이후 이 음악을 들을 때 내가 젊은 시절 가졌던 추억과 함께 한달 간 나와 함께 했던 작은 토끼 한마리를 추억하게 될 것이다.
* 나루가 가장 좋아했던 집안의 배란다로 나가는 문 틀이다. 나는 이곳에 한동안 이 노란색 국화꽃을 놓아 두었다. 원래 흰색 국화를 쓰는 것이라고 하는데 돈으로 산 꽃을 두고 싶지 않아 지인이 키우던 꽃을 조금 얻어왔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떤 이의 일기 (0) | 2014.01.31 |
---|---|
죽음이 가진 의미 (0) | 2014.01.12 |
2013년을 마무리 하며 (0) | 2013.12.31 |
명작 다시 보기 (0) | 2013.12.23 |
커뮤니케이션 - 완벽한 이해는 불가능하다 (0) | 2013.1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