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오늘 그 삶을 마감한다. 어떤 이들은 그 사람의 죽음이 왜 발생했는지를 궁금해 할 것이고, 죽은 이의 가족은 슬픔에 겨워 눈물을 흘리고 떠난 사람을 위한 준비를 할 것이며, 또 어떤 사람들은 죽음을 경험하고 있는 그 누군가의 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장례식장을 찾는다.
인간에게 있어서 삶과 죽음은 도저히 같은 방향에 설 수 없는 극단적 상태이다. 삶이란 어떤 상황에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에 관계없이 우리가 호흡을 하고 음식을 섭취하여 발생시킨 에너지를 이용해 피를 온 몸에 공급해 우리의 몸이 썩지 않게 하는 것이고 죽음이란 호흡이 멈추고 섭생이 멈추며 그로 인해 피는 흐르지를 못하고 몸은 썩어가는 것을 말한다.
생명의 원천인 피가 돌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몸이 썩는 것만이 아닌 우리가 존재를 인식하는 유일한 장소인 우리의 뇌가 더이상 활동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로 인해 사고가 멈춰진, 우리는 그것을 죽음이라고 칭한다.
결국 죽음은 우리의 사고가 멈추고 우리의 몸이 썩어들어가는 것을 말하며 발전된 과학 기술은 우리의 몸이 썩지 않게끔 처리를 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활동이 멈춘 뇌는 더이상 사고를 해 낼 수는 없다.
이런 죽음에 대한 생물학적 변화 말고도 죽음은 주변 사람과의 관계에서 커다란 진동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살아 생전 그 존재가 맺은 관계의 다양성과 깊이에 따라 진동의 폭은 크게 다르며 많은 사람들은 그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위해 그 진동이 폭이 크길 원한다. 즉 자신의 부재가 단순히 어느날 사라진 개미의 존재와는 다른 뭔가 많은 이야기꺼리를 만들어 내길 원하는 것이다.
우린 죽음 앞에서 크게 울고 슬퍼하며 죽은 이의 아픔을 공감하고 남은 자의 슬픔을 이야기 하지만 정작 죽은자 그 당사자는 그 어떤 고통을 느낄 수 없으며, 거기엔 유일하게 남겨진 자의 슬픔만이 떠돌고 있다. 그것도 살아 생전에 얼마나 죽은이와 현실적으로 얽혔냐에 따라서 그 슬픔이 결정되는데 떠난 자가 한 가정이 경제 생활을 책임지고 있던 나이라면 남겨진 자의 서러움은 누구보다도 클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우린 예의상 죽은자에 대해 슬퍼한다. 그렇지만 숨겨진 진정한 고통은 남은 자의 슬픔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만약 죽은 자가 살아 생전에 모든 인연을 끊을 수 있었다면 그야말로 최고의 죽음이 될 수 있다. 그로 인해 그가 떠남을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 삶이야 말고 최고의 가치 있는 죽음이 되는 것이다. 왜 남은 자들에게 슬픔을 안겨주고 떠나야 하는가? 모든 것을 잃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그리 이기적이고 싶은가?
누구나 삶을 마감하고 떠날 때가 되면 욕심이 사라지고 그 덕분에 그 존재의 성향이 바뀐다. 가끔은 그래서 착해지는 사람이 있고 또한 결과론적으로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떠날 때가 되었다고 느끼기도 한다. 실제로 우리를 살아 생전에 그리 욕심이 많고 처절하게 했던 그 모든 욕망은 죽음과 함께 묻혀 버린다.
그렇다면 인연이란 무엇인가? 살아 생전에 그리 원하고 가지고 유지하고 하던 인연과 그것을 표현하는 관계성이란 단어. 우리는 홀로 살 수 없기, 혼자 살아가기엔 너무 힘들고 외롭기에 어떤 식으로든 인연을 만들고 그것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지만 정작 그 인연은 그 자신의 부재로 인해 발생된 진득한 슬픔을 그들에게 남겨주고 떠나게 된다. 결국 우린 이런 한계를 지닌.. 떠날 때를 모르는 한계를 가진 인간이기 때문인가?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자의 뒷모습이 아름답다'는 말은 그야말로 대단한 역설이다. 왜냐하면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자는 거의 없으며 대부분은 떠나야 하기 때문에 떠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린 그것을 떠날 때를 알고 떠난다고 믿고 싶어 한다. 그래야 남은 자들의 마음속에 어떤 아쉬움이나 앙금이 남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과 같은 고통 속에서 끊어지지 않은 질긴 생명으로 인해 영원할 것 같은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에게 죽음이라는 살인행위를 한 어떤 사람의 이야기에서 우린 그 환자들이 평소에 했던 '죽고 싶다' 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죽고자 했으나 정작 그에게 최후의 안식을 준 사람은 살인자로서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은 바로 그 누구도 떠날 때는 알지만 떠나기는 힘들 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가끔은 진심으로 떠나고 싶은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언제 죽어도 좋으나 언제 죽는지는 모르고 살았으면 한다고. 죽는 그 순간의 고통만 느낄 수 없다면 언제든 찾아 올 죽음이 그리 두렵지 않다고.
죽음이란 어떤 두려움일까? 존재의 부재? 행복한 것으로부터 이별? 소중한 사람과의 단절? 그 모든 것이 아닌 우리 유전자에 새겨진 생명의 부재에 따른 본능적 두려움?
어쩌면 우리는 그 자신의 죽음과 우리가 알고 있는 이들의 죽음에 대해 너무도 심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내부에 새겨진 죽음에 대한 공포가 우리를 그런 착각에 빠지게 했는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죽음은 생각보다 그리 어렵거나 어두운 면이 아닐 수 있다.
죽음이란 단순히 삶이 없는 상태이고 더 쉽게 확장하면 우린 매일 잠을 자면서 죽음을 경험한다. 실제로 잠을 자다가 죽는 이가 있다면 그는 죽음을 경험하지 못하고 죽는다. 영원히 자는 이와 죽은 이의 차이가 무엇일까?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관계를 제외하면 그 둘의 진정한 의미에서 차이는 단 하나이다. 영원히 자는 이에겐 늘 끊임없이 강제로 에너지를 주입시키고 그 결과물을 처리해줘야 하며 그로 인해 많은 비용이 소모되지만 몸이 썩는 사태는 막을 수 있고 반대로 죽은 이는 태어나 묻어서 그 몸을 자연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것이다.
우린 죽음의 반대인 삶의 과정에서 많은 일을 겪고 살아가며 그것에 대한 유일한 기록으로서 자신의 기억에 저장을 한다. 모두 같은 사건을 겪고 비슷한 생각을 하더라도 이 기록의 유일성은 온전히 보존이 된다. 그래서 죽음은 어떤 의미에서 유일한 기록의 부재가 된다. 미래에 어떤 기술이 나와 우리의 뇌정보를 온전히 기록해 놓는 장치가 나타나지 않는 한 이 기록의 부재는 한동안 지속될 것이고 설령 그런 장치가 나오더라도 이것은 우리에겐 판도라의 상자가 될 것이다.
우리는 다른 이의 생각을 읽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 기가 막힐 정도의 이기심에 마음을 닫아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린 정말로 정제된 채 나오는 말과 몸짓 정도에서만 상대를 알아야 한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우리에겐 커다란 충격을 주기도 하는데 만약 그 생각이 바로 전달되어 온다면 우린 정말로 인간 혐오증에 걸린 존재가 되어 버릴 것이다.
개개인의 기억은 기록이 되거나 죽음과 함께 종말을 맞는다. 모두가 다르게 적힌 기억들은 각자의 입력과 기억 방식에 의해 다르게 적힐 것이고 죽음을 둘러싼 주변 인들에게는 다른 감정으로 작용 할 것이다. 이것은 절대 공유되거나 완전한 공감이 될 수 없는 것이며 이로서 우린 존재론적 유일성을 보장 받는다.
살아 생전의 삶조차 버거워 살아가는 존재들은 죽음 후 자신에게 부여될 기억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도대체 이런 것들은 버리고 산다는 것이 불가능 한 일일까?
어쩌면 죽음에 대한 이런 어리석은 생각들의 총합이야 말로 죽음에 대한 대책없는 미련인지도 모르겠다. 그야말로 죽음은 그저 숨을 멈추는 행위일 뿐이지, 더이상 뭔가 찾으려 하는 행위 자체가 자기 기만일 것이다.
너무도 다른 인간들에게 유일한 평등함.. 현재까지 그것은 죽음 밖에 없다. 우린 태어남 조차도 경쟁의 산물이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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