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늘 빨라지는 세상

아이루다 2013. 11. 24. 09:41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 비록 교회는 다니지 않았지만,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그 당시 친구들 사이에서 카드 보내는 것이 꽤나 열풍이었다. 아마 요즘 역시도 그 방법만 달라졌을 뿐 원리는 같다고 보는데, 그것은 바로 그 카드를 얼마나 많이 보내고 또 얼마나 많이 받느냐에 따라 그 한해 인간관계를 간접적으로 측량하는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크리스마스 카드란 것은 보내려면 일단 돈을 내고 사야하고 거기에 손글씨로 나름 정성껏 적어야 하며 우표까지 구매해서 빨간 우체통에 넣어 주기까지 해야 마무리가 되는 다소 복잡한 과정이었다. 거기에 이 크리스마스 카드는 연말에 부쩍 늘어난 우편양으로 인해 평소보다도 더 느려진 우체국 배달 시스템에 의해 최종적으로 집배원이라고 불린 아저씨들에 의해 목적지에 도착하는 과정까지 더해진다.

 

덕분에 연말이 되면 집에 들어가면서 우체통을 확인하는 것이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물론 한통도 오지 않은 날은 작은 실망을, 우연히 겹쳐 몇 통이 들어 있는 날엔 기쁨을 느꼈던 순간들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재미 있는 관계가 있었다. 하나는 내가 보냈는데 상대가 보내지 않은 경우, 다른 하나는 나는 보내지 않았는데 상대가 보내는 경우이다. 전자는 내가 상대에게 호감을 느꼈는데 상대는 나를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경우로 보통 인기가 많은 아이들이었고, 후자는 나에게 호감을 느꼈는데 나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거나 그냥 무시한 경우이다.

 

중학교라는 어린시절, 그것도 남녀공학도 아닌 남자 애들끼리만 있는 남학교에서 이런 작은 인간관계에 대한 한 해 평가를 하고 있다는 것도 웃기기도 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관계성에 있어서 우월성이나 관계적 관점에서 자신의 사회적 위치, 아니 그 당시라면 자신의 미래에 주어질 관계성에 대한 예측을 해보기 위해 이런 작은 실험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지금 생각하면 약간 소름끼치기도 한다.

 

여담으로 내가 보내지 않은 대상이 나에게 카드를 보냈을 경우,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보통 새해 축하 카드를 보내, 보내지 못한 나의 불찰과 실수를 돌려서 사과하는 경우도 있고 내가 그 새해 엽서를 받기도 했었다. 물론 지금 내 기억이 정확한 것인지도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그 당시 그것은 꽤나 중요한 문제였던 것 같다.

 

요즘도 이 원칙은 그대로 살아 있다. 하지만 요즘은 이 크리스마스 카드 대신 SNS을 통해, 짧은 단문 메시지를 통해, 카카오톡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수단의 차이와 그 수단의 차이로 인해 서로에게 전달하고 받는 속도가 비교되 안될 만큼 빨라졌다는 점이 다르다. 나의 어린시절 카드는 보내는데 적어도 일주일 이상이 소요되었기에 보내지 않은 경우를 나중에 수습하기가 무척 어려워 새해 카드로 대신했지만 요즘은 1분 이내에 이런 실수를 바로 잡기가 가능하다.

 

어제 영월에 다녀오면서 봤던 작은 간이역이 기억난다. 과거 수십년 전에 석탄을 나르고 강원도를 향해 떠나는 젊은이들의 기타소리를 담고 있던 그 역은 이제 열차가 서는 일은 아주 드물고 거기에 내리는 승객도 타는 승객도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이 되었다. 이젠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더 빠르고 편한 방법들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렇듯 시간이 흐르면 느린 것들은 서서히 잊혀지고 같은 결과이지만 더 빠르게 우리가 그 목적 지점에 도달할 수 있는 수단이 발명되면서 매일 매일 교체 되어져 간다. 그리고 우린 그것을 선택하는 순간에 비용과 시간 그리고 효율성에 대한 판단을 하면서 타인의 경험과 나의 경험과 판단을 섞어 그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한다.

 

요즘은 특히 이런 정보들이 정말로 많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막히는 도로나 모르는 길을 갈때 별 걱정없이 네이게이션을 이용할 수 있으며 전국으로 뻗은 수 많은 도로들은 전국을 거의 단일권으로 묶어 주고 있다. 또한 인터넷 통신과 최근 몇년 사이에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스마트 폰의 보급으로 인해 언제 어디서든 누구와도 늘 교류하고 가상의 접촉이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100년 후쯤에는 지금의 내가 과거 크리스마스 카드를 회고하듯 스마트폰의 시대를 회고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거의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 우린 아마도 좀 더 빠르게 자신의 생각과 말을 상대에게 전달할 방법을 연구할 것이고 그것은 도대체 어떤 결과로 나타나게 될지 상상도 못할 지경이다. 어쩌면 우린 우리의 머리 속에 어떤 칩을 꽂아서 생각만으로도 전세계 누구와도 통신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약간 시선을 돌려 왜 인간이 이렇게 기술을 발전시키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도록 하자. 자, 우린 왜 이렇게 좀 더 빠르고 정확한 것을 위한 기술 발전을 향해 나가고 있을까?

 

그 답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그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10시간 되는 이동시간과 한시간 이내로 끝나는 이동수단 중에서 전자를 선택하지 않는다. 물론 둘 사이의 비용이 심각하게 차이가 난다면 10시간을 써서 이동할 수도 있지만 어느 정도 껏이라면 대부분 후자를 선택한다.

 

질문을 좀 더 심화 시켜서 그렇다면 우린 왜 빠르고 정확하게 무엇인가를 해내려고 할까? 이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경제적으로 유리하다. 빠르다는 것은 단위 시간내에 더 많은 것을 해낼 수 있다. 두번째로 유효한 시간이 제약되어 있는 태생적 한계를 가진 인간이 그에게 주어진 시간을 통해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을 더 넓혀준다. 더 빠른 이동은 내가 가고자 하는 곳에 더 빨리 도착할 수 있게 해주고 더 빠른 다운로드 속도는 내가 보고자 하는 어떤 영상을 더 빨리 볼 수 있게 해준다.

 

이렇듯 빠름에 대한 이유는 이것 말고도 훨씬 더 많지만 그 안에는 단 한가지 원칙이 숨겨져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의 행복이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빠름의 역설이 생겨난다.

 

나는 스마트 폰을 쓰던 초기에 카카오톡이란 앱을 쓸 때 거기에 내가 보낸 글을 본 사람의 숫자가 기록되는 모습을 보고 꽤나 흥미로웠다. 그리고 실제로 이 기능은 상당히 유용했다. 특히 그룹채팅을 할 때 내가 쓴 글을 과연 몇명이나 보았는지 알려주기 때문에 내가 보낸 정보를 상대들이 다 봤는지 따로 연락 안해도 좋아서 편했다.

 

그런데 계속 쓰다보니 그리 읽고 싶지 않은, 아니 내가 그것을 보았다고 알리고 싶지 않은 연락들이 생겨났다. 그런데 그것이 이미 본 후에 그 생각이 들면 이건 되돌리기가 불가능 했다. 이미 읽음으로 표시된 상대가 보낸 문자는 그 상대에게는 이것을 내가 이미 보았다고 통보를 해버린 것이다.

 

과거 내가 보낸 편지의 경우엔 중간에 사고가 날 수 있는 가능성이 꽤나 있었다. 주소를 잘못 적어서 안 간 경우나 우체국 내부의 분류 실수, 우체국 아저씨의 실수, 우체통엔 넣어졌는데 다른 이가 주어갈 경우, 누가 훔쳐갈 경우까지 참 많은 이유가 있어서 혹시나 내가 보낸 카드가 상대에게 안 갈 경우도 있고 또한 상대가 보낸 것이 나에게 도착하지 않을 경우도 있어서 보내고 받는 것에 대한 약간의 여유가 있었다.

 

그것은 상대가 나에게 보냈지만 내가 보내지 못했을 때 내가 둘러 댈 이유가 되기도 했고 반대로 상대가 나에게 둘러 댈 이유나 혹은 따로 말을 하기 그렇다면 상대가 나에게 보냈지만 도착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기에 그 자체를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실제로 카드가 늦게 배달되어 12월 말일이 다 되어 도착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아마도 그것은 내가 보낸 카드를 받은 상대가 늦게라도 다시 보낼 가능성도 높지만 나는 그것을 우체국에 우편이 밀려 늦게 도착한 것이라고 착각하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카톡의 빠름과 정확성은 이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즉 우린 예전과 동일하게 관계성에 대한 추측을 방법만 다르게 하고 있는데 문제는 여기엔 단 한치의 여유분도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요즘은 직설적이라고 표현하는데, 물론 솔직하다는 점에서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문제는 이것들이 주는 상처와 치유의 과정이 개개인이 감당하기에 버거운 상황도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덕분에 이젠 누구나 자신의 감정을 더 숨기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즉 누군가에 대한 감정적 상황을 우린 좀 더 건조하고 상대가 모르도록 가면을 쓰는 일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우리 개인들의 감정이 들어내는 순간 그것은 모두 단 하나의 여유도 없이 온전히 표출되기 때문에 그 자체가 너무 위험해 보이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우린 상당히 경직된 반응을 하는 경우가 늘어 간다. 이것은 물론 성인들 사이의 관계에서는 매우 일반적이지만 이젠 어린 아이들 역시도 이런 성인들의 모습이 쉽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관계의 우월성을 위해 상대에게 적극적이고 확실하게 베풀고 또한 그것을 통해 맺어진 관계에게 명시적으로 그것에 대한 댓가를 바라게 되는 것으로 응용되어져 간다.

 

이것은 내가 보내고 받지 못할 수 있는 카드와 달리 내가 보내면 반드시 답을 해야 하는 문자와 같다. 여기에서 만약 보낸 것에 대한 답이 없을 경우 이것은 일종의 관계성에 대한 배신이 되며 그후로 그 관계는 잘못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물론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좋다. 서로 숨기고 앞에서만 웃는 가식적인 것보다는 나을 수 있지만 문제는 우리 감정이란 것은 늘 변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1년이 다르고 10년이면 너무도 달라진다. 이것은 상대에 대한 감정 역시도 그렇다는 점이다. 즉 우리가 그것이 당장 싫건 좋건 간에 시간이 어느정도 흐르면 다시 뒤바뀔 수 있다는 점이 존재한다. 그런데 만약 좋지 않은 관계에 대해 현재의 감정에 따라 끊어버리게 되면 다시 좋아질 가능성은 불가능해진다. 즉 단절이 일어나게 되면 복구가 불가능 하다.

 

어떤 의미에서 삶을 한가지 관점에서만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누구도 사람의 관계를 벗어나 행복하긴 정말로 힘들다. 그런 능력을 타고 난 사람은 우리나라에 백 명도 안될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거의 모든 이들은 관계성 내에서 결국 최종적 행복을 느끼게 되어 있다. 그것이 가족 범위이든, 친구까지 이든 관계없이 그져 우린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뜻이다.

 

과거의 느림은 관계성에 대한 순간적 실수를 바로 잡거나 혹은 이미 틀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수단으로서 어느 정도 순기능을 가지고 있었다면 우린 빠름과 함께 이 순기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이때 우리가 인식도 못하고 있지만 우리가 이미 잃어버린 사람과 사람간의 여유는 결국 우리 현재 사회가 느끼는 각박함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로 되돌릴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고 세상은 더욱 빨라질 것이다. 그런데 우린 정말 이런 시대를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지는 솔직히 의문이다. 요즘 세상에 나타나는 그 수 많은 문제들 역시도 과거에도 모두 있었지만 어느 정도껏 여유가 있었다면, 지금은 그것들이 너무도 명확하게 나타난다.

 

미래의 기술은 끊임없이 개개인의 상태를 정보화 시켜서 상대에게 전달하는 능력을 개발할 것이다. 우린 그것이 실제로는 판도라의 상자일지도 모르면서도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상대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과 같아질 것이다. 내가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과연 이 능력이 축복일까 저주일까?

 

이것에 대한 반동의 원리로 우린 이런 기술의 발전에 본능적으로 저항하여 더욱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능력을 어려서부터 개발 할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기계는 우리의 상태를 알아내어 상대에게 전달하는 데 우린 그럴 경우 자신의 솔직한 마음이 전달되는 것이 위험하다고 느끼기에 결국 기계를 속이는 방법을 숙달시키려 할 것이고 이것은 결국 개개인의 감정을 얼마나 잘 숨기느냐로 연결되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아이들이 현재보다 미래에 훨씬 빠르게 성인들처럼 행동하게 될 것이란 뜻을 의미한다. 어린 시절 우린 감정을 별다른 제약없이 표출하지만 성인이 되면서 이것에 대한 절제를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게 되는데 이젠 그것이 시작되는 나이가 점점 낮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좋은 것일까?

 

나는 가끔 페이스북을 하는 사람이 왜 그곳에는 '좋아요' 밖에 없는지 불만을 토로하는 것을 보는데 그렇다면 만약 훨씬 많은 표현을 한다고 해서 더 행복해질까를 묻고 싶다. 차라리 그 '좋아요' 그것 하나만 있기에 그나마 그 안에서 버티고 있는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