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케이션 - 완벽한 이해는 불가능하다
우리나라 말로 딱히 적절한 용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영어로 표현을 했다. 존재와 존재 사이의 정보 전달 과정을 뜻하는 말인 커뮤니케이션은 우리나라 말로 하자면 '의사소통' 정도의 의미가 될 것 같다. 그런데 이 말로는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의미가 모두 담기지 못한다. 개인적인 판단이겠지만 의사소통에는 감성에 대한 교류가 느껴지지 않는다.
단순히 이 단어를 생각하면 그저 인간과 인간간의 의사소통쯤으로 이해 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인간과 동물, 동물과 동물 그리고 식물까지도 확대될 수 있는 개념이다. 아무튼 어떤 방식이든지 생명체라는 범주에 소속된 존재들은 생존을 위해, 이익을 위해, 안전을 위해, 재미를 위해 늘 교류를 하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이 글에서는 우리가 보통 믿고 살아가는 다른 존재와 나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즉 서로간의 의사 전달 과정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믿음과 그로 인해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정과 사회에 소속이 되어 가족, 친구, 동료 등이나 혹은 전혀 모르는 낯선 이들과 시시각각 커뮤니케이션을 경험한다. 우린 인간에게 가능한 감각인 청각, 시각을 이용한 말과 글을 이용한 표현이나 여기에 더해 동작이나 얼굴 표정까지 판단하면서 상대의 의사를 파악하는데, 보통은 그 파악한 결과에 대해 그리 많이 의심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정말로 우리는 늘 상대의 의사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을 단순한 예를 통해 이야기 해보자.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서 외국에 이민을 가는 분들이 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그곳에서 10년 이상을 살았다고 했을 때 꼽는 문제점 중에 하나가 바로 교감의 부재에 의한 불행함이다. 즉, 아무리 그곳에 오래 살아도 한국민 특유의 민족적 정서를 그곳에서 경험할 수 없기에 느껴지는 외로움이나 고독함 같은 것이다.
이것은 비록 외국이라고 해도 10년 정도의 삶을 그곳에서 보냈다면 이미 언어나 생활 습성은 어느 정도 익숙해졌겠지만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바로 그곳 사람들과의 정서적 교류란 뜻이다. 이것은 의사소통이란 말에서는 잘 이해하기 힘들지만 영어 단어인 커뮤니케이션이 담고 있는 좀 더 넓은 의미를 통해 생각해 본다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결국 그 외로움의 이유는 바로 커뮤니케이션의 부재가 된다. 여기에서 말과 글은 그리 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우리가 과거를 추억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요즘은 크리스마스가 코 앞이니 개인마다 과거의 크리스마스 추억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커다란 로봇을 사준 기억이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하얀 눈이 온 날 첫사랑과 데이트를 한 기억이 떠오를 것이다. 또한 이런저런 기억이 없는 이는 군대에서 끝없이 내리던 크리스마스 이브의 지옥 같은 밤이 떠오를 것이고 어떤 불행한 기억을 가진 이는 모두들 즐거워하는 크리스마스에 혼자 집에서 울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어떤 사건이나 사물에 대한 기억은 인간 모두의 그때까지 살아 온 육체적 경험과 정서적 경험이 그 전에 있었던 또 다른 기억들의 영향을 받아서 우리의 뇌 속에 기록이 되게 된다. 예를 들어 '개' 라는 단어에 대해서 어린 시절 키우다가 죽은 가슴 아픈 감정의 기억을 어떤 이는 맛나게 먹은 육체적 경험의 기억을 떠올린다.
하지만 우리가 여럿이 모여서 크리스마스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이런 개인적 경험의 차이는 크게 고려치 않는다. 왜일까?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당연한데 우리 자신의 어떤 이야기를 할 때는 무조건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기억된 단어를 선택해서 쓰는 한계점이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린 타인의 시점에서 혹은 경험에서 가진 단어를 유추할 수 있을 뿐 절대로 그것을 제대로 알아낼 수 없다. 실제로 그렇게 되려면 그 사람과 동일한 경험을 공유하는 수 밖에 없는데 이것은 현대 기술로는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결과로 인해 다수의 사람들은 즐거운 크리스마스에 대한 이야기를 했겠지만 아무 말도 안 한 어떤 사람은 조용히 앉아서 타인들의 즐거운 크리스마스 추억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도 모르는 씁쓸함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머지 사람들 중에서 누가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으랴. 또한 이 씁쓸함을 느낀 사람이 그 즐거운 분위기를 깨면서 자신의 불행한 이야기를 선뜻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식으로 우리가 실 생활에서 쓰는 거의 모든 단어는 개개인마다 다른 의미로 기억이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린 끝없이 이런 단어를 통해 서로 교류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이 기억에 대한 어떤 통념적 범위가 있다는 점 때문에 이것이 가능한데 우린 이것을 상식적인 수준이라고 이야기 하곤 한다. 그리고 보통 한 국가의 상식적 수준은 어느 정도 것은 보장이 된다.
특히 요즘 같아서는 TV를 통해 전국이 동일한 방송을 시청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전국이 온라인 상에서 하나로 묶이고 실 생활에서도 빠른 운송 수단을 통해 지역별 다양한 교류가 일어나서 이 상식에 대한 공유가 과거에 비해 훨씬 편해졌다. 이것은 우리나라에 각 지역별 사투리가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사투리는 결국 고립과 교류의 부재에 의해 일어난 각 지역별 언어 발달인 셈이다. 그리고 미래엔 결국 없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우리가 대화 상에서 쓰여지는 단어나 글에서 쓰인 단어들은 아직도 미세하게 개인별 경험에 의해 보이지 않는 차이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각 단어 별로는 큰 차이가 없다고 해도 이것들이 모이고 모이면 좀 심한 간극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단순한 재미있는 예이지만 "사랑해 보고 싶다" 와 "사랑 해 보고 싶다" 두 말의 차이는 띄어쓰기 한 칸의 차이로 인해서 커다란 차이를 보이게 된다. 하지만 누가 평소에 대화에서 이런 미세한 차이점을 인식하면서 단어 사용을 신경 쓰겠는가?
다행히 이런 문제점은 단순한 일상대화에서는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때는 보통 어떤 이득과 관련된 상황이 엮일 때가 된다. 그리고 직장에서의 회의 시간에 일어나는 커뮤니케이션의 문제점은 정말로 어떤 의미에서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직장 내에서 벌어진 회의 시간에 참석하여 어떤 문제점을 토로하다가 보면 이 대화 내용이 산으로 가는 경우를 많이 목격한다. 예를 들어 회사의 매출이 부진한 이유에 대해 분석하는 회의를 진행하다가 갑자기 각 부서가 자신이 맡은 부서의 책임이 아니란 뜻을 피력하기 위해 문제가 되었다고 그 자신이 판단하는 부서의 대표를 공격한다.
이런 문제 제기는 이제 본격 적으로 부장들 간의 말싸움으로 전개된다. 그래서 처음에 회사의 매출이 왜 부진한지 이유에 대해 분석하기 위해 엄청난 시간을 시간을 투자해 준비한 자료는 보지도 않은 채 각 부서의 장들의 면피성 발언들이 난무하고 거기에 더해 상대 부서의 문제점을 성토하는 회의장으로 변질된다.
이러다 보니 이야기 속에서 직원들의 업무 태만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예를 들어 재무 팀의 소속의 어떤 직원이 업무시간에 일은 안하고 밑에 커피숍에서 노닥거리는 것을 자주 목격했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면 재무팀장은 즉시 발끈해서 그 이야기를 한 영업팀장 소속 직원을 업무시간에 사우나에서 봤다는 폭로를 하고 결국 이런 식으로 진행된 회의의 결과는 우리가 왜 망해가는 지 '알 수 없음' 으로 나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 이 회의를 객관적으로 보게 되면 이 회사의 매출 부진은 바로 그 회의장 모습으로 이미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저런 사람들이 모여서 일을 하고 있는데 회사가 잘 되길 바란다면 그것이 정상은 아닌 것이다. 도대체 어떤 능력으로 영업팀장은 재무 팀 직원이 커피숍에 자주 들락거리는 것을 파악했으며 반대로 재무팀장은 영업 팀 직원이 사우나에 있었던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여기에 더해서 제대로 된 결과가 도출된 정상적인 회의라고 해도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다. 같은 해결책도 사람마다 그 내용이 다르게 적혀서 결국 계속 중간에 서로 다시 의사소통을 시도해 바로 잡지 않으면 몇 달 후엔 서로 엉뚱한 일을 하고 있는 경우나 정말 중요하게 처리 할 내용을 누락하는 경우도 다반사이다. 결국 이런 실수와 실수가 겹치면서 회사의 생산성은 떨어지게 된다.
이런 일은 일반인 사이의 대화에서도 충분히 나타나기도 하지만 회사는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근본적 모습을 바로 들어내는 반면, 개인간의 교류에서는 이렇게 감정을 즉시적으로 들어내게 되면 서로 의가 상하게 될 염려가 있으므로 최대한 자재하면서 이해하는 척 하게 된다. 하지만 나중에라도 곰곰이 생각하면서 왜 상대가 그런 이야기를 했을 지를 생각해보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세대간에서도 크게 나타난다. 그 때문에 한 세대만 넘어가도 주로 쓰는 단어가 다르고 같은 단어라도 의미가 다르며 결국 다르게 적힌 기억 때문에 서로가 서로의 행동이나 말을 이해하지 못하여 갈등이 유발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부모와 자식간의 갈등 역시도 이런 근본적인 커뮤니케이션의 부재로 인해 발생되는데 이 조차도 많이 하지 않아서 더욱 오해의 폭이 커지는 경향이 있다.
엄마가 공부하라는 얘기는 '너의 미래를 위해 지금 열심히 공부를 해야만 한다' 라고 말하는 의미이지만 아이가 듣는 이 말의 의미는 '놀지 말고 공부나 해' 라는 의미로 해석이 된다. 이것이 더 심해지면 '넌 내가 친구들 앞에서 자랑하기 위한 도구이니 열심히 공부해서 나를 만족시켜줘' 라는 의미로 까지도 받아 드릴 수 있다.
이런 커다란 의사전달의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화를 자주 하지 못한다. 실제로 우리가 가진 대화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유일한 해결책은 오직 더 많은 대화뿐이다. 즉 더 오래, 많이, 자주 대화를 나눈 상대일수록 좀 더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질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그 대화를 통해서 사용하는 단어에 대한 최대한의 비슷한 기억이 저장되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주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의 대화 중에서 분명히 느낄 수 있다. 만약에 오랜만에 나간 동창회에서 어던 이질감을 느꼈다면 이것이 바로 단어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이 너무 차이가 심하게 나서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을 극복하는 것은 좀 더 자주 만나서 더 많은 대화를 나누든지 아니면 인연을 끊는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이 가족 갈등 해결 방법 중 하나로 대화를 꼽는 이유가 바로 이 대화를 많이 해야 결국 서로가 처한 입장이나 혹은 서로가 말한 말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상대에게 전달 가능할 가능성이 생기므로 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 내용이 단순히 연예인 가십이나 아니면 드라마 전개 내용일지라도 서로 이야기 하고 들어주면서 상대가 어떤 상황을 어떤 단어를 통해 표현하는지를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상대가 쓰는 단어의 의미를 어느 정도라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대화를 많이 한 부모와 자식은 '공부를 열심히 한다' 라는 말에 대해 같은 생각과 기억을 공유할 수 있다. 하지만 요즘 어떤 부모가 자녀와 대화를 많이 하려고 노력할 거이며 또한 이미 대화를 하는 것을 어색하게 받아들이는 아이들 역시도 이런 대화의 시간을 즐기려 하겠는가?
커뮤니케이션에서 단어 선정에 대해 가장 큰 고려를 하는 영역은 바로 국가 간의 외교일 것이다. 우리는 보통 어떤 나라를 비난하거나 지지하는 각 국가에서 발표되는 성명서를 보면 그 의미가 너무 약하다는 것에 대해서 좀 의아해 하곤 한다. 특히 '유감' 이란 단어는 개인간에서는 큰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국가간의 표현에서 '유감'이 사용되면 이것은 아주 커다란 질책과도 같이 인식된다.
그리고 외교 쪽에서는 그들만의 단어가 따로 정리되어 있다. 즉 마구잡이 식으로 단어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단어만을 고정적으로 사용하면서 정확히 의사전달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에 잘못 전달된 말 한마디에 전쟁까지 불사했던 역사를 통해 배운 나름 현명한 전략이기도 하다. 즉 서로가 오해를 하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을 하는 것이다. 개인간의 오해는 주먹질로 끝나지만 국가간의 오해는 전쟁을 불러 일으킨다.
이제 글을 거의 마무리 해 가는데 이쯤에서 이런 생각을 한번 해보시길 바란다. 글에서 사용한 커뮤니케이션이란 단어의 해석에 대해 정말로 이 글에서 주장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혹이 이 글을 읽으면서 커뮤니케이션이란 단어에 대한 이해의 폭이 변화되었는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 그냥 이전과 이후가 아무런 변화가 없는가?
결론적으로 어떤 것이든 간에 이것이 바로 커뮤니케이션의 문제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