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원인과 결과가 뒤바뀐 세상

아이루다 2013. 11. 18. 13:12

 

만약 현재의 상황에서 타임머신이란 기계가 발명 되었다면 아마도 세상은 엄청난 충격과 함께 이 새로운 기계를 이용해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설 것이다. 그것이 매우 큰 비용을 치룬다고 해도 그 돈을 치룰 수 있는 능력이 되는 이라면 정말로 큰 인기를 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시간여행이 현실화 되더라도 그것에 대한 실제적 이용 부분은 아마도 정부와 같은 단체들의 강력한 통제가 이루어질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미래로 향한 여행은 그나마 나은데 과거로 가는 여행일 경우 아주 심각한 시간의 역설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원인과 결과가 뒤바뀐 세상이다.

 

우린 실제 이런 여행을 직접 해보지 않아도 영화에서 충분히 이것을 경험해왔다. 시간여행의 가능성을 가지고 만들어진 영화 '터미네이터' 가 바로 그 상황에 대한 아주 강력한 예가 된다. 미래의 저항군이 된 '존 코너'의 출생을 막고자 미래에서 과거로 보내진 킬러 로봇과 이 로봇을 막기 위해 미래에서 과거로 온, 결국엔 존 코너의 아버지가 되어 버리는 이야기는 생각하기에 따라 매우 복잡해진다. 결국 미래의 존 코너는 자신의 아버지가 될 사람을 과거로 보내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미래의 결정된 상황이 과거의 사건에 있어서 원인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면 이른바 원인과 결과가 되집어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우린 시간의 단방향성 원리에 의해 모든 것은 원인을 통해 결과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고 또한 세상은 그렇게 동작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결과가 원인을 만들어 내는 일이 생긴다면 누가 그것을 제대로 이해 할 수 있겠는가?

 

탁자에서 떨어진 유리컵이 바닥에 부딪혀 깨지는 것은 실수로 그 컵을 건드렸거나 지진이 나서 땅이 흔들리는 원인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벌어지는 것이지 컵이 바닥에 부딪혀 깨졌기 때문에 그 컵을 건드렸거나 지진이 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물론 때로는 아주 커다란 물체가 땅에 부딪혀 지진이 나는 경우도 있으니 이땐 반대로 물체가 땅에 충돌한 것이 원인이 되고 지진이 결과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때도 역시 지진 때문에 물체가 충돌하지는 않는 것이다.

 

살인 사건이나  기타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나타난 상황이다. 이 세상에서 이 원리를 부정하는 것은 오직 양자역학에서 기술되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 뿐이다. 이 작은 영역을 제외하고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영역은 이 원리가 100% 동작한다. 그 어떤 것도 결과가 원인을 앞설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이것을 거꾸로 이해하는 경우가 생긴다. 물론 이것은 실제로 그런 것이 아닌 우리 인간의 인지력, 이해력 혹은 착각이나 현실 부정에 의해 생기는 온전히 우리 자신만의 오해로 인해 벌어진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것이 오해란 점도 인지하지 못하고 그 뒤집힌 원인과 결과에 대해 믿어 의심치 않으며 평생을 절대적 사실로 믿기도 한다.

 

이것에 대한 가장 흔한 예로는 일반적으로 부모들의 자식에 대한 착각이다. 현실적으로 문제가 발생한 자녀를 둔 많은 부모들은 자식이 사귄 친구에 대한 원인 제공을 우선적으로 뽑곤 한다. 즉 자신의 아이가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아이가 삐뚤어졌거나 문제를 발생시켰다는 가정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이런 것들에 대해 꽤나 완고한 편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 문제가 된다고 믿는 아들의 친구 역시 누군가에겐 자녀가 된다. 즉 둘의 입장은 명확한 것이다.

 

설령 모든 것을 양보해서 정말로 전적으로 아들의 친구가 모든 원인을 제공했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도 그 친구에 끌려 문제가 있는 행동을 보인 아들의 책임은 단 하나도 없는 것인가? 그리고 아들이 그런 비 도덕적일 수 있는 일을 하게 된 것에 대해 그 부모의 책임은 어떻게 될까?

 

아들의 친구가 원인이 되어 아들의 문제가 된 결과를 가져온 상황과 아들이 원인이 되어 아들의 친구가 문제가 된 결과를 가져온 상황은 완전히 동일한 가능성을 갖지만 이 세상의 대부분의 부모는 그 중 단 한가지만을 선택해서 원인과 결과로 인정한다. 하지만 그 가능성에는 자식이 그럴 수 밖에 없었던 표현되지 못한 부모의 문제점도 분명히 존재할 수 있지만 그것에 대한 내용은 완벽히 사라진다.

 

소위 명품이라고 알려진 제품이나 비싼 상품에 대한 판단 그리고 맛집으로 알려진 집에서 맛보는 음식에 대한 평가도 이런 현상이 늘 존재한다. 어떤 제품이 매우 좋다는 것 그리고 잘 만들어졌다는 것은 당연히 그것을 이루어 내는데 있어서 더 많이 비용이 소모되었음을 뜻한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런 제품들은 다른 동일한 기능을 하는 품질이 떨어지는 제품에 비해 비싸게 거래가 된다.

 

그런데 제품의 품질을 볼 수 있는 감각이나 지식이 부족한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이 제품이 좋다는 것을 판단할 수 있을까? 한점에 수십억 원 하는 피카소 작품을 보면 보통 사람은 이게 그 유명한 피카소 작품이고 비싸다 라는 생각을 하지 그 그림의 가치를 제대로 느끼기 힘들다. 하지만 실제로는 느끼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 작품은 그렇게 거래가 되는 것이다. 문제는 느끼지 못하는데 그것을 구매하는 사람들의 경우에 발생한다.

 

제품이 가진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니 이젠 거꾸로 생각한다. 비싸니 좋다고 믿기 시작하는 것이다. 제품이나 예술 작품등이 좋아서 비싸게 거래되는데 모르니 비싼 것이 원인이 되어 결론은 좋은 것이 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좋은 것들은 비싸기 때문에 이렇게만 생각해도 세상 사는데 큰 지장이 없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매우 영악하다. 그래서 일반 제품도 단지 비싸게만 파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런 제품들이 큰 인기를 끌고 소위 말해서 줄 서서 사는 사태가 벌어진다.

 

음식점의 경우도 완전히 동일하다. 맛집이라서 해서 사람들이 줄 서서 먹는 것을 보면 괜히 그 음식이 맛있을 것 같다. 그래서 먹으면 맛있다. 그런데 정말로 맛있을지 아닌지는 모를 일이다. 그냥 남들이 맛있다고 하니 맛있은 것인지 아니면 유명하니 맛있다고 느끼는지 모른다. 비싼 음식을 먹으면 맛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나 희귀한 재료나 혹은 말도 안되는 연관된 상상으로 고양이를 먹으면 관절이 좋다고 믿는 것까지 모두 원인과 결과가 뒤집힌다.

 

자신의 지식과 감각의 문제로 인해 벌어진 이 사태에서 우린 늘 원인과 결과가 뒤집히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도대체 언제부터 좋은 제품이 비싸다는 상식에서 비싼 제품이 좋다는 상식으로 뒤집혔을까? 그리고 그걸 믿는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 인해 그것을 거의 종교처럼 믿으면서 단 한점의 의심도 안하는 것일까?

 

이런 예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많이 일어나는 현상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자기 합리화'인데 여기에서 우리는 숱하게 원인과 결과가 뒤바뀌는 상황을 경험하게 된다.

 

뭔가를 갖고 싶거나 하고 싶다는 욕망이 일어났을 경우 이것을 이루기 위해 사람은 어느 정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욕망이 강할수록 더 많은 노력을 하게 되는데 실제로 그 목표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많은 이들이 이것을 포기한다. 그리고 그럴 경우에 욕망이 사그라들지 않으면 자신을 추스리고자 이젠 '여우의 신포도' 현상이 나타난다. 즉 자신이 품었던 욕망에 대한 단점을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현상은 이렇게 진행이 된다. 만약 천만원이 넘는 어떤 제품을 사고 싶었으나 도저히 경제적 능력이 되지 않아서 갖지 못하게 될 때 우연히 들은 그 제품에 대한 문제점이나 하자등을 보게 되면 이젠 그 제품이 그리 매력적이지 않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이 돈이 없어서 이 제품을 사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 제품에 문제가 있어서 사지 않았다는 식으로 자기 합리화나 혹은 자기 최면을 걸어서 누군가에게 말을 할 땐 이 제품에 대한 문제점을 열정적으로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래서 자기는 구매를 하려다가 돈이 없어서 못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다행이라고 말하면서 결론을 낸다.

 

이것이 오래 되면 이 제품을 사지 않은 원인은 돈인데 이것이 바뀌어서 제품의 하자가 원인이 되고 이것에 대한 결과로 원래는 제품을 갖지 못한 상태의 결핍이 부른 불행이 되어야 함에도 원인이 뒤틀리는 바람에 결과는 이 제품을 갖지 않아서 행복한 상태가 되어지는 것이다.

 

갖고 싶었으나 원인이 되는 돈이 없어서 갖지 못한 결과가, 제품을 갖지 못한 것이 원인이 되어 그 당시 그 제품을 살 돈이 없었기 때문에 다행이라는 결과로 뒤바뀌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이게 맞는 경우도 있으니 늘 이 논리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간발의 차이로 버스를 놓치고 난 후 바로 다음에 오는 텅 빈 버스를 타는 행운은 분명히 존재한다. 버스를 놓친 원인이 다음 버스를 기다려야 하는 결과로 이어져 당사자를 불행하게 만드는 경우가 존재하지만 재수 좋게 텅 빈 다음 버스가 바로 옮으로서 결국엔 간발의 차로 놓친 것이 원인이 되어 결론적으로 행복한 결말을 맞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원인과 결과가 뒤바뀌는 상황이 연출이 될까? 그것도 실제로가 아닌 우리 머리속에서만 이루어지는 이런 종류의 착각은 왜 발생하는 것일까?

 

이것에 대한 답은, 이런 착각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우리가 모든 행동을 할 때 그 최종 결과가 바로 행복을 얻기 위해서라는 대 전제를 자주 잊어 먹기 때문이다. 우린 무의식중에서 늘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할 수 있는 방향으로 선택의 방향을 틀게 된다. 이것은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니고 자신이 늘 의식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과일가게에서 과일을 고를 때 조금이라도 더 싱싱하고 맛있게 생긴 과일을 고르는 과정으로서 쉽게 설명될 수 있다. 누가 거기에서 흠짓이난 과일을 고르려 하겠는가?

 

하지만 이런 고객의 선택은 연쇄적으로 과일 가게 주인이 과일에 난 흠짓을 숨기려고 하는 행동을 유발시킨다. 아마도 딸기를 한 번이라도 사 본 사람이라면 두 개의 층으로 나뉜 딸기 포장 박스의 밑에 숨겨진 딸기를 기억할 수 있으리라. 멀쩡한 모양의 딸기 밑으로 깔린 흠짓나거나 너무 작은 크기의 딸기를. 그리고 아마도 많은 이들이 이런 얄팍한 딸기 장사의 장사 수완을 욕하겠지만 과연 이것의 원인 그 장사꾼일까?

 

물론 사람에 따라 그럴수도 있지만 처음에 그냥 팔던 사람이 자꾸 사람들이 좋은 것만 골라가니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결국 사람들의 골라가는 습성이 원인이 되어 결과적으로 딸기가 그렇게 담겨져 파는 상황이 벌어졌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신입 딸기 장사는 흠짓이 난 딸기를 모두 버리고 멀쩡한 딸기만을 골라서 팔 수는 있다. 하지만 이럴 경우 딸기 값은 두배나 세배까지 뛸 것이고 만약 두 가게에서 한쪽에서는 흠짓이 난 딸기를 숨겨서 싸게 팔고 다른 한쪽은 정직하게 멀쩡한 딸기만을 골라서 두배의 가격으로 판다면 한달 후 두 가게 중 어떤 가게가 망할 것인가? 그리고 망한 가게의 원인은 도대체 무엇일까? 신입 주인의 어리석은 선택일까? 아니면 사람들의 싼 것만 찾는 태도일까?

 

우린 자주 모여서 대화를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문제점을 이야기 한다. 사람들이 어떻고.. 저쩌고.. 하면서. 그리고 그 사람들로 인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이렇게 힘들어지고 믿을 수 없게 되고 나쁜 놈들이 생기고 한다고 하면서 불만을 늘어 놓거나 불안해 한다. 문제가 많은 사회는 자살자가 많이 나오고 흉악한 범죄도 자주 일어나는데 이것이 원인이 되어 우리가 사는 사회가 그리 행복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생각해보자. 자살자가 많이 나오고 흉악한 범죄가 많이 일어나는 것이 과연 원인일까? 그것들이 아무런 이유가 없이 오직 개인적 성향에 의해 벌어지는 일인가를 묻는 것이다. 물론 그럴 경우도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배고픈 개가 고기를 훔쳐먹는 것이다. 그때 고기를 훔쳐먹은 개를 도둑개라고 비난할 수 있지만 원래 개를 배고프게 하지 않았다면 그 개가 왜 고기를 훔치겠는가?

 

자살이나 범죄자와 같은 사회의 낙오자들 역시도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가 그들을 만들어 낸 점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지 그들이 오직 그들 자신의 의지대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란 뜻이다. 누가 자신의 목숨을 그냥 내던지고 누가 남에게 흉악한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가고 쫒기는 생활을 하고 싶어 하겠는가?

 

그들이 그런 삶을 선택한 것에 대한 부분은 우리 사회 전체 구성원의 공동 책임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행동을 자신이 불안하게 살아가야 하는 그래서 행복을 잃게 하는 원인으로만 규정한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된 것에는 그 자신의 무관심과 개인 이기주의가 원인이 되어 그런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을 인지도 못하고 설령 안다고 해서 설마 그렇겠느냐 혹은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냐 라는 식으로 되 물어 볼 것이 뻔한 것이다.

 

우리나라 정치 현실도 완벽히 이것과 동일하게 적용된다. 우린 정치인들의 비리나 말도 안되는 정책이 시행됨을 보면서 분노하고 욕을 하지만 실제로 그들을 뽑은 당사자가 바로 우리 국민들이다. 즉 그들은 우리 자신이 원인이 되어 결과가 된 사람들이지 그들이 원인이 되어 그 분노를 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분노한 최종 결론을 보면 우리 자신이 원인인 셈이다.

 

남을 비난하는 것은 쉽기 때문에 누구나 그것을 잘하고 자주한다. 하지만 자신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반성하는 것은 정말로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며 그것에는 인지 자체도 힘들고 인지를 해도 그것을 인정하는 과정이 무척 고통스럽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거의 엄두도 내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리고 이것을 해결하는 가장 일반적인 과정이 바로 자기 합리화 혹은 상황 논리 등으로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결국 최종적으로 이것들을 해내는 역할로 인해 우린 원인과 결과가 뒤집어진 사고를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린 우리가 불행해진 모든 원인은 외부에서 찾는 것에 매우 익숙하지만 그리고 그것을 서로가 공감하는 것에도 너무도 자연스럽지만 결국 모든 그 원인이 나 자신으로부터 생겨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엔 너무도 미숙한 존재이다. 그리고 이 미숙함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어나는 원인과 결과의 흐름을 뒤집어서 결과가 원인 되는 형국을 만들어 내거나 원인을 엉뚱한 곳에서 찾아 어이없는 결론을 내기도 한다.

 

문을 잠그지 않아서 도둑이 들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도둑이 많이 때문에 문을 잠궈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보통 집에 도둑이 들면 그 원인을 문을 잠그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정말 원인은 문을 잠그지 않아서 그럴까 아니면 도둑이 많아서 그럴까? 그리고 결과는 도둑이 든 것일까? 아니면 문을 잠그는 것일까?

 

그리고 이 모든 것에는 왜 도둑이 많아질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한 좀 더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사고는 여기까지 진행되지 못한다. 도둑이 많아진 것에 대해서 그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인식은 단지 도덕적 비난에 그치고 만다. 왜 사람들이 도둑이 되어야 했을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그들은 그저 사회를 좀 먹는 낙오자로만 인식한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군가에게 더 나은 기회가 있었다면 도둑이 아닌 다른 일을 하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나의 모든 행복에 대한 결론은 우리들 자신에서 부터 나오지 외부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정확하게 인식한다면 우리 머리속에는 더이상 원인과 결과가 뒤집히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