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단계 - 살아가는 방식의 선택
대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몇 년쯤 후에 대학교 시절 꽤나 친하게 지냈던 친구 녀석에게 한번 보자고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뭐 그간 몇 차례 연락은 주고 받았으나 늘 나중에 한번 보자고 말만 하고는 잘 안보게 되는 친구였다. 그 이유는 내가 군대에 갔다 온 후 그 친구와 몇몇이 함께 제법 잘 어울리고 자취방도 같이 얻어서 썼었는데, 같이 살다가 보니 밖에서만 보이는 이미지가 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내 스스로 약간의 벽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 별로 만나고 싶은 친구는 아니었다.
겉으로 보기엔 털털하고 단순하게 사는 듯 보였으나 같이 살다 보니 그런 모습이 제법 계산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타인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려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보통 사람은 계산적인 사람보다는 단순한 사람에게 더 끌리는데 그 이유가 바로 경계심 때문에 그렇다. 나 역시도 예외가 아니라서 밖에서 보던 그 친구는 꽤나 괜찮았는데 살아보니 너무 계산적인 모습이 느껴졌다.
아무튼 졸업 후 한참 시간이 흘러 오랜만에 다시 그 친구를 만났을 때, 그 친구는 나를 어떤 모임에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 모임은 바로 그 유명한 '암웨이' 였다. 그 친구가 다단계 판매로 유명한 그 회사에서 두 번째 직업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이 친구는 이미 직장도 꽤나 탄탄하고 연봉도 그 당시 나보다 훨씬 낫게 받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더 돈이 필요했는지 아니면 뭔가 목표로 한 것이 있는지 모르지만 두번 째 직업을 꽤나 열심히 활동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아마도 내가 암웨이와 같은 다단계 회사에 대해 전혀 경험이 없었다면 나는 그 참석했던 강의에 솔깃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미 내 머리 속에는 이 다단계 회사들에 대한 정의가 내려져 있었기에 친구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이렇게 설명했다.
"암웨이가 불법도 아니고 꽤나 좋은 네트워크 판매라는 것은 알지만, 이것을 하려면 내가 아는 지인들을 단순하게 아는 사람들이 아닌 고객으로 봐야 한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 나를 고객으로 보는 사람이나 혹은 내가 누군가를 고객으로 보는 것 그 자체가 싫다. 그리고 이것은 성격이 맞아야 하는데 나는 이런 것에는 영 잼병이다. 그래서 잘 맞는 너는 해도 되지만 나는 못한다"
내가 아마 무작정 거절했으면 그 친구는 꽤나 집요하게 나를 설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말했더니 꽤나 쉽게 포기를 했다. 그리고 또 하나 내가 놀랐던 것은 그 친구가 그 사이에 종교를 가지고 기독교를 믿고 있는다는 점이었다. 정말로 종교와는 너무도 안 어울리는 이미지의 친구였는데 말이다.
암웨이와 같은 다단계 회사는 공급되는 상품의 유통망 자체를 도매까지만 진행하고 이후로는 개인별로 각자 점 조직으로 진행이 되는 특징을 가졌다. 그리고 광고를 하지 않아서 마케팅 비용을 줄여서 결국엔 소비자는 싼 가격에 좋은 물건을, 판매 사업자는 소매의 마진을 보장 받는 형태의 사업이다.
그래서 실제로 이들은 사업자이면서 소비자가 된다. 그리고 자신의 밑으로 관계를 맺은 이들이 열심히 활동하여 사용하고, 팔기를 잘하면 결국 고액의 수입이 보장되는 구조이다. 개념상 이것은 그리 나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런 구조적 문제로 인해서 개인의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한없이 얽히는 문제가 발생한다.
보통의 삶에서 회사 내 직원, 고객, 거래처 사람들 등등과 나의 가족, 나의 지인과는 분명하게 갈린다. 그래서 관계성에서 회사에 있는 동안은 회사 내 연결된 인간 네트워크에 소속되어 거의 그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살아가고 퇴근 후에는 나의 지인 및 가족과 연결되어 회사에서와는 다른 종류의 삶을 산다.
이것을 단순화 시키면 회사에서의 모든 관계는 목적은 돈으로 귀결되고, 퇴근 후 모든 관계는 나 자신의 삶 자체를 목적으로 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뒤섞이면 좀 골치 아파진다. 결국 우린 직장을 통해 돈을 버는 이유 그 자체가 바로 자신의 삶을 위해 위함이다. 그런데 암웨이와 같은 다단계 사업을 하게 되면 이제 퇴근 후의 삶도 낮의 직장에서 삶과 그리 큰 차이가 없어진다.
물론 열심히 산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주장하듯 좋은 물건을 쓰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단순히 이렇게만 끝날까?
몇 년 전 TV에 빚 때문에 하루에 두 시간을 자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저씨의 사연이 소개된 적이 있었다. 정말로 그 분의 모습을 보면 우리의 평소의 삶이 얼마나 게으르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분이 그렇게 십여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여 한 달간 버는 돈이 약 450만원 정도라고 했다. 결국 그 분은 놀랍게도 수억의 빚을 다 갚았다.
열심히 산다는 것에 대해서 만큼은 정말로 타인의 귀감이 될만한 사람이다. 그런데 얼마 전 그분의 최근 소식을 들었다. 그것은 대장암에 걸리셔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것이다. 왜 대장암에 걸렸는지는 알아낼 방법이 없어서 뭐라고 말하긴 힘들지만, 정말로 하루에 2시간씩 자면서 수년간 살았다면 어쩌면 암이나 기타 치명적인 질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 신기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 인간에게는 적정한 휴식과 적정한 근로가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데 이것이 심하게 한쪽으로 기울면 몸이 탈이 나게 되는 것이다.
다단계 판매 역시도 이런 것과 맥락이 비슷하다. 우리가 열심히 살아 돈을 모으기 위해, 퇴근 후 또 다른 직업을 선택해서 그것을 열심히 하는 것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상대적으로 매일 집에 와서 TV만 보는 것보다는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관계가 명백한 이득을 기반으로 한 계산적 관계로 바뀌고 자신의 전화기에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의 연락처가 모두 거래처라면 도대체 우린 언제 진정한 휴식을 취할 수 있을까?
어떤 이들은 아마도 너무도 굳은 심지와 칼날 같은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라서 이런 휴식이 아예 필요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제적 활동을 한 후 필수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이것을 어떤 식으로든 간에 풀어 줘야만 나머지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사냥을 마친 동물이 느긋하게 다음 사냥까지 쉬는 것이 꼭 필요 하다는 뜻이다.
물론 아마도 다단계를 하는 내 친구는 그 자녀의 존재가 거의 유일한 휴식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정말로 좋은 환경에서 키워내어 신분 상승을 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한 자신의 목표가 되었을지 모른다. 이미 그 아내 역시도 같이 다단계를 하고 있었으니 아내도 이미 사업 파트너가 되어 버렸으니까 말이다.
누군가는 암웨이를 우스운 말로 '암으로 가는 길' 이라고 해석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이 농담이 그저 단순한 농담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앞에서 말한 살인적인 알바를 하시던 그 분의 이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공자님 말씀처럼 중용의 도에 대한 가치는 나이를 먹을수록 선택이 아닌 필수처럼 다가온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것은 단순히 중간이나 가라는 것이 아니고 정말로 삶을 살아가는데 너무도 중요한 가치 기준이다. 나는 한때 공자님을 오해했었다.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 있는 이 사회에서 한 푼이라도 더 벌어 자녀를 양육하고 노후를 잘 보장 받고 싶어하는 그 심리는 충분히 이해한다. 나 역시도 돈을 목표로 삼고 살아가진 않지만 돈의 필요성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나 나름대로는 그런 획일적 가치체계에서 벗어나 살고 있다고 우겨도, 결국엔 내가 선택한 대안 역시도 모두 돈이 들고 있다는 점도 역시도 부정할 수 없다.
아마도 살아 생전 그 친구를 다시는 안보게 되겠지만 나는 그 친구의 숨겨진 계산 능력, 사람과 살갑게 잘 지내는 그 재주, 자신의 삶에 대한 뚜렷한 목표, 나이를 먹고 갖게 된 기독교라는 종교가 모두 하나 같이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아마도 그 친구는 우리 사회가 말하는 보수주의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쯤은 서울에 꽤나 큰 아파트 한 채 정도는 사서 그것을 통해 돈을 좀 벌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또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렀으니 충분히 그렇게 살 것이다.
그 친구의 선택은 돈이었고 결론으로 나와의 관계는 완전히 끊겼다. 그리고 아마도 나와 비슷하게 그 친구와 관계가 끊긴 애들도 있을 것이고 또한 비슷한 부류로서 새로운 관계들이 맺어져서 그들만의 세상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선택의 문제이다. 나는 단지 그 친구가 간 길을 선택하지 않았고 그것으로 인해 그런 종류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지만 나는 가끔 그 친구의 삶이 씁쓸하게 느껴진다. 물론 온전히 내 입장에서만 그럴 것이다. 아마 그 친구 입장에서는 내 삶이 우울하게 느끼질 지도 모르겠다.
우린 먹어야만 생명의 존재를 연장시키는 필연적인 운명을 태어난 존재이다. 그것도 그 먹을 것을 스스로 만들어내지 못해서 어떻게든 외부에서 공급받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식물은 정말 멋진 생명체이다. 그들은 해를 바라보기만 해도 자신을 키우고 열매를 맺어낸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우리 인간은 이 외부의 에너지를 공급받기 위해 결국엔 돈을 벌어서 먹을 것을 사야만 한다. 물론 인간으로 태어나 밥을 먹는 것 자체는 그리 매우 큰 난이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어떤 먹을 것을 사서 먹느냐의 차이는 심하게 나지만.
여기에서 중요의 도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 중용의도 마져도 개인간에 가치관에 따라서 천차만별일 수 있다. 그래서 어쩌면 중요한 것은 매일매일 바뀌고 있는 현재의 삶 자체를 끝없이 다시 판단하여 중용의 지점을 매번 재해석 하는 과정일 것이다. 적어도 이렇게 자신의 위치를 늘 재조정하고 살다가 보면 결국 그것이 그 자신의 살아가는 가장 의미 있는 삶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