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아가는 이 사회는 참 다양한 분류가 있다. 이것은 매우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방식으로 분류된 의학적, 생물학적 분류가 있는 반면 어떤 것들은 매우 경험적이거나 혹은 미신적인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남자,여자와 같은 생물학적 혹은 피부색에 따른 인종별 분류 같은 경우는 나름 합리적이지만 혈액형별 성격이나 사주팔자와 같은 근거가 전혀 없이 다수에 의해 믿어지는 통속적 분류법이 있다. 아무튼 대다수의 분류법은 쓰임새가 있기도 하고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도 한다.
그 많은 분류법 중 사람의 본질적 삶에 대한 분류를 할 때 그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나 혹은 스스로의 가치 기준으로 그것을 적용해보면 정말로 엄청난 범위로 나뉠 것이다. 그 분류는 아마도 고도의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구도자의 삶부터 거의 동물과 다름이 없는 본능적인 충동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까지 양단간 극한의 차이점 사이에 존재하는 어쩌면 사람의 머리숫자 만큼의 숫자가 나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늘은 이것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일단 너무 양단간의 극한적인 존재들에 대한 부분은 체조 채점방식처럼 일단 잘라내고 그 중간에 속한 대다수의 사람들의 이야기로 그 범위를 좁혀보자. 그렇지 않으면 글 쓰기가 너무 힘들것 같다. 단순히 말해서 그냥 길가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 한 100명을 붙잡고 물어본 후 영 이상한 대답을 하는 10%는 제외하고서 생각해보자는 말이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으니까.
시작을 위해 질문을 이렇게 정해보자. '당신은 당신의 삶에서 의미있는 것이 있습니까?' 라고.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즉시 대답을 못할 것이지만 어떤 이들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대답을 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잠시 생각한 후 대답 하고 어떤 이들은 대답 후 또 그 답을 바꿀지 모르겠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결국 대답을 하지 못하고 집에 가다가 문득, 아 그렇게 대답할 걸 이라고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이 상황을 결론적으로 말하면 결국 그 대답이 없는 사람은 없다는 뜻이다. 그 답이 '나', '가족', '아이', '행복', '취미', '여행', '직장', '국가' 중에 어떤 것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대답이 없을 순 없다. 즉 우린 뭔가 의미있는 것이 없다면.. 존재하기도 힘들고 또 삶의 행복도 얻기 힘들기 때문이다.
일단 가장 기본적으로 의미있다는 것은 바로 그 자신에게 매우 중요하다. 내가 의미있지 못하다는 말은 내가 살아갈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도 확장 가능하다. 조금 무리해서 예를 들자면, 모든 사람들이 나의 존재를 무시한다면.. 내가 행복할 수도 없고 살아갈 이유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자신에 대한 의미는 보통 많이 잊어버리고 산다. 어쩌면 공기와 같이 너무도 당연한 것이기에 그럴것이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그 자신말고 다른 의미를 찾고자 한다. 그것이 보통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과정이다.
산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이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결론은 동일하다. 그래서 우린 더 많은 행복을 얻기 위해 의미를 찾고, 부여하고, 느끼고, 소중히 여긴다.
이 뻔한 이야기를 왜 하는가 라고 묻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 너무도 뻔하기에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쯤에서 한번쯤 생각을 뒤집어보려고 한다. 과연 우리가 믿는 그 의미라는 것들이 정말로 실제적인 것일까? 혹은 전혀 상상도 못할 정도로 관념적이거나 자신만의 생각의 결과일까?
가정을 이룬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아이를 매우 소중히 여긴다. 그리고 이것을 보통 사랑한다고 표현한다. 그래서 정말 많은 정성을 쏟게 되는데.. 이 사랑이란 말에서도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첫번째는 정말로 아이를 순수하게 사랑하는가 이다. 이것을 본질적으로 말하면 그냥 시간과 돈을 투자한 결과에 대한 집착일 수 있다. 물론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은 펄쩍 뛸 생각이긴 하지만 결국 우리가 뭔가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그만큼의 시간과 정성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것은 도자기를 만드는 장인이나 평생을 걸쳐 뭔가를 만들어 낸 사람들이 그 결과물을 거의 자신의 분신이나 혹은 자식과 같이 여기는 것과 비슷하다.
결국 소중하다는 것은 많은 시간과 많은 노력과 많은 돈이 들어갔기에 그것은 소중하게 되는 것이다.
두번째는 혈연, 즉 유전적인 연결로서 소중한 것이다. 이것은 매우 관념적인데.. 솔직히 어린시절 잃어버린 자식을 찾았는데 실제로는 잘못찾았다고 해도 그 스스로 그것을 모른다면 그냥 아이가 사랑스럽고 아쉽고 안타까울 것이다. 이것은 오직 지식과 관념이 주는 결과이지 절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키워도, 혹은 키우지 않아도 아이는 그저 그런 것일 뿐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부모들은 나의 말에 반박을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의미를 부여한 경우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특히 많은 의미를 부여한 경우 그것이 매우 심해지는데 심지어는 폭력이나 폭언까지도 나타날 수 있다. 사람은 모두 자신이 마음속에 담고 사는 그 의미에 대해 공격을 받으면 그런 반응을 보일 수 있다. 그것은 정말로 그 사람이 착하냐 아니냐에 관계없는 본능적인 반응이다.
간단한 예를 통해서도 우리가 의미가 있다라고 판단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그대로의 의미나 가치가 있는것인지에 대한 의심을 해 볼 수 있다. 실제로 그 모든 의미나 가치를 잘 분석해보면.. 이런 면이 들어나기 마련이다. 우리는 그래서 이것을 위해 우리의 의미나 가치를 공감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우린 늘 자신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타인과 말하고 그것을 잘 공감해주는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게 된다.
또래의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은 매우 쉽게 친해지며 공감대를 형성한다. 보통 이것은 세대의 문제로도 확대되는데 비슷한 나이를 가진 사람들이 나이차가 심하게 나는 사람들에 비해서 친하게 지낼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이것을 보통 세대차이라고도 표현하는데 이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왜나하면 사람들은 나이에 따라 그 소중하고 의미있는 가치가 계속 바뀌기 때문이며 이것은 사회에서 교육받은 것들의 후보군들 중에 자신이 마음에 드는 어떤 것을 선택해서 오랜 시간 투자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매우 일반적 수준의 선택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아이, 여행, 타인과의 교류, 취미, 돈, 종교 등등이다. 청소년기에는 친구가, 대학에 가서는 여자와 취업이, 취업 후엔 배우자가, 결혼 후엔 아이가, 그 후엔 돈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물론 조금씩 그 의미 있는 것들이 비율을 달리하면서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지만 아무튼 나이에 따른 의미 있는 것은 거의 100% 바뀐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나이가 비슷해야 대화도 잘 통하고 또 공감도 많이 간다. 10대 아이가 60대 노인과 함께 앉아서 '요즘 젊은 것들은 예의가 없어' 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이상한 풍경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의미있다고' 말하는 것들은 실제로 의미있지는 않다. 단지 그 의미있는 것들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 행복한 것은 100% 의미가 있는데 의미가 있다고 해서 100% 행복하건 아니기에 '행복 < 의미 ' 의 공식이 성립된다. 즉 행복은 의미의 일부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냥 그렇게 살면 된다.
문제는 우리가 의미를 행복과 동급으로 여기거나 자신의 마음속에 만들어진 의미를 가지고 행복하려고 할때 발생된다. 즉 자신의 의미있다고 여기는 어떤 행위가 행복하기 위해서 그것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하게 되는 경우를 말하는데 그것은 역으로 자신의 행복을 해치는 역날검처럼 작용할 수 있다.
회사를 성장시키고 이익을 얻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이 의미있다고 믿는 어느 회사 사장은 직원들이 일을 열심히 하는 것에 대한 명확한 측정을 할 수 없기에 얼마나 오래동안 사무실에 있는지를 체크하기 시작하고 그것으로 그 사람이 열심히 일했다고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이 사장은 왜 처음부터 열심히 일하는 것에 대한 의미를 부여했을까? 처음엔 분명히 좋은 회사를 만들기 위해 시작했다. 그리고 그 좋은 회사는 그와 그의 직원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이와 다르지만 삶의 어떤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 즉 돈이나 사회적 명예, 명성, 권력이 있는 삶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일반적인 형태의 삶을 영위하는 그들이 그것들을 추구할 때 과연 정말로 그것이 가진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느냐는 그것을 추구하는 것과는 확실히 다른 문제이다.
즉 우리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거기에 다가가려 평생을 노력하면서 그것이 갖은 본질적인 의미를 잊어먹게 되는 경우가 쉽다는 말이다. 여행을 떠난 사람들이 막히는 길에서 실망한 관광지에서 돌아오는 짜증나는 날씨에서 그 여행을 망쳐버리는것처럼 우린 여행이란 자기 치유의 행위의 본지를 망각하고 왜 우리가 여행을 떠나고 그것을 그리워하고 꿈꾸는지를 잊어먹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런 경우가 아니라고 해도 자신이 민족과 국가를 위해 의미있는 일을 했다고 믿어 의심치않으며 투철한 국가관에 의해 적을 말살하는 어떤 병사들의 행동처럼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평소엔 정말로 철석같이 믿었던 신념자체를 버리고 국가를 위한다는 명목에 적을 죽이는 것이 의미있고 가치있다는 행위로 포장되어지자마자 죽이는 것을 너무도 쉽게 해내는 것이다. 과연 여기에서 우리는 그것을 정말로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결론을 내자면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의미있거나 가치 있는 일은 없다. 만약 있다고 해도 그것은 자신의 모리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이지 절대적일 수는 없다. 우린 오직 인간의 입장에서 또한 인간중에서도 나와 관련된 사람들의 입장에서 더 좁게는 내 가족과 나 자신의 입장에서만 판단하고 결론낸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아무리 스스로 증명하고 남들에게 떠들어봤자 그것을 받아드릴 사람만 받아 드릴뿐이며 그런 사람들만 주변에 남게 된다. 가치의 충돌이 일어나면 서로 싸우고 안보거나 한쪽이 한쪽을 설득해낼 수 있어야 관계가 유지 된다.
어떤 가치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은 매우 순식간에 일어나기도 하고 혹은 매우 오랜시간동안 쌓인 후 변화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가치를 받아들이는 순간 우린 결국 그것과 충돌하는 또다른 가치들을 버린셈이 된다. 이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상황이 된다.
삶을 의미있게 만들고 싶은 것은 대다수 사람들의 맹목적인 희망이겠지만 삶은 의미있지 못하다. 삶이 의미있는 것은 그저 내가 의미있다고 믿고 또 주변인들이 나의 말에 토를 달지 않을 때 뿐이다.
그래서 좀 더 본질을 보려하고 생각을 더 하면 우린 내 가치에 대한 허망함과 타인의 가치에 대한 인정을 좀 더 쉽게 해낼 수 있다. 누구나 의미 있는 삶을 살려고 하는게 왜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그 의미가 꼭 우리가 말하는 정의로움일 필요는 없다. 그냥 각자가 자신이 제일 잘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갈 뿐.
물론 나 역시 이론으로만 알고 있을 뿐.. 정말로 나에게 이런 관용과 현명함이 주어진다면 그땐 또다른 생각이 나의 머리를 지배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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