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나는 내가 스스로를 판단했을 때 그리 의지적인 사람은 아니다. 특히 학창시절의 내 모습을 떠올려보면 정말로 공부에 대한 의지는 너무도 쉽게 무너지는 것 중 하나였다. 물론 이런 모습은 비단 나만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살아온 청소년 대다수가 공부 앞에서 자신의 의지에 대해 스스로 만족할 만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방금 전 문장에서 쓴 '의지' 라는 단어의 뜻을 생각해 보면 사람들의 머리속에는 '극기' 라는 단어와 연결을 한다. 즉 의지는 많은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자기를 극복하는 행위로 여겨진다는 의미가 되는데, 실제로 이 말은 그리 틀리지 않은 사고방식이다. 누구나 뭔가를 하려는 의도를 갖게 되었다면 제일 먼저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 바로 그 자신의 게으름이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지금 이순간에도 수 많은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위한 의지를 불태우면서 매 순간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든 지든 그 승패를 내고 있다.
금연을 꿈꾸는 흡연가,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는 수험생, 영어학원에 다녀 꼭 영어를 마스터하겠다는 회사원, 살을 빼고 싶은 처녀, 운동을 해서 몸을 튼튼하게 만들겠다는 평범 남, 올해는 꼭 뭔가 자신이 평생 꿈꾼 어떤 것을 이루고 말겠다고 믿는 몽상가까지 모두들 매일 매일 매순간 의지를 고취시키며 그것을 위한 자신과의 싸움에 집중하고 있다.
또 다른 의미로 볼 때 의지는 다른 단어인 '중독'과도 연결이 된다. 즉 중독을 극복하는 과정 또한 의지가 가진 힘의 강함으로 인해 그 성공여부가 판별되기도 하고, 실패했을 경우 의지력에 대한 의심을 받기도 한다. 앞에서 예를 들었던 금연이나 금주와 같은 행위를 실패할 때 우린 작심삼일과 같은 한자용어까지 끌어와서 그 의지의 박약함을 비웃기도 한다.
우리 주변에 보면 흡연 중독자는 꽤 있는 편이지만 알콜 중독자는 그리 흔하지는 않다. 아마도 둘 중 후자가 우리의 평균적 삶에 대해 피해가 훨씬 치명적이라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바로 사람들이 중독에 대한 두려움을 더 느끼게 하고 있다는 의미가 되기도 하면서 그래서 좀 더 극복을 해야 한다는 근원적 두려움을 가져다 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혹은 이미 이 중독자들은 일반적인 삶이 불가능해서 우리가 평상시 보기가 힘든 단순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극기' 나 '중독' 같은 의지와 연결된 단어들에서 우린 또 하나의 의미를 찾아낸다. 그리고 이것은 두가지 측면에서 중요함을 갖는데 하나는 일단 그 자신의 삶에 대한 성공여부를(경제적이거나 정신적 혹은 육체적 측면 모두) 결정하는데 매우 중요한 필수요건이란 점과 다른 하나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속한 많은 주변인들의 일반적인 평가 항목 중 꽤나 중요한 것으로 인정되는 요소라는 점이다.
쉽게 말해서 의지가 강한 사람, 즉 극기를 잘하고 중독의 상태를 겪지 않은 사람이라면 사회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 당연히 공부도 더 많이 할 것이고, 쓸데없는데 시간과 돈을 덜 쓰며,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잘 지킬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말로 삶을 오랜 호흡의 관점에서 봤을 때 꾸준함은 매우 중요한 성공의 요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정말로 단순한 경제적인 측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어떤 일이든지 꾸준히 30년만 해낼 수 있다면 많은 것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많은 위인에 대한 이야기를 읽거나 이야기 듣곤 하는데, 이들의 이야기에서 매우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어려움을 극복해내는 드라마틱한 소재들이다. 그리고 여기엔 반드시 개인이 가진 매우 강한 의지가 담겨있는 경우가 많다. 즉 아무리 어려운 과정이라도 자신의 의지의 힘을 빌려 극복해 내는 과정은 보통 다른 사람들에게 깊은 영감과 감동을 주곤 한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말한 두번째에 대한 해석이다. 즉 우린 의지력이 강한 사람에 대해 매우 좋은 호감을 갖기 마련이다. 당연히 그것이 나와 많이 연결이 안되었을 때이겠지만.
물론 이런 의지에 대한 부분은 다르게 생각할 여지도 있다. 실제로 강한 의지를 가지고 어떤 일을 추진하는 사람들은 성공했다면 결과론적으로 그 리더를 칭송 할 지 모르지만 방향이 잘못되었거나 혹은 실패했을 경우 그 리더에 대해 매우 혹한 평가를 내릴 것이다. 보통 이런 의지를 타인에게 강요 할 때 주변에서는 매우 심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위인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결과론적 판단이다. 쉽게 말해서 100명의 의지있는 추진력을 가진 사람 중 단 2명만 성공했다면 그들의 이야기만 퍼진다. 왜냐하면 나머지의 실패 사례는 언론의 관심도, 출판의 관심도, 그 사람에 대한 관심조차 없기에 그렇다. 하지만 반대로 성공 스토리는 매우 빠르게 퍼져 나간다.
대략 의지에 대한 기본적인 훑어봄은 끝난 것 같고 이젠 지금까지 설명한 이 의지의 본질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자. 이 질문은 바로 우리가 전혀 의심없이 믿어 의심치 않는 이 의지가 과연 순수하게 개인적인 성격적 특성일까? 라는 점과 혹은 우리가 그리 많은 호감을 줄만큼 대단히 힘들고 갖기 힘든 가치일까? 이를 위해 몇가지 상황을 예를 들어 보겠다.
우리가 알고 있는 '중독'에는 많은 것이 있다. 마약, 음주, 흡연, 게임, 도박.. 이런 것은 누구나 중독에 대해 예를 들 때 생각하는 일반적인 것들이고 추가로 콜라, 영화, 여행, 명품, 책, 주방기구, 전자제품, 구두, 옷, 인터넷 게시판, 애완동물, TV, 스마트폰, 채팅, 청소.. 또 뭐가 있을까? 그런데 잠시 생각을 해보니 뭐가 그 대상이 아닐까를 찾는 것이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 인간이 중독하지 못하는 대상은 과연 무엇일까? 지난번 어떤 기사를 보니 여자의 똥을 사는 변태 남자까지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 똥을 판 여자가 1억을 넘는 돈을 벌었다고 하는데 과연 그 돈이 다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나는 사람들이 중독자들에 대해 이중적 잣대로 판단하는 것이 좀 우숩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 역시 이중적 판단을 한다. 그래서 내 자신도 우숩다. 생각해보자. 과연 중독이 나쁜 것인지 아니면 우리는 단지 이로운 중독을 단어적으로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것에 불과한 것인지.
매일 책만을 읽어대는 어떤 학자는 '책' 중독이다. 단지 이 중독이 그 사람에게 해가 되지는 않겠지만 중독은 맞다. 하지만 우린 그를 중독자라고 부르지않는다. '박학다식' ,'많은 책을 읽은 학자' 등의 책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대접한다. 흡연자와는 너무나 다른 대접이다. 차이라면 흡연자와 같은 이들보다는 타인들에게 덜 피해를 준다. 아니 실제로는 이득을 준다고 보는게 나을지도 모른다. 출판업계를 먹여 살리는데 일조하면서 또한 그 지식을 활용해 인간종의 발전을 위해 일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책중독이 가져오는 나쁜 효과는 없을까? 당연히 있다. 운동부족, 대화부족, 공감대 형성부족, 가정일 비협조 등등
'명품' 이나 '구두'와 같은 소비성 중독은 약간의 욕을 먹기도 한다. 그 가치가 좀 다르게 해석이 되기 때문인데, 많은 이들은 이런 물질적 가치에 빠진 사람들이 사는 삶을 그리 좋아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또다른 의미에서 이 중독은 '의지' 로 환산될 수도 있다. 즉 천만원 짜리 가방을 사기 위해 일년을 먹을 것을 못 먹고 쓸 돈을 아껴가면서 모았다면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의지의 발현이다. 단지 그 의지의 방향이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얻지 못할 뿐.
'여행' 중독자는 꾸준히 여행을 다닌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책을 쓰기도 한다. 그러면 또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이야기에 빠져서 여행을 꿈꾸거나 혹은 실제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앞서 말했듯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온 중독이긴 한데 그렇다고 해서 중독이 아닌 것인가? 여행에 대한 단점도 확실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약 여행을 너무 좋아해 결혼을 하지 않고 살거나 혹은 결혼을 한 후에도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사회에 대한 공공성 역할에서 단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또한 벌어들인 돈을 모두 외국에서 써버리는 결과를 초래해 외국 경제는 살리는 역할을 했으나 국내 경제에는 그리 도음이 안되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취미를 즐기는데 있어서 그 열성적 활동 여부에 따라 '매니아', '오타쿠' 등의 용어를 쓰기도 한다. 그리고 '매니아' 정도까지는 이해를 하는 편이고 '오타쿠' 정도가 되면 이제 일종의 중독자로 여긴다. 왜냐하면 그 정도가 되면 실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영향을 크게 미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중독된 일을 하기 위해 실생활에서 어떤 희생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은 남에게 피해를 주냐 안주냐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일반적인 보통 사람들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느냐 마느냐에 대한 문제이다.
이렇듯 중독이 일반적인 인간의 특성라고 보면 그 중 하나인 일중독에 빠져 성공을 한 어떤 사람의 이야기 역시 이것을 단순히 의지적인 측면에서만 봐야 할 것인가? 어떤 중독을 극복하는 힘이 의지라면 실제로 중독 때문에 성공한 결과를 가져온 이 일중독 의지박약자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매우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인가? 아니면 매우 의지가 약한 사람인가?
내가 아는 사람 중 정말로 '공부'를 재미있어 하는 분이 있다. 실제로 취미가 공부라고 해도 과연이 아닐만큼 공부를 좋아한다. 그리고 이분은 실제로 머리도 매우 좋아서 우리나라 최고학부를 졸업하기도 했다. 내가 보는 관점에서 이 분에게 있어서 공부는 자신이 매우 잘하는 어떤 취미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즉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잘하는 분야를 좋아하는 특성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것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 받을 수 있고 또한 이것을 활용해 자존감까지 고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분은 나보다 의지적인것인가?
일단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냥 개인적인 타고난 능력에 따른 선호도 문제이다. 잘뛰고 공을 잘 다루는 사람은 축구에 빠져들고, 빠른 손놀림을 가진 이는 게임에 빠져든다. 타고난 외모와 수려한 말솜씨를 가진 남자는 여자에게 빠져들고 사람을 부리는 일에 쾌감을 느끼는 이는 사업에 빠져든다. 뛰어난 음감을 가진 이는 음악에 빠져들고, 색에 대한 감각이 좋은 이는 미술이나 인테리어에 집중하기도 한다. 여기서 예를 든 사람들 중 음치가 음악을 즐기고 달기기가 현저하게 느린 이가 운동을 좋아하기란 힘들다.
이런 것들을 노력해서 얻는 과정을 그냥 온전히 개인이 자신을 이기는 '극기'를 기반으로 한 의지적인 문제로만 여겨지는가?
실제로 의지는 매우 큰 스트레스를 동반한다. 그것은 마치 내리막길을 미끌어져 내려가는 자전거를 거꾸로 구르는 듯한 상황과 완전히 닮아 있다. 우리는 모두 게으르고 퍼지고 편하려고 한다. 우리 몸은 그렇게 진화되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린 또 살아야 하기에 뇌는 우리를 끝없이 괴롭힌다. 나가서 사냥을 하고 음식을 구하고 더 좋은 집을 마련하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하면 편하게 느낄 수 있는 호르몬을 분비해줘서 쉴 수 있도록 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죽을지도 모를 밖으로 나가서 사냥을 하고 집을 구하는 행위가 바로 의지에 관련된 내용인데 결국 이것의 시초는 뇌가 준 스트레스 때문에 그렇다. 이 스트레스를 받음으로서 우리는 별로 하고싶지 않는 행동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의지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것은 책임감을 갖게 되면 더 심해지는데 바로 결혼을 해 아이를 낳은 부모가 그렇지 않는 이들보다 조금 더 이 스트레스를 잘 견디어 낸다. 그럼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은 것이 의지력을 높여주는 동기가 되는 것일까?
하지만 또다른 면에서 보면 이런 어거지 행동이 처음엔 매우 싫다가도 어느 순간이 되면 그 자신이 그것을 처음보다는 훨씬 덜 싫어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즉 죽음보다 싫은 운동도 몇년을 하게 되면 운동 중독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일을 했을 때 그것에 대한 어떤 합당한 성공적 결과나 혹은 더 많은 이득이 주어지게 되면 우린 이젠 본격적으로 그것을 즐기는 것이다.
사냥을 처음 나간 어떤 사냥꾼이 처음엔 두려움과 성공하지 못할 것에 대해 많은 걱정을 하다가 우연히 좋은 사냥감을 구해서 돌아간 후 마을 사람들로부터 받은 칭찬에 고취되어 점점 더 사냥터에 가는 것을 즐기고 그러다보니 더 잘하게 되는 선순환 구조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반대로 사냥을 나갔는데 사냥감을 커녕 다치기만 하고 돌아온 어떤 사냥꾼은 이제 의기소침해져서 집에서 살림만 하길 원할 수도 있다. 물론 그랬던 그가 집안 일 전문가가 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이런 변화가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지, 극기, 중독등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사냥을 못하는 사냥꾼처럼 우린 스트레스를 받아서 행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훨씬 더 힘들게 느낀다. 즉 자신이 잘 하지 못하는 일을 해야 할 때 우린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직업을 구할 땐 자신이 어떻게든 잘하는 일을 찾게 된다. 물론 우린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는다고 믿겠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잘하기에 좋아하는 것이다. 냉정히 말해서 취미는 못해도 즐길 수 있지만 직업은 못하는 일을 고르게 되면 평생을 고통속에 보낼 수도 있다. 돈 앞에서 우리 인간은 매우 솔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잘 하지 못하는 일을 반복적으로 해야 할 때 우린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인데 결국 여기에서 그 일을 그만두던지 아니면 삶을 그만둬야 한다. 가끔 듣는 아주 멀쩡한 직장에 다니던 사람의 자살 소식이 바로 이런 경우의 예가 될 수 있다. 우린 단순히 아니 그렇게 그 일이 힘들면 그 직장을 그만둬야지 왜 자살을 하나고 궁금해 하겠지만 말이다.
이 상황을 좀 더 정리하면 우린 어떤 해야 할 일이 생겼다면 일단 제일 먼저 '스트레스' 를 받는다. 그리고 이어서 이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어떠한 행동을 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결과에 따라 스트레스가 줄기도 하고 더 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스트레스가 늘었다면 보통 포기로 이어지는데 이것이 마치 의지 박약자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물론 초반에는 견디기 힘든 경우가 많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소수의 견뎌낸 사람은 이제 조금씩 그 일을 즐기기 사직한다. 그리고 이 모습은 '의지'로 표현되며 이것이 더 발전되면 이젠 본격적으로 '중독' 단계로 나간다. 그리고 이것이 남들에게 소개될 땐 '극기'라는 단어적 선택을 하게 된다.
하지만 결국 다시 결론은 '중독' 이다. 단지 보통 이런 경우에 중독은 앞에서 예를 들었던 책, 영화, 여행등과 같은 타인들에게 도움을 주는 중독인 것일 뿐이다.
여기에서 초반에 자신이 강한 스트레스를 견뎌내는 힘에는 '자존감' 이 매우 큰 역할을 한다. 즉 자신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일수록 그것을 잘 견뎌낸다. 또 하나 그것을 갖고자 하는 개인적 욕망의 크기도 매우 중요하다. 그것에 대한 욕구가 강할수록 그 어떤 힘듬도 견뎌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존감과 욕망이 의지인것인가?
물론 이렇게 인간의 의지를 몽땅 싸그리 하나로 싸잡아서 폄하할 필요는 없다. 단지 이 글에서 나는 우리가 그리 철석같이 믿는 의지나 극기와 같은 우리에게 좋은 영감을 주는 단어들이 실제로는 그리 대단한 가치를 가진 것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다. 그래서 그 스스로 강한 의지를 가졌다고 믿는 사람들이 실제로 그 강한 의지는 그 자신의 온전한 것이 아닌 그가 타고난 육체적, 지능적 능력에 기반하면서 또 다른 의미에서는 어려서부터 받은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의도되지 않은 결과로 받아 들여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의지적인 사람은 없다. 단지 인간이 받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스트레스 중에 자신에게 주어진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과정이 단순히 자신의 잘하는 쪽으로 연결이 되어졌거나 혹은 남들보다 과도한 욕심을 가진 탓에 좀 더 잘 견뎌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가끔 영화에서 보면 마약중독자가 마약을 주입하기 위해 보여주는 히스테스성 반응을 의지로 환산한다면 과연 이 의지 수준을 넘어설 수 있는 일반적인 인간이 있을까? 팔이 썩어 들어가는 상황에서도 바늘을 또 꼽기도 하고 자신이 죽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다 주입까지 하는 그 마약중독자의 마약에 대한 의지를?
우리 인간에 의지란 어떤 의미에서는 단순한 방향성이다. 어떤 것에 중독이 되었으냐와 그것이 다른 인간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이것이 단순히 세상 어떤 일에도 관심이 없어진다면 그 삶은 매우 무료할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우리가 평가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화되어 1차원적인 평가를 받을 필요는 없다.
단지 여기에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는 점이 우울한 점이긴 하다. 하나는 사람과 같이 살기 위해서 또한 더해서 잘 살기 위해서는 당연히 타인들이 좋아하는 중독을 가져야 한다. 즉 어떤 의지의 방향을 잡을 때 남들이 좋다고 하고 부러워 하고 그리고 결론적으로 우리 사회기준으로 성공이란 목표를 달성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물론 이거도 자신이 타고난 유전적 성향이 맞아야 겠지만. 둘째 방법은 그런 타인들의 관점에서 초월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판단하는 이런 우수운 판단법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방법이다. 물론 매우 힘들고 거의 불가능한 방법이긴 하지만 첫번째 방법이 영 맞지 않는다면 그리고도 행복하고 싶다면 후자를 선택해야 한다.
글의 결론을 내면서 꼭 하고픈 말이 있다. 그것은 자신이 혹시 스스로 의지적이라고 믿는다면 일단 그런 생각을 조금만이라도 버렸으면 한다. 만약 남들이 의지적이라고 해도 그것은 단지 그 의지의 방향이 사회적으로 유용한 방향과 우연히 맞은 것이다. 즉 유전적 성향이 사회적 성향과 일치하는 경우인데 그래서 그것을 스스로 잘하고 즐기고 또 그 결과가 좋은 것이다. 만약 그 성향이 재수없게 여자의 똥을 좋아하는 것으로 발현된다면 그리고 더 재수없게 그것이 경찰의 수사에 걸려서 직장에서 짤리기까지 했다면 그것은 단순히 운이 없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앞에서 말했듯 이 의지의 가치를 송두리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린 좀 더 겸손해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런 의지의 방향이 잘 맞지 않아 사회에 부적응하거나 혹은 경제적으로 하위그룹을 형성하는 사람들을 마치 그 인간 자치가 하급인냥 여기지 않았으면 한다. 물론 나 조차도 힘든 일이지만 마음만이라도 조금 틀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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