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인식을 생각해본다

아이루다 2013. 2. 24. 09:42

 

며칠전부터 머리속에서 인식에 대한 생각이 떠날질 않고 있다. 아마도 명상을 하시 시작하면서 인식에 대한 생각을 더 하게 된 것 같은데 요즘은 그 생각이 좀 더 발전해서 인식이란 행위자체가 어떻게 우리 인간에게 영향을 미칠까 하는 것에 대해 좀 더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인식이란 단어를 그냥 그대로 해석하면 뭔가를 알아내는 것일 것이다. 예를 들면 자동차를 인식한다든가, 친구의 얼굴을 인식한다든가 하는 행위가 바로 어떤 대상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두뇌속의 데이터베이스를 뒤져서 그 정체를 파악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해 볼 수 있다.

 

이렇듯 인식은 내가 사는 세상을 내 머리속으로 옮겨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경험이 부족해 세상의 것들에 대한 지식 수준이 낮은 아이들은 성인들과 아주 다른 인식을 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재밌기도 하지만. 특히 걷지도 못하는 1살 수준의 아이들의 인식력은 겨우 부모나 알아볼 지경이다.

 

인식은 크게 두개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 구분의 기준은 바로 나 자신이 된다. 즉 나를 기준으로 삼아 나의 외부에서 일어나는 알아차림을 외적인식이라고 하고 반대로 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종류의 생각의 흐름을 일컬어서 내적인식이라고 표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이제 이 두개의 인식에 대해 천천히 알아가보도록 하자.

 

외적요소에 해당하는 인식의 능력은 그것을 통해 나는 세상과 나를 연결하는 도구로서 사용이 된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내가 세상을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데 실제로 우리의 삶을 좀 더 잘살게 해주거나 못살게 해주는 중요 요소로도 작용한다. 반대로 내적요소는 나 자신의 삶과 연관이 깊다.

 

우리가 머리가 좋다는 표현을 쓸때 그것이 단순하게 수학공식을 하나 더외우고 어려운 문제를 풀어내는 능력을 말하는 수도 있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돈을 많이 버는 능력으로 따지면 이 인식능력이 훨씬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즉 인식능력이 뛰어난 머리를 가진 사람이 수학문제를 잘 푸는 사람보다 세상을 더 잘 살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란 뜻이 된다. (이런 경험은 대다수 사람들이 해봤을 것이다)

 

외적인식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과 변화들의 중요한 포인트를 잘 집어낸다. 이것이 바로 정보 해석력인데 쉽게 말해서 경제 연구소에서 일하면서 미국에서 일어난 갖가지 경제적 사건들이 국제적인 경제흐름에 어떤 영향을 미칠것인지에 대한 분석하는 사람들이라면 보통 일반인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기반으로 더 정확하고 빠른 판단을 할 수 있으리란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아픈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병을 남들보다 쉽게 더 유추하는 의사들의 능력과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래서 우린 먹고 살기 위해, 이 외적 인식능력을 극대화 시키기 위해 평생 노력한다. 그것이 바로 지식 쌓기이다. 이것은 책이나 자료를 통해서만 얻는게 아니고 육체적인 능력도 마찬가지다. 결국 빠르고 정확한 인식능력은 개개인의 능력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결과가 일어나고 이로 인해 개개인이 얻는 소득의 수준이 차이가 나게 된다. 하지만 물론 세상은 이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부족한 인식능력이라도 부모만 잘타고 태어나도 충분히 돈 많이 벌고 살아간다.

 

두번째 내적 인식능력을 말할 차례이다. 그리고 실제로 오늘 글은 이 내적 인식능력을 말하려고 쓰기 시작했다. 인식의 외적요소가 나의 물질적 세계를 관장한다면 반대로 이 내적요소는 내 정신적 세계를 관장한다고 단순화 시켜볼 수 있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보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이 내적 인식능력을 가진 사람은 매우 드물다고도 표현할 수 있다. 왜냐면 이 내적 인식능력은 외적인 능력과 다르게 나를 물질적으로 더 잘살게 해주거나 하는 능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에 무시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무시되고 있는 내적 인식능력은 과연 어떤 것일까?

 

매우 추운 겨울날 사람들이 버스 정류장에 모여서 자신이 기다리는 버스를 발을 동동 구르면서 기다리고 있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어떤 이들은 버스가 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하염없이 바라보고, 어떤 이들은 스마트 폰에 나오는 버스 도착 예정시간을 바라보고, 어떤 이들은 관련없이 그냥 스마트 폰속의 뉴스기사를 보고, 어떤 이들은 같이 나온 지인과 대화를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이 순간, 사람들의 내적 인식을 생각해보자. 누구나 버스를 기다린다. 그런데 그들 중 누군가는 내가 왜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할까? 웃기는 소리같지만 개개인 모두 어떤 이유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출근을 위해, 약속장소를 가기위해, 심지어 버스를 타보고 싶어서까지.

 

그렇다면 여기에서 더 생각이 나아간다. 내가 출근을 위해 버스를 기다린다면, 나는 왜 출근을 하는지로 발전한다. 출근을 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니 나는 내가 쓸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그다음 나타나는 생각은 바로 왜 돈을 벌어야 하는가란 생각이다.

 

보통 여기까지만 와도 대단한 내적인식의 발전이다. 대부분은 그냥 내가 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가도 시작하지 못하고 끝난다.

 

하지만 생각한 김에 더 가보자. 왜 돈을 벌어야 하는가? 당연히 돈이 있어야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먹을 것을 얻고, 잘 곳을 만들 수 있다. 또한 이런 추운날 입을 옷도 사야 한다. 그리고 가끔 누군가도 만나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야 하고 내가 사고픈 고급 백이나 멋진 차, 전자기기를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

 

여기에서 물론 의식주에 관한 기초적인 부분은 어쩔 수 없다고 쳐도 나머지 소비에 대한 돈은 왜 필요한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해본다. 생각해보니 내가 그런것들을 함으로서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럼 결국 여기까지만 정리해보면 내가 추운날 이렇게 발을 둥둥 구르면서 이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 이유는 다름아닌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여기에서 좀 더 나가보자. 왜 난 누군가를 만나야 하고, 내가 사고픈 어떤 제품들을 사고자 할까? 그것들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기 때문에?

 

일단 그렇다고 하자. 나는 그것들로 인해 행복하다. 그렇다면 그것들을 통해 얻을 행복을 위해 이 추운날 아침에 이곳에서 덜덜떨고 있는 것을 스스로 납득하고 있는 것인가?

 

당연히 대부분 그렇다. 이정도 추위쯤은 미래의 내가 받을 금전적 보상을 생각하면 그다지 어렵지 않게 극복할 것이고 또한 내 인내력으로 충분히 견뎌낼 수 있다 라는 생각도 들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까지 연결되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자 원래대로 돌아가보자. '내가 추운날 덜덜 떨면서 한없이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라는 내적 인식 전 상태에서 인식과정을 통해 '이 상황과 내가 이 추운날 미래의 내가 무척 행복해 하는 것들을 하기 위해 오늘 이곳에서 약간이 고통을 참아내고 있다' 라는 다른 생각으로 바뀔 수 있었다. 즉 동일한 상황에 대한 두가지 다른 인식버전이 있다는 뜻이 된다.

 

그냥 버스를 기다리는 것은 실제로 거의 인식이 없는 것이다. 오직 여기엔 외적인 인식만 존재해서 버스와 나와 관련된, 그리고 나와 같은 버스를 탈 경쟁자들에 대한 인식만 존재한다. 하지만 내가 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지를 생각하다보면 내가 버스를 기다려야 할 확실한 이유가 있고 그로 인해 내가 이 버스를 꼭 타야하기에 난 기다려야 한다는 내적인 인식이 있다.

 

두가지가 무슨 차이냐고? 그럼 더 크게 만들어보자.

 

이 버스를 인생으로 바꿔보자. 누군가는 태어났기에 죽을때까지 산다. 그러니까 버스를 타야하기에 버스를 기다린다. 다른 누군가는 내가 왜 살아야하는지 생각하고 고민한다. 그리고 어떤 것이든간에 그 스스로만의 이유를 찾아서 살아간다. 같은 살아감이지만 둘의 삶은 너무도 다른다.

 

그냥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과 버스를 기다려야할 확실한 이유가 있는 사람의 삶은 다르다. 그냥 삶을 살아가는 사람과 살아가는 이유가 확실하게 있는 사람과는 살아가는 모습은 정말 천지차이가 난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냥 버스를 기다린다. 태어나지고, 자라지고, 학교에 가고,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애를 낳고, 늙고, 죽는다. 여기에서 단 한번도 내적 인식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들이 대다수이다. 내가 왜 태어났고, 왜 부모로 부터 키움을 받았으며, 왜 학교에 갔고, 왜 취직을 했고, 왜 결혼을 했으며, 왜 애를 낳고, 왜 늙고, 왜 죽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아주 가끔 짧게 우연히 생각하기도 한다. 책의 제목을 보다가, 영화를 보다가, 산다는 것이 너무 괴롭다는 생각을 하다가, 왜 난 좋은 회사에 취직하지 못할까 생각하다가, 왜 나는 나의 영혼의 짝을 찾지 못할까 생각하다가 그런 생각을 짧게 한다. 하지만 대부분 그냥 스쳐지나갈 뿐이다.

 

버스를 타야 한다고 생각하면 버스가 오면 탄다. 그리고 빈자리가 있으면 앉는다. 경쟁자가 많으면 빠르게 이동해서 앉는다. 혹은 뒷문으로 빠르게 타 앞만으로 타는 이들보다 더 빠르게 안쪽의 빈자리로 이동한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의 인식수준이다.

 

나와 나를 둘러싼 세상. 여기엔 오직 외적인식만 존재한다. 실체적인 버스, 실체적인 사람들, 실체적인 나만이 존재하는 세상인 것이다.

 

나는 왜 버스를 타야 하고, 나는 왜 자리에 앉아야 하며, 나는 왜 뒷문으로 타서 남들보다 더 빠르게 안쪽으로 이동하는 행동을 할까에 대한 인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왜 살아가야 하며, 나는 왜 그 회사에 취직해야 하며, 나는 왜 돈을 벌어야 하며, 나는 왜 나의 성공을 위해 작은 반칙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인식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타고났으니 타고 난대로 생각 나는대로 살아간다. 거기엔 내적인 자기인식이란 존재하지 않는 단어가 되어 버린다. 도대체 왜 하는지 모르고 그저 살아갈 뿐이다.

 

왜 그런 내적 인식을 해야하는지 모르겠다면 이런 생각을 해보자. 외적인 인식 영역이 실제로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있는지 말이다. 돈을 100억을 누가 줬다고 치자. 그 돈 자체가 당신에게 어떤 행복을 주는가? 무인도에 있다면 이 돈은 그냥 땔감이 될뿐이고 무인도가 아니라고 해도 내가 뭔가 하고픈 것이 없다면 이 돈은 그냥 쓰레기가 될 뿐이다.

 

모든 물질적인 요소에 해당되는 외적 인식영역은 결국엔 내적 인식영역에 예속된다. 우리가 삶을 행복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믿는다면 그 행복은 모두 내적에서 정의되기 때문이다. 결국엔 외적 인식영역은 내적 인식영역을 위한 보조역할만 할 수 있을뿐 그 자체가 주도적인 영향을 미치진 못한다. 내가  좋은 직업과 좋은 집에서 살거나 하는 것이 나를 행복하게 못해준다면 그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내 행복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것은 그래서 당연히 내적 인식영역이다. 파란 가을하늘이 예쁘다고 느끼는 것이나 밤하늘에 가득찬 별을 보고 행복을 느끼는 것은 내적 영역에서 주는 행복이다. 똑같은 환경에서 동일한 행동을 할때 느끼는 행복은 천자만별이다. 그것이 바로 내적 인신능력의 차이에서 오는 결과인 셈이다.

 

행복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내적 인식능력을 키워라. 내가 왜 사는지, 내가 왜 이것을 원하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라. 그렇다면 생각보다 내가 원하는 것들이 별로 쓸데없는 경우가 참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정말로 그렇다. 정말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은 참 적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래서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그것들 하나 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 마음 깊이 느끼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내적 인식이 없는 삶은 모든 것이 당연히 놓여진 것이고 나는 그냥 시간의 흐름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로 결국 죽음까지 단 한번의 방향전환 없이 살아가다 죽고만다. 뭐 그것도 인생의 한 모습이니 거기에 대다수가 그렇게 살아가니.. 틀린 삶이라고 말할 자격이 나에겐 없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하고 느끼면 자신의 삶이 훨씬 감동적이고 아름답고 감사할 수 있어서 더 행복할 수 있는데 아쉽다는 생각은 많이 든다. 물론 나 역시 이 내적 인식을 조금씩 더 발전시켜가는 불안정한 존재임을 충분히 자각하고 있기에 이것을 쉽다고 말하진 않겠다. 하지만 해보는 것 자체도 시도하지 못하는 99%의 사람들이 답답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