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문화, 이로움과 해로움의 경계

아이루다 2013. 11. 25. 10:39

 

이번 주말에, 아니 실제로는 지난 주말에 봤던 영화 한편이 있다. 개인적인 사정에 의해 이 영화를 두번을 보게 되었는데 개인적으로는 꽤나 마음에 남아서 이 영화에 대한 정보를 검색해 보았다. 쓰고자 하는 내용과는 관계 없으므로 영화 제목에 대해서는 생략하도록 하겠다.

 

영화의 평점은 그럭저럭, 사람들의 평가는 우호적인 글들이 주로 였지만 가끔 지루하다든가, 뻔한 스토리라인 이라든가 하는 박한 평가도 눈에 띄였다. 물론 나는 처음부터 우호적인 입장에서 글을 읽기 시작했기 때문에 당연히 비우호적인 글에 약간 반발 심리가 생겼다. 그리고 생각난 김에 보고 실망을 많이 한 영화 한편에 대해서도 검색했다. 그리고 이 영화 평가에 대해서는 완전히 반대로 접근해 들어갔다.

 

우리 인간은 이런 영화 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오래된 책, 연극을 비롯한 각종 형태의 극(오페라, 뮤지컬 등등), 음악 연주회, 미술 감상회 좀 더 확장하면 스포츠 관람이나 서커스까지 각가지 종류의 일종의 즐길꺼리가 되기도 하면서 우리들에게 어떤 영감이나 평소와는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것들을 접할 기회가 꽤나 된다.

 

이것들을 통털어서 문화생활이라고 칭할수도 있는데, 물론 문화생활이라면 이것들의 범주를 넘기도 하겠지만 아무튼 여기에서는 이 정도 범위로 잡고 생각해보면 우린 늘 이런 종류의 작품에 대해 우호적이거나 적대적이거나 무관심하거나 등등의 태도를 보이게 된다. 그리고 어떤 작품은 예술이라고 칭하고 또 다른 작품은 B급 물이나 쓰레기 혹은 에로물이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린 어떤 근거로 이런 것들을 이렇게 분류하고 있는 것일까? 누군가에겐 너무도 재미난 작품이 또 다른 누군가에겐 너무 통속적이고 뻔한 스토리로 지루함을 느끼게 해주는 그 차이점이 어디에서 올까?

 

또한 거기에 더해서 우린 어떤 기준으로 작품의 가치를 평가하고 분류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 결과로 명작이라고 꼽히는 작품들이 나타나고 반대로 쓰레기급이라고 분류되는 망작들이 생겨날까?

 

이 부분에 대해서 개개인별로 질문을 던지면 꽤나 의견이 많고 서로 다른 관점에서 자신이 옳다고 믿거나 생각하는 바를 평소보다 좀 더 강하게 주장할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란 예상이 된다. 생각보다 우린 자신이 어떤 작품을부터 받은 감동이나 실망을 주관적으로 해석하면서도 객관적으로 주장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영화나 책을 읽고 받은 느낌을 누군가 폄하 한다는 느낌을 받게 되면 그것에 대해 반발하고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설명하거나 설득하려고 하는 행동이 나타나는데 결국 이 결과로 같은 작품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두 사람은 심한 논쟁을 벌일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그 작품에 대해 아무런 느낌도 없는 제 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참 무의미한 논쟁인 것으로 보이는데 그 당사자들은 그것을 인식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생각을 해보도록 하자. 우린 왜 우리 스스로 접한 문화생활의 결과로 벌어지는 그 자신의 변화에 대해 그리 집착을 하게 되는 것일까? 반대로 어떤 작품을 접한 후 느낀 그 불쾌함을 그리 싫어하게 되는 것일까?

 

쉽게 예를 들어서 포르노급 영화를 한편 가정해보자. 이 작품을 본 많은 이들은 이것을 인가의 본능을 자극해서 돈을 벌려고 한다고 비난을 하겠고 몇몇은 이런 작품을 연출한 감독에 대해 놀라움과 찬사를 보낼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 유명한 예술과 외설의 경계에 대해 사람들의 의견이 분리된다.

 

상당히 고지식하면서 매우 성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한 부부가 이 영화를 봤을 때 그 당황스러움과 어색함 때문에 너무 화가나서 왜 이딴 영화를 만들었는지 그리고 왜 자신들이 이 영화를 보게되었는지 후회스러움이 밀려들 수 있다. 그리고 혹시나 자신의 아이들이 이런 영화를 접하게 될까바 화도 나고 그래서 결국 이 쓰레기 영화를 아주 싫어하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반대로 비슷하지만 실제로 밤에 있는 부부관계에 좀 심각한 문제가 있는 부부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느낀 것은 바로 서로에게 좀 더 집중하고 새로운 관계 시도에 대해 눈을 뜨게 되어 결론적으로 이전보다 좀 더 자극적이고 적극적인 부부 생활을 하게 되어 좀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된 경우도 생각해보자. 물론 이 부부는 이런 상황을 보통 남들에게 이야기 하려 하지 않겠지만 기회가 되어 자신들과 비슷한 고민을 하는 부부를 보면 은밀히 이 정보를 알려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포르노급 영화는 그렇다면 예술일까? 외설일까? 그리고 좋은 작품일까? 나쁜 작품일까? 이렇게 두가지 측면에서 모두 언급을 하고 나면 그것을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도 사람들은 아무리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고 해도 실제로 부정적인 효과를 미치는 사람들이 더 많을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은 나쁜 작품이며 또한 외설이라고 대답을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히 맞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가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효과를 미치는 대상의 숫자이다. 그리고 이 경우엔 불편함을 느낀 사람 숫자가 좀 더 많을 가능성이 높다.

 

대한민국에는 요즘 소위 막장 드라마라는 용어가 꽤나 자주 노출이 된다. 그리고 이 막장이란 용어는 해당 드라마를 아주 비하하는 내용으로서 솔직히 말해서 이 드라마를 보는 이들 조차도 같은 막장 인생처럼 여겨지는 분위기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막장 드라마의 시청률은 늘 잘 나오고 있다. 그 주제의 통속성과 어떤 의미에서 놀라운 일관성을 지니기도 한 대한민국 막장 드라마의 생명력은 매우 대단하다.

 

하지만 이런 막장 드라마라고 해도 그것에 대해 긍정적인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것에는 그 어떤 종류의 작품이라도 그것을 접한 사람에게 매우 광범위 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영향을 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 영향이 긍정적이냐 혹은 부정적이냐, 큰 영향을 미쳤냐 혹은 거의 영향이 없었냐에 따른 차이만 있을 뿐 그것이 없는 경우는 좀 드물다.

 

이것을 보면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반드시 그 대상이 우리가 소위 말하는 명작이 된다는 것도 문제점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즉 앞에서 얻은 힌트대로 효과를 미치는 대상의 숫자만으로 대상에 대한 적절한 판단을 하기가 힘들어진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을 돌아가서 우린 과연 무엇을 근거로 작품에 대한 판단을 하고 있나 혹은 해야 하나를 생각해보자.

 

이것에 대한 대답은 얻어내기가 매우 어려워 보이는 질문이긴 하지만 생각보다도 이것에 대한 사고적 결론은 단 하나로 쉽게 압축이 되어진다. 그것은 바로 그 어떤 종류의 작품이라도 그것을 접한 당사자의 생각에 영향을 미쳤을 때 그것이 기존의 사고방식을 더욱 더 굳히는 영향을 주었느냐와 반대로 그 생각흐름에 어떤 반발적 역할이나 혹은 다른 시야로 세상을 생각할 단초라도 제공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작품들을 접했을 때 그것을 통해 사고적 한계를 벗어나는 경험을 하기도 하게 된다. 맬로물 영화를 보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몽환적 환상이나 공상 과학물을 보고 과학적 상상력의 한계, 뛰어난 머리를 가진 주인공이 펼치는 스릴러 작품을 보면서 인간 능력의 한계 능력의 끝을 느끼기도 한다. 또한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이 현실적으로는 가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것을 제작자의 의도대로 간접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것들 중에서 어떤 것들은 꿈이 되고 어떤 것들은 평생을 그리워 하기도 하여 우리를 움직이게 만들어 주지만 이것은 모두 그나마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하는 경우를 말한 것일 뿐 또 다른 어떤 것들은 우리를 현재 있는 위치에 더욱 단단히 접착시켜주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앞에서 예를 든 포르노 영화를 접한 두 부부에게 있어서 한 부부는 포르노는 더럽고 불쾌하다고 생각한 사고를 더욱 접착시키고 고정화 시켰으며, 다른 한 부부에게는 부부간의 관계에 있어서 새로운 시도를 해줄 수 있는 사고 전환을 불러 일으켰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두 부분은 동일한 작품을 보고 난 후 다른 결론을 내게 되는 것이다.

 

또한 막장 드라마 역시 그런 종류의 드라마에서 주로 다루는 출생의 비밀, 복수, 너무도 평면적인 선악의 대결등의 구조가 평소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세상과 잘 일치가 되어서 결국 자신의 사고방식을 더욱 더 견고하게 해주기 때문에 결국엔 고정화 되는 것이고 반대로 이런 드라마를 싫어하는 이들은 그런 종류의 드라마가 만들어 낸 세상에 대한 단편화와 고정화가 싫어서 부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린 사람이란 존재가 사고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생각해봐야 한다. 우린 생각보다 주변의 영향, 교육의 영향을 매우 크게 받는다. 주변의 영향은 바로 그 자신이 속한 나라나 민족적 특성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고 교육은 국가가 의도하는 방향대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민족 고유의 정서와 해방 후 매우 오랫동안 주입된 군사 정부의 애국심 논리와 기타 여러가지가 복합적으로 뒤섞이여 현재의 대한민국 사람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문제는 이것을 여기에서 멈추면 우린 앞에서 말한 민족적 국가적 특성에 따른 거의 찍어 낸 듯한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되어 버린다는 점이다.

 

그럼에 불구하고 우리가 현재의 다양함을 갖는 이유가 바로 이 문화적 접촉에 의한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즉 우린 모두 다른 자신만의 인생 속에서 다른 경로로 각종 책, 영화, TV, 연극, 오페라, 뮤지컬, 서커스, 스포츠까지 모두 통털어서 이것을 주기적으로 접하게 되면서 여기에서 자신의 사고를 고정화시키거나 또는 고정화 된 사고를 깨면서 사고의 변화나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즉 이것들은 정확히 말해서 사고방식에 대한 자극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 이런 자극은 두가지 형태로 분류가 된다. 하나는 더 고정화 시키기, 다른 하나는 그 고정화 된 사고를 깨뜨려주기.

 

여기에서 이 영향의 방향 중 어떤 것이 옳다라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고인 물은 썩는다는 평범한 사실을 떠올려봐야 한다. 즉 사고가 고정되면 될수록 우린 썩을 수 밖에 없다. 이것을 썩은 것이라고 말해서 반발심이 생길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사고가 고정된 사회일수록 경직되고 불편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소비하는 문화를 판단해보면 어떤 작품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사고체계나 혹은 기존의 사고를 흔드는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반면 다른 작품들은 기존의 사고를 더 공고히 만들어서 우리를 좀 더 경직되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온전히 개개인의 영역에 따라 다르게 동작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모든 종류의 작품은 그것을 접하는 사람에 따라 이 두가지 측면이 모두 나타날 수 있으며 따라서 그 결과로 모든 종류의 작품은 명작이면서 망작이 될 수 있다. 단지 여기에서는 숫자만 다르게 분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주로 망작을 접하는 사람들은 계속 고정화되어 갈 것이고 명작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사람들은 반대로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세상을 늘 다르게 보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이런 이유로 인해 우린 망작을 보면서 마음이 편해지게 된다. 왜냐하면 기존의 내가 옳다고 믿거나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그것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을 하는 작품들을 보면 꽤나 불편해지기 때문이다.

 

결국 이 문제는 사람들이 명작보다는 망작으로 쏠리게 되는 현상을 초래하여 결국 망작이 돈을 잘 버는 세상으로 가게 된다. 하지만 여기에서 희망이 있다면 어떤 명작들은 이것조차도 뒤집어 버릴만큼 강한 영향을 미치기도 해서 사람들의 명작에 대한 유치한 열등감을 해소시켜주기도 한다.

 

명작을 접해야 한다는 주기적인 압박감에 시달리면서 결국엔 망작을 주로 찾게 되는 보통 사람들은 그래서 이런 명작급이면서도 망작의 즐거움을 주는 작품들을 접할 때 폭발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이런 작품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아주 가끔 존재한다. 그리고 이런 천재적인 창작자의 능력으로 인해 세상은 가끔 조금씩 변화되곤 한다.

 

우린 생각보다 별다른 목적없이 매일매일 많은 작품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이 작품들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우리에게 이롭게 작동하거나 해롭게 작동을 하게 된다. 이것은 이글을 통해 계속 말했던 영향을 미치는 방향에 따라 결정이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이로움을 그리 좋아하지 않고 또한 해로움을 그리 싫어하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몸에 이롭거나 해로운 음식을 선택하는 것과 유사한 것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미각의 즐거움을 주는 음식을 먹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정말 중요 한 것은 우리가 일 년 중 열한 달을 해로움 속에서 살아갔다면 한 달 정도는 이로움을 접해야 그래도 현재 상태가 유지될 수 있다는 뜻이다. 옷을 입을 때 십일을 입었다면 하루는 빨기 위해 세탁기에 넣고 말리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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