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진지함에 대하여

아이루다 2012. 10. 2. 08:45

 

이번 추석 연휴는 운좋게도 5일 동안을 쉬게 되었다. 아마 나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직장생활하는 사람들 중 꽤 많은 이들이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렇지 못한 이들도 꽤 될것이라고 생각한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고 여친과 함께 '반지의 제왕' 3부작을 보기 시작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인데 그녀가 보지 않았다고 해서 다시 보기로 했다. 1080dpi로 인코딩 된 8기가 짜리 파일 세개였다. 영화 한편 한편이 워낙 길어서 세편을 다보는데 10시간 이상이 걸린듯 하다. 그리고 당연히 영화는 너무 재미있었다. 개인적인 견해지만 나는 이 영화가 내가 본 영화 중 제일 잘 만든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가 끝날 무렵 왕위에 오른 아르곤이 천천히 거닐며 자신과 함께 한 이들에게 인사를 하는 장면이 있다. 드워프족인 김리, 엘프족인 레골라스 그리고 네명의 호빗인들.

 

아르곤은 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네명의 호빗에게 '당신들이야 말로 우리의 인사를 받아야 할 분들입니다' 라고 말하며 고개를 숙인다. 그러자 그 광장에 있던 모든 이들이 같이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내 눈에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맺혔다. 그리고 여친은 아예 펑펑 울었다. 모르겠다.. 이 장면이 왜 그리 감동을 주는지.

 

영화가 끝나고 내가 여친에게 물었다. 재미있게 봤냐고.. 그리고 재미있게 봤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또 물었다. 왜 극장에서 보지 않았냐고.. 그러자 1편을 보고 너무 유치해서 안봤다고 했다. 지금보다 10년 이상 어린 그녀가 이 영화를 보고 유치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물론 유치할 수 있다. 그들이 말하는 것, 표현하는 것, 생각하는 것 마법과 오크, 고블린이 나오는 시대의 이야기. 너무나 평면적으로 나쁜 '사우론' 과 '절대반지' 라고 일컬어지는 반지 하나를 쥐고 죽음의 공간을 향해 나가는 두명의 호빗 이야기는 충분히 유치할만 하다. 그런데 왜 지금 이시점에 이 영화를 보고 눈물이 날까.. 더 나이가 많아지고 더 성숙했는데.. 그렇다면 지금 이 영화를 보면 더 유치해졌어야 하는데 말이다.

 

한참을 생각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들의 진지함에 대해 감동을 한 것이구나.. 그리고 그 진지함은 진심과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작품은 영화고 내용도 픽션이다. 진실할리가 없다. 하지만 영화속 그들은 그 순간에는 진지했고 진실했다. 적어도 나와 여자친구는 공감했다.

 

진지한 진실함은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많은 감동적인 영화들이 바로 그렇다. 코믹영화라고 해도 작은 아주 작은 소망들이 이루어지는 것들이 감동을 줄 수 있다. 그것이 정말 누군가에는 너무도 유치할지도 모르지만 어떤 이들이게는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가치가 될 수 있는 것을 생각해봤다.

 

이 생각은 점점 깊어지면서 결국 내가 세상에 어떤 것에 대해 실망을 하고 있는지 인식하게 되었다. 나는 사람들의 감정을 부정한다. 사랑, 우정, 명예, 용기, 약속 등과 같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가치들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그리고 이런 나의 태도에 대해 사람들은 너무 까칠하다느니 혹은 부정적이라는 말을 한다. 그런데 더 깊게 생각해보니 나는 실제로 그 가치에 대해 끝없는 꿈을 꾸고 있다. 남들은 이미 포기한 것들을 나는 붙잡고 있는 것이다.

 

살아가다 보면 살기 위해 혹은 남들보다 더 잘 살기 위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우린 약속이나 맹세 같은 것들을 너무나 쉽게 버릴 것을 인정받는다. 자신의 지인과 친척들을 모두 모아서 같이 살기로 한 결혼식을 한 부부도 결혼식은 그냥 거쳐가야 할 과정일 뿐 거기에서 하는 맹세와 약속은 헌신짝처럼 버려진다.


부부간의 약속이 이럴진데 타인들과의 약속은 어찌 지켜질까? 우리에게 약속이란 몇시에 누구를 어디서 만날지를 지키는 것 정도로만 인식된다. 딱히 입밖으로 꺼내서 그 명확한 것을 정하지 않은 것들은 자신의 상황에 따라 너무도 쉽게 입장을 바꾼다.

 

좋은 친구과의 만남도 자신의 상황에 따라 자신의 가족의 계획에 따라 쉼없이 변경되며 나와 나의 가정이외의 모든 일은 상황이 허용하는 한 지켜야할 약속이 된다. 친구조차 그러할 진데 직장동료나 혹은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들과의 약속은 어찌될 것인가. 그들은 그냥 같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을 뿐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들이 된다. 그리고 결국 우린 외로움을 느끼고 가치없음에 대한 가치를 증명받고자 노력한다.

 

그렇게 지키려 했던 나의 가치를 가정의 가치를 끊임없이 재확인하고 자신의 영향력이 있음을 온라인상에서 오프라인 상에서 증명받고자 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가치있다고 믿으며 살아가려 한다.


하지만 힘들다. 자신도 모르게 회의적으로 변하고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과연 제대로 된 삶인지 궁금해하고 그래서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또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쉼 없이 이야기하면서 위로를 한다. 하지만 변하는 것은 없다.

 

진지함의 가치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그것을 두려워 한다. 어느날 우연히 거울 속 나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며 새로 생긴 주름과 흰머리에서 자신이 나이 먹었을음 아는 것이 두렵듯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마주하는 것이 두렵다. 그래서 밝음을 찾는다. 재미를 찾고 즐거움것만 보려고 한다.


영화는 코믹과 멜로물과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야기들이 가득하고 TV 엔 쇼프로들이 가득가득하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보고 웃고 즐거워한다. 마치 그것이 멈추면 안될 것 같다는 절박함 심정으로 이제는 쉬는 시간이 오면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에 접하며 게임을 한다.

 

완벽한 세상이 되었다. 아침에 눈을 떠 잠에 드는 순간까지 단 한번도 진지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생각할 필요도 없고 자신에 대해 진지하고 진실해질 필요도 없다. 스스로 만들어낸 허상속을 계속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어느날 우연히 찍은 잘나온 셀카를 보고 나는 이렇게나 이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초췌하게 푸석푸서한 얼굴을 가진 거울 속 나는 잠시 내가 흩트러진 상태라고 믿는다. 그리고 화려한 메이크 업과 옷을 입고 자신의 변화를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라고 상상한다.

 

친구들과의 대화에서도 진지함은 외면받는다. 웃겨야 산다. 누군가를 욕하고 웃기고 황당한 소리를 하면서 친구속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인정받는다. 쉼없이 날라오는 카톡 메시시는 내가 살아 있음을 인정받은 수단이며 내가 생각할 시간과 진지해질 필요가 없는 방법을 제시해준다.

 

약속, 맹세, 용기 등과 같은 살아가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은 상황에 따라 언제든 저버릴 수 있다. 심지어 친구나 가족도 상황에 따라 버릴 수 있으며 나를 살리기 위해서는 그 모든 것도 포기 가능한 사람들도 있다. 조금 더 나아져봐야 가족 수준으로 확장 될 뿐이다.


나의 가족을 제외한 그 모든 사람들은 나에겐 언제든 적이 될 수 있으며 또한 언제든 등을 돌릴 사람들이다. 물론 선하고 좋은 사람들은 그 경제적 수준이 유지될 때 계속 유지는 가능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며 살아간다.


경제적 몰락은 단순히 내 삶의 힘듬만을 의미 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나의 관계성의 단절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나를 완전히 파괴시켜 버릴 수 있다. 그만큼 그 가치들을 의심없이 품었기 때문에 더 그렇다.

 

스스로 절대 인간임을 판단하면서도 인간을 정말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가치들은 상황이 될때만 지킨다. 내 경제력이 되고 내 이득에 방해가 되지 않을때만 그 가치들은 살아 있다. 그리고 그렇지 못할 때 우린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그것들을 버린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그 가치가 있었던 것이 맞았을까?

 

반지의 제왕을 보고 유치함을 느낀 20대의 그녀가 30대가 되어 다시본 후 느낀 감동을 어떻게 생각할까? 나이가 들어 더 철딱서니가 없어졌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세상을 좀 더 살아보고 이해해보니 우리가 정말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들이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해볼까.

 

생물학자에게 다윈과 DNA 이중나선은 일반인에게 주는 감동과 비할바가 아니다. 물리학자에게 상대성이론과 최근 발견된 힉스입자의 존재에서 느껴지는 감동과 일반인의 그것은 다를바가 아니다.


수학자에게 오래되었지만 증명하지 못한 어떤 공식에 대한 새로운 증명이나 화성에 오퍼튜니티를 보낸 나사의 기술진에게 화성 창륙의 순간은 누가 이해할 수 있는 감동이 아니다. 수십년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 그 모든 이들이 이루어 놓은 모든 것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 누구도 자신의 분야가 아니고 자신이 잘 모르는 곳에서는 감동을 느낄 수 없다. 삶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생각해본 사람만이 진정한 인간의 가치에 감동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누구도 그렇게 살아가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재미가 없는 세상이다. 그리고 머리가 복잡하고 확실하게 덜 행복한 세상이다.

 

누가 빅뱅에 나오는 네명의 인간들이 나누는 대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겐 그들은 서투른 세상살이와 끊임없이 들이대는 물리학 이론의 오용을 웃어넘기기에 바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