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아날로그 감성

아이루다 2012. 12. 28. 21:22

 

지금은 거의 완전히 사라졌지만 중/고등학교 시절만 해도 크리스마스나 연말이 되면 친구들 사이에 카드를 보내는 문화가 있었다. 그런 문화를 반영하듯 12월이 되면 문방구나 시내에 가게들은 가게 밖에 각종 예쁜 카드를 전시해 놓고 사람들의 손길을 기다렸다.

 

PC는 물론 프린터기가 없었던 시절 글을 적는 수단은 오직 펜밖에 없었으므로 볼펜이나 혹은 멋들어진 붓펜등을 이용해 정성스럽게 글을 썼고 주소를 적어 넣었다. 그래서 그땐 친구들 집 주소를 꼭 알아야 했었다. 또한 학교에서 계속 만나는데도 불구하고 따로 편지로 보내는 것은 그만의 다른 맛이 있어서였다. 때로는 생각지 못한 친구에게 카드가 오곤 했었는데 그것은 보통 호감을 의미하는 방법이었다.

 

이 행사는 1년을 마무리하면서 한해 인간관계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시기였기에 다들 꽤 신경을 많이쓰고 또

보낸 카드 대비 받은 카드의 수를 세면서 나의 득실을 따지곤 했다. 적게 보내고 많이 받으면 나는 꽤 인기 있는 사람이고 보낸만큼 받으면 나는 그럭저럭한 사람이고 보낸것 대비 너무 적게 받으면 난 친구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물론 아예 참여하지 않는 아이들도 있었는데 보통 그런 아이들은 교실 한쪽에서 거의 눈에 띄지 않게 학교를 다니는 친구들이었다.

 

그땐 이런 정확한 의미는 몰랐고 아무튼 매년 연말은 이런 행사로 인해 늘 기대를 많이 했고 거리는 캐롤송과 함께 연말 분위기를 한껏 느끼게 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자필 편지를 쓴것은 아마 군대에 있었을 때였을 것이다. 물론 그후로 편지를 꽤 쓰긴 했지만 거의 이메일이였다. 그리고 이상하게 이메일은 내가 편지지에 이쁘지 않은 글씨체로 쓴 편지와는 느낌이 다르다. 또 중간 형태로 문서로 친 후 프린터기로 뽑은 종이에 잘 정렬된 폰트로 그려진 편지도 다른 느낌을 준다. 손으로 쓴 편지와 나머지의 가장 큰 차이는 인쇄된 느낌이나 모니터로 보는 이메일에서는 유일한 존재라는 느낌이 없다. 그것은 아마도 당연히 디지털 자료는 복사가 너무나 쉽기 때문일 것이다.

 

그 차이를 좀 더 명확히 정의한다면 아마도 '정성' 이란 단어가 가장 어울릴 듯 하다.

 

손으로 쓰는 글은 매우 신경이 쓰인다. 잘못 쓰면 지우기도 힘들고 또 필체가 좋지 않는 나 같은 사람은 한글자 한글자 쓰는것에 꽤나 정성을 들여야 하기에 한장의 편지만 써도 팔이 아플 지경이고 이것을 또 편지로 붙이려고 한다면 편지를 넣을 봉투와 우표까지도 구해야한다. 또한 이것을 빨간 우체통에 넣어줘야 하며 이 과정을 위한 상대의 주소지 역시 알고 있어야 한다.

 

이러니 이메일 주소 하나만 알고 컴퓨터로 뚝딱뚝딱 쓴 후 전송만 누르면 되는 상대적으로 너무도 간편하고 편한 이메일로 쓴 편지는 너무도 쉽다. 하지만 쉽다는 것이 꼭 장점만은 아닌 것이다.

 

이것을 아마도 아날로그 감성이라고 할 것 같다. 나의 경우엔 학창시절엔 아날로그 감성 속에 살았고 20대 중후반 부터는 거의 디지털 시대 속에 살아왔다. 특히나 요즘은 디지털 감성이란 말까지 통용되듯이 디지털도 감성을 따지는 시대가 되었다. 무한 복제의 시대에 새로운 감성 기준이라고 할까?

 

한때 전자책도 꽤 읽었지만 조금만 내용이 어려운 책은 거의 읽기가 힘들었다. 언제 어디서고 간편히 읽을 수 있는 장점은 있지만 전자책은 정말 쉬운 내용의 소설정도가 딱이고 조금이라도 학술적인 내용이 들어가 있으면 집중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그래서 요즘은 거의 종이 책을 읽고 있다.

 

사람의 아날로그 감성은 매우 시대 중심적이다. 음악 같은 경우엔 한 10년 전부터 mp3 파일이 유행해서 이젠 CD가 아날로그 감성이 될 지경이다. 하지만 LP에서 CD로 바뀌는 시점엔 LP가 아날로그였다. 지금도 아마 내 나이정도의 사람들이라면 CD는 디지털 LP는 아날로그로 느낄 것 같다. 그렇다면 LP는 왜 아날로그인가? LP역시 음을 기억하는 방식 중 하나인 것이다.

 

연극과 영화는 다르다. 연극은 실제로 눈 앞에 배우들이 연기를 하는 것이고 영화는 이미 해놓은 연기를 담은 필름을 통해 본다. 요즘 디지털 시대엔 아예 영상파일로 되어 있는 완전한 디지털 자료를 통해 본다. 이 경우에 연극을 아날로그 영화를 디지털로 분류해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필름까지를 아날로그 컴퓨터 영상파일을 디지털로 분류할지도 모르겠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필름 카메라와 디지털 카메라. 디지털 카메라 같은 경우엔 기본적으로 영상보정 기능이 들어있고 또한 컴퓨터에서 인식할 수 있는 파일이기에 포토샵과 같은 강력한 편집툴로 사진을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꾸밀 수 도 있다. 그럼 필름 카메라가 아날로그이고 디지털 카메라가 디지털인가?

 

아마도 대충 현시대에는 이런 기준이 맞을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100년 전, 혹은 100년 후 이 정의가 맞을 수 있을까? 그것은 절대로 아니다.

 

미래의 우리는 뇌에 구멍을 뚫어 정보를 인식기관을 통하지 않고 바로 뇌로 집어 넣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과도기를 살아가는 미래의 인간 후손은 다섯가지 인식기관을 통해 사물이나 정보를 인식하는 방법을 아날로그 감성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누가 아는가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를 말이다.

 

2012년 겨우 며칠 남은 오늘 나는 성탄절 카드나 신년 축하 카드를 그리워 하고 있지만 그것은 바로 2012년에 내가 40대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실제로 내가 느끼는 감정이나 생각은 매우 주관적인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것들은 남들과 쉽게 공유가 되지 않는 경향도 있다. 그런 이유로 인해 가끔은 이런 느낌을 공유할 수 있는 이들을 만나고 싶긴하다. 물론 같이 착각을 하기 위해서이지만.

 

감정에 숨어 있는 실제적인 이유를 알면서도 겨울산에 흐르는 작고 맑은 어느 개울물이 얼음밑으로 흘러가는 소리가 그리운 것은 아마도 내가 아직까지는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고 또한 내가 아직까지는 세상에 덜 혼탁해졌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란 생각도 언뜻 스쳐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