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프레 라는 말이 있다. 정식 어원은 '코스튬 플레이' 라고 하는데 다소 생소하지만 이 단어에 대해서 들어 본 것이 벌써 몇 년은 흐른 듯 하다. 아마도 게임이나 만화 등의 문화에 익숙한 사람은 꽤나 친숙한 단어일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그 동안 인터넷을 통해 세상을 배운 많은 이들 역시도 비슷하리라고 생각한다.
코스프레는 쉽게 말하면 게임이나 만화에 나오는 인물처럼 현실에서 의상이나 장비를 착용하는 놀이 행위를 말한다. 거기엔 기본적으로 게임이나 만화에 나오는 캐릭터들의 의상이 매우 인상 깊다든지 디자인이 잘 되어 있다든지 혹은 파격적인 형식 파괴가 있다는 점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즐기는 이런 종류의 문화생활에 대해서 좀 더 깊숙이 동화되는 목적도 있다.
현대에 들어서는 이 행동은 단순한 놀이에서 그치지 않고 전시회나 각종 관련된 행사에서 이들에 대한 상업적인 필요성이 요구되면서 전문적으로 이런 행사를 하는 작은 소규모의 모임들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그래서 요즘은 게임 전시장이나 대규모 제품 발표회 등에서는 거의 빠지지 않고 코스프레 전문가들의 높은 수준의 연출을 감상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기도 한다.
이 코스프레를 단순히 표현하면 게임이나 만화에서 그리는 세상 속 인물들이 마치 현실에 존재하는 척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이 단순한 척을 하는 행위라는 점을 알면서도 그 준비를 하기 위해 쏟은 정성과 그 결과물에 대한 작품성 그리고 그 의상을 착용한 사람에 대한 매력으로 인해 열광을 하는 것이다.
영화 역시도 이와 매우 비슷하다. 특히 현대에 들어서 영화에서의 CG는 거의 필수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데 촬영장에서는 녹색 배경만 존재하지만 우리가 보는 영화 장면의 뒤쪽은 웅장한 산맥이나 거대한 도시의 모습이 보여지게 되는 것이다. 아무튼 감독은 배우를 그 역할을 맡은 사람인척 하라고 시키는 역할을 하고 배우들은 어떤 환경이든 간에 자신이 맡은 배우로서 배경에 그런 것이 있는 척 하면서 영화를 완성해 나가게 된다.
연극, 영화, 오페라, 드라마, 각종 쇼 프로 등등은 이미 사람들 역시도 이것이 그런 척을 한 결과라는 점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연기와 연출로 인해서 현실감을 잃고 그 작품들 속에서 그려낸 세상에 동화되어서 동조하면서 감동과 웃음과 생각할 거리를 찾게 된다. 이것은 또한 꽤나 매력적인 행복이기도 하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영화를 보는 도중에 우린 영화 속에서 그린 세상에 빠져들게 되지만 실제로 영화를 찍는 그 순간도 현재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들과 같은 현실에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결과물은 영화라고 불려지지만 영화를 찍는 과정에는 영화를 보고 있는 그 자신과 같은 직업과 돈을 버는 과정인 셈이다. 이것은 현실에서 배우들이 영화 속 인물인척 하는 것 자체가 바로 현실이란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영화배우도 아니고 코스프레를 즐기는 사람도 아닌 우리 보통사람들은 현실에서 어떤 척을 하고 살아가고 있을까?
실제로 우린 생각보다 많은 척을 하고 살아간다. 단지 그 자신이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인정하지 못해서 그것에 대해 잘 느끼지 못할 뿐 실제로는 우리의 삶 자체가 바로 척을 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린 그래서 사생활이란 말을 만들어서 척을 하지 않는 삶에 대한 비밀 성을 매우 중요시 여긴다. 실제로 이 사생활이란 말이 중요해질수록 우린 결국 누군가의 시선과 평가에 따라서 공적인 영역에서 어떤 척을 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사람들에게 노출이 되면서 돈을 벌어서 살아가는 연예인등과 같은 사람일수록 이 사생활이 더욱 중요해지는데 이 점은 이들에게서 있어서 일종의 아킬레스건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파파라치는 집요하게 이들의 사생활을 카메라에 잡아내려고 하고 열성 팬들 역시 스토커 수준으로 자신이 추종하는 우상을 끊임없이 지켜본다.
그래서 결국 이들은 어쩔 수 없이 거의 모든 시간을 어떤 척을 하고 살아가야 한다. 특히 한국의 문화에서는 '착한 척'을 반드시 해야 하면 '싸가지 있는 척' 도 매우 중요하다. 어떤 이유로 인해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 착한 척, 싸가지 없는 척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인터넷에는 금방 해당 행동을 한 연예인의 이름이 XXX 싸가지 라는 검색어로 순식간에 검색어 순위 1등을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안티 팬이 생기며 더 나가면 안티 카페나 출연하고 있는 프로그램에 대한 퇴출 청원이 이뤄지기도 한다.
척을 하는 사람들 중 가장 목적 중심적인 계층은 바로 정치인이다. 이들은 유권자의 표를 얻기 위해 선거철이면 자신을 뽑아달라면서 일반인 코스프레와 함께 자신이 유권자를 위해 살아가는 척을 엄청나게 한다. 그런데 선거가 끝남과 동시에 이들의 척은 중단된다. 왜냐면 선거는 대부분 몇 년의 임기를 보장하기에 그렇다. 이 점이 이들과 연예인들의 차이점을 만들어 낸다. 연예인은 한번 잘못하면 평생을 그르칠 수 있는 반면 정치인들에 대한 내용은 그리 많이 퍼지지도 않고 그리고 그런 것들도 크게 사람들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런데 과연 이들만 그럴까? 슬프게도 그것은 아니다. 왜나 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착하고 싸가지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이기심을 가졌기에 일반사람인 우리 역시도 끝없이 주변인들에게 그런 척을 해야 한다. 실제로 착하고 싸가지 있는 사람들도 꽤나 많다. 물론 그것 역시도 좀 더 따져봐야 할 문제지만 아무튼 이런 사람들로 인해 그것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주변 사람들에게 대한 점수를 잃는다. 그리고 이것은 거의 명백하게 손해로 이어진다. 그것은 누구나 자신이 조금이라도 호감을 가진 사람에게 이득을 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다른 이들의 호감을 얻는 '척'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결국 그것으로 인해 우린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어떤 척을 하는 것을 체득하게 되는데 그런 이유로 인해 그런 척을 하는 것에 대해서 스스로 인식을 못하는 일도 자주 있다.
예를 들어 10살이 채 되지 않는 여자아이들 역시도 자신의 외모가 다른 사람들에게 호감을 준다고 느끼면 어려서부터라도 그 외모를 활용하는 법을 알고 행동한다. 물론 그 아이가 그것을 인식하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아이는 경험적으로 어떤 표정과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웃음을 짓고 사탕이나 용돈을 주는지를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행동을 지속하면서 커 온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 시절의 그 행동을 그대로 유지한다. 단지 그것이 좀 더 은밀하고 전략적으로 변했을 뿐 본질은 같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외모가 좋은 사람이 착하거나 성격이 좋아 보이는 것은 단순한 선입견이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이런 식으로 자라온 아이는 실제로 성격이 좋다. 아니 성격이 좋은 척 보이는 것이 너무도 익숙해져서 결국 후천적 성격으로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이 부분이 앞서 말했던 실제로 착하고 싸가지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의 본질이기도 하다.
사람이 착하거나 이타적이란 말의 의미는 본질적으로 두가 지 특징을 의미한다.
첫 번째는 계산 능력의 부족이다. 이것은 어린 아이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데 만원을 들고 있는 아이에게 커다랗지만 천원밖에 안 하는 사탕과 바꾸자고 하면 그 만원의 가치를 모르는 아이들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면서 교환을 원한다. 그 부족한 계산 능력을 보면서 사람들은 아이의 순수성을 말하면서 귀엽고 예쁘다고 말하지만 결국 잘 생각해보면 아이는 단순히 만원의 가치를 모르는 것일 뿐이다. 즉 인지능력 부족으로 인한 현상이란 것을 말한다. 이 아이가 단지 10년만 더 나이를 먹어도 동일한 상황에 놓이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을 것이다.
두 번째는 욕심이 적다는 뜻을 의미한다. 사람들 중에는 굳이 나에게 필요 없는 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잘 주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자신에게 필요할지 필요 없을지에 대한 판단보다는 일단 가지고 보려는 사람도 많다. 특히나 돈에 대해서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져있기에 쓰지 않는 물건은 주변에 잘 주지만 쓰지 않는 돈을 주변에 주는 이들은 거의 없다. 그래서 실제로 욕심이 적다는 뜻도 어느 한계가 분명히 있다. 즉 자신에게 필요 없음에 대한 선택 기준에 따라 욕심의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계산법에 의해 착하거나 이타적인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손해를 본다고 착각할 수 있지만, 좀 더 장기적으로 계산하면 사람들의 호감을 얻기 때문에 실제로는 이득을 보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런 경험을 몇 차례 한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도 충분히 손해를 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기에 그런 삶의 태도를 유지하고 살아간다.
이것이 근본적으로는 이기적인 성향을 가진 우리로 하여금 착한 척 이타적인 척 살아가게 끔 해주는 원리가 된다. 결국 우리가 착한 사람, 이타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 자체도 그 사람들로 인해 우리가 추가적인 이득을 얻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꼭 인지해야 한다. 즉 계산 능력이 떨어지고 욕심이 적은 사람 주변에 있으면 쓰지 않는 가구도 얻을 수 있고 심지어 급할 땐 돈도 얻어 쓸 수 있는 기회도 된다. 거기에 더해서 그 사람이 부지런하기까지 하면 내가 어떤 힘든 일이나 도움을 받을 때 매우 유용하기도 하다.
하지만 우린 대부분 자신이 착한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를 생각보다 매우 순수한 의도로 생각한다. 즉 착한 것은 좋은 것이니까 이득과 손해에 관련 없는 좋은 의도로 좋아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착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그 자신도 역시 착할 것이란 가정도 한다. 거기에서부터 우리의 커다란 착각이 시작된다.
착한 사람 =>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아서 주변에서 좋아 함 => 주변에서 좋아하면 추가 이득 가능성 열림 => 착한 사람 = 이득 공식 생김 => 자신도 착한 사람인 척 함 => 착한 사람 이 됨의 과정이 우리가 보통 사람에서 착한 사람이 되는 과정으로 보면 된다. 즉 우리가 착하게 살아서 손해를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착하게 살아가려는 이유는 바로 그것으로 인해 받을 수 있는 계산하기 힘든 이득 분이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렇게 만들어진 착한 사람 말고도 소수의 태생적으로 타고난 착한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분명하게 욕심이 적고 계산 능력이 떨어진다. 물론 그 계산은 수학적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득과 손해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또한 소심한 면도 있어서 적극적으로 이득을 위한 행위도 하지 않는 성향도 있다. 즉 계산을 잘 못하니 이득과 손해에 대한 주관적인 선택보다는 그냥 주어진 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성향의 단점으로는 자신만이나 가족 혹은 지인 정도의 범위만 보고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는 점이다. 결국 이런 착한 사람들은 보편적인 사회 문제나 정치 문제에는 거의 무관심한 것이 일반적이다. 반대로 차라리 이득과 손해에 민감한 사람들이 사회 문제에 훨씬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물론 자신과 관련된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의 방향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서 상황을 좀 더 미시적인 관점으로 좁혀보자. 우린 개인과 사회, 개인과 관계성에 대한 부분보다 더 좁게 단 두 명의 사람과 사람간의 대화에서도 이런 '척'의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대화 중 상대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척, 공감하는 척을 하는 행동이다. 이것은 대화의 스킬에서 매우 중요한데 일명 '굿 리스너' 라고 굳이 영어로 말해지는, 잘 들어주는 사람들이 잘 하는 행동이다. 실제로 상대의 이야기에 흥미가 있든 없든 간에 적당한 반응과 적당한 한마디 대꾸가 말하는 이에게 다음 말을 이어갈 힘을 주는 것이다.
직업적으로는 정신과 의사나 상담가로 알려진 카운셀러 등이 있고 꼭 그런 역할은 아니지만 직업적 특성에 의해 미용실이나 네일 아트 등에서 일하는 사람들 역시 이런 대화에 능숙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잘 할 수록 사람들은 그 공간에 대한 친밀도가 높아져서 결국 고정 고객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이런 현상은 사업 전반적인 영역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작동한다. 특히 고객을 응대하는 분야에서는 따로 돈을 주고 교육을 받아야 할 만큼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결국 이런 모든 점을 따져볼 때 우리가 어떤 척을 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이득과 매우 커다란 연관이 있음을 결론을 내 볼 수 있다.
물론 친구와의 대화 역시도 그런 척이 많이 등장하니 이럴 땐 이득과 관련 없는 것이 아닌 것 아니냐 라고 반문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친구를 사귀는 것도 조금만 따져보면 생각보다 순수하지 못하다는 슬픈 현실이 있다. 우리에게 친구는 매우 소중한 존재일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친구란 서로가 필요한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친구란 것은 재미있게 놀 때, 내가 슬픈 일을 당했을 때, 집안에 경조사가 있을 때 필요하고, 그 자신이 그의 이득 권을 확대시킨 가정에 충실할 땐 다음 순위로 밀려버린다. 그리고 이것이 매우 일반화 되어 서로가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렇다고 가정에서 아내와 남편은 또 다를까? 또한 부모와 자식간에는 다를까? 아니다. 우리 인간은 아주 오랫동안 생각하는 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거나 느끼는 대로 상대에게 행동했을 때의 문제점을 경험해왔기에 스스로를 그렇지 않게 행동하도록 변화시켜 왔다. 즉 그래서 우린 웬만해서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물론 들어내서 좋은 감정은 열심히 들어내지만 반대로 그렇지 못한 것들은 최대한 숨기게 되는 것이다. 그것의 배경엔 우리가 아무리 좋아하는 것이라도 해도 장점과 단점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결국 부부는 늘 서로만 생각하는 척 하거나 부모와 자식은 서로를 다른 존재들과 비교하지 않는 척을 해야 한다. 만약 이것이 겉으로 들어나게 되면 서로에게 커다란 상처가 되는데, 인격 형성이 제대로 되지 못하거나 감정적 충동을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입 밖으로 표현을 해서 상대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한다. 결국 이 말은 척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다른 여자를 보는 남편의 시선, 옆집 아이와 비교하는 부모들의 행동이 그런 것들에 대한 심각한 경우이다.
우리 인간은 너무 오랜 기간 동안 사회 속에서 살아와서 이제는 우리가 가진 '척'을 하는 사회성에 대해서 스스로 의문을 품지 않는 지경까지 와 버렸다. 하지만 우리의 사회성은 분명히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교육된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그것을 부정하려고 해도 우린 결국 우리 개개인의 이득 극대화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어떤 척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사람들마다 큰 차이가 나는 것은 기본적으로 타고난 지능과 성향에 더해 어린 시절의 후천적 교육으로 인해 얻어진 절제력의 차이가 큰 역할을 한다.
즉 우수한 지능에 의한 뛰어난 상황판단 능력과 자신의 감정을 잘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 사람은 '척'을 매우 잘해서 사람들에게 큰 호감을 얻고 그 덕으로 인생 전체에 걸쳐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반면에 떨어지는 지능으로 주변 상황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거기에 더해 감정적 절제력까지 없으면 '척'을 거의 못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인덕을 잃고 결국 인생 전체가 이득보다는 손해로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너무 척을 하는데 익숙해져서 이젠 자신이 척을 하는지 아니면 정말 그런 사람인지조차 헷갈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우린 우리가 보통 매일매일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하는 척이 자신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쉽게 착각을 한다. 그리고는 자신을 스스로 꽤나 괜찮은 사람일 것이라고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우린 타인들을 행동적으로 돕기도 하고 기부를 통해 돈을 주기도 하면서 자신의 선함에 대한 인정을 받고 스스로 인정을 하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인간 사회에서 그래도 필요한 존재라고 느끼고 그것을 통해 존재감을 확인 받기도 한다. 또한 이것은 자존감으로도 이어진다. 이것이 착한 척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과연 인간이 다른 인간을 돕는 행위가 그렇게 도덕적이고 선한 행동일까? 우리가 착한 척을 하면서 하는 행동들이 과연 정말로 그렇게 착한 짓일까? 이것은 생각보다 매우 상대적인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우린 이미 착하다는 행동을 너무도 절대화 시켜놓아 버렸다. 즉 '남을 돕는 행위' 는 착하다 라는 규정해 버렸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어떤 사상을 지지하고 우리 인간 종의 무구한 발전을 위한 방법론적 토론을 지속하면서 결국 지구라는 행성에서 스스로 그 지배자의 지위를 유지하고 거기에 더해 우주로 진출 할 방법까지 고민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래서 인구가 늘어나는 것을 걱정하고 인구가 줄어드는 것을 걱정하고 바닷속 생물들이 멸종해 가는 것을 걱정하고 지구 온난화를 걱정하고 자연이 파괴 되는 것을 걱정한다. 하지만 잘 따져보면 실제로 그것 자체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로 인해 우리의 미래가 불투명해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우리의 미래를 위해 자연을 걱정하는 척을 하는 태도엔 한가지 본질적인 부분이 빠져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사회에서는 이 문제는 거의 공론화 되지도 않고 어떤 정책적 판단에서도 고려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살아 갈만한 할 만한 가치를 가진 존재들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이것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가 스스로 아무리 금칠을 하면서 어떤 척을 해봐야 그것은 그냥 척일 뿐이다.
문제는 이젠 너무도 이런 사고방식이 고정화 되어서 거의 모든 인간들에게 있어서 인간이란 존재 자체는 이미 절대 바꿀 수 없는 가치화가 이루어져 버렸다. 즉 조금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우리 인간의 생명은 우주와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 극대화된 인간 생명에 대한 가치 추구는 바로 우리의 반성 없는 태도에서 비롯되고 있다. 즉 어떤 척을 너무 오래 해서 우린 이제 스스로의 본질조차도 잊어버린 것이다.
이 과정을 정리 해보면, 우리 존재에 대한 착각을 기반으로 자신의 소중함이 만들어지고 그 소중함을 기반으로 각종 이득에 대한 적극적 행동이 나타나며 이를 위해 우린 끝없는 척을 하는 삶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린 아직도 우리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너무도 기초적인 답변 조차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우린 이제야 겨우 남자와 여자가 섹스를 하면 정자와 난자가 만나 아이를 만들어 낸다는 생물학적 지식만을 알아냈을 뿐이다.
그 근원적 바탕이 없는 곳에서 아무리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 가치를 정의하고 또 거기다가 더해서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착각까지 덮어졌다고 해서 우리가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이렇게 스스로를 절대화시켜 규정하고 살아가니 생각이나 사고의 시간이 존재할 리가 없다. 자기 착각은 무섭게도 우리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주고 이것으로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하는 모든 행동을 설명해 버린다. 결국 그래서 자신이 척을 하고 사는지 아니면 원래 그런 사람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인류가 이 종족 자체에 대한 존재 가치성을 둘째 치고라도 그나마 조금이라도 미래의 희망이 있으려면 우리들 스스로 이런 착각을 벗겨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우린 과거에도 앞으로도 대단한 과학문명을 이뤄내겠지만 우리의 가장 중요한 정신적인 영역은 과거 수 천년 간 단 한걸음의 진보도 이루지 못했다. 우린 분명히 돌을 쪼개서 쓰던 석기시대가 있었고 겨우 철기를 다루던 시절도 있었다. 그리고 그 시절에 쓰인 경전을 지금까지도 무시하지 못하고 바라보고 있으며 심지어 재해석까지 하고 있는 형편이다.
기술 발전과는 상관없이 우리의 정신은 전혀 변하지 못했는데 그 배경엔 바로 우리의 절대적인 착각이 깔려 있는 것이다. 우린 단지 직립보행으로 인한 뛰어난 손재주와 집단 지능의 힘으로 이런 대단한 문명을 발전시켰지만 이것은 단지 수단적인 내용에 불과하다. 우리가 달에 가고 암을 정복한다고 해서 우리의 존재가 어느 날 갑자기 필수적으로 변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존재의 필요성을 옆에 있는 다른 존재들로부터 인정받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우린 이 착각 덕분에 지금 가지고 있는 틀을 깰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끊임없는 기술 발전만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인지 아니면 우리의 커다란 실수 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생각하는 사람들이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실제로 우리가 이룩한 문명이란 것은 단지 우리를 더욱 나태해지게 해줄 뿐일 것이다.
우리에게 미래는 현재로서는 이렇게 밖에 정의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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