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이란 단어에 대해 100명에게 그 의미를 물었다면 아마 그 답 중에는 단 하나도 같은 의미를 가진 대답이 없을 것이다. 그만큼 사랑이란 단어는 우리가 매우 일반적으로 또한 누구나 알고 있다고 가정하면서 자주 쓰지만 실제로 그 단어를 이해하고 있는 각자의 당사자들은 너무도 자신만의 경험을 통해 혹은 감정을 통해 그것을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불과 수백년 전 우리나라가 조선이란 국호를 쓸 때 유교의 사상이 지배하던 그 시절에 우리 조상들은 과연 사랑이란 단어에 대해 이해를 하고 있었을까? 물론 사극을 보다보면 '은혜한다' 는 표현을 쓰는 것을 들어보긴 했지만 진정 남녀나 부모자식 간에 요즘 세대가 쓰는 느낌의 사랑이란 감정을 느꼈는지는 실제로 많이 의문스럽긴 하다. 사랑 중에 가장 강렬한 감정인 남녀간의 그것이 얼굴도 모르는 상태에서 결혼을 해야 했으며 결혼 후 여자의 삶은 진정 집안일에서 시작해 집안일로 끝나고 거기에 더해 많은 수의 아이를 끝없이 낳아 길러야 했던 그때 그분들의 삶에서 우리가 사랑이란 단어를 찾을 수 있을까 싶다.
물론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남녀의 애뜻한 사랑이야기도 있었을 것이고 그런 것들 중에 오래된 이야기로 남아 전설의 고향에 소개될 법한 이야기로 각 마을에 전해오는 것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내 예상은 아마도 그분들의 세상에서는 사랑은 그리 주목받는 그리고 중요한 단어는 아니였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럼 사랑이란 단어를 우리보다 훨씬 중요하게 여긴 서양쪽은 어떨까? 내 기억으로 더듬어봐도 오래된 서양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아마도 그리스 신화가 처음인듯 하다. 물론 그리스 신화는 온갖 너저분한 신들의 방탕한 삶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특히 제우스의 남성적인 성향은 수 많은 여인들을 겁탈하고 그를 통해 자신의 아들을 낳은 경우인데, 뭐 물론 이들의 이야기가 있어서 그리스 신화가 더 재밌긴 하다.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가(영어 명으로는 비너스) 공식적으로 사랑의 타이틀을 달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 역사에 있어서 사랑은 꽤나 오래된 인간의 감정상태였나 보다.
일단 그래서 역사적으로나 혹은 현시대적으로 봐도 사랑은 일반적이고 보편화된 감정이라고 그리고 인간의 본성적이 측면이 있다고 가정하자. 어찌되었건 간에 현실적으로 현대 사회에서 사랑은 그 모든 감정 중 가장 강렬한 행동을 유발시키니까 말이다.
아무튼 사랑은 꽤나 방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어서 오늘 이야기에서는 그 범위를 좀 줄여야겠다. 그래서 그래도 가장 드라마틱한 남녀간의 사랑을 일단 그 주제로 삼는다. 그리고 이 사랑의 감정에 대한 정의와 과연 우리가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 정리해보도록 하자.
혹시 살아오면서 정말 내가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누군가에 대한 호감이나 누가 나에게 잘해줘서 좋다는 수준이 아니고 이 사람과 같이 하지 못하면 내가 죽는 것이 낫다고 여길 만큼 강렬한 감정. 물론 이것은 수 많은 오래된 러브스토리의 단골 주제이기도 하다.
만약 이런 경험이 있다면 여기에서 발전해서 내가 내 옆에 있는 내 짝을 만난 것은 일생일대의 행운이면서 또한 이 사람을 통해 깊은 평온함과 누구와도 나눌 수 없은 공감을 느껴본적이 있는가? 만약 이런 경험까지 했다면 당신은 적어도 사랑이란 감정의 끝자락은 잡은 셈이라고 나는 본다. 물론 나 역시 여기까지가 나의 경험의 한계이다. 뭐 그렇다고 해서 내가 사랑 감정의 전문가도 아닌데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좀 우숩긴 하다.
하지만 내가 보는 세상에서 생각보다 꽤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부부들이 이런 사랑에 대한 감정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음을 본다. 즉 보이는 것보다 사랑을 해서 사귀거나 혹은 그 결과로 결혼에 골인한 경우라도 그 내용적으로는 공동의 이득이나 편리함, 양육과 경제활동의 효율성을 위해 맺어져, 그것을 통해 그들의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요즘 젊은 여인들의 결혼관에 돈은 매우 중요한 목표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현실적으로 그것이 이후 그들이 결혼 한 후 경험할 수 있는 사랑에 대한 감정에 있어서 매우 큰 한계로 작용하기도 한다. 즉 돈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결혼을 했다면 돈만 충분히 있으면 사는데 큰 지장이 없기에 더이상의 감정적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는 셈이다.
물론 '사랑' 은 밥을 먹여주지 않기에 돈과 사랑 중 선택을 하라면 '돈을 사랑하는' 선택을 하는 것이 나름 현명한 결정이긴 하다. 하지만 난 이 부분에서 좀 아쉬움이 느껴진다. 결론적으로 보면 남녀간의 불꽃같은 사랑의 기간이 지난 후 또 많은 시간이 지나 둘이 충분히 노력해서 삶을 살아간다면 그 어떤 것으로도 얻지 못하는, 단어적으로 표현하면 영혼의 친구와 같은 짝을 만들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내 운명과 같은 사람을 얻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이런 선택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우리가 어린시절부터 커오면서 이런 깊은 사랑을 부모로부터 받지 못해서 생겼다고 믿는다. 즉 우리나라의 현시점에 있어서 우리 세대의 부모들은 조선시대의 그것으로부터 그리 자유롭지도 못했고 실제로 전쟁과 배고픔을 느끼면서 살아온 그저 생존에 대한 욕구가 가장 강했던 세대였기에 아이에 대한 깊은 사랑보다는 먹고 사는데 그 삶의 에너지를 모두 써야 했던 불운한 세대였기도 했기 때문이다. 즉 우린 사랑을 받고 컸다기 보다는 경제적으로 보살핌을 받고 큰 세대라고 봐야 한다.
좀 더 보강해서 설명하면,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사랑이란 단어에 대한 실체적 경험을 부모로부터 경험하지 못했기에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거기에 대한 욕구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어려서부터 충분히 사랑받고 그 사랑받는 것이 어떤 느낌이란 것을 온전히 느끼고 자랐다면 커서도 당연히 그 사랑에 대한 온전한 완성을 위해 정말로 많은 가치를 부여하게 될 것인데, 아쉽게도 지금 30~40대의 우리들에겐 그런 경험을 한 이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완 달리 이런 사랑에 대해 충분히 경험을 하고 자라난 서양의 아이들은 우리와는 그 사랑에 대한 욕구가 근본부터 다르다. 실제로 미국쪽 문화만 봐도 '사랑한다' 라는 말이 갖는 무게에 대해 그들 스스로도 대단한 가치를 두고 있으며 우리는 나이가 차면 무슨 행사 치루듯 해버리는 결혼식도 그들에겐 너무도 중요하고 또한 확실한 마음을 먹어야 하는 중대한 인생의 결정으로 생각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 차이를 좀 냉정하게 말하면, 우리는 생계형 부부 결합이라면 그들은 사랑의 감정을 통해 행복을 위한 결합으로까지 차이가 느껴지는데, 뭐 그렇다고 해서 우리나라 모든 커플이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 역시 그 감정을 충분히 느끼는 이들이 꽤나 있으며 특히 처음에는 그렇지 않다가 나이가 먹을수록 자신의 배우자에 대해 깊은 사랑을 느끼는 부부도 가끔 있어 보이니 나름 괜찮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은 조금 많이 운에 좌우되는 영역이다. 실제로 사람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정말 다양한 환경에 노출되어봐야 아는데, 평소엔 너무도 좋던 사람이 위기상황에 놓이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거나 반대로 위기상황엔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평소엔 상대하기도 싫은 마초적인 성격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린 초반 연얘기간에 한 선택의 실수로 인해 평생을 후회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미리 말했던 깊은 공감과 평온함이 함께하는 운명 공동체적인 느낌을 주는 사랑은 실제로 꽤나 오랜 시간을 함께 했을 경우에만 얻어낼 수있는 것이기에 초창기 우리의 뇌가 사정없이 퍼부어주는 3개월 간의 호르몬 폭풍이나 혹은 그 후 아이를 낳기까지 다시 또 융단폭격을 하는 2년간의 시간에 결정을 하는 행위는 충분히 그럴 실수를 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결혼과 이혼은 너무도 당연한 연계가 될 수 있다. 감정에 푹 빠져 상대를 잘못 판단하여 결혼에 이르렀을 때 결국엔 경제력이나 아이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랑의 감정이 전혀 없이도 살아가야 하는 경우로 살아가야 한다면 개인한테는 너무도 불행한 일이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로 보이기도 한다. 대한민국의 사회는 아직까지는 이혼에 대해 그리 관대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여기에 또하나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데 그렇다면 초기 사랑의 불꽃을 지나 5년차, 6년차의 오래된 연인이 되어갈 때 우린 또 어떻게 변해가는가? 또 많은 이들이 이 기간에 권태로움과 지겨움을 느끼는데 그것은 상대에 대해 너무 많이 알아서 새로운 것이 단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즉 초기 연얘기간의 위험함은 피했지만 그 때 그 감정은 단 하나도 남지 않고 허공으로 사라졌으며 이제 거리를 채워 줄 운명의 동반자로서의 깊은 유대감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생기는 문제로 보면 된다.
이것은 중간에 결혼을 했더라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하는데 이때 또 둘 사이에 낳은 아이는 이 문제에 대한 좋은 해결책이 되기도 한다. 즉 아이는 어떤 의미에서 큰 장점과 단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부부 사이의 관계를 좋게하기도 하고 나빠진 관계를 끊지 못하게 하기도 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사랑을 하는 관계는 아주 다양하다. 친구간의 우정, 형제간의 우애, 남녀간의 사랑, 부모자식 간의 사랑, 신과의 사랑 등등. 나는 개인적으로 그 중에서 부부 사이의 관계를 최고의 사랑에 대한 관계로 본다. 그것이 남녀가 아닌 남남이나 여여라도 상관없으며 이제부터 그 이유를 적어보겠다.
부부관계의 가장 좋은 점은 서로에게 서로가 우선순위에서 최고일 수 있는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에서 시간은 단일한 선택만을 할 수 있다. 즉 우리는 같은 시간에 여러 공간에 있을 수 없는 3차원의 한계를 가진 존재이다. 그래서 우린 늘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우선순위를 놓고 늘 저울질 해대는 선택의 순간이 된다. 보통 사람들은 이때 자신이 가장 행복할 수 있는 결과를 가져올 것을 예측하여 선택함으로서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우선순위 1위는 참 많은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상대에 대한 '집중' 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이 집중이야 말로 우리 인간이 근본적인 평온함을 느낄 중요한 사건이다. 실제로 우리가 여행을 가서 그 여행기간 동안 함께한 동반자에게 느끼는 감정적 깊이 역시 이 집중에 대한 부분도 크다. 물론 우린 가서 보고 먹고 하는 것 때문에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듯 착각하지만 실제로 여행이 정말 좋으려면 밤 늦은 시간에 한자리에 모여 온전히 서로의 이야기에 집중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그 시간이 필요하다. 전화의 방해나 가족 중 누군가의 참견이 없이 온전히 서로에게 집중하는 그 시간을 함께 할 때 우린 깊은 공감대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만약 제대로 된 여행을 하고 싶다면 여행 기간동안 스마트폰은 가방에 두고 꺼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약 한사람이 집중에서 벗어나게 되면 다른 남은 사람 역시 거기에서 벗어나면서 둘의 여행은 그저 좋은 것보고 듣고 먹는 수준에 그칠 수 있다. 이런 것은 페북에나 올릴 꺼리가 될 뿐이다.
부부관계의 두번째 좋은 점은 역시나 육체적 접촉이다. 우린 어려서부터 피부와 피부의 접촉을 통해 많은 안정감을 얻는다. 어린 아이들이 부모에게 안겨서 울음을 그치는 것처럼 우리 성인들 역시 이런 실제적인 신체적 접촉을 통해 스스로 가진 긴장감을 풀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부부만 가능하거나 혹은 어떤 식으로든 스킨쉽이 가능한 관계에서만 가능한데 그래서 아무리 깊이 사귄 친구라도 이 부분에서 한계가 지어지는 것이다. 즉 친구와 육체적인 스킨쉽이 시작되면 그것은 이제 친구가 아닌 셈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세번째 좋은 점은 경제적인 공유이다. 이것을 물론 최 우선순위로 놓는 사람들도 꽤나 있을 것이다. 아무튼 경제적인 공유는 많은 좋은 점을 가져다 준다. 일단 내가 힘들때나 혹은 내가 어떤 위기에 닥칠 때 그것을 백업해 줄 이가 있다는 말이 되며 결국 최종적으로는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이타적일 수 있는 순간을 얻어내는 것이다. 즉 내 배우자가 잘되어야 나도 잘되니 당연히 나와 배우자의 운명은 깊게 연결되어 있으며 이로 인해 내가 아프거나 위기를 맞을 때 나를 위해 나처럼 해줄 다른 사람이 있다는 안도감은 실제로 대단한 것임이 분명하다. 이 부분 역시 친구와는 불가능하다.
물론 이 관계는 꼭 부부가 아니여도 된다. 그냥 연인이라도 전혀 상관없다. 어차피 부부란 것은 법적인 것이나 사회 계약적인 관계일 뿐이고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한집에 같이 살지 못하는 불편함은 있더라도 결혼이란 문화가 주는 다른 수많은 불편함을 벗어날 수 있음으로 더 나을 수도 있다.
단 한사람과의 관계에서 내가 느낄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을 경험해보고 싶다면 사랑을 하고 또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한다. 불꽃 같은 사랑은 어떤 면에서 공짜로 얻어진다. 때가 되고 그럴듯한 외모를 가진 이와 연결이 되면 뇌가 마구 뿜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불꽃이 사그라든 후 오래가는 숯불같은 은은한 사랑은 공짜가 아니다. 정말로 서로에게 집중하고 아끼고 배려하는 부단한 노력행위가 따라줘야 한다.
그래서 이런 사람을 만들고 싶다면 그 상대에게 그것을 바랄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먼저 그럴만한 가치를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어렵고 또한 그렇다고 해서 그럴만한 상대를 반드시 찾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그 기회가 와도 잡을 수가 없는 것도 현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말하지만 실제로 그 사랑을 제대로 느끼고 한 평생의 삶을 살아가는 이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물론 꼭 이런 경험을 했다고 해서 그 삶이 성공했다거나 실패했다거나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린 지금보다 훨씬 더 높고 깊은 행복을 느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가진 한계나 혹은 이미 다른 가치들에 너무 빠져들어서 그런 행복을 누릴 준비조차 안하는 현실이 안타깝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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