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뱉는 말과 자신이 쓰는 글을 통해서 자신이 현재 누리고 있는 행복에 대해 이야기 하곤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을 담아주고 있는 따뜻한 가정을 표현하고 가족간 사랑을 말해주는 작은 에피소드를 적기도 합니다. 또한 자신과 관계된 또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적으면서 이것들로 인해 그 자신이 행복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곤 하지요.
거기에 더해서 가끔은 다른 이들이 말하거나 글로 표현한 불행함에 대한 접하면서 그 자신이 그런 불행을 당하지 않았음을 감사하며 스스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현재 가진 것들을 능력껏 객관적으로 천천히 살펴 본 후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요소들을 보면서 스스로 평가를 합니다. 그것들에는 그나마 남들에 비해 안정적이고 괜찮은 직장, 좁을 수도 있지만 자신의 노력으로 소유한 집, 풍족하지는 않아도 크게 부족하지 않은 돈, 평범하면서 화목한 가족 관계, 가끔 보는 소중한 친분을 맺은 친구, 잘하지는 못해도 즐기는 취미생활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평가들 끝에서 이런 것들을 어느 정도껏 갖춘 그 자신이 객관적으로 넘치지는 못하지만 적절히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이들의 말을 듣거나 글을 읽다보면 이런 것들 조차도 갖추지 못한 이들이 이 세상에는 참 많으며 자신이 가진 것들이 사람의 삶에 있어서 지극히 평범한 것들이어야 하지만 그것조차도 제대로 갖추기가 힘든 삶이란 것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국 최종적으로 생각했을 때 객관적으로 행복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의 객관적 상황을 모두 열거하여 우리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로 행복일까요? 아니면 그렇지 못한 이들을 보면서 혹시나 나 역시 그런 불행을 당할 수 있었는데 운이 좋거나 능력이 있어서 피해 갈 수 있었다는 점을 상기하면서 두려움에 대한 안도감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요?
이 부분에 대한 경계는 매우 모호합니다. 도대체 그렇다면 어떻게 이것을 구분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도록 하죠. 우리가 느낀 행복이 정말로 행복인지 아니면 두려움을 극복한 안도감인지 말이죠. 물론 안도감도 행복의 일종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행복은 그저 행복해야 한답니다. 조건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죠.
너무도 배가 고픈 후 먹는 정말 맛있는 식사를 할 때 우리는 대화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밥을 먹는 그 행위 자체에 온전히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딴 생각을 할 수도 없고 타인과 어떤 대화를 나눌 여유도 없지요. 단, 우리가 어느정도 배가 차고 나면 그때야 비로소 옆에서 같이 먹고 있는 다른 이들의 표정과 만족감을 읽으면서 공감의 웃음이나 아니면 참 맛있다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요.
힘든 일을 마친 후 피곤한 몸을 끌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든 사람은 죽음과도 같은 잠에 빠져 듭니다. 그땐 정말로 꿈을 꿀 겨를도 없고 잠자기 전 잡 생각을 하거나 타인과 대화를 나눌 시간도 없지요. 그런 잠을 잘 땐 정말로 시체와 다름이 없을 정도 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야 몇 시간의 잠을 자고 난 후 개운해진 몸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이렇듯 우리가 정말로 행복한 경험을 하고 있을 땐 우린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래서 대화를 나눌 수도 없고 그것을 글로 쓸 여유도 없지요. 그땐 그저 그것에 푹 빠져서 온통 그것만 생각하게 됩니다. 정말로 재미난 영화를 볼 땐 영화가 시작되고 끝날때 까지 우린 온통 그 스크린 속의 세상에서 헤매이게 됩니다. 하지만 재미없는 영화를 보게 되면 그땐 많은 잡생각과 함께 옆자리에 있는 사람과 작은 목소리로 딴 얘기를 하기도 하지요.
우리가 우리 자신의 행복함에 대해 타인에게 이야기하고 글로 표현하는 행위는 어쩌면 반대로 우리가 그것으로 인해 정말로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개인적으로 겪은 경험 등을 타인이 보기 좋게 표현해서 그것을 '그래 그렇게 살면 행복하겠네' 라고 평가해주길 바라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또한 모두가 행복한 이야기만 적어 두는 것이 아니니, 타인들의 불행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자신의 비교 행복에 대한 확신을 좀 더 높이는 것이 겠지요. 그래서 요즘 시대에 많은 이들은 각종 인터넷 게시판에 자신에게 일어난 불행하거나 행복한 사건들을 써서 타인에게 공개를 하는 것도 이런 심리의 일종일지도 모릅니다. 행복한 일은 행복한 일대로 불행한 일은 불행한 일대로 적어서 타인들에게 말함으로서 공감과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이 행복하다고 타인들에게 강하게 말하면 말할수록 그리고 외부적인 물건들을 모아서 그 자신이 풍족하고 누가봐도 행복할 것이라고 믿을 수 있게끔 그 자신을 치장할수록 거꾸로 그 내부적으로 행복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그리고 타인의 불행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퍼뜨리는 행위나 그것을 위로하는 행위등을 하면서 자신의 비교 행복감을 높이려는 슬픈 행동도 하게 됩니다.
어쩌면 행복이란 최종적 결론은 타인에게 보여지는 행복감 + 그 자신이 느끼는 행복감 이면서 그 총량은 늘 고정적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타인에게 보여지는 행복감이 커지면 결국 그 자신이 느끼는 행복감이 줄어들고 반대로 그 자신이 느끼는 행복감이 증가하면 타인에게 보여지는 행복감은 줄어들게 되겠지요. 즉 이 말은 그 자신이 충분히 행복하다면 그것을 타인에게 증명할 필요가 없어지게 됩니다.
실제로 자신이 절대적 기준으로 행복하다면 느낀다면 그것을 우리가 평소에 하듯 타인에게 말하거나 사진으로 남기거나 글로 장황하게 써서 보여 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에게 확신이 있는데 쓸데없이 왜 남에게 그것을 설명하고 공감 받으려고 하겠습니까?
이것은 마치 신을 온전히 믿는 신도의 모습과 같습니다. 신을 온전히 믿는 신도라면 신이 있다는 것을 타인에게 주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가 부정을 하든 신은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그렇지만 이것에 대해 확신이 없으면 우린 그것을 주장하고 논쟁하여 그 자신이 옳다는 확신을 가지려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린 어떤 자신이 믿는 것을 강하게 주장하면 주장 할수록 실제로는 그것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뜻하게 됩니다.
아이를 키우는 대부분의 부모는 이미 그 아이가 충분히 소중하기에 그 아이가 나에게 소중하다고 타인들에게 공감해 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절대적이어서 단 한 점의 의문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 타인들의 평가도 없으며 누구도 너는 왜 너의 아이를 소중히 여기느냐고 질문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냥 절대적 진실이 될 뿐입니다.
사람들이 믿는 신념 역시도 동일합니다. 그 신념을 절대적으로 믿는다면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그저 웃어주면 됩니다. 절대적으로 믿는데 무엇을 의심하며 결국 부정하는 이들에게 화를 내거나 설득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불필요한 행위일 뿐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행복하다면 우린 그 행복 그 자체에 빠져서 그 자신 이외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상황인지 혹은 얼마나 강한 행복을 느끼고 있는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말하지 않아도 얼굴의 표정과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들어납니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이는 얼굴이 이뻐진다고 하지요.
행복한 토끼는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그저 재빠르게 뛰어댕기다가 가끔 맛있는 풀을 먹곤 하지요.
이와는 다르게 비교를 함으로서 얻어지는 행복감은 모래성 같은 위험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비교 대상이 달라지는 상황이나 혹은 우리 자신이 여건에 의해 다른 그룹으로 속하게 될 때 갑작스러운 비교 대상의 변화로 인해 심한 방황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행복을 누릴 때 나타나는 가장 일반적인 모습이 바로 그 자신의 행복을 끊임없이 타인들에게 알려주려고 애를 쓰는 것이죠. 페이스 북은 이것을 매우 잘 노린 상품이며 우리가 접하는 거의 모든 종류의 SNS를 사람들이 애용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명품을 찾는 사람들과 타인의 시선을 인식하면서 자신이 감당하지 못하는 소비를 하거나 설령 감당이 가능하더라도 느끼지 못하는 차이점을 가진 상품을 구매하는 이유가 되겠지요.
행복하지 못하니 행복하다고 끝없이 주변에 알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외침에 사람들은 서로 의지합니다. 당신이 외치면 그들은 동조해주고 그들이 외치면 당신이 동조해줍니다. 이것은 어쩌면 바보들의 행진과 같습니다. 두 바보가 서로를 마주보면서 1+1 = 2 임을 맞췄다고 칭찬해주고 있는 꼴이죠.
여기에서 왜 이런 짓을 하느냐고 의문을 품은 사람은 그들의 무리에서 배척됩니다. 내가 행복하다고 설명을 할 때 그것이 정말이냐며 되묻는 이는 나의 인맥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가 됩니다. 누구도 이젠 '왜'라고 물어서도 안되며 정말로 그러냐고 되물어서도 안됩니다. 그저 누군가 외치면 그대로 그게 맞다라고 말해주는 것이 그들 간의 예의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이렇게만 살아도 어느 정도 껏은 행복합니다. 물론 가끔 행복하지 못하다고 느낄때도 있지만 그땐 재빨리 나보다 훨씬 불행한 이를 찾아 진심으로 위로해주면 됩니다. 이렇게 하면 기분이 금새 나아지고 내 자신이 훨씬 더 행복해집니다. 그리고 더욱 다행인건 이렇게 가끔 찾아 위로해 주면서 나를 행복하게 해줄 불행한 사람이 생각보다 주변에 쉽게 발견된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불행함을 느낄 때만 찾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불행함에 같이 엮일 수 있기 때문에 그렇죠. 평소엔 당연히 나와 비슷한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과 어울려야 한다는 원칙과도 같은 현명함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정말 이렇게 묻고 싶군요. 정말로 행복하냐고..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꿈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0) | 2013.12.06 |
---|---|
음식 이야기 (0) | 2013.12.04 |
문화, 이로움과 해로움의 경계 (0) | 2013.11.25 |
늘 빨라지는 세상 (0) | 2013.11.24 |
원인과 결과가 뒤바뀐 세상 (0) | 2013.1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