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옳음과 옳음의 대결

아이루다 2013. 12. 26. 10:14

 

'라이프 오프 파이' 라는 제목을 가진 영화를 보면, 인도에서 캐나다로 향하던 일본 소속의 선박이 태평양 마리아나 해구를 지나다가 태풍을 만나 배가 전복된 후 남은 '파이' 라는 이름을 가진 한 소년과 '리처드 파커' 라는 이름을 가진 호랑이의 구명보트 안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 육식동물, 그나마 구명보트이다 보니 이런저런 비상 식량이 있었던 사람. 이 둘의 기묘한 동거는 꽤나 흥미롭게 그리고 설명하긴 힘든 감동을 준다. 여기에서 주인공 파이는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리처드 파커와의 동거에 대해 두 가지 시선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다. 하나는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로서, 다른 하나는 자신과 함께 구명보트에 탄 동반자로서 고민하다가 결국 동반자로서 받아 들인다.

 

호랑이가 고기를 먹으려고 생명체를 죽이는 행동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그저 호랑이는 자신의 본능대로 행동하고 있을 뿐이다. 이 영화에서 보면 사람인 파이는 고기 밖에 못먹는 호랑이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 낚시를 하여 물고기를 주기도 하고 또한 빗물을 받아서 식수로 건내기도 한다. 그러니 호랑이 입장에서 파이를 잡아 먹는 것이 단기적으로는 고기를 제공 받지만 결국 그로 인해 그 자신도 죽을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호랑이가 그것을 계산 해 낼 머리는 없다.

 

파이는 호랑이가 자신의 의도를 알고 자신을 동반자 혹은 보호자로서 받아들이길 원하는데 호랑이가 그것을 이해 해줄리가 없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총 동원해 호랑이 길들이기 훈련을 시킨다. 그리고 이 역시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호랑이는 호랑이 자신만의 정당성이 있는 것이고 사람은 사람 자신만의 정당성이 있다. 그래서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 먹든, 사람이 호랑이를 죽이거나 물에 빠뜨린 후 도망가더라도 그것이 비극일 순 있지만 어느 한쪽을 도덕적으로 비난 할 순 없다. 최근 우리나라의 어떤 동물원에 호랑이가 사육사를 물어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역시 관리 소흘 및 갖가지 문제점으로 인한 인재이지 호랑이를 비난할 순 없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에서도 역시 이런 원칙과 원칙, 정의와 정의, 옮음과 옳음은 끝없이 충돌한다. 물론 강도, 도둑과 같은 명확하게 '악'한 것이라고 규정한 것들도 있지만 생각보다 그렇지 못한 것이 너무도 많다. 우리가 먹고 살기 위해서 수 많은 소, 돼지, 닭을 좁고 더러운 환경에서 키운 후 1년도 채 되지 않아서 죽여서 먹는 것을 생각해보면 결국 우리가 어떤 이유를 이야기하면서 동물 사랑을 이야기 한다고 해도 좀 애매한 구석이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피하기 위해 채식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식물이 말을 못한다고 해서 우리가 동물은 먹으면 안되고 식물을 먹으면 된다는 것 조차도 애매하다. 그나마 최소화 한다는 의미에서는 채식주의자의 논리가 그럴듯 하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많은 이들은 선과 악에 대해 좀 더 명확한 구분을 원한다. 그래서 각종 영화, 소설, 드라마 등에서는 악당의 역할을 최대한 악당스럽게, 주인공의 역할은 최대한 선하게 포장되어서 표현이 된다. 이것이 조금만 애매하게 표현되면 사람들은 영화를 어렵게 느끼고 복잡하다고 생각한다.

 

이러다보니 우리가 살아가면서 보는 그 모든 종류의 갈등에 대해서도 이런 선과 악 두가지 이분법적인 사고를 적용하려고 한다. 그래서 만약 어딘가에서 운수 노조 파업이 일어났다고 하면 파업을 일으킨 노조를 욕하거나 파업이 일어나도록 만든 버스 회사를 욕하거나 혹은 이 둘의 문제로 인해 버스를 이용하지 못하는, 자신이 입는 손해 때문에 양쪽을 싸잡아서 욕하기도 한다. 물론 무관심한 사람이 제일 많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보자. 지금 횡단보도에 서 있는데 건너편에 어떤 나쁜 놈이 아이를 납치하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횡단보도는 현재 빨간색으로 건널 수 없는 상태이다. 이때 이 신호를 무시하고 건너서 아이를 구하는 것이 옳은가?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용기가 없거나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어서 안 건널 뿐 신호를 지키는 옳음과 아이를 구해야 하는 옳음 사이에서 혼란스러움을 느껴 건너지 못하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조금 생각이 있고 정의로운 사람이라면 당연히 건너서 아이를 구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가 알려지게 되면 미담이 되고 기사화 되며 사람들은 이 영웅에게 많은 찬사를 보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한가지 상황을 더 넣어보자. 그것은 바로 이 영웅이 빨간 불에 횡단보도를 건너게 됨으로서 그 당시 그 도로를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통과하던 한 차량이 급작하게 브레이크를 밟다가 차가 빙 돌아서 사고를 내게 되었다고 치자. 그리고 운전자가 큰 부상을 입었다.

 

이 운전자의 잘못은 횡단보도를 지날 때 속도를 줄이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횡당보도를 건널 때 속도를 줄이는가? 아무튼 그래도 잘못은 잘못이니 그렇다고 치고 이 잘못을 한 결과로 인해 사고가 나고 몸이 회복 불가능한 부상을 입게 되었다. 즉 어딘가가 심각하게 고장나 장애인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이유로 인해 직장을 그만둬야 했으며 이후로 아무런 일도 할 수 없게 된다.

 

원래 이야기에 조금 큰 덩어리가 붙었다. 아마도 지금까지 상황이라고 해도 많은 이들은 아이를 구해야 한다고 믿을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여기에 동의한다. 그러면 이 사고가 나서 장애인이 된 이 운전자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가 평소에 정의로운 인물이든, 나쁜 욕을 많이 먹는 인물이든.. 그에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운수 회사가 노조의 요구를 거부한다. 운수 노조는 파업을 한다. 그로 인해 버스가 운행을 멈춘다. 결국 버스를 이용하는 많은 이들이 불편을 느낀다.

 

건너편에 아이가 있다. 아이를 구하기 위해 빨간 불을 무시하고 넘어간다. 그로 인해 지나던 차가 사고가 난다. 결국 아이는 구했지만 차를 타고 있던 운전자는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물론 이 두가지 사건을 동일한 원리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어떤 것에 대해 기대하는 가치가 무한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무리해서 여기에서 옳지 않은 것과 옳은 것을, 정의로운 것과 정의롭지 않은 것을,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구분해 보도록 하자.

 

일단 아이를 납치하던 유괴범은 나쁜 놈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유괴범이 과거에 다른 유괴사건에 얽혀서 아무런 죄가 없이 사고가 나 장애인이 되어 인생이 완전히 망가진 사람이었다면?

 

이쯤에서 혼란스러움이 몰려 온다.  그래도 아직도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하고 싶은 분들이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하지 못하면 머리 속에 이 생각이 하루 종일 머물게 되고 이 혼란스러움으로 인해 문득문득 즐겁지 않게 되며 행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행복하다는 것 자체가 바로 머리 속에서 무엇인가 충돌하는 것이 없는 평화스러운 정신 세계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죄가 없다. 단지 힘이 없고 사고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당하는 일이다. 하지만 약육강식의 세계라면 약한 것도 죄가 된다. 아니 약한 존재가 죽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길을 건너서 아이를 구한 사람은 옳은 일을 한 영웅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다른 한 남자가 장애인이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것을 의도한 것은 아니다. 사고를 당한 남자는 옳지도 그를지도 않다. 그저 재수가 없었다. 그 이외의 그 사건을 바라본 모든 이들 역시도 옳지도 그르지도 않다. 하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그들은 그 사건을 방관했다.

 

그렇다고 해서 늘 이런 상황을 고민하고 누가 옳고 그런지를 고민할 순 없다. 이렇게 되면 심한 두통이 생겨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린 어떤 식으로든간에 결론을 낸다. 일단 어떤 사연이 있더라도 유괴를 하려고 한 범죄자는 나쁜 놈이다. 그리고 사고의 직,간접적인 역할을 한 영웅은 비록 그 여파로 인해 한 사람의 인생이 망가졌더라도 결국 옳은 일을 한 것이다. 그리고 장애인이 된 한 사람은 횡단보도에서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해 정말 재수 없는 일을 당한 것이다. 뭐 운이 좋다면 보험에 많이 들어서 풍족한 노후를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러길 바란다. 그래야 이 사람에 대해 잊을 수 있으며 한 20년 후에 이 사람이 유괴 사건을 일으키다가 잡혔다고 했을 때 그를 기억해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우겨도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그 많은 갈등에서 그 어떤 것에도 절대적 정의를 부여할 순 없다. 물론 종교를 제대로 믿는 이들은 신의 말씀을 그것으로 믿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조금 다른 영역이다. 아무튼 우리가 착각에 의해서든, 경험에 의해서든 그 어떤 것을 절대적으로 믿는다면 그것은 100% 잘못된 것이란 점만이 유일한 진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린 판단의 혼란스러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일반적인 갈등 상황에서는 그냥 대충 넘어가겠지만, 직장과 같은 생계가 걸린 상황에서 이것을 제대로 판단해내지 못할 경우 정말 심각한 곤란함에 놓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영업을 하는 사람이 그 영업 활동의 불법성과 그 행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회사의 이득을 기반으로 한 자신의 자리 보존 사이에서 정확하게 빠른 결정을 하지 못하면 이것도 저것도 하지 못한 채 양쪽 모두에게 비난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그 중간에 낀 존재는 이것을 좀처럼 견뎌내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이 거대한 갈등은 그 자신을 망가뜨리고 결국엔 도망가게 만든다. 즉 이것은 판단할 수 없어서 도망치는 것이다. 회사라면 보통 사직서를 내고 떠난다. 물론 그렇지 않은 한쪽을 선택한 사람조차도 떠나야 하는 경우도 흔하다.

 

가치에 대한 혼란스러움이 이런 상황이 만들어 내니 누가 중간에서 고민하고 싶어 하겠는가? 물론 처음에 고민은 충분히 일어나겠지만 한 두번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동일한 상황이라도 해도 처음보다 훨씬 빠르게 판단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다.

 

이 사회를 구성하는 기득권과 일반 서민으로 표현되는 자본을 둘러싼 두개의 보이지 않는 계급층에서도 이런 문제는 동일하게 나타난다. 보통 일반 서민들은 자신의 옳음을 근거로 기득권층을 욕심 많고 비 인간적이라고 비난하고 욕하지만 반대로 기득권 층에서는 그들의 옳음을 근거로 서민들을 게으르고 노력하지 않으면서 욕심만 많다고 비난한다.

 

이것은 한 배를 탄 호랑이와 사람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모두 그 자신이 가진 본능에 의해 움직이고 이 본능을 우린 성격이나 인격 등으로 표현 할 뿐이다. 물론 동물과 사람과의 관계와는 달리 인간과 인간간의 관계는 좀 더 이성적이며 대화가 가능하다는 면에서 희망이 있다. 하지만 이것도 단일 대상과 단일 대상간서나 해결 가능한 문제이지 무리와 무리의 충돌일 경우엔 해결 불가능 하다.

 

만약 커다란 배에 호랑이 수 백마리와 인간 수 백명이 타고 있었다면 과연 그러한 인간과 호랑이 사이의 보이지 않는 연대감이 생겨날 수 있을까? 그땐 그냥 서로 죽이지 못하면 죽을 뿐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 대부분은 인간의 승리로 끝난다.

 

오늘도 우리 사회에는 이런 서로의 정의로움에 따른 입장에 따라 서로를 비난하고 반복하는 갈등에 관한 뉴스가 신문과 방송을 통해 끝없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역사가 유지되는 한 영원히 반복될 일이다. 그런데 이것들에 대해서 조금만 서로 상대의 옳음에 대해 이해해주려고 노력한다면 사회에서 이런 반복과 대결이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그래서 사고 후 장애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어떤 재수 없는 사람이 덜 생기지 않을까?

 

물론 이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 자신이 믿는 정의라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만 생각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20년을 믿었든, 50년을 믿었든 상관없이 우리 자신이 그것이 옳다고 철석같이 믿으면서 살아온 그 모든 가치에 대해서 말이다.

 

머리가 너무도 혼란스럽고 토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린 조금 더 상대를 이해하고 그래서 옳음과 옳음이 충돌하는 현장에서 조금은 나 자신의 옳음이 틀렸을 수 있음을 또한 상대의 옳다고 주장하는 면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음을 인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