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나에게만 약간 흥미로운 이야기

아이루다 2013. 11. 2. 23:04

 

오늘은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의 관심이 없는 주제이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약간 흥미로운 세상의 모든 일들에 대해 어떤 근본적인 원리가 있을까 하는 글을 쓰려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글이 어떤 개연성이나 객관적 사실성 여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또한 과거에 비슷한 이야기를 몇차례 쓴 적이 있어서 반복이라고 느낄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약간은 억지 꿰맞춤일 수 있는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다.

 

20세기 초 양자역학이 태동 될 무렵 이미 상대성 이론을 통해 물리학계의 거물이 된 아인슈타인은 이 괴상하고 무책임한 새로운 이론에 대해 몹시 못마땅 해 했었다고 한다. 아, 이글이 물리학에 대한 글은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읽으셔도 된다. 그도 그럴것이 아인슈타인이 믿은 우주는 몇가지 아주 단순하고 아름다운 원칙에 의해 모든 것이 설명 가능한 일명 조화롭고 질서 정연한 세상이였는데 양자역학에 따르면 이 세상은 오직 우연성과 확률에 의해 지배되는 제멋대로인 곳이란 말 밖에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끝내 '신은 주사위를 굴리지 않는다' 라는 말을 통해 확률로 지배된다고 우기는 그 이론에 대해 거부를 했다고 전해진다. 여담으로 어떤 사람들은 아인슈타인이 '신' 이란 단어를 썼다는 이유로 그가 신을 믿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여기엔 두가지 우수운 착각이 있다. 일단 하나는 아인슈타인은 실제로 이 말을 한 적이 없으며 두번째로는 그가 설령 신을 언급했다고 해도 그것은 종교에서 말하는 신을 말한 것이 아니다. 그는 무신론자였으며 그가 신을 언급했다면 우리가 조물주라고 부르는 창조자로서의 의미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무신론자들이다. 그도 그럴것이 과학을 제대로 공부해서 알게되면 종교에서 말하는 신을 믿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를 죽는 그 순간까지 버리지 않고 평생을 통해 우주를 설명하는 단 하나의 이론을 찾기 위해 연구했지만 결국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떴으며 그가 그리 싫어한 양자역학은 80년 넘게 단 한차례의 그것의 원리를 부정적 자연현상을 경험하지 않고 모든 실험적 데이터가 일치함으로서 현시대의 가장 강력한 이론으로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양자역학이 이상하다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벽을 통과하지 못하는 것이 오직 운과 확률의 문제라는 인식 방법이 선뜻 이해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매일 길을 걸을 때 딛는 발이 콘크리트 바닥으로 빠지지 않는 이유 역시 콘크리트의 견고함이 아닌 단지 운이 좋아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이 조금 우숩기도 한 면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행하는 일들이 이루어지는 과정이 생각보다 매우 우연하고 확률적인 면이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인간이 의도해 이루어 낸 많은 성공사례가 책과 기사를 통해 많이 언급되지만 이것은 생각보다 매우 결과론적이다. 실제로는 100명이 시도한 것을 그 중에서 단 한명이 성공하여 이 사례를 전파하면 마치 그 한사람만 두고 결과를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통해 의도한 대로 되었다고 생각하기 쉬운 것이다. (이 경우 99명의 실패에 대한 이야기는 전파될 가능성이 매우 낮다)

 

실제로 현실에서 성공한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미화되어서 전파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실제로 그들이 그런 의도를 가지고 그것을 추진 했는지 알 길이 없다. 그것은 실제로 알고 보면 우연일 수 있는 가능성도 높으며 또한 거기에 더해서 얼마나 다른 비슷한 시도가 있었는지 통계를 낼 수 조차 없다. 심지어 과학적 위대한 발견이라고 알려진 것들 역시도 실험실에서 우연히 발견된 예도 많다.

 

요즘 시대에서 IT 분야에서 성공한 MS 빌게이츠나 애플의 잡스 역시도 시대적 배경과 적절한 행운이 함께하여 그런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이런 우연성에 따른 결과론적 평가는 우리 인간 사회에서 매우 우연하게 전개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면은 우리의 역사속에서도 발견이 된다. 그것이 바로 역사는 승자의 입자에서 기록된다는 원칙과도 같은 사실을 직시함으로서 알 수 있다. 우리는 역사가 나름 객관적이라고 평하지만 실제로 보면 새롭게 새워진 왕국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바로 새로운 왕의 족보를 미화하는 일이었다. 즉 결과론적으로 이 미화된 족보를 통해 이 사람이 왕이 될 수 밖에 없었다는 당위론을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다른 세력과의 전쟁을 통해 이겨서 왕이 되었다면 그 패배자는 철저하게 악당으로 묘사되게 되어있다.

 

어떤 노력이나 기회를 통해 왕이 된 사람이 그 자신의 필연성을 스스로 믿지 못해서 자신이 왕이 된 것을 필연적 과정으로 변형시키기 위한 나름대로의 노력인 셈이다. 결국 이 행위가 바로 자신이 왕이 된 것이 우연함의 결과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다.

 

그러다보니 이젠 마치 양자역학의 근간이 되는 우연과 확률의 법칙이 마치 현실세계에서도 나타나는 듯한 평가도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과연 정말로 이 세상은 오직 우연과 확률의 법칙만이 존재하는 것일까? 내가 오늘 살아있는 것도 내가 내일 7시에 일어나 회사를 향해 떠나는 것도 정해진 것이 아닌 그 당시에 높은 확률로서 일어나는 사건일 뿐인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도 명확하게 발생할 일이긴 하다.

 

내가 갑자기 오늘 죽을 일도 없고 내일 회사를 나가지 않은 이유란 것도 단 하나 없다. 실제로 거의 내가 내일까지 살아서 회사에 나갈 확률은 거의 100%에 가깝다. 아 그런데 생각해보니 100%라고 단정짓지는 못하겠다는 점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양자역학에서는 우리 우주가 확률과 우연성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고만 했지 그 확률이 50%, 40% 될 것이라고 지정해준 것은 아니니 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 라고 해도 100%은 아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이 세상은 양자역학에 말하는 확률과 우연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세상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강철같은 의지를 가지고 성공을 향해 나가가거나 이루기 위해 가고 있는 그 험난한 길들에서 나타나는 초인적인 의지력이란 것은 모두 쓸데없는 것일까? 모든 것이 확률적으로만 이루어진다면 뭐하러 공부를 하고 뭐하러 열심히 일을 하는가?

 

물론 이 질문은 어리석다. 같은 원리상으로 대답을 한다면 이런 노력은 실제로는 의도한 것이 이루어질 가능성을 높이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공부를 열심히 한 학생이 그렇지 않은 학생에 비해 좋은 성적을 거둘 확률은 실제로 높기 때문에 안하기 보다는 하는게 더 낫다는 것은 양자역학적으로도 위배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노력이란 것의 실체가 무엇일까? 우린 노력을 통해 분명히 확률을 높이고 있는데 왜 노력을 하면 의도한 것이 이루어질 확률이 높아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기 전에 먼저 한가지를 생각해 볼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루어진 것, 즉 성공이나 목표 등의 과정을 통해 얻어질 최종 단계에 대한 정의이다. 과연 성공이나 목적 달성이 갖는 의미는 어떤 내용을 공통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이것은 매우 쉬운 질문이지만 오늘을 이 질문을 물리학적 관점에서 보도록 해보자. 즉 우연성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목표가 가진 의미를 살펴 볼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단순한 상황의 예를 들어보자. 오늘 나는 집안 청소를 해서 집을 깨끗하게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두시간 정도 열심히 청소를 해서 거의 만족할 수준의 깨끗한 집을 이루어냈다. 그럼 나는 목표를 달성했다. 다른 말로 방 청소에 성공했다. 물론 이런 경우 성공이란 단어를 쓰는 것은 어색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이상한 것은 아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목표 달성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일단 첫번째 나는 깨끗한 집을 얻었다. 그리고 두번째 나는 청소를 위한 두시간의 내가 가진 자원을 소비했다. 그리고 잊기 쉽지만 나는 에너지를 소비했다. 즉 청소라는 동작을 위해 나는 열심히 움직였으며 그로 인해 어제 먹었거나 혹은 며칠전 먹은 어떤 에너지 원으로 부터 얻은 열을 나의 근육을 움직이는데 사용한 것이다. 아마도 나는 미세하게나마 체중이 줄었을 것이다.

 

어지럽혀져 있는 방과 그렇지 않은 방의 가장 큰 차이는 정리정돈 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물리학적 의미로 해석을 하면 나의 집은 엔트로피가 낮아진 상태이다. 엔트로피는 물리적학적으로 정의된 단어로서 무질서도라고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내 집은 무질서도가 낮아진 것이다. 이것은 정확히 맞다. 하지만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닫힌 계에서는 엔트로피는 절대 낮아질 수 없다. 즉 지구라는 닫힌 계에서 나의 집 엔트로피가 낮아지려면 뭔가 다른 엔트로피가 더 많이 늘어나야 한다.

 

그것은 당연히 나의 몸에서 발생한 열이다. 이 열을 발생시키기 위해 나의 몸 속의 질서도는 하락했으며, 만약 내가 쉬지 않고 계속 에너지를 쓰다간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은 엔트로피 상승을 뜻하는 것이 된다. 실제로 우리의 몸은 우리의 몸 자체의 엔트로피를 낮게 유지시키고자 늘 언제나 외부에서 에너지를 공급 받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식생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이 상황을 좀 더 확장 시키면 성공이란 단어가 갖는 의미를 엔트로피가 낮아지게 만드는 것에 성공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올림픽에 나가 메달을 땄다면 누구나 메달을 따지 못한 상태의 무질서도에서 순위별로 순서가 매겨진 질서도가 높아진 상태로 변화된다. 하지만 이 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순위는 의미를 잃어가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그 선수들 각자 모두가 시시각각 변화되기 때문에 4년 후 다시 동일한 선수들이 모였다고 해서 동일한 순서가 유지될 확률은 그리 높지 못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열심히 노력을 해서 큰 그룹의 회사를 만들고 그곳의 회장이 된 목표를 이루었다면 역시나  무질서하게 존재했던 사람들이 조직이라는 질서가 있는 모임에 합류를 하고 회사는 이윤을 얻기 위한 매우 질서도 높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회사는 외부에서 계속 돈을 유입받아야 하고 (제품을 팔아서 이득을 얻음) 이 돈을 그 조직원들에게 매달 지급해줘야 한다.(월급을 지급한다)

 

회사에서 돈은 일종의 에너지가 된다. 실제로 우리는 돈을 가지고 에너지를 살 수 있다. 그것은 음식, 기름 등의 우리나 자동차가 쓰는 에너지의 일부로 환산 가능한 것이다.

 

사람이 하는 행동에 열역학 법칙을 적용하는 것은 다소 무리일 수 있지만 이런 해석을 통해 우린 성공에 적용 가능한 물리학 법칙을 정할 수는 있다. 그럼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노력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보자. 이제 답이 쉬워졌다.

 

노력은 단순하게 엔트로피를 낮추는 과정을 뜻한다. 우리가 활을 잘 쏘기 위해 매일 활에 화살을 매겨 쏘는 연습을 하면 실제로 활을 잘 쏘게 된다. 즉 활을 과녁에 명중시키는 것은 바로 활 자체가 질서 있어진 것이며 결론적으로 엔트로피가 낮아진 것이고 그것을 위해 우린 매일 에너지를 써가며(엔트로피를 높혀가면서) 목표의 엔트로피를 낮추려고 하게 되는 것이다. 결론은 물론 전체 엔트로피가 높아졌지만 나타나는 현상은 목표를 달성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이제 대충 노력과 목표달성에 대한 정의를 했다면 이제 다시 양자역학적 사고방식에 의한 확률과 우연성의 이야기로 되돌아가보자.

 

우리의 삶의 확률과 우연성에 의해 지배받는다는 것은 실제로 평범한 엔트로피가 높아지는 과정을 의미한다. 주사위를 던질 경우 그 숫자는 1~6까지 중에서 예상하기 힘든 숫자들이 나온다. 그런데 만약 매우 많은 연습을 통해 주사위를 던져 1이 나오는 방법을 터득했다면 우린 1이 나오는 목표를 달성하게 되고 이 경우 엔트로피는 낮아지게 된다. 물론 중간에 연습을 했기에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좀 더 특별하게 엔트로피가 높아졌지만 (내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했지만) 결론은 주사위의 결과에 대해서 만큼은 엔트로피를 낮춘 성과를 낸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무척 싫어했지만 양자역학이 단순한 원자 이하의 미시세계를 지배하는 원리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과 같은 거시세계조차도 적용되고 있다면 우리 자신의 삶은 우연성과 확률에 지배를 받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앞에 설명한 예처럼 우린 분명히 매일매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살아가며 있으며 누군가는 이 순간 목표를 달성하고 있다.

 

즉 우린 우리에게 운명처럼 주어진 우연성과 확률의 지배에서부터 시작하지만 엔트로피가 낮아지는 대상을 정하고 우리가 가진 자원을 활용해서 결론적으로는 우리 자신에 대한 엔트로피가 높아졌지만 목표의 엔트로피가 낮아진 결과를 얻은 셈이 된다. 

 

이 전체 이야기를 한마디로 압축을 하자면 우리 인간은 확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자신의 엔트로피가 높아짐을 감수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대상의 엔트로피를 낮추는 것을 매일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결국 어떤 일을 하든 만약 우연히 그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면 우린 그 얻는 것을 위해 우리 몸의 엔트로피를 높이는 일을 하고 있는 셈이 된다. 이 이야기는 결국 엔트로피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되므로 결국 어떤 목표를 이루면 이룰수록 우린 죽음에 가까이 가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질문이 하나 나올 수 있다. 그럼 성공한 사람은 빨리 죽는가? 그건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일을 해서 성공을 하게되면 돈이 생기기에 이 돈이 다시 나의 몸의 엔트로피를 낮출 수 있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이 돈으로 좋은 먹거리와 좋은 병원 시설을 이용하게 된다면 결국 다시 보충이 되는 것이다. 즉 몸에서 사용한 에너지는 언제든 다시 보상으로 인해 다시 채워지지만 문제는 시간이다. 그래서 결국 우린 시간을 쓰고 만다. 그것은 꼭 목표가 없어도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

 

심지어 우리가 매일 매초마다 숨을 들이키고 내뱉고 할 때도 일종의 목표를 이룬 셈이 되는데 그것은 산소라는 우리 몸에 필수 기체를 몸 내부로 이동시키는 과정이기 때문에 우리 몸이 죽지 않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시간을 소비하며 결론적으로 호흡을 많이 하면 할수록 우린 죽음에 다가가게 된다.

 

여기까지 해서 양자역학과 열역학 제2법칙을 우리 삶에 무리하게 적용해봤는데 아무튼 내 생각으로는 대충 잘 맞아 떨어진다. 물론 억지스러운 부분도 있겠지만 완전히 동떨어진 것 같은 어려운 물리학 법칙이 우리의 삶에도 잘 적용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 만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것을 다시 해석하면 우리 인간이 우리의 삶을 아무리 포장을 하고 의미를 부여해도 그저 우연히 그리고 확률적으로만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다소 기분이 좋지 않는 결론도 난다. 하지만 그래도 우린 노력에 의해 엔트로피 조정을 통해 목표를 달성할 수는 있기에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단지 내가 결론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그 노력은 의미있게 인정해줄 수 있지만 그 결과는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니란 말을 하고 싶다.

 

우리가 이룬 그 모든 업적은 결국 우연히 얻어진 산물일 뿐이며 단지 노력에 의해 조금 그 가능성이 높아졌거나 아니면 우연히 선택된 자들이 이루어 낸 것들이다. 천재가 세상을 바꾼다는 말도 사실이지만 그 천재가 태어나는 것 자체가 우연히 일어난 것이니 결국 우리 인간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것은 우연한 사건의 결과가 된다.

 

그리고 여기에는 또다른 생각할 꺼리가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커다란 접시에 담긴 물의 일부분만을 뜨겁게 데운 상황인데 그럴 경우 이 접시의 엔트로피는 낮아진 것이고 현실 세계라면 이 온도가 다른 물은 언제나 동일한 온도로 변하려고 대류가 일어나게 된다. 즉 엔트로피가 높아지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다. 이것은 노력에 의한 성공에 대해서도 동일한 효과가 일어난다. 만약 누군가가 성공을 했다면 그 성공은 늘 성공하기 전 상태로 돌아가려는 성질이 있게 된다.

 

이것은 막기 위해서는 많은 무리를 가져온다. 즉 물이 섞이는 것을 막으려면 꽤나 많은 노력을 해야하는데 현실에서도 역시나 비슷한 수준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많이 가질수록 (성공할 수록) 그것을 지키는데 있어서 많은 비용이 발생하게 되고 그 결과로 우린 성공이 주는 결과를 지키는데 생각보다 나 자신의 엔트로피를 높이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공들여서 쌓은 돌은 그냥 널부러져 있을 때보다 당연히 엔트로피가 낮다. 그래서 이것을 탑이라는 고유 형상물로 이름을 짓는데 결국 널부저져 있는 탑은 무너질 이유가 없지만 공들여서 쌓은 탑이 무너지게 될 가능성이 생긴다. 즉 공든탑은 언젠가 무너진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모든 진행 방향이 된다.

 

뭐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노력하지 말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의지적으로 했다고 믿는 그 모든 것의 밑바탕에는 바로 이런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양자역학적 원리가 숨겨져 있음을 생각하지는 의미이다.

 

만약 우리가 해낸 모든 것이 모두 우연한 결과라고 인정할 수 있다면 세상은 어떻게 바뀔까?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양자역학의 근간을 이루어 낸 존재들 조차도 매우 거만했다고 한다. 물론 뛰어난 천재들이였기 때문에 그랬겠지만 그들 역시도 단순히 머리가 좋은, 타고난 두뇌에 운좋았던 사람들일 뿐이었다.

 

이들은 그래도 신체적인 우월함과 노력을 통해 그런 자부심을 가졌다고 해도 요즘 부자집에서 태어나 돈에 대한 자부심이나 자신의 가문에 대한 자부심 혹은 더 심하게 자신이 소속된 조직이나 모임에 대한 자부심이 요란하게 들어나는 사람들도 꽤나 된다. 그야말로 우연성을 기반으로 노력조차도 거의 하지 않은 사람들이 이 행운에 대해 꽤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스스로 갖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란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한번쯤은 깊게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