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의 사랑을 받는 사람과 만인을 사랑하는 사람 중 누가 더 행복할까? 오래된 질문이지만 누구도 이런 양 극단의 경험을 해보지 못했기에 쉽게 결론을 내지는 못할 것 같다. 그러면 신뢰할 수는 없지만 나만의 방법으로 간접적으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살펴보겠다.
만인의 사랑을 받지는 못하지만 꽤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얻거나 혹은 사랑까지 얻는 직종의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바로 연예인이다. 그들은 원래 직업적으로 호감을 통해서 살아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즉 인기가 많아야 살아가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다.
아마도 전체 연예인에서 우리가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의 비율은 10% 남짓 될 것이다. 그리고 보통 그 나머지는 얼굴정도만 기억하거나 혹은 매우 소수의 사람들만 그 존재를 아는 이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 10% 연예계에서 발생하는 매출의 90%이상을 가지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뭐 가난하게 사는 90%의 사람들은 그냥 일단 무시하고 우리가 소위 잘산다는 기준으로 봤을때 매우 합당한 입장인 소위 잘나가는 연예인을 기준으로 보자. 그러니까 베스트만 추려보자는 뜻이다.
그들중 행복한 이는 물론 많아보인다. 하지만 반대로 그리 행복해보지 않는 이도 꽤 있어보인다. 심지어 연예인 자살을 매년 행사처럼 일어난다. 그리고 그들 중 소수는 매우 큰 인기를 얻었던 재벌 수준의 돈을 번 사람들도 있다.
그런 예를 통해 봤을때 만인의 사랑을 받는 이가 꼭 행복하는 것은 아닌듯 싶다. 그렇다면 반대로 만인을 사랑하는 사람의 삶을 보자.
실제로 이런 사람은 찾기가 매우 힘든데 그냥 주변에서 남들과 크게 다투지 않고 인자한 모습을 살아가는 이웃을 떠올려보자. 한명도 없다면.. 이 글을 읽는 분의 인생이 좀 안타까움이 있다. 이런 분들은 흔한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찾기 힘들만큼 어렵지도 않다.
주변사람들과 잘 지내고, 돈의 힘에 크게 눌려 살지 않으며 베풀줄 알고 넉넉한 삶을 영위하는 분들이 있다. 늘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웃음이 언제나 함께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
그냥 봐도 행복해 보인다. 이래저래 따질 필요도 없이.
결국 내 식대로 결론을 내면 사랑을 하는 것이 사랑을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어느정도 근거도 있다고 나는 주장해본다.
여기에서 매우 긍정적인 신호가 하나 오는데, 만인의 사랑을 받기란 정말 힘들다.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얻으려고 해도 사람들이 그렇게 마음을 쉽게 열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만인을 사랑하는 것은 내 의지가 작용할 수 있다. 즉 내가 열심히 노력을 하면 달성할 수 있는 목표가 된다.
결론은 꼭 두가지 중 하나를 하고 싶다면 사랑을 하는 것이 사랑을 받는 것보다 이루기 쉽고 또 더 행복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평소 우리 삶을 잘 살펴보자. 우린 주로 사랑받기 위해 행동한다. 즉 우리는 타인들의 호감을 얻어서 그로 인한 이득을 얻고자 늘 노력하는 형태의 삶을 사는데 너무 익숙해져 있다. 어려서부터 경쟁적인 삶을 교육받고 또 느끼고 자란 우리들에게 남을 사랑하는 것은 매우 한정적인 범위에서만 허용되었다. 정말 커져야 친족 범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범위가 좁은 이들은 자기 자신 이외에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극대화된 이기주의적 사람이 된 경우도 많다. 실제로 이건 매우 불행한 사건이다. 여기에서 조금 더 진행되어봐야 가족 정도가 된다. 즉 자신의 아내, 남편, 아이들 수준에서 끝나는 것이 대부분 일반 사람들의 삶이다.
하지만 확장이 되어 내가 아는 이들까지 사랑의 범위가 넓어진다면 그 사람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지금까지 살펴왔듯 당연히 더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은 진리다.
그렇지만 이렇게 확장되기 위해서는 자기 손해가 따를 수 있다. 왜냐면 누군가를 사랑하고 배려한다는 것은 내가 기존에 취했던 나에게 호감을 갖게 해 나의 이득을 극대화 시키는 행동의 완전한 반대가 되기 때문이다. 즉 내가 남을 사랑하는 것은 내 손해를 불러일으키는 행위가 될 수 있다.
물론 이런 부분은 내가 여유가 어느정도 되면 극복할 수 있는 여지도 있다. 돈이 그리 부족하지 않다면 좀 손해보면서 살면 어떤가?
실제 문제는 이제부터 일어난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했다고 치자. 그런데 그 사람이 나의 호감을 이용해 자기의 이득을 극대화 하려고 나를 이용만 해먹을 때 우린 정말 힘든 경험을 하게 된다. 즉 내가 아무리 선의를 가지고 대해도 상대는 나를 오직 득실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내 잘못이 아닌데도 나는 어쩔수 없이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을 접어야 한다.
그리고 어쩌면 우린 어린시절부터 이런 사람들로부터 받은 기억나지도 않는 경험들이 쌓여서 각자 마음의 벽을 점점 두텁게 쌓고 있는지 모른다. 결국 내가 세상을 잘 모르던 시절 베푼 선의가 나에게 칼날이 되어서 돌아온 경험을 몇차례 한 후 나는 나도 모르게 나 역시 타인들에게 칼날을 겨누고 있는것이란 말이다.
이점이 보통의 사람인 우리가 만인을 사랑할 수 없은 이유를 만들어 준다. 누군가를 사랑하고픈데 도대체 상처를 입을것 같은 걱정이 되어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의 문을 꼭꼭 걸어잠구고 나와 조금 확장된 가족을 중심으로 살아가려 애쓴다. 그럼으로서 우린 우리가 훨씬 더 많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을 포기하고 살아가게 된다.
과거에 만인에 대한 사랑을 이루어냈다고 해서 유명해진 분들이 있다. 바로 부처와 예수다. 그분들은 모두 자비와 사랑이라는 단어는 다르지만 결국엔 타인의 존재에 대한 사랑을 통해 세상으로부터 어떤 탈출구를 말했던 사람들이다.
어쩌면 그분들이 진정한 사랑에 대한(행복에 대한) 진리를 깨달았는지도 모르겠다. 정말로 그렇게 누구나를 사랑할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하지 않을까? 아무런 걱정도 아무런 증오도 없이 누구나에게 그 선의를 들어내어 미소지을 수 있다면 말이다.
나는 이 진리에 대해 꽤 오래전부터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하지만 글에 썼듯 나의 선의가 타인에게 이용당하는 순간 나는 거기에서 멈춰버리길 반복했다. 분명히 세상 사람들 모두를 사랑할 수 있어야 내가 행복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건 나에겐 매우 불행한 일이다.
그래도 요즘 작은 가능성은 찾았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나의 마음이다. 어쩌면 측은지심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마음이 부처의 자비가 되고 예수가 말한 사랑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속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유일한 진리라고 믿어지는 나의 이득과 생존이란 벽에 갖혀 그 평생을 스스로를 갈아먹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진심어린 동정심.
만약 이것이 진정한 깨달음으로 다가온다면 정말 누구나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마치 그건 닭장속에 갖혀 살아가는 닭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다름이 없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결국 부처나 예수도 이런 종류의 깨달음을 얻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결국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래서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가 그 누구에게 적대적일 필요가 있겠는가?
물론 다른 한편으로는 내 자신이 매우 우숩기도 하다. 무슨 근거로 이런 생각을 한단 말인가. 지금도 나는 매우 서툴다. 부족하고 어리석다. 그래서 나는 더 나가야 한다. 이런 삶이 지속되어 적어도 내가 품을 수 있는 사람의 수가 늘어나면 늘어날 수록 나의 행복은 더 커질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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