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능력 구분 - 후기
지난번 글에서 인간의 능력에 대한 나름 장황한 글을 썼는데, 내 블로그의 유일한 애독자 분에게 약간의 항의가 들어왔다. 그것은 인간의 능력을 신체,지능,정신 세가지로 구분하고 그 중에서도 간과하기 쉬운 정신력을 발전 향상 시키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는 글까지는 이해를 하겠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고 불평을 하셨다.
나는 그것이 모든 문제를 스스로 풀어내지 않고 늘 타인이 만들어 놓은 답안을 보려는 한국 교육의 문제라고 농담 삼아 한마디 하고는 지나갔는데 다시 글을 보니 그것에 대해 아예 언급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너무 두리뭉실하게 표현을 해서 결국 명확하게 와 닫지 않은 모양이다.
또한 우스개 소리로 말했지만 그 말을 하면서도 우리 인간은 머리 속에서 드는 정답을 찾기 힘든 수 많은 문제점에 접했을 때 실제로 앞서간 타인의 정답을 생각보다 많이 의지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왜 우린 늘 그 어떤 문제든지 간에 스스로 풀어내기 보다는 누군가 써 놓은 답을 보고 따라 하려는 것일까?
예전에 읽은 글 중에서 딴지일보 총수로 유명한 김어준씨가 자신이 맡은 상담 프로그램에 걸려오는 전화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내용이 이랬다.
'사람들은 나에게 상담 전화를 한 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그것에 대해 조언을 해 달라고 한다. 혹은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지 모르겠다고 알려 달라고 한다. 그런데 수 십년을 알고 지낸 그 자신도 모르는 것을 내가 무슨 재주로 어떻게 살지, 어떻게 해야 행복할지 말해 줄 수 있느냐'
김어준씨를 내 자신이 개인적으로 아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가끔 그가 하는 말에 담긴 지혜로움을 느낀다. 비록 표현이 좀 거칠긴(?) 하지만 확실히 그는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이다.
그가 말한 말의 내용은 정말 중요한 포인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듯 우린 왜 자신이 아닌 남에게 자신의 문제를 물어 보는 것일까? 그리고 왜 조금이라도 혼란스러운 상황을 견뎌내지 못하는 것일까? 결국 그래서 자신의 머리가 복잡해는 생각이나 잘 모르겠다는 답답함이나 혹은 그로 인해 기분까지 다운되는 상황이 벌어지면 어떻게든 그것을 해결을 하든, 잊든 하려고 할까?
물론 우리는 머리가 복잡하면 불행하게 느끼는 것은 맞다. 하지만 머리가 복잡해지기 않기 위해 하루 종일 스마트 폰과 TV만 붙잡고 사는 것이 제대로 된 해결책일까? 아니면 그것보다는 낫지만 재빨리 누군가 만들어 놓은 정답을 보면서 '그래, 그건 이렇게 생각하면 돼' 아니면 ' 그래,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 것이야' 라고 같은 결론을 내고는 최대한 빨리 잊는 것이 해결책일까?
나는 개인적으로 이 두가지 해결책 모두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물론 생각을 하는 것은 어떨땐 좀 고통스럽기도 하고 사고의 흐름이 원할하지 않을 땐 많이 답답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기에서 포기한다면 마치 공부를 하다가 이해가 안된다고 해서 영화를 보러 가거나 아니면 다른 책으로 대상을 바꾼다고 해서 해결될 것이 아니지 않은가?
스님들 사이에는 '선문답' 이란 일반인은 참 이해하기 어려운 대화법을 나누는 경우가 있다. 물론 이 선문답을 하는 수준의 스님이라면 보통 고승의 소리를 들을 정도로 깊은 공부와 사고의 경험을 한 분들이겠지만 아무튼 이 선문답의 특징이라면 정말로 수십년간의 시간을 단 몇개의 단어를 통해 합축적으로 표현을 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다보니 일반 사람은 그것을 들어도 도저히 그것이 가진 의미를 해석할 길이 없다. 우리는 일반사람에 속한 시인들이 쓴 시나 화가가 그린 그림을 이해하기도 거의 불가능한데 도대체 수십년의 생각의 끝에 다다른 이들이 하는 그 한 두마디의 말을 이해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고 일반인들까지 많이 알려진 이 문장은 물론 선문답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법어라고 칭해지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작은 울림을 주는 화두가 되어줄 수 있다. 물론 이 문장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는 모두 개인의 자유이지만 결국 해석의 주체는 그 자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그것이 선문답이든 화두이든 법어이든 간에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모든 것이 바로 우리가 어떤 생각을 시작할 수 있는 시작점이 되어 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것이 중요하며 비록 그것을 제대로 해석하기 힘들고 이해하기 힘들어서 결국 아무런 결론이 나지 않더라도 그것을 위해 생각하고 고민한 그 시간은 절대로 그냥 쓸데없이 낭비한 시간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고 싶은 정신력에 관련된 행위가 될 수 있다.
지난 글에서 나는 정신력을 향상시키는 방법에 대해서 두개의 해결책을 적었었다. 하나는 그것은 절대적으로 실천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였고 다른 하나는 인문학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것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보충 설명을 해 보겠다.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우리 인간은 언제 가장 열심히 살아갈까?' 에 대한 부분이다. 그리고 그 답은 바로 '그것을 할 때 가장 행복하다면' 이다. 이건 그냥 정답이다. 다른 답이 없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같지만 이제부터 달라진다. 그럼 당신은 어떤 때 행복한가? 여기에서부터 100인 100색이 나타난다. 즉 모두 다른 답을 내어 놓는다.
그런데 이 행복을 느끼는 기준점은 무엇일까? 이것도 답이 단순하다. 그것으로부터 가치를 느낄 때이다. 그럼 무엇이 어느정도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결국 가치를 느끼는 상황을 우리가 행복하다고 표현을 한다면 우리는 왜 그렇게 그렇게 서로 다른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을까?
이 질문에서부터 정신력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바로 정신력은 이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예를 들어 우리가 숲속의 동물이라고 치자.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장 큰 가치는 무엇을까? 그것은 바로 먹을꺼리, 안전한 잠자리, 2세를 가질 수 있는 짝 등이 될 것이다. 실제로 동물들은 이 이상 다른 가치를 갖기가 힘들다. 그래서 이것이 만족되면 행복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는 불행하게도 먹을꺼리, 잠잘 곳 자체가 없는 경우가 드물다. 즉 우린 세가지 행복 중 두가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미 타고나 있다. 물론 그것의 고급스러움에 대한 차이는 있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 굶어 죽거나 잠잘 곳이 없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래서 우리에게 남은 것은 2세를 가지는 행위 자체로 많이 집중된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의 삶 역시도 동물과 같이 거기에서 느끼는 만족감으로 인해 행복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이 정답일까? 물론 그렇게 살아도 충분히 행복하다면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인간은 다람쥐처럼 매일 도토리나 밤을 까먹고 살아갈 순 없다. 그래서 우린 어느날은 비빔밥을 먹고 어느날은 삽겹살을 먹는다. 그런데 이 음식들의 가격이 다르다는 점이 문제다. 또한 음식 마다 호불호가 존재한다.
그러다보니 욕심이 생기고 이것은 욕망으로 발전된다. 즉 기왕이면 더 맛난 것을 먹고 더 좋은 집에서 살며 더 나은 배우자를 만나려고 한다. 하지만 우리 인간 역시도 경쟁의 본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누구나 그러고 싶어 하기에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치열하게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1등은 단 한명일 뿐이며 전체 구성원 중 만족 하는 삶을 사는 이가 그렇지 못한 이보다 훨씬 적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불행하게 되는 과정이 된다. 또한 그 과정은 숲속의 동물과 조금 더 커진 욕망을 가진 것일 뿐 우리에게 스테이크나 다람쥐에게 도토리는 정확히 같은 의미일 뿐이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동물과 동일하게 구성된 시스템에서 벗어나 비로소 우리가 스스로 정의하는 인간의 기준의 가치와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이것의 답이 바로 인문학이란 말을 하고 싶었다. 그것의 실체가 애매하고 도대체 인문학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서점에 가서 '인문학 개론' ,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인문학, 그것을 말하다' 등의 이름을 가진 책을 사서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실제로 이것은 딱히 한마디 말로 정의하기가 힘든 학문이다.
단지 그냥 그나마 내 입장에서 표현을 한다면 앞에서 말했듯 인간을 동물의 세계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란 정도? 그래서 우릭 타고난 본능에 의한 가치 이외에 다른 가치를 느끼고 이것을 통해 좀 더 다양한 형태의 행복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학문이라고 내 딴에 서투른 정의가 가능하다.
하지만 아무리 이것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하고 책을 읽어도 우린 단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갈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실행이 동반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새벽 차가운 공기를 마시면서 걷는 한 두시간의 산책은 정말 심신을 좋게 해준다. 그것을 알고 있는 이는 많다. 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이는 드물다. 이것이 바로 현실이다. 등산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여행을 하거나 그 수 많은 우리의 행위 속에서 우린 서서히 먹고 자고 섹스를 하는 본능의 가치에 추가적인 가치를 더해나갈 가능성이 생긴다. 그리고 그것이 서서히 늙어서 결국 먹을 것을 즐기는 미각도 자도 자도 피곤한 늙은 몸과 성적 만족을 얻기엔 이미 낡아져버린 육체를 대비하는 자세이기도 하다.
물론 늙음을 대비하면서 젊은 시절을 낭비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젊은 시절을 마냥 젊은 시절에 다 써버리면 젊음이 사라진 시절엔 도대체 무엇으로 살아가겠는가?
이쯤에서 정신력에 속한 것들을 다시 한번 언급한다면 '인내력', '의지력', '자기 조절력', '포용력' 등이다. 그리고 이런 것은 이미 선천적 성격과 어린 시절 형성된 후천적 성격의 합으로 실제로 성격이나 성정 등으로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즉 거의 변화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고들 표현한다.
2년을 열심히 운동하면 초콜릿 복근을 갖을 수 있고, 힘들고 돈이 들지만 성형 수술을 통해 뛰어난 미모로 변신도 가능하다. 토익 점수가 100점인 이가 정말 이 악물고 열심히 공부하면 900점으로 올라설 수도 있다. 그런데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고 한다. 이 말이 바로 우리가 정신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란 것을 대변하고 있다.
그래도 우리는 성격은 바꾸기 힘들지만 다양한 사고를 통해 정보를 통해 행동을 통해서 가치를 느끼는 대상을 바꿀 순 있다. 그래서 젊은 시절 명품에 환호하다가도 결혼을 하고 애를 낳은 어떤 애 엄마가 시장에서 싸게 산 가방을 별 부끄러움 없이 들고 다니는 것도 흔히 볼 수 있다. 이것은 단지 가치의 기준점이 달라졌다는 단순한 사실에서 출발한다.
추구하는 가치가 달라지면 살아가는 자세와 태도가 바뀐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삶의 방향을 변화 시켜준다.
어떤 삶을 살아갈지 크게 고민이 없는 분이라면 그냥 그렇게 살면 된다. 우리는 적어도 외모는 인간의 모습을 가졌기 때문에 그 어떤 삶을 살아도 법적으로 타인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살아가는데 큰 지장이 없다. 하지만 현재의 삶이 불안하거나 혹은 미래의 삶의 불안하다면 한번쯤 자신이 가진 가치에 대해 되집어 봐야 한다.
그래서 오늘 나에게 연락이 오는 카톡의 대화방 숫자나 나의 페북 글에 '좋아요'를 누르는 사람의 숫자가 많을때 느끼는 행복감이 과연 지속 가능한 가치인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또한 내가 갖지 못한 것들을 가진 타인들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부러움과 질투가 과연 정말로 그것들이 명백하고 틀림없는 가치인지를 다시 한번 고민해 봐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글이 해답이 아닌 사고의 시작점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