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히틀러가 남긴 유산 그리고 미래

아이루다 2013. 12. 10. 18:23

 

지난 주말에 아주 오랜만에 '쉰들러 리스트'를 다시 보게 되었다. 이 영화가 개봉된 것이 93년도이니 어느새 20년이나 된 고전 영화가 되어 있었다. 나는 이 영화를 통해 '리암 닐슨' 이란 이름을 가진 배우를 처음 보았는데 역시나 20년 전이라 그런지 꽤나 젊은 모습이다. 그는 요즘 거친 역할을 주로 하는 액션배우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쉰들러 역을 맡았던 과거의 모습에는 돈을 사랑하는 깔끔한 모습의 사업가 역이 꽤나 잘 어울렸다.

 

쉰들러 리스트는 보기가 참 힘든 영화다. 그것은 내용에 대한 이해가 어려운 것이 아닌, 내용 자체가 알려주는 진실을 그저 바라보기가 너무 힘들어서 그렇다. 정말로 그랬는지.. 아니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그렇게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거기에서는 인간의 생명에 대한 아니, 유대인으로 한정된 인간의 생명에 대한 단 한점의 존중이 없다. 무엇인가에 홀린 듯한 독일 병사들은 재미로, 귀찮아서, 짜증나서, 아무런 이유없이 유대인을 죽인다. 실제로 600만명이 죽었다고 알려진 이 전대미문의 혈사에서 그 영화속의 장면들은 너무도 현실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역사에는 이 학살을 명령한 당사자인 히틀러가 유대인을 병적으로 증오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아마도 히틀러에겐 이보다 좀 더 계산적인 속셈이 있음이 틀림없다. 그는 특히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쌓아놓은 부와 재산을 가장 손 쉽게 강탈할 방법과 1차 세계 대전 이후 빚더미로 올라 선 독일 국민들의 분노를 먹이 삼아 자신의 권력을 확고한 기반으로 올리기 위해 이용했을 것이다.

 

아무튼 악의 근원으로 알려진 히틀러는 이 거대한 학살을 통해 우리 인간에게 아주 중요한 해답을 알려주고 자살로서 자신의 생을 마감 했다. 그것은 위대한 유산은 아니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중요한 유산이 되고 있다. 히틀러는 우리 인간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주었으며 또한 견제되지 않은 국가의 권력의 독재가 얼마나 오용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처절한 증인이 되어 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잔혹한 혈사가 오직 히틀러 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과거에도 몇 차례 이런 우리가 스스로 정한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는 반 인륜적인 학살이 있어 왔다. 예를 들어 유럽과 미국의 노예제도에 의해 희생된 아프리카 흑인들, 아프리카 대륙 발견 초기에 자행된 마야국에 살던 토속민 학살, 미국의 초창기 말살을 당한 인디언 등이 대표적이다. 단지 이 시기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파악조차 안되고 있기 때문에 우린 그냥 짐작으로만 이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아무튼 인류 역사상 아마도 가장 기록에 정확하게 남은 학살은 2차 세계 대전 동안 벌어진 독일내의 유대인 학살로 아주 오랫동안 그 지위를 유지할 듯 보이는데 이것에 대한 기록은 비단 쉰들러 리스트 영화 하나 뿐만이 아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이것에 대한 문학적 기록을 몇차례 경험한 적이 있었는데 그땐 그것이 정말 무엇인지도 모르고 봤었다.

 

* 혹시나 북한 정권이 무너진 후 그들의 만행이 들어나면 아마도 히틀러가 2등으로 밀려날지도 모르겠다. 나는 도대체 북한이란 나라에서 정말로 어떤 비 인륜적인 일들이 일어나는지 상상도 못하겠다.

 

개인적으로 기억나는 작품 중에서 어려서 본 '나비는 이곳에 살지 않는다' 라는 만화가 있었는데 강제 수용소 중 가장 악명을 떨쳤던 아이슈비츠에 갇힌 엄마와 딸의 이야기를 그린 내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오래 되어서 그 내용이 기억에 남지 않는다. 단지 가스실에서 최후를 맞이 한 두 모녀가 서로 부딩켜 앉고 두려움에 떨던 장면과 엄마가 아이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리고자 자신의 품에 최대한 안아 가스를 최대한 덜 흡입하도록 애쓰던 장면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또 하나의 작품으로는 이 학살과는 조금 다른 내용인데 독일의 인종 차별정책으로 인해 그곳을 탈출하고자 한 두 소년이 알프스 산맥을 걸어서 넘는 이야기였다. 이것은 실화를 바탕으로 그려진 만화로 알고 있으며 그때 나의 기억 속에서 오래 남은 것은 바로 그 소년 중 한명이 피아니스트가 꿈이었는데 피아노를 치는데 너무도 소중한 자신의 손을 보호하고자 탈출하는 내내 손을 바지 주머니에 꼽고 다녔던 장면이 기억난다.

 

이 소년은 탈출 중 넘어져서 험한 비탈길을 굴려 떨어져 자신의 목숨이 매우 위험한 지경에 쳐했을 때 조차도 절대로 바지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지 않는 초인적인 인내력을 보여줬는데 훗날 미국인지.. 어딘지로 탈출 한 후 매우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었다고 한다. 자신의 꿈과 미래를 위한 그 고집스러운 모습이 지금도 내 기억 속에서 살아 있다.

 

영화로는 쉰들러 리스트보다 더 늦게 개봉한 '피아니스트' 란 영화가 있었다. '애드리안 보로디' 란 배우가 출연했던 이 영화 역시도 쉰들러 리스트와 비슷한 감동을 주었던 작품으로 기억이 난다. 그래도 이 영화는 쉰들러 리스트보다는 덜 무거운 느낌으로 남아 있다.

 

세상에는 슬픈일이 참 많다. 감동을 받들 수 있는 일도 많다. 우린 많은 영화나 소설 그리고 실제로 일어난 현실 속 이야기들에서 이런 선한 감정을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이것을 분노하고 이해하면서 공감한다. 그리고 기억 속에 이런 감정들을 아주 오랫동안 담아 두게 된다. 이런 것들은 바쁜 세상살이 중에서 곧잘 잊혀진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그 세세함에 대한 기억만 사라질 뿐 그 당시 느낀 감정은 정말로 오랫동안, 아니 평생에 걸쳐 남아 있는 있게 된다.

 

사랑하는 여인들의 슬픈 만남이나 서로 저울질 하는 남녀의 이야기를 다룬 로맨틱 코메디는 역시도 이런 종류의 감정을 갖게 해주는 명작들이기도 한데.. 나는 왠지 이런 작품들이 그리 마음에 와 닫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좀 더 무겁고 더 슬프고 그래서 내가 더 힘든 작품을 마음 속에 더 담게 되고 더 보게 되는데 이것이 이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쉰들러 리스트에는 슬픔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감동이 있다. 그리고 여느 로맨틱 코메디 영화에도 재미와 함께 감동이 있다. 둘 모두 인간을 대상으로 한 감동이며 보편적 감성의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 감동이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 한쪽으로만 쏠리게 된다. 그리고 설령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에 감동을 받았다고 쳐도 다시는 그 영화를 보고 싶지 않다.

 

그런데 가끔 이런 생각도 든다. 정말로 이 전혀 다른 종류의 작품 속에서 느낀 감동은 같은 종류일까? 자기 희생이나 타인을 위한 배려, 시대가 가져 온 아픔 등을 공감하면서 느끼는 감동과 남녀간의 사랑이야기 속에서 느껴지는 가볍지만 진실한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져다 주는 감동은 아예 처음부터 종류 자체가 다른 것일까?

 

인간이 가장 추악해졌을 때 가장 선한 의도를 보여준 오스카 쉰들러란 인물은 어쩌면 우리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작은 희망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위대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600만명이 희생된 그 악마같은 시기에 비록 숫자는 비교가 안될지라도 천 명이 넘는 사람을 살려낸 그의 선의가 정말로 우리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무거운 진실보다는 가벼운 거짓말을 더 좋아하고 있는 세상이다. 그런데 이런 세상이 오래 지속되면 결국 히틀러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요즘 세상은 점점 더 혼탁하고 어지러워진다. 그래서 모두들 눈과 귀를 막고 보고싶은 것과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그리고 우린 이렇게 히틀러가 지배한 독일의 국민처럼 나의 증오를 배출 할 대상을 찾아서 도저히 불가능 할 것 같은 폭력을 휘두르게 될지도 모른다.

 

나 자신의 일과 가족의 일 이외에는 거의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날수록 우리 사회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얽매이게 하고 우리를 억누르며 우리를 공포 속에서 떨게 만들며 서로를 믿지 못하고 경계하도록 만들어 절대로 같은 목표를 향해 가지 못하게 하여 우리들 하나하나를 스스로 고립시키고 있다.

 

공동체란 결국 모든 공동체에 속한 인력이 그들이 속한 공동체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쏠림 현상을 경계하며 무관심 속에 자라나는 독버섯과 같은 세력들을 막아냄으로서 결국 건강하고 발전적인 미래를 향해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로 쉽지 않은 일이란 것을 21세기 대한민국이 명백하게 증명하고 있음이 슬프다.

 

히틀러는 언젠가 다시 나타날 것이다. 우리가 평화로움에 빠져 우리가 해야 할 공동체 일원으로서 임무를 망각한 채 살아가는 날이 오게 되면 반드시 생겨날 수 있는 어둠이다. 단지 그건 어떤 시기에 어떤 나라에서 나타날지에 대한 문제만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