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가치있는 것들에 대한 욕망

아이루다 2013. 10. 28. 13:47

 

그냥 여러가지 복잡한 의견이 있더라도 최대한 단순화 시키고 난 후, 이 시대 전에 살았고 또한 이 시대를 살아가며 더해서 이 후의 시간에 존재할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단 하나의 목표를  한 단어로 표현하라고 하면 그것은 행복이 된다. 물론 이 행복이란 단어를 얻기 위해서는 정말로 많은 다양한 경로가 있다는 것도 변치 않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복잡해지고 다양해지며 또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기 힘든 예상치 못한 갈등도 발생한다.

 

그렇다면 이 행복이란 목표에 숨겨져서 실제로는 그 행복감을 유발시키고 또한 우리가 삶의 방향을 결정시키는데 있어서 어떤 본질이 숨겨져 있을까? 어려운 말 쓰지 말고, 쉽게 말해서 행복의 본질이 무엇일까? 이 질문에 숨겨진 재미있는 것은 바로 행복도 바로 최종적인 본질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내용이다.

 

아무튼 본질이든 아니든 보통 사람들의 삶은 언제나 더 행복한 방향으로 결정이 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행복의 원천은 도대체 무엇일까? 물론 단순하게 식욕, 성욕, 수면욕, 배설욕 등의 기본적으로 우리가 가진 본능을 해결함으로서 오는 행복감도 있지만 우리 인간은 이것으로 만족하는 단순한 존재가 아니기에 여기에 더해서 무엇인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그것이 앞서 언급한 바로 '가치'란 존재이다.

 

잠시만 생각해봐도 그 어떤 것이든 가치가 없는 것을 기반으로 하는 행복은 참 얻기가 힘들어 보인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 아이를 통해 느끼는 행복감은 매우 크게 느껴지기 마련이지만 만약 아이가 그럴만한 가치가 없다면 행복을 느끼기가 쉽겠는가?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의 아이와 내 아이는 분명히 같은 인간의 아이인데 그 둘을 통해 느끼는 행복감은 절대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것은 분명히 아이를 키우는 행복에는 바로 가치가 늘 본질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런데 그 아이가 바로 내가 키우는 아이일 때 행복한 것이지 남이 키우는 아이를 바라볼 때 행복해지기란 쉽지 않다. 물론 아이를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아이를 보고도 행복을 느끼겠지만 이것은 단순히 기호적 취향이다. 즉 담배를 좋아하는 사람, 술을 좋아하는 사람처럼 개개인별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한 선호도란 뜻이다.

 

결국 우리 인간이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에 숨겨진 진실은 우리가 어떤 가치를 느끼는 것을 찾고, 만들고, 키우고 하는 그 모든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사람을 만나는 행복 역시도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성에 대한 가치를 만들고 키우는 과정을 통해 나타나게 되는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을 만난다고 해서 다 행복하진 못하다. 우리가 정말 그 안에서 행복하려면 내가 그 만큼이나 가치를 느끼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래서 그 가치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일수록 사람들에게 많은 매력을 느껴지게 한다.

 

이것을 정리해 우리가 행복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 바로 내가 어떤 것에 가치를 느낄 수 있는가를 찾아내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평소에 참으로 행복하게 세상으로 살아가는 운 좋은 사람들을 제외하고 남은 대다수의 많은 이들은 이 행복을 찾기 위해 꽤나 노력을 하고 살아간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찾아지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매우 힘들게 찾기도 하며 또 다른 이들은 평생을 제대로 찾지 못해서 행복하기 보다는 불행하게 살아가는 경우도 꽤나 된다.

 

오늘 글은 행복한 사람이나 이미 행복할 수 있음에 근접한 사람들에 대한 글이 아니다. 오늘 글을 바로 행복하고 싶으나 현실적으로 행복하기 힘든 사람들에 대한 조언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치에 대한 무한한 동경을 버리는 것에서 출발한다.

 

현대 사회의 삶에 익숙한 우린 보통 교육을 받은 후 사회에 진출해 회사에 다닌다. 뭐 어떤 이들은 스스로 장사를 하거나 아니면 아버지 뒤를 이어 그룹의 후계자가 되기도 하겠지만 절대 다수는 보통 그냥 직장생활로 시작을 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몇 년 간의 사회 생활 후 다시 다른 선택들을 하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직장생활을 할까? 뭐 너무 뻔한 대답이다. 일단 가장 큰 이유는 돈을 버는 것이며 거기에 더해서 자신의 존재감 성취에 대한 욕구도 있다. 그리고 우린 힘들게 일해서 번 돈을 모으거나 혹은 사고픈 물건이나 먹고 싶은 것들을 소비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즉 힘들게 번 돈을 자신이 충분히 그 가치를 느끼는 것과 바꾸는 일을 한다. 그리고 혹시 남은 것이 있으면 이것을 미래에 내가 돈이 없을 때를 대비해 그때 원하는 가치와 바꿀 수 있도록 은행에 넣어 두는 것이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틈틈히 여자나 남자를 만나 연애를 하기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애도 낳기도 한다. 이것 역시도 자신이 적극적으로 원했든 우연히 만났든지 상관없이 자신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배우자라는 가치를 얻는 행위이다. 즉 우린 결혼을 통해 남녀가 서로에게 평생에 걸쳐 함께 할 매우 든든한 동료를 얻게 된다. 그리고 또한 어쩌면 생명체로서의 최고의 가치로도 환산될 수 있는 2세에 대한 욕구도 충족이 된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불행하게도 이런 과정을 거치지 못한채 평생 혼자 살아가면서 여기에서 채워지지 못하는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하게 된다. 물론 다른 면에서 노력을 하다보니 너무 잘 채워져서 실제로 다시 결혼이란 일종의 구속을 스스로 회피하는 경우도 생기는데 실제로 이런 경우는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더해서 혹시 지금 그렇다고 해서 미래의 늙은 나에게도 그럴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결혼을 했건 자발적으로 쏠로의 길을 택했건 간에 현 시점에서 스스로 충분히 행복하다면, 즉 가치에 대한 욕구 충족이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냥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그래도 살아가면 된다. 그런데 만약 그리 행복하지 못하다면?

 

생각해보면 우린 직장(경제생활), 결혼(가정생활) 등을 제외하고도 상당히 많은 일에 대해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어떤 제품들을 사는 것에 대한 행복, 운동 등의 육체적 행동을 통한 행복, 인간간의 교류를 통한 행복, 무엇인가를 배우는 행복, 여행의 행복, 문화 생활을 즐기는 행복, 자신이 하고픈 일이나 어려서부터 생각한 꿈 등을 실현해나가는 행복 등등 우리가 느끼는 행복감의 종류란 정말로 다양한 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느끼는 행복감에 대해 남들에게 이야기 하곤 한다. 그리고 그렇게 좋은 것이니 너 역시 같이 해보라고 권유한다. 이 권유에 대한 경로는 정말로 다양한다. TV 다큐를 통해 소개되는 다양한 삶, 책 속에서 소개된 삶, 인터넷 기사나 혹은 블로그 글들에서 소개된 삶, 각종 SNS를 통해 혹은 지인들의 소개를 통해 알게 되는 다양한 형태의 정보들까지 해서 우리는 정말로 선택할 것들이 너무 많고 실제로는 시간과 돈이 부족한 형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모든 것들에서 그 자신이 실제로 그것을 했을 때 100%로 소개한 사람의 만족도와 일치하지 않는 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고아원 자원봉사가 세상에서 가장 높은 가치를 얻게 만들어서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고 했지만 그것을 따라한 다른 사람은 아이들의 성가심에 하루만에 그 자리를 차고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도 반복하다보면 시간과 노력과 돈이 들어가면서 처음에 느끼지 못한 가치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처음엔 조금 싫거나 힘들더라도 참고 계속 그런 시도를 하기 마련이다.

 

물론 이런 과정을 통해 처음에 느끼지 못한 가치를 찾는 좋은 경우도 있지만 또 다른 많은 이들은 단순히 시간과 돈만 버린 채 그곳으로부터 떠나야 할 처지가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일들은 또 다른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일들로 몰려간다. 그래서 디카를 사서 사진을 찍으로 다니거나, 매주 영화를 보고 감상문을 쓰거나, 여행을 다니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동물을 키우거나, 동네 모임에 나가 탁구를 치거나, 요리를 배우거나, 미싱을 사서 옷을 만들거나 해본다.

 

이런일이 오래 반복되면 어느새 자신의 집엔 먼지를 뒤집어쓴 미싱, 자전거, 탁구채, 주인을 잃은 동물 우리, 오랫동안 관리가 안된 영화 소개 블로그 등등이 남겨진다. 그리고 그 많은 시도는 많은 비용과 시간을 소모한 채 무산되어 버리고 결국 자신은 원점으로 되돌아 오고 만다. 하지만 이 시도는 멈출수가 없다. 왜냐하면 멈추는 순간 자신이 더이상 행복할 가능성 자체가 현저하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늘 세네가지를 움켜지고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서 또 다른 많은 시도들을 해본다. 물론 복구되기 힘든 시도는 못한다. 누구처럼 전 재산을 다 털어 인공위성을 만들어서 띄우거나 직장까지 그만두고 세계 여행을 할 엄두는 내지 못한다. 어쩌면 어떤 일을 할지라도 늘 실패할 것을 염두에 두기에 언제라도 제자리도 돌아오기 쉬운 것만을 골라서 시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새로운 취미를 하기 위해 필요한 물품을 살 땐 늘 중고가를 신경쓴다. 언제라도 자신이 이 시도를 그만둘 때 시간은 어쩔 수 없어도 돈은 일부분이라도 되돌려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현상을 일종의 행복 추구에 대한 중독현상으로 본다.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것은 당연하나 우리가 행복만을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약간 부정적이다. 실제로 이 행복에 대한 욕구는 또다른 욕망이 된다. 행복이란 것 자체가 가진 것이 많거나 원하는 것이 적어야 높아지는 속성이 있는데 행복하기 위해 행복에 대한 욕망을 늘려버리면 아무런 이득도 없이 행복감만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쯤에서 꼭 내가 왜 행복해야 하는가에 대한 스스로의 자문이 필요하다. 실제로 행복한 사람은 그럴 필요가 없지만 지금 행복하지 못해서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이 질문은 필수적으로 해야 한다. 정말로 왜 행복하려고 하는가?

 

아마도 답을 강요받게되면 딱히 대답할 말이 없어서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니까요' 라고 대답을 할 것이다. 그런데 다시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왜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지?'

 

이것에 대한 답은 하나다. '우린 그렇게 태어났으니까'

 

그렇다. 우린 그 답대로 우린 행복 하기 위해서 태어났다. 그런데 행복하지 못하다는 말은 자신의 태어난 본질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렇다면 빨리 이 본질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잘 되는 사람도 있지만 잘 안되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잘 안되는 이들은 조급해지고 그러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실제로 불필요한 시도를 자주 하게 된다. 그리고 버려야 할 것도 버리지 못한 채 늘 수 많은 행복 가능성을 쥐고 살아간다.

 

그 어떤 것도 가능성이 모두 있으니 우린 카메라를 메고 등산가방을 지고 지갑에 돈을 두둑히 넣은 채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도 스마트 폰을 바라보면서 내일 나갈 직장을 생각하느라 멀리 가기도 힘들어서 자신의 집 근처를 배회한다. 이런 상황이니 사진을 찍고 싶은 것이 있어도 카메라 꺼내기가 힘들고 자세도 불안하며 끊임없이 스마트 폰도 봐야 하니 눈이 쉴틈이 없다. 그래서 자전거도 천천히 몰아야 하고 등산 배낭은 왜 지고 있는지조차 까먹고 있다.

 

이것들 중에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도구가 행동이 어떤 것일지 알길이 없기에 일단은 다 하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마치 TV를 볼 때 여러 채널을 동시에 보는 효과를 준다. 실제로 이 상태에 있는 사람은 여러 채널을 동시에는 볼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어떤 채널을 통해서도 원래 한 채널을 볼 때 느끼던 행복감을 느끼긴 힘들다.

 

이 원리를 이해하면 행복하기 위해서, 즉 가치를 얻고 만족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순위가 나타난다. 그것은 바로 잡다구리한 행복 가능성은 과감히 버리는 것이다. 일단 손발이 자유롭고 어떤 일을 할 때 집중을 방해하는 요소는 다 버려버린다. 이것은 꽤나 중요한 일이다.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언제 행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이 나온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어떤 것이든 '집중'을 할 때 생긴다. 밥을 먹을땐 맛있은 식사에 집중, 사람들과 만날 땐 지금 앞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집중, 영화를 볼 때 화면에 대한 몰입, 사진을 찍을 땐 자신이 찍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타이밍 등등 우리가 실제로 시간을 잊을 때 우린 행복하게 된다.

 

그런데 머리가 복잡하고 손발에 여러가지가 묶여 있으면 그 스스로는 멀티 프로세싱을 하고 있다고 자부하면서 행복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정작 자신의 그 자신의 그토록 원하던 행복은 버리고 있는 셈이 된다. 그래서 우린 가장 처음에 가능성이 낮은 것들에 대한 버림을 시작으로 변화의 출발점을 삼아야 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바로 욕망의 포기, 즉 욕심을 버리는 행위가 된다. 그 많은 것들로부터 행복을 얻고자 하는 욕망을 버리면 이젠 슬슬 그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만이 남아 있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추구해야 할 절대적 가치가 된다.

 

이것은 친구가 100명인 사람과 친구가 한명이 사람의 인간관계처럼 차이가 생긴다. 100명인 사람은 눈코뜰 새 없이 경조사와 만남으로 인해 바쁘지만 그는 그 누구와도 마음을 나누기가 힘들다. 반대로 친구가 한명인 이는 그 친구가 바쁘면 만나기는 힘들지만 가끔 서로 시간이 맞아 만날 때 그 어떤 관계보다도 깊은 이해와 공감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실제로 우린 이런 친구가 한 명쯤은 있을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다른 대안을 찾길 원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있다.

 

이 방법에 있어서 최고의 결과는 모든 욕심을 버린 상태, 즉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경지가 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부터는 일반 사람들이 갈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그래서 우린 그 전에서 대충 마무리 해야 한다. 그냥 단순하게 말하자면 해탈의 경지가 되면 실제로 최고의 행복감을 얻는데 그것을 환희라고 표현을 한다. 우린 부처가 고행을 통해 얻는 어떤 고귀한 것이라고 여기겠지만 실제로 부처가 얻은 것은 바로 영원하고 극대화된 행복감이다. 그래서 부처는 이 경지가 있음을 알지 못하는 우리 일반인을 불쌍하게 여긴 것이다.

 

이렇게까지는 못해도 10개 중 8개를 버리고 2개에만 집중할 수 있다면 아니 확실하게 하나만 남겨서 거기에만 집중해 적어도  자신이 만족할만한 시간동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면 결론적으로 없던 가치도 만들어지고 거기에서 많은 행복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 행복은 또 다른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카메라에 빠져 사진을 너무도 열심히 찍으러 다니게되면 장비에 대한 욕구가 생기고 찍은 사진에 대한 공유 욕심도 생긴다. 그래서 돈을 열심히 벌어서 장비를 사려고 하기 때문에 직장에 더욱 충실해 질 수 있고 공유를 위해 다양한 글이나 카페 활동을 하게 된다. 물론 이것이 무조건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자신에게 또다른 형태의 도전욕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웃기는 예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을 너무 좋아하게 되어 일본어를 마스터하는 사람처럼 어떤 것을 너무도 좋아하게 되면 그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넘는 것에 대한 의지가 매우 강해지는 것이다. 즉 사람은 하고픈 일이 있으면 정말로 적극적이고 비범한 능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일반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적어도 아이를 낳음으로서 이 대상이 자동적으로 생겨버린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아이를 키우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라는 사회적 판단과 함께 자신이 투자한 시간과 돈이 아이를 키우내는 과정으로 환산되면서 자신도 모르게 회사 생활에 더 열심히 하게 되고 돈을 모으는 이유가 생긴다. 그렇지만 처음에 말했듯 이 글을 이런 일반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조언이다.

 

* 혹시나 해서 적어두는데 아이를 키우는 가치에 올인한 사람은 나중에 반드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우리가 평생 어떤 가치를 추구하려고 한다면 그것의 대상은 변하지 않는 것이라야 한다. 사람은 변한다. 특히 크고 있는 인간의 아이는 절대적으로 변한다. 그래서 나이를 먹은 후 이 가치가 사라진 후 사람은 급격한 회의감과 우울증 속에서 휘말려 들어가게 되어 있다.

 

보통 그럴 경우 여러가지를 찾아서 헤매이게 되지만 지금 나는 그것을 그만두고 하고 있는 있들도 최대한 버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일단 최소한 한 개 정도 남기도록 해봐야 한다. SNS을 통한 교류, 사람 만나기, 스마트 폰, 독서, 요리, 운동, 여행, 영화보기 등등 중에서 단지 행복할 가능성이 높다고 해서 하고 있는 일들을 과감히 정리해 보자. 그러면 모두 사라지든지 아니면 한 두개 정도 남게 될 것이다. 다 사라졌다면 처음부터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그래도 운 좋게 한 두개가 남았다면 거기에서부터 시작하면 된다.

 

변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새롭게 시작하는 것으로 인해 우리가 변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새롭게 시작한 그것이 바로 나에게 잘 맞는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지 내가 뭔가 새롭게 한 것 자체로 변화가 되는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변화를 매우 놀랍게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 사람은 새롭게 시작한 것으로부터 자신이 큰 가치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상황으로 연결된 운이 따르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운은 운이다. 운은 실력도 아니고 우리 삶은 실력대로 살아가는 곳이 아니다. 우린 운에 좌우되는 세상에 살아가고 있으며 이것은 오직 확률적이다. 만약 지금 자신이 무척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자신의 삶이 불행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불운한 것이다. 행복하지 못한 것과 운이 없는 것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우린 우연히 얻은 행운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거나 생각지 못한 불운에 의해 불행한 삶을 살아간다.

 

이것은 우리네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는 과정이다. 우리가 아무리 보험을 잘 들어놔도 내 팔 다리가 잘리거나 내 머리가 다쳐 제 역할을 못하면 행복하기란 너무도 힘들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현재의 불행을 너무 절망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단지 행운이 도래했을 때 이것을 놓치지 않고 꽉잡을 생각은 하고 살아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평소에 해야 할 준비이다.

 

단순하게 시작해보자. 버릴 것은 버리고 운이 오길 기다려보자. 그리고 버릴수록 마음 한켠에 쌓인 부담감이 사라지고 마음이 좀 덜 조급해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면 아직 제대로 버리지 못한 것일 뿐이다. 우주의 시간에 나에게 허용된 시간 100년은 그야말로 찰라일 뿐이다. 100년이라고 해봐야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