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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불행의 정당성, 네 행복의 정당성

아이루다 2019. 12. 28. 11:32

 

 

매일같이 사람들은 많은 말들을 한다. 내 얘기도 하고, 네 애기도 하고, 그 자리에 없는 또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한다. , 사실 솔직히 말하면 대부분 그 자리에 없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좋은 이야기는 별로 안 한다.

 

아무튼 사람들이 매일 수 많은 말들을 할 때 단골로 나오는 주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과거에 느꼈거나 현재 느끼고 있는 감정들에 대한 표현들이다누군가 자신을 서운하게 했다든지, 누군가 자신을 짜증나게 했다든지, 누군가 자신을 억울한 감정이 들기 했다든지, 누군가 자신을 즐겁게 했다든지 하는 등의 이야기들로 구성된다.

 

그리고 그런 표현들 중에서 주로 서운한, 짜증, 억울함 등과 같은 부정적 감정에 대해서 말할 때는 언제나 암묵적으로 듣는 사람의 동의를 구하고 있다. 그리고 상대가 동의를 해주면 자신이 공감을 받았다고 느끼면서 기분이 나아지고, 그렇지 못하면 상대방이 자신을 무시한다든지, 센스가 없다든지, 둔하다든지 하는 등의 불만이 생겨나면서 또 다른 부정적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만약 특정 어떤 사람에게 그런 일이 반복되면 그 상대와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점점 줄어든다. 그런 상대는 뭔가 명확히 설명하기 좀 힘들지만, 만날 때마다 은근히 기분 나쁜 사람이 된다.

 

이런 과정을 보면 사람들은 매일같이 자신이 느낀 어떤 감정들이 나름대로 타당성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받고자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자신이 느낀 감정들의 정당성을 얻고자 말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매일 그런 행동들을 할까? 자신이 어떤 부정적 감정을 느꼈다면 그것을 그대로 끝내지 못하고 끝없이 다른 사람들의 동의를 구하려고 하게 될까? 그 상태로 그냥 두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일단 부정적 감정이 들면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해결해야만 다시 평온해질 수 있어서 그렇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매우 불편하고 불안하다.

 

그리고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한가지 슬픈 진실이 숨겨져 있다.   인간이 느끼는 모든 감정이 바로 살고자 하는 생존본능에서 나오며, 그 생존본능을 채우기 위해서는 자신이 살아가야 할 이유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야만 하는 확실한 이유를 가지고 싶어한다. 그래야 다른 생명체를 죽이면서 살아가야 하는 삶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과 경쟁을 했을 때 이기려고 최선을 다할 수 있다.

 

이것은 삶의 정당성이며, 삶의 정당성이 부족한 사람들은 늘 다른 사람들에게 치이게 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어려서부터 '넌 왜 태어난 것이냐?' 라는 말을 자주 듣고 자란 아이들의 경우 평생 동안 자신의 삶에 대한 정당성이 부족해서 늘 노이로제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삶의 정당성은 매일 느끼는 감정의 정당성으로 이어진다. 사실 우리가 느끼는 부정적 감정이라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손해를 입었다는 것이고, 손해는 결국 생존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것이 자신의 문제로 생겼다면 아주 큰 문제가 된다. 그럴 경우 평생 계속 반복될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반드시 자신이 문제가 아닌 타인이 문제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자신이 느끼고 있는 나쁜 감정의 원인이 타인에게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감정 정당성을 가지고 싶은 욕구의 시작점이 된다. 이런 과정은 이해는 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정상적인 것은 아니다.

 

생존본능 자체는 생명체로써 당연히 가져야 할 것이지만, 문제는 한 생명체가 살고자 한다는 사실은 정당한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점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가 살고자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지만 그것은 오직 각 개인의 주관적 입장에서만 옳지 절대로 모든 사람들에게 옳은 객관적 진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래 처음부터 정당성이라는 단어 자체가 객관성을 가지고 있다. 나 혼자 정당하다고 우겨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정당성을 얻으려면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지지가 필요하다. 사실 제대로 된 정당성을 얻으려면 모든 사람들의 완벽한 동의가 필요한데, 이 세상에 그런 것은 존재할 수 없다.

 

그래도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타인의 생존에 대한 정당성을 인정해주는 편이다. , 그 인정이 유효한 범위는 늘 정해져 있다그저 사람들마다 차이가 조금 날 뿐이다. 그리고 아무리 범위가 넓은 사람도 누군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기 전까지만 유효하다. 그래서 누군가 나를 죽이려고 할 때 살기 위해서 상대방을 죽이게 되면 분명히 '살인'을 했더라도 그 정당성이 인정되어서 처벌을 받지 않는다그야말로 '정당방위' 이니까 말이다.

 

매일 같이 사람들 틈에서 샘솟듯 쏟아져 나오는 감정들은 모두 정당성을 얻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실제로 정당성을 얻는 듯 보이지만 진실은 전혀 다르다. 그 감정들은 원래 객관적 정당성이 전혀 없는 자신의 생존본능의 활동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느끼는 모든 종류의 감정은 처음부터 정당한 것과는 전혀 결이 다르다. 어떻게 감정이 정당할 수 있겠는가그래서 감정이 정당하다는 말은 '너의 체중은 참 길다' 라는 표현처럼 앞뒤가 안 맞는 것이 되고 만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끝없이 자신의 감정에 대한 정당성을 추구한다그래야 불안하지 않고, 불안하지 않을 때 생존 가능성이 높아진다. 어떤 감정을 느꼈는데 그 감정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부정되면 그것만큼 불안한 것도 없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생존을 부정 받은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들 그렇게 자신의 감정에 대한 정당성을 얻고자 매일 같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꼈고 그 감정을 왜 느끼게 되었는지를 자신의 잘못은 최소화 시키고 상대의 잘못은 집중적으로 부각시켜서 설명하려고 한다. 그래야 동의를 얻기 쉽기에 그렇다. 그러다 보니 어떤 갈등 상황에 놓이면 가능하면 양쪽 말을 다 들어봐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감정 정당성을 찾으려는 노력은 비단 자기 자신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놀랍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이 느낀 감정에 대한 정당성도 판단하려고 한다. 그래서 상대방이 근거 없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 듯 보이면 그것을 부정하거나 지적하려고 한다.

 

하지만 내 감정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타인의 감정의 정당성을 판별하는 것은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목적이 달라서 그렇다. 특히 정당성을 얻으려고 하는 감정의 종류가 다르다. 자신의 감정에 대한 정당성은 주로 부정적 감정에 한정된다면 반대로 타인의 감정에 대한 정당성은 주로 긍정적 감정에 한정된다.

 

우리가 자신의 불행한 감정들을 공감 받고 정당성을 얻으려고 하는 이유는 앞이 설명을 통해서 그나마 쉽게 이해 할 수 있다그렇게 남 탓으로 돌려야만 자신이 매일 살아가고 있는 삶이 불안하지 않을 수 있어서 그렇다. 하지만 왜 우리는 타인의 행복에 대해서도 정당성 여부를 판단할까?

 

여기에서 참으로 슬픈 이유가 숨겨져 있다. 그 이유는 바로 타인이 행복해지면 행복해질수록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자기 자신이 불행해지기 때문에 그렇다타인의 불행을 통해서 상대적으로 행복해졌기에타인의 행복으로 인해서 상대적으로 불행해진다

 

그리고 사람들은 불행해지는 것이 싫기 때문에 누군가의 행복이 반드시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그렇지 못하고 우연히 얻은 행복은 쉽게 용납하지 못한다.

 

만약 쉽게 용납했다면 이미 그 자신이 그 정도의 행복 정도는 웃으면서 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행복한 상태였을 때임을 의미한다. 그 이외엔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질투가 생겨나게 된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미 상대방이 충분히 고생을 해서 이제 제발 좀 행복해졌으면 하는 경우 정도이다. , 대가를 충분히 치렀을 때만 허용이 된다.

 

이런 심리로 인해서 부잣집 자식으로 태어나 그 돈으로 평생 호의호식하는 사람과 가난하게 태어났지만 엄청 힘든 노력을 통해서 자수성가한 사람을 서로 다르게 바라본다.

 

물론 전자는 별 다른 노력도 없이 부모로부터 쉽게 얻은 것이고 후자는 힘들게 노력을 해서 스스로 얻은 것이니 당연히 다르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간과하는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노력을 해서 성공할 수 있는 것도 결국 부모로부터 받았다는 진실이다.

 

성공할 수 있는 '좋은 머리'와 그 머리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노력할 수 있는 성격', 이 둘 모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특히 노력하는 성격은 절대로 노력해서 얻을 수가 없다. 지적 능력이 부족한 것은 노력하는 성격으로 따라잡을 수 있지만 노력하는 성격이 부족한 것은 절대로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다.

 

사실 이런 사람들의 착각은 흔히 일어나는 편이다. 외모가 좋게 태어난 사람들에게 외모적 차별에 대한 강한 불만을 늘어 놓으면서도 지적 능력을 뛰어나게 태어난 사람에 대해서는 쉽게 인정한다. 그 둘 모두 부모로부터 받은 유전의 결과인데도 그렇다그래서 '외모 지상주의' 라는 말은 있어도 '지능 지상주의' 라는 말은 없다.

 

그리고 좀 더 현실적으로 봐도 외모가 좋은 것보다 머리가 좋은 것이 나중에 경제적으로 훨씬 더 유리하다. 물론 외모가 아주 탁월하게 좋다면 모르겠지만 대충 비슷한 수준의 외모와 지적 능력이라면 당연히 머리가 좋은 것이 평생 더 유리하다. 더군다나 외모는 젊은 시절 짧게만 유효하지만 머리가 좋은 것은 죽을 때까지 유효하기에 더욱 더 그렇다.

 

비슷하게 사람들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보다 노력해서 얻은 것에 대한 가치를 훨씬 높게 평가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유명한 경구가 있다. 자식을 잘 키우려면 물고기를 잡아 줄 것이 아니라 물고기 잡는 법을 알려줘야 한다는 것 말이다.


 

같은 원리로 많은 재산을 물려받은 사람보다 스스로 그 재산을 일군 사람이 훨씬 더 복 받은 것이다. 물려 받은 사람은 그 재산을 날리면 끝이지만 일군 사람은 언제든 또 다시 만들어 낼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훨씬 더 좋은 것을 받고 태어난 행운아를 힘들게 노력했다는 이유로, 그러니까 충분한 대가를 치렀다는 이유로 쉽게 인정해주는 것이다.

 

상대방의 적절한 대가를 치르지 않는 행복에 대한 비판적 판단, 이것은 이런 식으로 설명해줘도 잘 납득이 되질 않지만 우리 모두가 매일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는 짓 중에 하나이다. 그리고 이런 무의식적 행위가 삶 속에서 큰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처음 만나 호감을 느낀 사람과 친해지기 위해서 선물을 주기도 하고 밥을 사주기도 할 수 있다. 비록 당장은 자신이 좀 손해를 보더라도 상대방을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게 해주면 당연히 나를 좀 더 좋아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관계를 잘 맺어 놓으면 어떤 식으로든 나의 행복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복잡하면서도 자연스러운 계산법이 깔려 있다.

 

이런 과정이 사람들이 친해지는 원리이다. 그리고 이때 호감의 근원은 바로 이득이며, 그 이득은 단순한 금전적인 것이 아니라 행복 그 자체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려고 애쓴다.

 

하지만 그런 투자가 늘 성공적일 수는 없다. 그래서 언젠가 자신이 결국 누군가에게 주기만 한 호구가 되었음을 알기도 한다. 그리고 이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한 배신감과 억울함 그리고 분노까지 느끼게 된다.

 

투자를 실패해서 손해를 입었으니 일단 기분이 나빠야 하는 것은 정상적이다. 하지만 배신감이나 억울함을 느꼈을 때 경험하는 감정들은 그 이상이다너무 강렬해서 어떤 경우엔 폭력이나 살인이 일어날 수도 있다.

 

왜 이렇게 강렬한 감정 반응이 일어날까?

 

자신의 판단 미스에 대한 자책감을 느끼긴 하겠지만 오직 자책감만으로 그렇게 되기는 힘들어 보인다. 뭔가 또 다른 원인이 있어야 한다. 이때 원인이 되는 감정 중 하나가 바로 상대방이 자신의 호의를 통해서 정당하지 못하게 행복해졌다는 분노이다. , 자신이 쓴 돈으로 상대가 그만큼 행복해졌는데, 그 행복이 공짜로, 아니 더 심한 경우로 자신의 손해라는 불행을 통해서 얻은 행복이 아닌가?

 

그것을 그냥 넘기기엔 너무 억울한 것이다. 배신감도 들지만 참기 힘들게 억울하다. 그러니 어떤 식으로든 그 행복을 뺏어야 한다고 느낀다. 그래서 상대방의 기분을 잡쳐 놓을 수 있는 날선 말들이 나갈 수 밖에 없다. 그렇게 해야 억울한 감정이 조금이라도 풀리기에 그렇다.

 

사실 인간이 느끼는 감정 중 가장 견디기 힘든 것 중 하나가 바로 억울함이다. 그래서 어떤 억울함은 평생을 함께 하기도 한다. 그러니 복수라는 과정을 통해서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결국 사람을 잘못 봐서 잘못된 투자를 했을 때 느끼는 강한 분노의 원인은 손해 그 자체가 아니다. 상대방이 얻은 행복을 인정하기 싫은 감정이다. 대가를 치르지 않고, 아니 그 대가를 내가 대신 치르고 상대만 행복해진 그 상황이 너무도 싫은 것이다.

 

전혀 모르는 부잣집 자녀가 자기 돈을 펑펑 쓰는 것에서도 사회 공공성이나 위화감 같은 개념들을 끌어다가 그 돈에 대한 정당성 여부를 따지는데, 자신의 희생을 통해서 상대방의 행복이 이뤄졌다면 얼마나 더 기분이 나빠질까?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고 해도 차분히 객관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부잣집 자녀가 돈을 펑펑 쓰는 것과 내가 투자를 했지만 약간의 돈을 잃은 것이 왜 나의 불행으로 이어져야 할까

 

사람들에 따라서는 부잣집 자녀가 돈을 펑펑 쓰는 것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것이라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사람이 자신이 운영하는 가게에 와서 펑펑 써도 그런 생각이 들까?

 

사실 꼭 자신의 가게가 아니더라도 부잣집 자녀가 돈을 펑펑 쓴다는 것은 부잣집의 돈이 다른 집으로 옮겨가는 긍정적인 현상이다. 그러니 오히려 더욱 더 칭찬해줘야 할지도 모른다. 또한 사람을 잘못 봐서 밥 한두 끼 산 것이 자신에게 정말로 그렇게 큰 손해일까?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몇 만원의 돈이 큰 돈일 수도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쓸만했으니 쓴 것이 아닌가? 몇 만원이 정말로 아쉬운 사람이라면 그 돈을 처음부터 타인에게 쓸 리가 없다. 미래에 대한 투자는 기본적으로 현재의 여유에서 나오니까 말이다.

 

그래서 결국 돈이 아까운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좀 더 깊게 생각해보면 돈 몇 만원 잃은 것에 대해서 그렇게 화낼 필요가 없다. 그깟 몇 만원에 왜 스스로 불행해지려고 하는가그런 불행은 사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다른 누군가의 행복엔 반드시 그것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믿음, 그러니까 거기엔 상대가 느끼고 있을 행복에 대한 질투심이 깔려 있음을 인식해 내야 한다. 그래야 멈출 수 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런 흐름을 어떻게 정말로 자신의 행복에 도움이 될까를 생각해봐야 한다.

 

사실 나 자신이 느끼고 있는 나쁜 감정들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려고 하지 않거나, 타인이 느끼고 있는 좋은 감정들에 대한 정당성을 판단하는 짓만 그만해도 우리의 행복 수준은 훨씬 높아질 수 있다. 매일 그것들 때문에 끝없는 타인에 대해 불필요한 관심을 가지게 되어서 머리만 복잡해지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그렇다.

 

생각은 공짜가 아니다. 분명히 체내 에너지를 쓰는 일이며 우리가 더 나은 곳에 쓸 수 있는 삶의 활력을 소비하는 일이다. 남 얘기 할 시간에 나의 이야기를, 남의 행동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할 시간에 내 행동을 하면 된다. 그러면 얼마든지 더 행복할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우리가 매일같이 타인에 대해서 이런 저런 말을 하는 이유에 정작 '그들에 대한 관심' 은 하나도 없음을 스스로 자각해야 한다. 그저 우리 자신에게 매일 생겨나고 있는 감정에 떠밀려서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감정은 그저 감정일 뿐, 처음부터 정당한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결국 무의미한 행동이다.

 

내 삶이 정말로 소중하다면, 나에게 주어진 유한한 시간이 그리도 소중하다면 왜 그런 소중한 시간을 불필요하게 별 관심도 없는 타인을 위해 낭비할 필요가 있는가?

 

그 역시도 그저 행복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다. 내 불행의 이유를 타인에게 찾으면서 안도감을 얻고, 타인이 행복해지면 상대적으로 불행하다고 느끼기에 타인의 행복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그럴 때마다 당장 마음은 편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저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지금보다 조금 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 소중하다고 여겨야 한다. 내가 소중하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우리들에게 각자 주어진 삶 그 자체가 너무도 소중한 것이다. 그 소중한 것을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들에 대한 정당성을 찾고자 하는 시간으로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너무도 아름답고 멋진 것이다. 그것을 지금 당신은 잘 모르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내 감정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타인의 감정의 정당성을 판결하고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것들은 그것이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언제나 하나였을 뿐이다. 행복이다. 최선을 다해서, 할 수 있는 힘을 다해서, 언제나 행복을 향해 가야 한다. 그것이 삶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