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이해

아이루다 2013. 12. 19. 14:26

 

유전자 관점에서 볼 때 어느 정도 지능적인 측면에서 검증된 부모로부터 난 자식은 우리나라 처럼 심한 경쟁사회에서 커 나갈 경우, 일반적으로 상대적 우위 위치에서 시작을 할 수 있다는 커다란 장점을 가지고 있다. 물론 반대로 타고난 머리가 평균에 미달하는 아이들은 시작부터 뒤쳐지는 핸디캡을 가지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원리로 설명 가능하다.

 

하지만 단순히 사람의 능력과 성공은 선천적인 역량에서만 결정되지 않는다. 물론 선천적인 타고남이 매우 중요하기도 하지만 살아가면서 후천적으로 얻어지는 노력 역시도 매우 큰 결정 요소 중 하나이다. 그래서 실제로 사회적인 성공, 즉 부와 명예 등을 그 목표로 한 경우 선천적인 타고남과 후천적인 노력이 거의 대등한 수준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렇다고 해도 요즘 사회는 워낙 다들 성공을 위해 노력을 하는 분위기라서 어떤 분야에서 큰 성공을 이루기 위해서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능력으로 인해 보다 많이 좌우되는 분위기이다. 결국 타고 난 선천적인 차이는 노력으로 극복되지 못한다는 것은 슬프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많은 후천적인 노력을 쏟아 부은 경우 어느 정도까지는 이것에 대한 극복이 가능한데, 1등은 못하더라도 상위권에 소속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경우라고 해도 선천적으로 어느 정도 껏은 타고 나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인간의 신체 능력 중 하나인 점프력과 탄성은 흑인들이 발군의 능력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영역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가끔 이 분야에서 가장 뒤쳐지는 능력을 보이는 동양인들 중에서 아주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래도 그 한계는 명확하다.

 

보통 어떤 분야에서 성공을 한다는 것은 그 분야로 간 사람이 같은 분야에 진출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상위권으로 도약을 했거나 거기에 좀 더 극적으로 해당 분야에서 거의 1인자의 소리를 들을 만큼 타고난 능력에 더해져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을 뜻한다. 물론 이런 1인자를 선정하기가 난해한 분야도 많지만 그냥 이럴 경우 극상위권 정도로 표현해도 별 상관 없으리라.

 

아무튼 어떤 사람이 극상원권을 포함한 소위 말하는 성공한 그룹에 소속되었을 때 그리고 그것이 타고난 능력이든 아니면 보통의 능력에 많은 노력이 들어갔든 간에 상관없이 공통적으로 그런 종류의 성공을 그 당사자들은 과연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일단 타고난 이들은 자신이 타고난 능력이기에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인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머리를 써서 하는 일이나 몸을 써서 하는 그 모든 일에 관해서 당연히 그 당사자들은 자신이 이미 그렇게 유전적으로 능력을 타고 났기에 자연스럽게 받아 들이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특별한 노력 없이 수학을 잘 하는 아이가 자신이 남들보다 수학을 더 잘하는 머리를 타고 났음을 인식할 순 있어도 이것이 누군가로부터 받은 능력적 선물로 인식하거나 혹은 운이 좋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여기는 것은 많이 힘들다. 또한 부자집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그 자신이 부자집에 태어난 것이 다행이다 라고 까지는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을 감사하게 여기긴 힘들다.

 

또한 이들과는 조금 다르지만, 보통이나 약간 뛰어난 능력을 타고난 이들이 남들보다 훨씬 많은 노력을 해서 타고난 이들과 비슷한 수준을 달성했을 때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물론 이들은 타고난 것이 많지 않아서 그것에 대한 당연함은 없지만 자신이 노력한 것에 대한 기억이 존재하기에 자신의 성공에 대해 어쩌면 더욱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또한 보통 이런 사람들은 가진 욕망의 크기가 매우 크기 때문에 보통은 자신의 노력에 비해 자신이 가진 것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다면 평균적으로 타고난 천재가 많을까 아니면 노력형 수재가 많을까? 이것은 계산할 필요도 없이 노력형 수재가 많다. 실제로 천재급에 속하는 타고난 능력을 가진 사람은 정말 소수이며 대다수의 성공한 사람들은 타고난 어느 정도의 능력에 더한 욕망의 부추김에 의한 노력의 결과이다. 따라서 보통의 성공한 사람들은 그것을 감사하게 여기기 보다는 당연하게 여기거나 심지어 불만족스럽게 여기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물론 이런 최종 판단은 개인의 성격과 사고 방식에 의해 매우 다르게 나타나기에 어떤 일관된 결론을 내리기가 힘들다. 그런데 예전에 MBC에서인가 웃기는 기사 하나를 내보내었다. 아마도 알통 굵기와 정치 성향을 연관시키는 것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이 기사는 그 무리한 연관성 주장으로 인해 이후 많은 조롱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 MBC 보도 내용으로 보면 알통이 굵을수록 보수 성향이 강하다고 표현했었다.

 

그런데 나는 이 기사 내용과는 비슷하게 실제로 육체적인 발달 정도와 정치적 성향이 어느 정도 연관이 있을 것이란 추측을 한다. 하지만 원리상 다른 점은 단지 몸이 얼마나 근육질이냐를 따질 것이 아니라 앞서 말한 타고난 것과 노력한 결과로 얻어낸 성공에 대한 관점에서 이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즉, 이 말은 육체적인 발달 정도가 자신의 몸에 대한 스스로 바라보는 성공의 측면으로 여겨본다면 이런식으로 가정해보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사람이 어떤 것에 대해 타고나든 타고나지 못했지만 노력해서 얻었든 간에 상관없이 그것은 이미 그 자신의 고유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 예를 들어 학생들이 공부해서 얻은 시험 성적은 그들 자신의 것이지 같이 공부한 친구들의 것이 아니다. 또한 누군가 열심히 일해서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해도 마찬가지로 그 결과는 그 자신의 것이지 동료의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정치적 성향에 따라서 이들의 성공한 결과는 다르게 받아들여지게 된다. 즉 보통의 진보적 성향에서(좌파, 분배, 복지, 공동체 중심) 보면 이들의 성공은 다른 성공하지 못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배려해줌을 기본으로 한다면 반대로 보수적 성향이(우파, 성장, 성공, 개인 중심) 강한 사람이라면 개인의 성공은 단지 개인의 성공인 셈으로 왜 그것에 대한 나눔을 국가가 강요하느냐 라고 되물어 볼 수 있다.

 

우린 이것을 좌파, 우파 형태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이것은 성공한 자와 성공하지 못한 자나 실패한 자의 구분이 더 옳다. 혹은 지배층이나 피 지배층으로도 구분이 가능하며 또한 기득권과 일반 서민들로 구분도 가능하다. 하지만 기득권에서 보기엔 이것을 상하 구분이 있는 듯 보이는 지배층, 기득권이란 말로 하면 피 지배층에서 반발이 일어날 수 있으므로 이 용어를 좌파, 우파로 부르길 의도한다.

 

아무튼 어떤 형태의 분류이든 간에 상관없이,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다. 그냥 개인별 성향의 문제인데, 내가 성공한 결과가 전체 사회가 조금씩 나의 성공을 위해 노력한 최종적으로 사회 전체의 성공으로 여기는 철학을 가졌다면 당연히 나의 성공 결과를 공동체와 나누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내가 성공한 것은 오직 나 자신의 피눈물 나는 노력에 의한 것이므로 온전히 내가 다 가져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이것에 대해 중간자적 입장인데 그래서 나는 스스로 중도의 입장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진보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보면 보수주의자들이 매우 이기적으로 느낄 수 있는 측면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실제로 우리가 어떤 성공을 거두었다면 그것에 대해 의지적이든 아니면 비자발적이든 간에 어떤식으로든 그것에 대해 도움을 준 상황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보주의자들은 분배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제도를 도입하고자 하고 그것을 통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자 한다. 반대로 보수주의자들은 만약 그들이 약자를 돕고자 한다고 해도 그것을 스스로 나서서 복지 사업을 벌여야 맞지 왜 국가가 개인의 돈을 세금으로 뺏어서 하는지에 대해 불만을 늘어 놓을 수 있다.

 

그래서 실제로 스스로 보수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서 자발적 복지사업을 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 문제는 그 스스로가 언제든 그것을 중단할 수 있다는 점과 또한 그 복지를 시행으로 인해 세력을 형성할 수 있다는 단점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것은 주는 자와 받는 자 간의 주종 관계나 혹은 갑을 관계가 맺어져서 마치 한쪽은 천사처럼 다른 한쪽은 마냥 감사해 하면서 받아야 하는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있다.

 

분명히 타고난 능력이 뛰어난 이들과 남들보다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한 사람은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렇게 성공한 사람들의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의 90% 이상은 그 자신의 선천적 능력 혹은 후천적 노력이다. 그런데 단순하게 공동체를 위해 그 결과를 그렇게 타고 나지 못한 이들과 나눠야 한다면 그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여기에 더해서 이 성공한 사람들이 운 좋게 타고난 능력으로 인해 별 다른 노력 없이 쉽게 얻어진 성공이라면 그나마 이런 논리에 대해 수긍할지 모르지만 정말 힘든 노력으로 얻어진 결과라면? 자신이 학창시절에 매일 공부을 안하고 옆에서 놀던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부럽지만 미래를 위해 힘겹게 공부해서 성공 했는데, 그 후에 놀던 아이들을 위해 힘겹게 번 돈을 내라고 한다면 어떤 심정으로 그것을 바라 볼 것인가?

 

하지만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다. 어떤 기업이 자사의 제품을 팔려면 그것을 사 줄 경제력을 가진 시민층이 필요하다. 그럼으로 당연히 시민들이 자사의 제품을 살 수 있도록 돈을 벌 수단이 필요한 셈이다. 그리고 이 인원은 많으면 많을 수록 좋은 것이다. 따라서 혹시나 경제적으로 실패한 이들에게 현재의 여유가 있는 돈을 지원해서 스스로 가난을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면 잠재적으로 그 회사는 미래의 고객을 확보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기에서 좀 많은 착각을 한다. 일단 가장 큰 착각은 왜 강자들이 약자들에게 자발적 배려를 해주지 못할까를 성토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이 약자라서 강자의 입장에 서보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또한 혹시 강자라고 해도 그 자신이 타고난 재주로 그것을 쉽게 얻었기 때문에 그 결과물을 남들과 나누는 것 자체를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을 수 있다.

 

누군가는 피땀으로 얻은 결과물을 운이 좋게 얻었으며 타고난 성향으로 인해 그것을 남들과 나누는 것을 크게 개의치 않는다고 해서 반대로 그렇지 않은 이들을 마구잡이식으로 이기주의자로 몰아 세우는 것도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소비자가 많아질 수 있는 미래의 사회를 만드는 것은 결코 지금의 나눔이 반드시 손해만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는 것은 현명한 생각이다. 나 하나만 잘 살자고 살다가는 전체가 망할 수 있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가장 명심해야 할 점은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이기적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들이 이룬 그 모든 것은 그 자신의 타고난 능력과 열심히 노력한 결과이지 사회적 약자들이 그들이 공부할 때 옆에서 커피 타주면서 응원했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가 아니란 뜻이다.

 

단지 여기에서는 어떤 성공을 거둔 사람들의 이야기가 미디어를 통해 미화되고 포장되어서 또다른 추가적인 이득을 얻어가는 것에는 경계를 해야 한다. 특히 이런 일들은 방송에서 매우 자주 이용되는 것인데, 과연 그 성공한 결과라는 것이 그것들에서 비춰진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는 감동적인 요소만 존재할까? 그래서 그런 어려움을 떨치고 성공했으니 성공의 열매도 맛보고 또한 더해서 사람들의 존경심도 얻어야 할까?

 

성공에 대한 결과에 대해 왈부왈부할 필요 없듯이 그들의 얻은 성공의 결과에 대한 평가도 하지 말하야 하는것이 옳다. 거의 대부분의 성공한 사람들이 성공한 이유는 바로 그들이 가진 욕망의 크기에서 비롯된다. 즉 많이 원하면 원할수록 현재의 고통을 견디고 장미빛 미래를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훗날 이것을 꿈이나 희망 등의 제법 그럴법한 용어로 욕망을 포장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어리석은 대중들은 타고난 능력과 거기에 더해진 노력과 함께 운까지 따라준  성공한 사람들이 방송 속에서 각종 포장되고 꾸며진 모습에 감동하고 심지어 존경하기까지 하면서 성공한 이들에게 무한한 신뢰와 존경을 보내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그 당사자들의 이미징 작업으로 얻어진 신뢰를 이용한 CF등을 통해 추가적인 이득으로 이어진다.

 

이 두가지 측면, 하나는 성공한 이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옳다고 믿는 것과 다른 하나는 성공한 이들의 만들어진 이미지에 혹해서 그들에게 추가적인 이득을 안겨주는 것은 모두 잘못된 사고 방식으로 야기된 결과이다. 아니 좀 더 혹독하게 말하면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겐 생각 자체가 없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누구나 한계적 이타심과 또한 제한적 이기심을 가진 존재들이다. 이것의 범위는 사회 구성원 숫자만큼이나 다양해서 그것을 어떤 특정 그룹의 생각으로 고정시킬 수 없다. 여기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결국 미래의 우리 후손들에게 가장 좋은 시나리오의 결과를 물려 줄 방법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 사회는 이런 사회의 미래 방향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지금도 이런 문제를 개인적인 측면에서만 보고 있다. 즉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선행' 이란 이름으로만 행해지고 이런 이야기는 미담이 되어 떠돌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성공한 이들이 이런 미담 행열에 가담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결국 우리는 현재 성선설에 입각하여 사람을 판단하고 그런 사회를 옳은 사회라고 믿고 싶어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세상은 분명히 선악설이 맞다. 사람은 생각보다 착한 존재가 아니며 그래서 당연히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착한 일을 할 것이라고 믿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기반으로 한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 우리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