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딜레마
인간 사회에 일어나는 갈등은 참 많은 종류가 존재한다. 이 중에서 빈부 갈등, 능력 갈등, 남녀 갈등, 계층 갈등, 정신적/육체적 노동에 대한 갈등, 민족이나 인종에 따른 갈등 등은 보통 본능적인 성향에 의해 벌어진 원초적인 갈등 군에 속하는 편이고 이보다 좀 더 복잡해진 경우엔 약자를 대하는 방식, 빈부 갈등 해소를 위한 방법론, 특정 성향의 소수자를 위한 배려, 민족이나 인종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 등은 원초적으로 가진 많은 갈등들을 도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대한 방법론에서 생겨난 2차적인 갈등이다.
하지만 우숩게도 현실적으로 사회를 대립과 대결의 구조로 만들어가는 요소는은 본능적인 성향에 의해 발생되는 원초적인 갈등들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발전된 사회구조망과 오랜 시간 힘들게 얻어낸 합의점을 통해 이런 갈등들을 어느 정도 극복했고 그 결과로 그것 자체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 돈이 많다고 해서 돈이 적은 이를 업신여기거나 자신이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고 해서 그렇지 못한 이를 무시하는 일이 발생되면 적어도 그 당사자는 사회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표면적으로만 나타날 뿐이다. 실제로 우리 사회엔 돈이 많기 때문에 돈이 적은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하며 만약 그 스스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해도 그것이 진심으로 아닌 경우도 많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누구나 자신이 속한 무리에서 나가 그 대척점에 있는 무리로 가는 것은 꽤나 겁이나고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부자 동네에 살던 아이가 어느날 친한 친구의 집에 놀러 갔는데 그 집이 너무 가난하여 자신의 집과 너무 큰 차이를 보일 때, 어떤 아이들은 그것을 그리 크게 개의치 않고 관계를 이어갈지 모르지만 다른 아이들은 서서히 그 친구와 멀어지는 모습을 보이기 쉽상이다. 그리고 또 다른 아이들은 그것을 알기에 아예 처음부터 그들과 다른 환경에 사는 아이들과 친해지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성향은 교육이 된다. 그래서 결국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자신이 어울릴만한 사람인지를 빠르게 파악하여 적당히 사귀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기에서 자신이 왜 그들과 어울리지 않고 있는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단지 아마도 지금 어울려지내는 이들이 자신과 적당히 맞고 성향도 맞아서 그렇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두려움수도 있지만 선입견일수도 있는 문제이다. 하지만 대부분 이것을 무시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처음부터 만남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 과연 무시하지 않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일까?
이것은 마치 왕따를 당하는 아이에게 직접 왕따를 하는 것과 그 행동을 그냥 지켜만 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둘 중 왕따의 행동을 하는 것과 그냥 그 대상이 내가 아니니 그냥 못본척 하고 있는 것이 정말로 많이 다른 것일까? 물론 걔 중에는 용감하게 이 왕따를 챙겨주는 아이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아이는 모른척 하거나 정말로 모르거나 할 것이다.
아무튼 우리 사회가 가진 아니, 인간이 가진 거의 모든 종류의 갈등은 이미 기본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의 본성이며 단지 우리가 더 심한 갈등을 표출하는 영역은 이미 가진 갈등이 아닌 바로 이 갈등을 해소하는 방법론에 대한 갈등이다.
그리고 이 대부분의 해결책에는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한가지 특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가진 한가지 딜레마 때문인데, 이 딜레마의 정체는 바로 우리가 이기적 동물이면서 이타적으로 행동이 가능한 존재라는 점이다.
우리 인간은 어떠한 말로 스스로를 포장한다고 해도 우리 존재 자체가 경쟁의 산물임은 부정할 수 없다. 우린 우리의 생물학적 탄생인 배아의 생성부터 이미 무수히 많은 경쟁의 결과이다. 그리고 그 최초 생성을 가져오기 위해 벌어졌던 남녀간의 애정행위 역시도 정자들의 달리기처럼 대놓고 일어난 경쟁은 아니지만 아무튼 남녀가 많은 탐색전과 동종간 이루어진 경쟁의 결과이다.
이렇게 시작된 인간이 삶은 죽는 그날까지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 시험과 같은 경쟁이나 혹은 은연중에 일어나는 수 많은 경쟁 속에서 이기거나 지거나를 반복하면서 살아간다. 그래도 21세기 우리는 다행스럽게 식량과 같은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를 위해 볼쌍 사납게 경쟁은 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에 태어나 먹을 것을 두고 싸우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이것은 어제든 상황만 벌어지면 며칠만에라도 금새 우린 먹을 것을 두고 서로 죽이는 일을 벌일 잠재적 본능을 숨기고 있을 뿐이다.
* 인간이 먹을것을 두고 싸우지 않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과거가 아니다. 실제로 과거에 일어난 무수히 많은 전쟁들은 모두 이 먹을꺼리를 두고 일어났고 현대의 전쟁 역시도 치장은 그럴듯 하지만 실제로는 모두 경제적 이득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요즘은 과거와 조금 차이가 있다면 과거엔 먹기 위해 싸웠다면 지금은 더 잘먹기 위해 싸울 뿐이다. 질적으로는 지금이 훨씬 더 수준이 낮다.
하지만 배부른 호랑이라 사람을 물어 뜯지 않고 사육사와 장난을 치듯 우리 인간 역시도 어느 정도껏 만족을 하면 (이 만족의 조건이 호랑이에 비해서는 매우 많고 크다) 이제부터는 서로를 챙겨주거나 혹은 아직 제대로 만족하지 못한 이를 위해 신경을 써주는 행동을 한다. 물론 끝없이 만족을 못해서 절대로 평생 이런 짓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반드시 존재하지만 그래도 많은 이들은 연민에서 혹은 미래에 대한 보험 성격으로 이런 행동을 해 놓는다.
하지만 이 보험적 행동은 매우 은연중에 느껴지기 때문에 많은 이들은 실제로 자신이 베푸는 선의를 아주 순수한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인간을 이기적이거나 이타적인 성향을 모두 가진 존재라고 믿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 무한한 욕심에 의해 끝없는 탐심을 보이는 인간이 있는 반면 끝없는 연민에 휩싸여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도 존재할 수 있다.(하지만 이 경우에도 한계는 명확히 존재한다. 아무리 무한한 연민을 가진 이라고 해도 멀쩡한 자신의 심장을 타인에게 주진 못한다) 하지만 이 양끝에 극단적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의 비중은 매우 작고 실제로는 어떤 면에서 유전적 돌연변이라도 평가할 수 있다. 아무튼 이들은 너무 별난 성향이니 일단 제쳐두고 생각하는 것이 편하다.
그리고 이들과 연결되어, 끝이 없진 않지만 끝이 너무도 먼 욕망을 가진 사람들과 무한정 사람들에게 잘해주지는 않지만 적당히 잘해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양쪽 끝에서 서서히 서로 다가와 중심 부근에서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 중심 부근이 가장 많은 사람들이 소속된 일반적이 인간의 성향이 된다.
인간의 딜레마는 바로 여기에서 발생한다. 자신의 생존을 최우선시 여기는 본능적 이기주의와 타인과 잘 어울려 지내고 서로를 보살펴줘야 하는 이타적 성향의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으로 인해 인간이 본능적으로 가진 갈등을 해소하는 법에 대한 해결방안에 대한 커다란 충돌이 발행하게 된다.
사회적 약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천차만별로 존재한다. 물론 도와줘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다수라고 해도 얼마를 도와줘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매우 다른 의견이 있다. 쉬운 예로 30명의 사람 중 29명이 도시락을 가지고 있고 단 한명이 먹을 도시락이 없을 때 이 사람들 도와 다른 29명이 한숫가락씩 밥을 덜어 주었다고 쳤을 때 개인별로는 총 20숫가락이 나올 수 있는 양의 밥에서 겨우 한숫가락을 퍼주었으니 큰 문제는 아니지만 결국 나중에 보니 도시락이 없던 사람이 29숫가락으로 실제로 각 개인보다 더 많은 밥을 가지는 경우가 일어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예는 조금 극단적이긴 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약자를 배려하는 복지를 바라보는 태도에는 확실하게 이것이 존재한다. 왜 노동을 하지 않는 이들에게 나머지 노동을 하는 이들이 자신이 열심히 일을 한 댓가를 일부 나누어주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와도 비슷한 경우라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동일한 상황이라도 사람들의 의견은 너무도 다양하다. 앞서 예를 들었던 도시락 상황일때도 어떤 이들은 그래도 한숫가락씩 줘야 한다고 말하며, 다른 사람들은 왜 우리가 한 숫가락씩 줘서 저 사람이 더 많이 먹는지를 따지면서 주지 않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중립적인 어떤 사람들은 주고 안주고를 개인별 의사에 맡겨야 한다고 말하기도 할 것이다. 여기에 스스로 꽤나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마도 한 숫가락이 아닌 반 숫가락이나 이것이 어렵다면 두번에 한번만 한 숫가락을 내 놓는 규칙을 만들자고 제안할지도 모른다.
우리 인간의 갈등 상황은 이런 명시적인 상황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가 겪는 거의 모든 사회적인 갈등은 바로 숨겨진 우리의 이런 사고방식에서 출발하게 된다. 그리고 우린 여기에서 좌파, 우파를 나누고 서로 비난하면서 정책을 결정하는 부분에서 많은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데 잘 생각해보면 이것은 정말로 상상속의 산물일 뿐이다.
좌파는 복지를 우파는 발전을, 좌파는 파이를 나누고 우파는 전체 파이를 키운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정말로 단어의 나열일 뿐이다. 실제로 좌파는 미래의 자신에게 닥칠 불행에 대한 보험을 들어놓는 사람들이거나 혹은 이미 만족할 수준까지 도달하여 배부른 호랑이의 입장인 사람들이며 우파는 그럴일이 없을 것 같아서 그 보험에 들어갈 돈이 아까운 이들이거나 혹은 욕심히 끝도 없어서 도대체 만족하기 힘든 사람들이다. 하지만 우리의 이런 성향은 매우 교묘하게 치장되어서 마치 인간의 유전자에 타인을 위한 이타적인 성향이 각인되어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이것이 착각임에도 불구하고 우린 이 착각을 깨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동물과 다른 인간 고유의 특징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착각이 우리 인간 사회가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여 유지시켜주는 근간도 되고 있기에 모든 사회에서는 이런 인간의 성향을 교육을 통해 좀 더 주입하려고 하지 없애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의 갈등은 멈추지 못한다. 생존 주체로서 욕망을 품은 인간과 어느 정도껏 만족을 하면 한 숫가락 정도는 타인에게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인간은 그 어느 정도의 만족이 도대체 정말로 어디까지인지를 측정하는 것이 매우 힘들어서 그렇지 분명히 존재하기에 두 종류의 인간은 중심점에서 좌우 극단으로 갈수록 더 강하게 서로를 비난하고 더 강하게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고 행동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본능적 인간의 성향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우리 인간은 그것을 뛰어넘는 의미를 가진 존재라고 믿는 사람들 사이에 무한한 갈등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보니 많은 생각과 사고를 하는 철학자들도 이것이 매우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성선설이나 성악설로 대표되는 인간의 고유 성향에 대한 판단이 나오고 서양의 철학자들 역시도 이 부분에서 많은 복잡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인간의 가치를 주장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인간의 가치없음을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의 그 많은 생각에도 근본적 한계가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그 생각을 하고 있는 주체인 그 자신이 인간이기에 이것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즉 인간이 아무리 인간을 제대로 파악을 하려고 해도 우리 자신이 인간이기에 우린 우리를 개미나 늑대처럼 객관화된 채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실제로 그래서 지금의 지구 생태계에서 보면 우리 인간은 매우 해악을 끼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인간이 지구 생테계에 저지른 짓은 정말 표현하기도 불가능할 만큼 치명적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예 싸그리 없어져야 할 바퀴벌레보다 못한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즉 우린 그 관점에서 한계를 보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딜레마는 환상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어떤 미사여구를 통해서 우리를 치장해도 우린 지능이 뛰어난 동물이기에 결국 동물적인 성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린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하고 먹을 것이 부족하면 강자가 살아남으며 혹시 배가 부르면 그땐 가끔 착해지는 존재에서 단 한발자국도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우리 자신이 어쩌면 이런 인간의 본성을 뛰어넘는 인간 고유의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믿으면서 심지어 내가 배가 고프더라도 더 배가 고픈 이를 위해 자신이 가진 먹을 것을 나누어줄 수 있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의지이며 이런 의지가 모이고 모여서 결국 우리가 지금의 사회를 유지하는 커다란 접착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 결과로 우리 사회가 잘 유지되어 아무리 발전을 하더라도 우리의 딜레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그 갈등 자체가 우리 자신의 고유한 성향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오늘도 이 딜레마 속에서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두고 서로 각자의 입장에서 옳다고 주장하면서 싸우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정의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우리에게 정의란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이런 갈등의 상황에 처해 있을때 어떤 식으로든 한쪽의 편에 설 필요는 있다.
하지만 이 판단에는 딜레마의 양끝 점인 이기주의와 이타주의가 영향을 미쳐서는 안된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합리적 판단점이다. 밥이 부족하면 내가 먹고 밥이 남으면 타인에게 줘서 그것이 썩어서 냄새가 나지 않도록 하는 합리적 판단을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