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두가지 변화때문에 그런것 같은데 그 두가지 모두 1년전쯤부터 시작 되었다. 하나는 시골에 집을 지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걸어서 출퇴근 하면서 성내천로를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이 변화는 나에게 길을 오고가며 혹은 그곳에 머물면서 많은 식물들을 관찰할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나는 이런 봄에 얼마나 많은 야생화들이 피고 지는지 새삼스럽게 놀라고 있다.
우리가 흔히 잡초라고 부르는 대다수의 풀들 역시 봄,여름,가을에 걸쳐 꽃을 피운다. 솔직히 우리가 화초라고 부르는 것들은 이런 잡초들 중에 미모가 뛰어난 녀석들만 고른 것일 뿐이다. 그 예쁜 장미는 꽃이 피기전엔 그져 초록의 덩굴로만 보이며 봄날의 화려함을 마음껏 뽐내는 벚꽃 역시 일년 중 이주 정도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그저그런 푸른 잎을 가진 나무일 뿐이다.
그동안 풀이나 나무는 그저 풀이나 나무였다. 물론 과학적으로는 그들이 태양빛을 이용해 물과 이산화탄소를 화합하여 산소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래서 식물과 우린 완전히 반대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우린 산소를 흡입하여 화학반응을 하고 이것의 결과물로 이산화탄소를 내뿜는다. 이 둘의 절묘한 조화가 어찌보면 매우 조화로운 것 같지만 실제로 지구상은 식물이 먼저 지배했던 진화역사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대다수의 동물은 식물의 결과물인 산소를 이용해 진화해 온 것 뿐임을 나는 지식적으로 알고 있다.
현재 우리 인간은 지구의 절대적 지배자이다. 그 어떤 다른 생명체도 우리 인간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다. 물론 바이러스는 예외이다.
하지만 요즘 느끼는 것은 과연 정말로 우리가 지구의 지배자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와 함께 어쩌면 이 지구의 진정한 지배자는 식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연속으로 떠오른다. 물론 식물은 기본적으로 매우 큰 단점을 가진 존재이다. 그것은 당연히 이동을 못한다는 점인데, 우리 인간으로 따지면 사지가 다 묶여서 있는 형편이 된다. 물론 우린 그렇게 되면 굶어죽지만 식물은 다르다. 해와 물만 있으면 혼자서 잘 살수 있다. 그래서 어쩌면 식물이 이동하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 관점에서만 단점일 것이란 생각도 든다.
푸른 잎에 있는 엽록소는 햇빛과 함께 오는 광자를 붙잡아 원자 단위의 화학반응을 한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 동물들이 섭취하는 많은 영양분을 생산해낸다. 그리고 또 그 잎과 풀을 먹는 초식동물들이 1차 소비자로서 혹은 잎을 갉아먹는 애벌레들 역시 1차 소비자로서 나무의 결과물을 소비하고 그 벌레나 초식동물을 먹는 2차 소비자로서 많은 동물들, 즉 조류, 양서류, 어류, 포유류까지 모두 그 먹이사슬에 묶여 있다.
결국 우리 인간 역시 이 결과물을 먹고 살아간다. 물론 인간 문명이 발달할수록 우린 이런 먹거리 체인을 벗어나 우리가 실험실에서 공장에서 먹을 먹거리를 직접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 원료를 자연으로 부터 가져오긴 하지만 결국 수 많은 첨가물를 통해 새로운 먹꺼리를 생산하는 수 많은 과자들 역시 어느 정도는 이런 성격을 지녔다.
하지만 현재까지 인간 문명의 한계는 혹은 사람들의 선호도는 과거 수백만년동안 익숙해진 '자연으로 부터 얻어내기' 에 익숙해져 있다. 그리고 지금은 단지 그 자연으로부터 더 많이 얻어내기 위해 각종 품종을 개량하고 거기에 유전자 조작을 통한 수퍼푸드까지 생산해내고 있는 상황이다.
말이 좀 샜지만 아무튼 우리 인간은 지구의 생태계와는 너무도 밀접히 관여되어 있어서 우리는 물론 수퍼나 야채가게에서 먹거리를 사지만 실제로 그 모든 먹거리는 우리가 매일 보는 그 식물들로부터 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오늘 지나면서 본 그 식물들은 모두 나의 생존에 밀접히 연관된 존재이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 좀 더 확장한다면, 그 식물들과 나와는 실제로는 동질한 구성물로 이루어진 넓은 의미에서 보면 같은 존재란 것으로 확장 될 수 있다.
이 통합 혹은 연결된 느낌은 매우 새삼스럽다. 그것은 매일 TV를 통해 보던 자신이 매우 좋아하던 연예인을 우연히 친척집에 갔다가 거기에서 설겆이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본 것과 비슷하다. 늘 화면을 통해 본 것들을 실제로 느낄 상황이 주어졌을때 느껴지는 것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우린 등산이나 혹은 각종 야외활동을 통해 자연과 특히 식물과 함께하려고 한다. 일단 그들이 산소를 많이 뿜어주기에 건강상 좋다. 거기에 그들을 많이 보려면 기본적으로 많이 움직여야 하니 이동을 통한 건강챙기기 활동까지 덤으로 얻어서 좋다. 그러니 사람들은 늘 식물에 다가가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식물들에 다가갈 때 우리는 진정 그들과 우리가 하나의 운명 공동체임을 느낄 수 있을까?
길가에 흔하디 흔하게 자란 잡초부터 몇백년은 자람직한 커다란 나무까지 그 모두가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며 나와 같은 원소로 구성되며 또 내가 그들을 직접으로 혹은 간접으로 섭취하고 또 어느날 그들이 나를 섭취하는 자신의 일부화로 변화 시키는 거대한 지구의 생태계를 내가 느끼면서 그 존재에 대한 느낌을 단지 보고 있는 것이 아닌 나 자신의 일부로 느낄 수 있을까?
이것은 어쩌면 매우 관념적이거나 혹은 상상속 개념이 될 수도 있다. 우리 인간은 그 자신을 제외하고는 모두 제 삼자, 즉 자신과 나머지 형태로 세상을 나누는 것이 매우 익숙한 존재이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가정을 꾸리면서 자신만큼 사랑하는 존재가 생기기도 하지만 실제로 이것은 진정한 본질적인 타인과 자신 동질화는 아니다. 그것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생명체 본질의 생존본능을 따지면 어림도 없다. 남편을 위해, 아내를 위해, 아들을 위해, 딸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삶에 대한 갈망을 없애는 것은 아니란 뜻이다.
우리가 이런 존재이다 보니 인간에게도 그러지 못하는 동질화를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어보이는 길가에 핀 잡초 하나에 그것을 느낄 수는 없다. 불가능한 목표가 된다.
나는 나이고 그들은 그저 그들이다. 내가 사과나무가 되고 사과나무가 나일 순 없다.
하지만 시야를 좀 높게 가보다. 지상에서 한 20m 정도 떠서 세상을 봐보자. 개미는 안보이겠지만 지구상의 그 모든 생명체는 오늘도 생존을 위해 살아간다. 그리고 다음 세대를 키워내기 위해 짝짓기, 양육하기, 밥먹기를 모두들 열심히 하고 있다. 우리가 그리 귀찮아 하는 파리조차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이동하면서 먹거리를 찾고 숫파리는 암파리를 찾아 헤맨다.
이것이 생명력이라고 부르는 힘이다. 그리고 여기엔 정말 깊은 감동이 있다.
나나 내가 아는 모든 이들도 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생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힘, 그것이 생명력이다. 우린 결국 먹고 먹히는 관계이지만 거기에서 최대한 먹기만 하려고 하고, 먹히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것은 분면이 한계가 있는 행위이다. 우린 오랜 시간을 먹고 살지만 결국은 죽어 미생물에게 먹히고 그 결과물은 식물에게 먹히기 마련이다.
우주까지 나가지 않아도 지구상의 생태계는 그렇게 수억년을 지속해왔다. 그 얼마나 많은 생명체들이 짧은 시간을 지나 거대한 흐름에 작은 탑승자로서 존재해 왔던가. 우린 우리를 스스로 대단한 존재로 여기고 자신에 대한 믿음에 대해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지만 우린 겨우 오래 살아야 백년을 먹는 존재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의 몸을 이루는 모든 영양분은 내가 아닌 나의 외부로부터 빌려왔을 뿐이며 결국 죽음을 통해 반납해야 한다. 우린 단지 100년의 대출자일 뿐인 것이다.
어쩌면 너무도 당연하기도 하고 그래서 또 식상해보이는 이 이야기는 결국 느낄 수 있는 사람만이 이해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산소가 없으면 죽으니 산소는 매우 중요한 존재이다 라고 내가 말하면서 산소에 대해 고마워할 때 사람들이 느끼는 느낌과 비슷할 것이다. 물론 다 같이 어딘가에 갖혀 수시간을 산소 부족에 대한 공포감에 휩싸인 사람들이라면 밖으로 나오는 통로를 발견한 순간 그 산소의 소중함을 너무도 절실히 느껴 공감을 많이 하겠지만.. 실제로 그럴 경험이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되고 또 그 느낌이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유지되겠는가?
솔직히 말해 나 역시 그런 느낌을 느끼는 순간은 매우 짧고 또한 횟수도 몇번 안된다. 그리고 그것이 제대로 느끼는 것인지도 스스로 의문이다. 나 혼자 착각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기분이 좋아서 오버하는 것인지.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진정 그것을 느낄 수 있다면 나는 정말 외롭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진정한 겸손함을 갖게 될 것이다. 나는 절대로 뭔가의 존재가 아니다. 나는 그들과 같고 그들은 나와 같다.
요즘은 가끔 뿌리를 굳게 내린 내 나이만큼은 되어 보이는 커다란 나무가 부럽다. 움직이지는 못해도 스스로 먹거리를 생산하며 자신을 키워내는 능력을 가지고 수십년을 한자리에서 바람이 불면 부는대로, 비가 오면 오는대로, 겨울이 오면 오는대로 그냥 그렇게 세월의 흐름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그 나무가 부럽다.
이 나무는 올림픽 대로변에 커다랗게 자라고 있다. 하루에 보는 차량 수가 수만대일것 같고 주변이 온통 오염 천지인듯 하다. 또한 얼마나 시끄러울까.. 하지만 나무는 너무도 당당히 그곳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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