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놈 근성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류를 보다가 보면 흔히 나오는 장면 중 하나가 바로 어떤 집안에 소속된 하인 혹은 종이 자신이 소속된 가문의 위세에 따라서 큰 소리를 치는 광경이다. 그래서 삼정승 댁 하인은 삼정승에 맞는 위세를, 참판댁 하인은 또 그에 맞는 위세를, 그보다 한참 낮고 재물도 적은 집안의 하인은 마치 그 주인의 모습처럼 다른 권세 있는 집의 눈치보기에 바쁘다.
이와 비슷한 현상이 현대에서도 일어나고 있는데, 흔히 군부대 지역에 장교를 위해 만들어진 아파트 등에서 부인이나 아이들이 자신의 남편의 지위에 따라 보이지 않는 서열이 매겨지고 그 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남자의 아내가 은연 중에 리더로서 혹은 보이지 않는 질서의 중심점으로 작동한다. 또한 이것은 아이들에게도 이어져 대령의 아이는 소위의 아이에 비해 그 아이들만의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상관이 되기도 한다.
이것 뿐이랴. 이런 것은 그나마 구체적인 직위와 직급에 따라 나뉘는 모양새라면 서울등과 같은 고밀도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지역에는 이젠 아파트 평수를 근거로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즉, 큰 평수에 사는 사람은 은연 중에 작은 평수에 사는 사람을 자신의 밑으로 보는 경향이 나타나고 이 작은 평수를 사는 사람 조차도 근처에 혹시 임대 아파트 등이 있으면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을 은근히 자신의 밑에 두면서 자신의 아이들에게 그 임대 아파트 소속의 아이들과는 놀지 말라고 단도리를 쳐 놓는다.
물론 이 세 경우 모두 그렇지 않은 사람은 존재한다는 명제는 옳다. 하지만 반대로 그런 사람은 반드시 있다는 명제 역시도 옳다. 어찌되었건 간에 이렇게 어떤 식으로든 남들과 자신 사이에서 성공등과 같은 가치를 기준으로 볼 때 뭔가 잴 만한 것이 있다면 우린 어떻게든 그것을 통해 남과 나를 수직관계로 규정하려고 한다는 점은 분명히 존재하는 현상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건 우리가 어려서부터 오랜 기간 동안 순위를 매기는 삶에 많이 익숙해져서 나타난 현상으로도 여겨진다.
이 세가지 예를 구체적인 관점에서 좀 더 세밀하게 분석해보면 공통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그 서열을 매기는 주체는 분명하게 구분이 되는 반면(각자 소속된 가문의 지위나 군인의 계급 등) 그것에 소속된 존재들의 서열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지만 이것이 현실적으로는 작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이것을 통념적으로 부정하고 있다는 점도 이채롭다.
이 말은 남편이 영의정이라고 해서 그 집안의 종놈이 영의정은 아니며, 남편이 대령이라고 해서 그 아내와 아이가 대령은 아닌 것이란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위세는 쉽게 사라지지 않은 것이며 또한 이것을 무시하는 사람도 나타나기 쉽지 않아 보이는 사회 현상을 뜻한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공적 역할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군 장교의 진급은 바로 실제로 아내의 내조에 따라 많이 좌지우지 된다는 점은 현실이다. 따라서 그 아내의 역할이 그렇게 단순하게만 볼 것이 아니다. 이것은 바로 그 아내의 말에 따라 남편의 판단이 조금이라도 영향을 주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며 이것은 남녀의 역할의 관점에서도 일반적인 현상이다.
또한 대감집 종놈 역시도 그 집을 방문하는 사람이 가장 처음 대하는 얼굴이며 그로인해 그 종은 찾아 온 이를 쫒아내어 대감과의 접견 자체를 막을 수 있으며 또한 반대로 통과 시켜서 대감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을 통해 본인 스스로는 이것을 일종의 권한으로 인식한다. 이로 인해 종은 그 나름대로의 위세를 충분히 떨칠 수 있는 것이 된다.
이런 전체적인 모습을 살펴볼 때 이런 현상이 인간 사회에서 꽤나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란 점쯤은 대충 짐작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 우린 현실적으로 이것을 인정하지는 않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정상적인 현상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며, 그 안에는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 자체가 우리 인간의 불완정성이나 비도덕적 성정을 뜻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또한 이것을 인정하기엔 우리 인간은 생각보다 우리 얼굴에 금칠하는 것에 대해 익숙해져 있다.
아무튼 이런 현상이 현실부정이든 아니면 이것이 우리의 판단착오로 인해 벌어지는 잘못된 모습이든 간에 상관없이 이것 자체가 존재함은 부정 할 수 없다. 그리고 문제가 있긴 해도 그 문제점이 영향을 미치는 범위가 그나마 지역적이나 혹은 상황적으로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사회 전체가 가진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이와 연관된 아주 커다란 문제점이 우리 사회에는 하나 존재하고 있다.
내가 개인적으로 이런 현상을 칭하는 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듣기에 따라서 기분이 좀 안좋을 수도 있지만 조금 적나라하게 표현을 해서 '종놈 근성' 이라고 칭한다. 이것은 대감 댁 종이 자신이 소속된 집안의 권력을 등에 지고 스스로 갖지 못한 권리를 주장하고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는 사람을 보면 바로 존재하지도 않은 위세를 통해 그 못된 성질을 들어내는 것을 뜻하는 용어이다.
이 종놈 근성은 우리 인간의 아주 슬픈 단면이면서 또한 고약한 면이다. 우리 인간이 그 스스로 존재감과 자존감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 스스로 천한 존재 되었을 때 나타나기에 슬프지만 또한 이런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것들의 부재로 인해서 나타나기에 매우 왜곡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타인들에게 심한 불편함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자신을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섬기는 존재에 대해 끝없는 충성심을 보이며 그 위세를 믿고 쉽게 보이는 이들이나 혹은 자신의 주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악날할 정도로 적개심을 보이는 것이 일반적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측은하면서도 짜증이 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기본적으로 많은 것을 가진 기득권 층과 그렇지 못한 일반 사람들로 구분되어 있다. 물론 이 중간에 낀 존재들도 있지만 아무튼 전체적으로 사회 계층을 분리시키면 그렇게 된다. 과거 사회주의 사상에서는 이것을 '부르조와'와 '프롤레타리아'로 부르기도 했는데 아무튼 용어는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두 계층에 속하지 못한 최 하위층이 하나 더 존재한다. 즉 보통 사회를 구성하는 계급을 좀 더 자세히 나누면 극 상위층에 존재하는 기득권층과 그리고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가진 계층인 일반 시민과 그 밑으로 사회적 약자로 알려진 극빈층이 존재하는데 여기에서 조금 기묘한 현상이 하나 나타난다.
그것은 바로 극빈층이 상위층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는 현상이다. 이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현상이며 우리나라 같은 경우엔 상위층을 기반으로 존재하는 새누리당을 하위층에서 지지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것은 위에서 말했던 '종놈 근성'의 가장 확실한 예가 된다. 그래서 결국 새누리당의 지지자 성향은 부자/고등고육/기득권 층 과 가난/저학력/극빈층 두가지 계층으로 구분이 된다. 우숩지만 가장 한달에 100만원도 벌기 힘든 이들이 한 달에 수 억이 돈을 버는 사람들의 경제적 미래를 걱정하고 살아가는 형편이다.
보통 기득권 층은 사회 지배계층이다. 즉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제법 똑똑하고 그 덕분에 국가를 경영하는 각종 그럴 법한 한 자리씩을 꿰차고 있다. 당연히 많은 공부를 했고 그곳에서 접하는 고급 정보들 덕에 재산도 꽤나 모은 사람들이 많다. 그러니 당연히 좋은 양복을 입고 좋은 차를 몰고 다닌다.
그런데 극 서민층에서 이런 그들의 모습을 일종의 대감집으로 보는 것이다. 즉, 자신의 부족함과 어리석음으로 인해 제대로 구현되지 못한 자아의식이 결국 자신의 존재감을 타인의 존재로부터 확인 받으려는 현상으로 연결되면서 그 성공한 인물들에 대해서 무비판적인 충성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그냥 자연스럽게 일어나지 않는다. 여기엔 한가지 비책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나라에 대한 사랑이라는 애국심의 존재이다. 그리고 이것을 잘 아는 기득권층은 그들 자신이 나라를 지극히 사랑하는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존재란 것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여기엔 북한의 존재가 너무도 고맙게 도와주고 있다.
사람은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 상관없이 자신이 가치 있는 일을 하거나 스스로 가치 있길 바란다. 그런데 그 스스로 존재감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사람은 자신에 대해 가치를 스스로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그 자신이 가치 있고 싶어하는 욕구를 갖게 된다. 그럴 때 애국심과 같은 가치는 너무도 좋은 대상이 된다. 적어도 애국심에서는 돈이나 명예나 그 밖에 그들이 갖지 못한 그 많은 가치들을 준비할 필요가 없다. 그저 그것은 숭고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며 이를 위해 죽는다면 명예롭게 되는 것이다.
즉, 이런 경우에 국가는 개인의 가치화로 환산이 되며 이것을 위해 국가는 전체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에 대해 과도한 포장을 해주면서 치하를 한다. 물론 이것은 어떤 면에서 매우 좋은 정책이다. 아무도 애국심을 갖지 않는다면 누가 나라를 지키려 하겠는가?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엔 이것이 너무 정략적으로 이용이 되고 있다.
자신의 주인이 나라에 대한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고 그런 사람들에 속해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런 자신들에게 주체의식을 가지라고 가르치는 다른 존재들에 대한 강한 반발을 일으킨다. 즉 이들은 자신들이 믿는 기득권층을 부정하는 존재들이며 또한 그럼으로서 애국심을 갖지 못한 존재로 부각된다.
여기에서 선택할 수 있는 두가지 길이 존재한다. 하나는 자신을 가르치는 사람들의 의지에 따라 스스로 더 열심히 노력해서 갖지 못했던 주체의식과 자의식을 갖는 것, 다른 하나는 바로 그것들을 부정하면서 더욱 더 자신이 믿는 종교화 된 애국심과 그것을 충분히 갖고 있은 것으로 보이는 기득권 층에 최대한 지지를 보내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선택이란 용어를 썼지만 둘의 길을 선택했을 때 개인이 받는 스트레스는 심하게 차이가 난다. 스스로 자의식을 갖는 길은 정말 어렵고 힘든 여정이 되며 또한 그렇다고 해서 성공할 가능성이 높지도 않다. 반면 후자의 길을 가는 존재들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냥 믿고 싶은 것을 믿고 부정하고 싶은 것을 계속 부정하면 된다. 그리고 이것을 기득권층의 대변인인 언론과 그들이 믿는 기득권층이 끝없이 그것이 옳다고 말해주기 때문에 크게 힘들지 않는다.
물론 가끔 터지는 기득권층의 비리가 몇 백억의 돈을 개인적으로 착복했거나 혹은 각종 로비를 통해 불법적인 돈을 수급한 뇌물 사건이 터지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들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무리들에게도 수 천, 수 억의 뇌물 수수 사건은 분명히 존재했기 때문에 그것은 누구나 다 그런 것인 것이다. 즉 그 차가 수백배가 나더라도 오십보 백보임은 틀림 없다는 것이다.
이 퍼펙트한 도덕심에 대한 기준은 10원을 훔친 사람과 1억을 훔친 사람을 모두 같은 도둑이 아니냐는 결론으로 이끌고 간다. 그런 면에서 그들이 지지하는 기득권층의 비리가 일명 '물타기'가 가능해진다. 즉 계속 물을 타서 희석시키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그런 것이 옳지 않다고 계속 말해주는 무리들의 모습을 보면 괜히 그들이 그리 잘나지도 못한 처지에 잘난 척 하는 것 같아서 영 마음에 들지도 않는다. 하기야 누가 그 자신에게 넌 아직 부족하고 깨어나지 못했으니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서 세상에 대한 진실을 알아야 한다고 충고 한다면 그것을 단순히 고맙게 받아들이겠는가? 누가 그 자신의 부족하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지적하면 그것을 충고로 받아들이겠느냐 말이다.
이것은 그 충고를 받는 이들의 그마나 안남은 자존심을 긁는 행동이다. 그리고 그만큼 커다란 적개심이 생겨날 수 있다. 결국 이런 결과로 인해 죄 중에서 가장 용서하기 힘든 죄인 '괘씸죄' 에 걸려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대상으로 인식된다. 그리고 적의 적은 아군이 된다. 그래서 그들이 말한 세상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대상이 되는 기득권층이 이젠 아군의 편에 서게 된다. 거기에 더해 애국심을 통해서 부족한 존재감까지 채워주니 그 얼마나 순리적인 길이 되는가?
그리고 이런 복종을 보이는 자들에게 기득권은 가끔 콩고물을 남겨주기도 하면서 이것을 최대한 이용한다. 물론 그런 후 더 큰 이득을 가져가지만 실제로 이 덫에 한번 걸린 사람들은 평생을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스스로 존재감을 갖지 못하고 살다가 죽어가게 된다.
이것은 참 슬픈 일이지만 현실적으로 일어나며 또한 이것을 고치기가 무척 힘들다는 점에서 난해한 문제가 된다. 이 문제를 고치기 위해 당사자를 설득하면 설득 할 수록 그 당사자는 더욱 그것을 부정하면서 더 멀리 가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언제 깨질까?
그것은 직접적으로 그들이 지지했던 기득권으로부터 피해를 입을 때가 된다. 즉 기득권의 이득을 위해 골프장이 들어서서 자신이 사는 마을이 순식간에 붕괴되거나 혹은 철거를 당하거나 하는 피해를 입을 때 그때야 비로소 오래된 악몽에서 깨어나 각성이 시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퍼지지 않고 국지적으로만 존재하다가 사라져버린다.
혹은 이것을 약간이라도 벗어난 이라고 해도 이젠 양비론에 휩싸인다. 즉 오십보 백보 논리에 의해서 양쪽 다 비판을 하는 것이다. 이러면서 그 자신이 중심점에서 도덕적으로 훨씬 나은 존재라고 믿는 어리석음을 깨어나지 못한다. 이런 양비론에 의한 도덕적 자위는 그나마 조금 지식을 갖춘 종놈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며 실제로는 기득권에 들어가고 싶으나 능력이 부족한 이들의 세상에 대한 적개심이다.
선진국이라면 돈을 많이 버는 나라를 뜻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선진국의 참된 의미는 그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들의 깨어있는 의식이다. 그래서 이런 나라들은 공동체 의식이 매우 강하며 사회의 미래를 해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매우 강한 처벌을 내리고 서로를 감시하는 시스템이 일반화 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 하나가 바로 허리 계층, 즉 중산층이 매우 넓게 분포를 하고 있는 것인데 바로 이들이 기득권 층의 권리 남용을 감시하며 하위 계층을 돌보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점점 거꾸로 가고 있다. 즉 있던 중산층도 무너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서 우리는 점점 더 극단적 갈등의 시대를 향해 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당연히 상위층이 꿈꾸는 나라가 된다.
중산층이 부재는 바로 상위층의 감시가 허술해진다는 뜻이 되며 결국 이것은 상위층이 좀 더 자유롭게 탐욕을 부리고 권리를 남용하며 대를 이어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이젠 하위층으로 떨어진 이들은 종놈 근성에 의해 상위층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거나 절망에 빠져 양비론을 주장하면서 사회로부터 분리되어 버린다.
앞으로 우리 대한민국이 어떤 방향으로 나갈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이대로 가면 희망이 없어진다는 점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