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변에 있는 지인들을 기준으로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면 대부분 평범한 삶을 살아간다. 물론 그들 역시도 빈부 격차가 있고 첫 애가 몇살인지, 사는 곳이 어딘지, 현재 다니고 있는 직장이 얼마나 안정적이고 또한 그 안에서 성공하고 있는지는 모두 다르다. 하지만 이런 디테일한 부분을 제외하고 나서 살아가는 모습을 몇가지 단어로 단순화 시켜보면 거의 유사한 패턴을 보인다.
일단 가족, 아이, 교육, 직장, 경제문제, 주변 가족관계 등이 아마도 대부분의 지인들을 정의할 수 있는 중요 단어들이 될 것이다. 여기에 그들은 모두 자신의 현재 상태를 기록할 수 있으며 그럼으로서 구분 가능한 삶이 되어진다. 이것은 마치 인간이란 종 전체를 칭하는 말과 영수나 순희와 같은 개별 인간들의 특징을 정의하는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그런데 이 평범한 그룹에 속한 사람들 말고 또 한 그룹이 있다. 그것은 바로 미혼, 정확히 말해서는 독신주의자가 아닌 어떤 사정으로 인해 결혼을 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나 자신이 나이가 어느정도 있다보니 내 주변의 사람들 역시도 어느정도 나이가 다 있다. 그래서 현재를 기준으로 봐서 아직 결혼을 하지 못한 사람은 거의 결혼에 대한 가능성이 희박한 상태로 보인다. 일단 나이가 40이 다 넘었고 나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인 지금껏 결혼을 하지 못한 이유가 해결되지 못한 채 명확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다양하지만 또한 모아 보면 역시나 패턴이 나온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경제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이 경제적인 문제는 보통 본인 자신의 문제라기 보다는 자신이 속한 가족으로부터 출발한 문제들이 대부분이다. 즉 결국 부모나 형제의 문제로 인해 가족 전체가 경제적인 측면에서 곤란을 겪으면서 그 자신도 그 안에서 같이 발목이 잡혀 있는 형국이다.
물론 그렇지 않고 본인 자신의 문제로 인해 결혼을 못한 사람들도 있다. 그것은 호감이 떨어지는 외모나 너무 까탈스러운 성격에 의한 소위 눈높이가 높은 경우나 여자를 사귀는데 있어서 너무 잼병인 친구도 있다. 물론 이런 경우엔 정확한 이유를 나 역시 알길이 없다. 경제적인 문제처럼 명확한 것이 아닌 개인적인 사정일 경우 이런 내용은 알아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상반된 삶을 살아가는 이 기혼층의 무리들과 미혼층의 무리들로부터 재미난 패턴을 하나 찾아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 내가 쓰고자 하는 주제가 된다.
내가 아는 지인들은 기본적으로 일반적인 상식을 통해 세상을 본다. 이 말이 참 당연하면서도 우리나라에서는 이상하게 힘든 일인데 바로 우리나라의 심하게 왜곡된 반공논리를 이용하는 무리들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은 '빨갱이는 싫어요' 하면 끝나는 단순한 구조가 아니다. 우린 단지 능력있는 사람들이 잘 살고 여유가 되면 능력이 안되는 이들을 조금 도우면 좋고 싫으면 안하면 된다. 또한 능력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수준에 맞춰 거기에서 행복을 찾고 살아가면 되는데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반칙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반칙은 수 없이 일어나고 누구나 유혹을 받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반칙을 한다. 그것은 절대로 막을 수도 없고 없앨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린 사법권을 통해 적발된 반칙을 응징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반칙에 대한 유혹을 견뎌낼 수 있도록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이 반칙을 응징하는 사법권의 원칙이 무너져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세상은 왜곡되고 소위 잘나가는 사람들만 더 잘나가는 세상이다. 그리고 그들은 몇 가지 사람들을 겁주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어 세상에 퍼뜨린다. 즉 호랑이가 언제 올지 모르니 호랑이로부터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모두 매달 일정 금액의 돈을 내야 한다고 하지만 호랑이는 이미 멸종하고 없다는 것을 절대 말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매일 공포에 떨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돈을 낸다. 이 돈을 우리가 선거 날 행사하는 표로 바꾸고 호랑이를 북한을 바꾸면 딱 우리나라의 현실로 대입 된다.
그래서 일반적인 상식, 죄를 지으면 죄를 받고 능력껏 살아가고 남의 권리와 나의 권리가 충돌할 때를 위해 서로간의 배려가 필요한 이 상식을 지키면서 살아가가가 쉽지 않다. 그래도 나의 지인들 중에는 이런 일반적인 상식수준을 크게 벗어나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긴 하다.
하지만 이런 지인들도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바로 적극적인 계층, 즉 세상의 부조리와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관심있게 보고 좀 더 나설 경우라면 SNS을 통해 타인들에게 전파하는 것까지 그 나름대로 열정적으로 한다. 또한 그러기에 좀 더 많은 숨겨진 진실을 알고 살아가고 있으며 이런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 답답함을 느끼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소극적인 계층이다. 일단 이 사회의 만연된 문제에 대해서는 인식하지만 다른 일들이 바쁘고 그 자신의 문제로 인해서 인지만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혹은 여기에 더해서 그 자신이 속한 조직이 현실적으로는 사회적 기득권 세력에 속하거나 혹은 자신이 살아가는 공간이 일명 잘나가는 곳이여서 이젠 조금씩 기득권 세력으로 편입되는 진행형 현실도 존재한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두 계층은 거의 비슷하게 앞에서 말한 미혼층과 기혼층으로 분리된 그룹과 90%이상 유사함을 보여준다. 즉 적극적인 계층은 주로 미혼들이고 소극적인 계층은 주로 기혼들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다시 이것을 되집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는 한가지 질문을 던져본다. 사회문제 혹은 정의로움에 대한 개인별 성향은 결혼의 유무, 즉 가정을 꾸린 가장으로서의 바쁜 의무감이 없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인지 혹은 그 자신이 원래 그런 성향이 강해서 결국 나이를 먹자 나타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서 적어도 한가지 사실은 알고 있다. 내가 알던 적극적인 계층에 속한 사람들 모두 20대, 30대 초반 그들이 소위 그리 특별나지 않은 시절(총각으로 살아도 충분히 괜찮았던 나이) 그들의 모습은 지금 결혼을 하고 살아가는 소극적인 계층의 모습에 비해 거의 다를바가 없었다는 점이다. 즉 그들의 젊은 시절은 거의 유사한 모습을 보였었고 그 시절 나는 매우 까칠하고 불만이 많은 존재의 이미지였다.
즉 나는 이것을 통해서 그들이 그렇게 변해가는 것에는 분명히 제때 가정을 꾸리지 못한 원론적인 사실이 깔려 있다는 것을 유추해낼 수 있다. 물론 그렇게 되면 그림이 매우 좋지 않다. 왜냐하면 사회문제나 정의로움에 대한 신념을 가진 사람에게
"당신이 결국 결혼을 하지 못해서 시간도 남고 또한 사회불만도 많아져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오?"
라고 물어보면 그 신념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과연 어떻게 반응을 할까? 이런 신념이 상황으로 통해 얻어진 조건부라고 지적을 한다면 말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놓고 반박은 못하더라도 어느정도 그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해서는 스스로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은연중에 자신에 대한 변론을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사회가 얼마나 부조리한지를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수많은 사례를 들어보이며 나를 설득하려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들이 알고 있는 대부분을 것들을 알고 있기에 이런 것으로부터 나는 잘 설득되지 않는다.
그리고 예측하건데 이들 중 대부분이 어떤 계기로 그들이 미혼층을 떠나 기혼층의 무리에 들어갈 기회가 주어져서 그렇게 되고 나서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 아마도 그들 역시도 기혼층의 무리와 비슷하게 변해갈 것이다. 미혼의 시기와 다르게 기혼의 삶은 그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자유의 시간이 매우 한정적이기 때문에 그 짜투리 시간이 주어졌을 경우 그때 머리 복잡하고 어려운 사회문제에 대해 그리 생각하고 싶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현재 기혼층의 모습을 그대로 대변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단 결혼을 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한달 혹은 두달에 한번씩 양가를 방문하며 명절 땐 거의 남자측 집안에 가서 명절을 치루고 거기에 더해 양가 부모님 생신과 각각 연결된 수 많은 친인척의 경조사만 챙겨도 일년 중 반이상의 주말이 날라간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남편이나 아내의 지인들의 경조사와 가끔 떠나는 휴가 등을 더하면 실제로 아무런 계획이 없는 주말이란 한달에 한번도 힘들 지경이 된다.
평일엔 돈을 벌어야 하니 회사에서 바쁘고 주말이 되면 수 많은 참여해야 하는 행사로 인해 바쁘다. 거기에 더해서 아이까지 생기면 이젠 뭐 완전히 바쁠 수 밖에 없는 삶을 살게 되어진다. 이런 상황이 되니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니, 정의로움이 어떠니 하는 것은 정말로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될 뿐이다. 거기에 더해 이런 것에 대한 관심은 우리를 절대 행복한 쪽으로 끌지 않는다. 실제로는 정말로 모르는게 약이다.
물론 이 모든 상황을 동일하게 겪더라고 자신이 믿는 신념에 따라 끝없는 관심과 행동을 통해 삶을 진행해나가는 사람들도 아주 소수 있지만 나의 경우엔 그렇게 사는 이를 단 한 명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내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국 상황에 의해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 뿐이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소위 서민이란 사람들은 우리가 평소 즐겨쓰는 서민적인 삶에서 나오는 그런 왜곡된 것이 아닌 단지 기득권에 들어가지 못한 능력이 부족한 예비 기득권일 뿐이라고.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실제로 그래서 서울에서도 못하는 지역에서 살면 사람들이 참 많이 팍팍하다. 여유도 없고 배려도 부족하며 결국 그래서 싸움도 자주 난다. 우리는 이렇듯 주어진 상황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심하게 왜곡되고 변형되며 결국 영구적인 변화가 되어져가는데 우리 스스로는 그것이 마치 자신이 의도해 변하가는 것처럼 절대적 의지인냥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내가 서민적인 삶을 사는 것은 내가 가진 집이 없고 내가 가진 재산이 없기 때문이지 내가 만약 빌딩을 수십채 가지고 있고 돈이 매달 수십억씩 벌린다면 내 스스로 지금도 욕하면서 안하고 있는 골프를 그때도 치지 않으며 이 빌딩값을 떨어뜨리려 하는 정치세력이나 세금을 높게 내라고 주장하는 정치세력을 지지할 것인가? 혹은 반대로 세금을 낮춰주려 하고 빌딩값을 유지시키는 정책을 펴는 정치세력을 단지 정의롭지 않다는 이유로 인해 배척해 낼 수 있을 것인가?
* 몇 년전 친구녀석들을 만났을 때 스크린 골프를 치러 가는 녀석들과 혹은 골프장에 가서 골프는 친다는 몇면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스스로 이제 이들과의 교류가 힘들겠구나 라고 생각했었는데 나에겐 다행인지 그 후로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골프장에는 안가는 듯 하다.
물론 지금의 나는 이것에 대해 꽤나 명확하고 또한 나름 자신있게 대답해 낼 수 있다. 하지만 20대, 30대의 나에게 이것을 물어보았다면 아마도 다른 대답이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 대답 중 매우 개연성 있어 보이는 대답 하나가 바로 분노였으리라. 과거의 나는 아마도 찔려서 흥분하여 화난 어투로 이 세상이 얼마나 부조리한데 그런 것을 내가 욕심낼 것 같냐고 하면서 소리를 질렀을 것이지만 집으로 가 혼자 있을 때 그것을 떠올리며 자신은 없어 하면서 괜한 소리를 했다고 후회를 했을 것이 틀림없다.
어쩌면 내가 아는 그 적극적인 참여의식과 결혼을 하지 않은 현실적인 상황이 중복된 사람들도 역시나 현재의 내가 느끼는 그런 단계로 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만을 대상으로 좁은 대상을 기준으로 돌의켜보면 나의 경우엔 결국 거의 30년이 가까운 시간동안 이 문제에 대해 생각을 해왔고, 결국 최근 몇년 내로 그나마 약간의 확신을 얻었는데 내가 아는 그들은 이제 겨우 10년의 시간도 안되었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다.
거기에 더해서 나는 그것이 내가 가진 어떤 문제로 인해 타의지적으로 시작된 것도 아니고 나는 나의 개인적인 경험, 즉 중/고등학교 시절에 느낀 친구들의 도시락 반찬을 통해 느낀 빈부격차에 대한 부조리함 그리고 내가 잘산다고 해서 남들도 잘사는 것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느낀 부끄러움을 느낀 경험을 통한 스스로가 질문을 던지면서 자발적으로 촉발 되었지만, 그들은 모두 결혼을 하지 못한 상황과 보통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되는 30대가 겹치면서 - 그 자신을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겠지만 - 결국 자발적인 시작이 아닌 셈이 되어 버린 것으로 예상되어 진다.
물론 미혼이면서도 아직도 사회문제나 혹은 정의로움에 대해 거의 인식을 하고 살지 않는 어떤 사람들도 있으니 그들보다는 낫다고 보여지기는 한데, 이런 상황에서 또 다른 문제는 그들이 그런 정신적인 행사를 통해서 자신이 타인들에 비해 채우지 못한 가치, 즉 가정이나 자녀에 대한 가치를 대신하려는 경향이 나타나는 점이 보인다는 점이다. 즉 그 스스로가 어떤 종류의 깨어있는 사람이라고 금칠을 하면서 일반적인 삶을 살아가는 타인들과는 다른 좀 더 높은 레벨에 있다고 서로서로 인정해주는 경우가 생긴다.
* 여기에서 SNS는 특히 요즘 이런 사람들의 금칠하기에 매우 좋은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어떤 대표되는 인터넷 공간에 모여서 실없는 농담이나 정색을 하는 정치의견과 현 사회의 부조리를 서로 공유하면서 매일매일 그 자신들은 그들이 비웃거나 분노하는 그 대상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그 자신의 본질을 잊지 않을 것이란 점을 매일매일 스스로 다짐하고 있는 형국이다. 물론 그들의 개개인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 말은 유효하다. 하지만 어떤 행운이 왔을 때도 그렇게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그리고 가장 염려스러운 점은 바로 그렇게 되기까지가 상황에 의해 전개가 되었다면 반대로 또 그렇지 되지 않아지는 과정 역시도 상황에 의해 주어질 것이 분명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아까 말한 서민에 대한 정의와 매우 유사한데 결국엔 그 자신들이 어떤 행운에 의해 기득권 층에 속하게 되었을 때 과거 그 자신들이 가졌던 정의로움에 대한 신념을 유지시켜 나갈 수 있으냐에 대한 질문이 된다.
아마도 많은 이들은 머뭇거리다가도 결국엔 '나는 이정도는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가 누릴 권리를 조금씩 확대시켜 나갈 것이다. 실제로 능력만 된다면 어떤 것을 즐기지 못하는 것이 말이 안되지만 그렇게 되었을 때 그것들을 유지시키기 위해 매달 들어갈 비용을 생각하면 결국 그 비용만큼의 이득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정책에 찬성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아파트를 사면 아파트 가격이 떨어지지 않기 바라게 되고 반대로 없으면 떨어지길 원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본성인데 우린 결국 우리가 이런 상황에 놓여서 상황논리에 빠져들도록 스스로를 절제하지 못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한달에 백만원을 버는 이는 한달에 2백만원을 벌면 정말로 매달 백만원을 저축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 그렇데 되면 보통은 50만원의 추가 소비와 함께 잘해야 50만원의 저축을 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것은 당연히 일년에 한번이나 할까 말까 한 고기를 먹는 외식을 한달에 한번 하는 것으로 바꾸기 때문이고 이런 변화는 너무도 당연하다.
2백만원을 버는 사람이 4백만원을 벌면 달라질까? 아니다. 우린 수입이 많으면 그만큼 지출을 늘릴 뿐이다. 동일한 원리로 집안에 있는 냉장고는 끝없이 늘어나게 되어 있다. 아무리 냉장고를 3개 두고 4개를 두어도 결국엔 산지 1년 넘은 생선이 냉동실에서 그 존재유무 조차도 까맣게 잃어버린 채 아주 천천히 썩어가게 된다.
이렇게 스스로를 절제하지 못하는 한에서 우린 단지 상황이 주어지는 현실이 주는 한계를 통해 늘 제약된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원리인데 단지 그것을 자신이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란 착각만 안하면 된다.
생각보다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어떤 신념이나 철학을 가지고 살아가기는 무척 힘이 든다. 이 세상 사람들 중에서 뇌물이나 촌지 등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서 받는 사람도 있지만 받지 않으면 그가 속한 무리로부터 왕따가 되거나 생활 자체가 힘들어서 받다보니 결국엔 익숙해져버린 경우도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현재 스스로 믿는 신념이 있다면 이 신념이 왜 생겨났는지 그리고 이것을 어떤 경우라도 지켜낼 자신이 있는지에 대해서 정말 자주 물어야 한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것에 대한 대답이 무척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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