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의 폭력

선의의 폭력 - 1

아이루다 2018. 3. 23. 08:00

 

#상처의 기억 NO.1#

 

"아마도 그때가 처음인 것 같아요."

A씨가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계속 얘기해봐요."

"그때는 그 감정의 정체를 정확히 몰랐어요. 그냥 좀 기분이 좋지 않다고만 느꼈거든요. .. 뭐라고 할까? 좀 억울하다고 할까요? 어쩌면 겁이 난 것인지도 몰라요."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별 일은 아니었어요. 그냥 친구랑 함께 동네 근처 도서관에서 주최하는 작은 행사에 참석 했었는데, 처음 보는 아줌마가 사탕을 하나를 꺼내어서 친구에게만 줬어요."

"그런데요?"

"사탕이 하나 밖에 없었나 봐요. 그래서 저에겐 사탕을 주지 않았죠."

"왜 친구에게 사탕은 준 것인데요?"

"예쁘다고 하면서 줬어요. 사실 그 친구가 어디 가서도 예쁘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 편이었어요."

", 그러면 그냥 별다른 이유가 없이 예쁘다는 이유로 사탕을 준 것이군요."

", 그런데 나와 눈이 마주치기 전까지 아줌마 얼굴은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저와 눈이 마주치자 약간 당황한 기색이었어요. 당시 제 표정을 제가 보진 못했지만 어떤 표정일지 상상은 가요. 그래서 그 아줌마가 그런 표정을 지었겠죠."

"왜 사탕을 주지 않냐고 물어보지 그랬어요."

".. 지금은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런데 그때는 어려서 그런지 물어 볼 생각도 안 났어요."

"그렇긴 하겠네요. 아이 때는 어른들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이해하기가 힘들거든요."

"맞아요. 그래서 저는 그냥 기분이 좋지 않다고만 느꼈어요."

"충분히 그럴 수 있죠. 일종의 차별을 받은 것이니까."

"그런데 낮엔 모르고 지나갔는데자기 전에 그 장면이 떠오르면서 막 눈물이 났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평소처럼 소리 내어 울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소리를 꾹꾹 참으면서 서럽게 울다가 지쳐서 잠에 들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사탕 하나에 그렇게 서러움을 느낀 것도 참 이상하긴 하네요."

"그래도 힘들었겠네요. 그러면 지금은 어때요?"

", 어린 시절에 겪은 일인데요. 지금은 괜찮아요."

 

 

#황희정승과 농부# 

 

황희정승의 젊은 시절, 길을 가다가 엎치락뒤치락 열심히 농부의 쟁이질에 맞추어 일을 하는 누런소와 검은소의 풍경을 보고 문득 호기심이 일어 농부가 잠시 일을 쉴 때 가서 물었다.

"저 야무진 두 소들을 보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구려, 그래, 누런소와 검은소 중 누가 더 힘이 세오?"

그러자 농부는 황희정승을 한번 쳐다 본 후, 두 사랑스러운 소들을 한번 쳐다보고,조심스럽게 황희정승에 귀에 대고는 이렇게 말했다.

"검은소가 힘이 셉니다, 하지만 꾀를 잘 부리고 게으르지요. 일은 누런소가 잘 합니다."

황희정승은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문득 호기심이 들어 다시 물었다.

"아니 그것을 왜 이렇게 몰래 말하는 것이오?"

농부는 난처한 듯, 입가에 손을 들어올리며 대답했다.

"한낱 미물도 듣는 귀가 있는데 이 말을 검은소가 들으면 기분 나빠하지 않겠습니까 나으리"

 


 

#상처를 주는 말#

 

사람들은 흔히 나쁜 말을 들으면 상처를 입는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나쁜 평가를 받거나, 누군가로부터 비난을 듣거나누군가 짜증을 내면서 하는 말을 들었을 때 그렇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런 나쁜 말들을 들을 때는 대개 비슷한 몇 가지 반응을 보인다. 적극적으로 반박을 하거나, 크게 화를 내거나, 삐쳐서 말문을 닫거나, 그렇지 못할 상황이면 겉으로는 웃고 나서 나중에 마음을 터 놓을 친구들을 만나서 뒷담화를 하면서 푼다.

 

그래서 비록 상처를 입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상처가 어느 정도는 해결이 된다. 상처를 준 말에 어떤 식으로든 응대를 했기 때문에 그렇다. 사실 친구들을 만나서 자신이 당한 억울한 일에 대해서 하소연하다가 보면 그것만으로도 많이 풀린다. 그래서 사람들이 끝없이 뒷담화를 하는 것이다. 즐기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어떤 상처들은 그렇게 처리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가 있다. 그것이 바로 상대가 나쁜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상처를 입는 경우이다.

 

다른 말로 '선의의 상처' 라고 한다. 이것은 자신에게 나쁜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에게 좋은 말을 해줄 때 입는 상처이다.

 

미팅을 나간 자리에서 옆에 앉은 친구에게만 관심이 쏟아질 때 그렇다. 옆에 있는 친구에게는 끝없이 질문이 들어오는데 자신에게는 어느 누구도 질문을 하지 않는다. 예쁘다는 말이나 잘생겼다는 말을 듣는 친구 옆에 서 있을 때도 그렇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나쁜 의도도 아니고 그래서 당연히 자유이지만, 옆에서 듣고 있는 사람은 옆에 있었다는 이유로 상처를 받는다.

 

그리고 칭찬의 상처는 누군가를 만나서 하소연할 방법도 많지 않다. 물론 그것조차도 친구들에게 말을 하면서 뒷담화를 할 수 있긴 하다. 원래 위로라는 과정이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다고 해도 감정이 풀리지 않고 오히려 초라해질 뿐이다.

 

미팅장소에서 자신이 아닌 다른 친구에게만 질문을 하는 상대방들의 행동을 씹는다고 한들 그것이 풀릴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후 또 다른 자리에서도 반복될 상황일 뿐이다.

 

그것은 열등감이고, 질투심이며, 자신의 초라함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그렇게 했다가는 상처가 더욱 덧날 위험도 있다.

 

 

#선의의 상처를 주는 사람들#

 

선의의 상처는, 그 상처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정작 자신이 의도치 않게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지조차 모른다는 특징이 있다. 나쁜 말들의 상처는 상처를 주고 있는 대상이 명확하기 때문에 그 사람으로부터 확실한 응대를 받음으로써 인식이 가능하다. 상대가 화를 내거나, 삐치거나, 말문을 닫거나, 따질 것이니까 그렇다.

 

하지만 선한 의도로 한 말이나 행동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것이 아니라 칭찬을 한 것이기에 그 대상은 기분이 좋아진다. 단지 그 의도치 않게 그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에 자신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음을 스스로 인식할 방법이 없다.

 

또한 그런 과정에서 우연히 상처를 입은 사람들도 그것을 따지기가 매우 애매하다. 사탕 하나에 상처를 입고는 집에서 혼자 울다 지쳐 잠든 아이처럼 말이다.

 

설령 누가 그것에 대해서 지적하더라도 상처를 입힌 당사자는 자신은 그저 좋은 의도로 말한 것이라면서 억울함을 호소하게 된다. 그리고 정말로 그것까지 다 생각해서 말을 하려면 도대체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이 있겠냐고 따질 수도 있다. 사실 그 말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

 

하지만 이런 점이 "좋은 의도"가 가진 가장 큰 맹점이다.

 

좋은 의도가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 중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자녀를 키우는 부모의 좋은 의도이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거의 대부분 아이를 제대로 키우고 싶다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부모들이 생각하는 제대로 키운다는 말은 성공을 의미한다. 돈도 많이 벌고, 결혼도 잘 하고, 아이도 잘 낳고 사는 것이다혹은 좀 더 좋은 의도를 가지고 아이가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하길 바라는 경우도 간혹 있다.

 

 좋은 의도는 이후 아이를 양육하는데 있어서 크게 영향을 끼친다. 대한민국의 경우엔 주로 공부로 나타나는데, 비싸고 좋은 학원을 보내서 교육을 시키는 것이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아이는 그것이 힘들고 싫지만 부모의 좋은 의도로 인해서 끝없이 학원 뺑뺑이를 돌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과정 속에서 아이는 로봇처럼 변해 버리고 만다. 판단하지 않고 책임도 지지 않는다. 모든 결정을 부모가 했기 때문에 그렇다. 결국 점점 수동적이고, 책임만 회피하려 들고, 판단을 하려고 하지 않는 성격으로 변해간다.

 

 

#상처를 주지 않는 말은 거의 없다#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그것이 그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 좋은 일이나 나쁜 일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복권에 당첨되면 그 사실을 알게 된 많은 사람들이 그냥 아무런 이유 없이 불행해지고 만다. 누군가 성적이 오르면 누군가는 떨어진다. 비교당하고, 경쟁하고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누군가에게 일어난 행운이 그저 행운으로 끝나는 일은 거의 없다.

 

말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게는 좋은 말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된다.

 

하지만 좋은 말을 하는 당사자들은 자신이 하는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 있음을 전혀 모르고 산다. 그리고 자신의 선함에 대한 기대치를 품고 산다. , 자신은 착한 사람이라고 믿는 것이다.

 

당연하다. 좋은 말만 하고, 좋은 행동만 하고 살았는데 어떻게 착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진실은 착한 사람이 주는 상처가 나쁜 사람이 주는 상처 못지않게 크다는 점과, 사실 사람들은 나쁜 말에 상처를 입는 경우보다는 오히려 선한 말에 상처를 입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생각해보면 실제로 누군가에게 대놓고 상처를 주는 말을 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없다. 서로 감정이 크게 상했을 때나 그렇다실수로 그런 말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역시도 그리 많지는 않으며 실수를 인식하게 되면 사과를 함으로써 처리가 된다

 

오히려 선의의 상처가 더 많다. 예를 들어서 여러 사람이 모였을 때 웃기려고 한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는 경우가 그렇다. 그 농담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웃었지만, 정작 농담의 대상자는 기분이 상할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것을 따지기가 애매하다. 같이 웃자는 좋은 의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한 의도의 말에 상처를 입을 때 생겨나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을 따질 수가 없어서 도대체 억울함이 풀어질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그것이 상처를 훨씬 더 깊게 만든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힘들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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