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 드라마
언제인지부터 모르겠지만 언론을 통해 우린 막장 이란 용어를 꽤나 자주 접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막장은 원래 탄광에서 유래한 용어라고 한다. 실제로 이 말은 탄광의 마지막을 뜻하는 말이지만 어쩌면 60~70년대 산업발전기 시절 실패한 인생들이 마지막으로 찾는 바로 그 탄광의 슬픈 자화상을 뜻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즉 갈때까지 간 삶을 뜻하는 이 막장이란 뜻이 2천년대 한국 드라마 앞에 수식어로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SBS에서 2007년에 방영한 조강지처 클럽이라고 하는데 솔직히 이런 시초에 대한 부분은 의정부 원조 부대 찌게처럼 알길이 없다. 아무튼 대충 시기적으로 그때쯤 신문사에 있는 기자 하나가 이 용어를 써서 드라마를 표현한 모양이다. 아무튼 막장 드라마는 것은 드라마로서 갈때까지 간 일종의 쓰레기 급의 작품을 뜻하는 용어로 정착되었다.
그런데 막장으로까지 비하되는 이런 드라마들이 왜 계속 공중파 방송을 타는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별로 생각할 필요도 없이 바로 시청률 때문이다. 아무리 내용이 비현실적이고 개판이라고 해도 사람들이 본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대한민국 주부들의 TV 사랑은 정말 드라마에서 시작해서 드라마로 끝나는데 거기에 가장 정점에 서 있는 것이 바로 이 막장 드라마들이다.
조금 원론적인 이야기를 먼저 해보면, 드라마는 연기자들이 함께 모여서 어떤 역할을 해낸 결과물이다. 그리고 이 연기, 즉 연극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은 꽤나 오래되었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 시대에도 연극은 있었으며 그 유명한 철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경우엔 아예 연극 자체에 대한 정의까지 내렸다는 점이 이채롭다. 실제로 연극, 연기를 하는 일은 꽤나 매력있는 직업이기도 하고 또한 누군가의 인생을 살아 본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을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이 인간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유용한 면도 있다.
그래서 몇몇의 아주 특이한 작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드라마, 영화 등은 바로 현실의 투영이 된다. 물론 그 모든 작품들은 모두 다루는 주제가 다르고, 나오는 주인공이 다르고, 그 배경이 다르지만 결국 우리가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여 무엇인가를 만든다면 아니 애니메이션처럼 동물이나 물건이 주인공이라고 해도 실제로 그들의 모습은 철저하게 인간의 모습과 가치관을 따르게 된다. 즉 우리가 만들어내는 모든 연극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감독이나 연기는 현실감을 매우 중요한 요소로 생각한다. 적어도 극을 보는 시청자들이 그 극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바로 진짜같이 보이는 연출과 스토리의 개연성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어떤 극에 나오는 주인공이 우리의 보편적 상식에 매우 어긋나는 판단과 행동을 하면서 이것에 대한 적법성을 판단받고자 할 때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은 큰 혼란에 빠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드라마는 그 드라마가 제작된 나라에서 통용되는 가치관을 배경으로 하게 되어 있다. 그래도 인간은 기본적으로 인간이라는 보편적 특성을 공유하기에 우린 생각보다 다른 문화권에서 제작된 작품들도 몰입해서 볼 수 있는 능력 역시 가지고 있다.
이런 극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을 기반으로 하여서 볼 때 드라마라는 연극의 한 장르는 바로 우리의 가치관을 근간으로 하여 우리의 현실을 투영해야만 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막장 드라마는 이 원론적인 부분부터 큰 괴리감을 보여준다. 그 원인으로는 이 소위 막장 드라마라는 작품들이 기본적으로 심각하게 현실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막장 드라마의 필수 요소인 불륜, 태생의 비밀, 신분 상승, 복수 등 때문에 이 드라마들이 비 현실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이런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일들은 실제 현실세계에서도 꾸준히 나타난다. 어쩌면 드라마가 그것을 많이 완화했다고 까지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현실에서 인간은 더욱 더 막장스럽다.
그렇다면 보통 막장 드라마를 정의하는 기본 요소등이 그리 문제가 없다면 과연 무엇이 문제라고 말하는 것일까?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막장 드라마의 첫 번째 문제점은 비 현실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의 등장이다. 일단 보통의 주인공은 너무 대책없이 착하다. 그래서 끝없이 같은 드라마에 출연하고 있는 악당역을 맡은 사람에게 너무도 심하게 당한다. 물론 이 악당역을 맡은 사람의 행동 역시도 매우 비현실적이다. 선한 쪽의 맡은 주인공은 말도 안되게 착하고 반대로 갈등을 일으키는 악의 역할을 맡은 악당은 너무도 악하다. 이것은 마치 어린 시절 만화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절대 악당과 절대 선이 충돌처럼 보여진다.
하지만 이런 분명한 선악의 구분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드라마를 볼 때 어느 편에 서야 할지를 명료하게 알려준다. 선악이 혼란스럽게 얽힌 드라마 대부분은 주부들의 외면을 받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결과는 바로 시청률 저하로 나타난다. 과거 우리나라 드라마들 중에 소위 말하는 명품 드라마들이 몇 있었는데 바로 '하얀 거탑' 과 같은 종류가 바로 시청자를 혼란스럽게 했던 작품 중 하나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드라마를 완전히 다 보지는 못하고 몇 편만 봤지만 주인공 역으로 나온 김명민이 맡은 의사는 우리 보통 수준의 가치관에 비추어 보면 선하기 보다는 악당에 가까운 역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이런 선악의 구분이 애매해지면 보통의 시청자는 누구를 지지해야 할지 혼란스럽기에 그 드라마에 빠져들지 못한다. 차라리 이런 류의 드라마는 평소에 선악에 대해 혼란스러움을 느꼈던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경우가 많다. 적어도 그들에게 그 드라마가 현실적인 것이다. 현실에서 선악에 대한 구분이 모호한데 드라마에서 명백하면 이것이 비 현실적인 내용인 것이고 반대로 현실에서 선악이 명확한데 드라마에서 모호하면 이것이 비 현실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결국 드라마의 비 현실성은 그것을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데, 문제는 현실 세계에서 선악은 드라마처럼 명백하지 못하고 매우 상대적인 특징을 보이는 모호함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사람들 대부분은 그저 그것이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이면 선으로 반대면 악으로 규정해버린다. 그리고 그런 단순함에 드라마는 매우 훌륭한 증명자 역할을 하고 있는것이다. 즉 그런 단순한 선악 구분법이 당연한 것임을 지지해주는 것이다.
막장 드라마의 두번째 문제점은 몇 가지 고질적인 가치관을 정형화 시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혈연에 대한 끝없는 사랑은 마치 우리 사회 전체가 피가 섞이지 못한 관계는 모두 무의미하다는 식으로 우리를 암중에서 교육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즉 어려서 주어서 기른 아이가 커서 반드시 그를 낳은 부자집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물론 주인공이 못사는 처지에서 각종 고생을 하다가 알고보니 출생의 비밀이 있어서 그 아이가 매우 부자인 원래 부모를 찾아가 복수를 한다는 내용으로 연결하기 위해 유용하게 사용되긴 하지만, 결국 내가 낳은 자식이 아니면 늘 생물학적 부모한테로 돌아가 버리는 결과를 만들어 버린다.
또한 개차반 같은 삶을 산 부모들도 자신의 자식에 대해서는 거의 무대뽀식의 애정을 퍼부어서 아이를 두고 치열한 혈투를 벌이는 장면도 자주 나온다. 물론 그때 그 아이는 순진무구하고 예쁘게 생겨야 하며 또한 가끔 하는 말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너무도 사랑스러운 모습이어야 한다는 점은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원래 혈액에 대한 애정이 남 달랐던 전통을 가지고 있어서 지금도 입양에 대한 사람들의 부정적이 시선이 만연하고 있는 형편인데 드라마에서 입양하거나 어떤 이유로 인해 어린시절부터 키운 아이가 크자마자 자기 부모를 찾아가 버리는 상황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면 그것을 본 사람들은 바로 '그래 키워바야 무슨 소용있어',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것이 아니야' 라는 식으로 대꾸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가 아기 수출 1위를 차지하는 이유가 되어 버렸다. 냉정하게 말해서 5대만 내려가면 우리의 피는 섞이고 또 섞여서 우리 자신의 5대조 할아버지와 내 옆의 아무 혈연관계 없는 친구와 동일한 수준의 피 섞임이라고 한다. 즉 나의 5대조 할아버지와 나의 피는 기껏해야 6%도 관련이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혼인을 할 때 각종 말도 안되는 요구사항들이 당연스럽게 등장하고 3대가 같이 사는 집이나 결혼 후 한복을 입고 다니면서 아침 새벽부터 밥을 짓는 새 며느리의 모습은 이 시대의 시어머니들에게 며느리의 역할에 대한 당당한 요구를 할 수 있는 근거를 주고 있다. 여기에서 '에이 그건 드라마일 뿐이야' 라고 말한다면 정말로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이 드라마는 아줌마들이 모였을 때 이야기의 주제가 되고 그 주제는 늘 한쪽 방향으로 흘러가게 마련이다. 바로 그것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이며 결국 이것은 자신들에게 옳은 방향이 된다.
막장 드라마의 세번째 문제는 권선징악의 결말을 통한 카타르시스이다. 물론 이 권선징악이란 내용은 드라마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연극에 관련된 작품들에서 공통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하지만 막장 드라마에서의 권선징악은 그 심한 갈등구조만큼 커다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준다는 점에서 문제를 만들어 낸다. 실제로 이런 막장 드라마를 욕하면서 본다는 사람들은 바로 이 최종 카타르시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는 거의 90%의 기간동안 끝없이 착하기 그지 없는 주인공을 괴롭힌다. 이 괴롭히는 내용은 참으로 뛰어나서 심지어 살인 교사까지 나올 지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어떻게든 이 위기를 다 이겨내면서 결국 자신이 원하는 성공을 얻고 멋진 배우자를 얻고 그를 또는 그녀를 너무도 사랑해주는 주변인들과 행복한 삶으로 결말을 맞는다. 그리고 그때쯤 되면 주인공은 그를 또는 그녀를 90%의 기간동안 괴롭혔던 그 악당을 대승적 차원에서 용서를 한다. 그리고 이 악당은 그것에 감화되어서 착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시청자는 이런 모습에서 큰 카타르시스를 느끼면서 대리만족을 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너무 비현실적이란 것이다. 현실에서 정말 그런 악당이 있다면 그 악당은 용서를 해도 악당일 뿐이다. 과거 꽤나 유명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전두환에 대한 대승적 용서나 고인이 되신 김근태님이 자신을 고문했던 이근안을 용서했던 일은 꽤나 많이 회자되기도 했지만 결론적으로 지금 시점에 보면 과연 그들이 용서받을 자격이 있었는지는 매우 큰 의문이다. 현실적으로 악당을 용서해도 그가 개과천선 하기 힘든 이유는 바로 그 악당은 그 자신만의 논리와 양심적 근거에 의해 행동했다는 것이다.
만약 어떤 인물이 끝없는 양심적 가책을 느끼면서 어떤 행동을 했다면 그리고 그에게 그것을 회개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 사람은 어떤 경우엔 다시 착한 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사람은 거의 없다. 이것에 대한 이야기는 양심에 대한 글에 적어 뒀으니 한번 보시기 바란다.
결론적으로 보통의 악당은 보통 사람들과 똑같이 양심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단지 그 양심의 근거가 되는 선악에 대한 판단이 다를 뿐이다. 판단 기준이 다른데 어떻게 우리들이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는 그 근거로 그 사람의 양심적인 회개를 기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드라마에서 이런 종류의 회개는 마치 현실에서도 악당이 용서해주면 회개할 줄 아는 것이다. 그리고 또하나 중요한 문제인데 현실에서는 착한 사람은 성공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악당이 성공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늘 착한 사람이 성공하고 악당은 결국 몰락한다는 너무도 비 현실적인 내용을 담아내고 있다.
이런 문제점 이외에도 늘 나오는 무슨일을 하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회장의 아들인 실장이 꼭 힘들게 살아가는 여주인공을 사랑하여 결국 부의 신분상승을 이루어 내어 이것을 바라보는 젊은 여인들의 백마탄 왕자님 병을 심화 시키는 점도 있다. 또한 공적으로 평가되어야 할 회사 내의 시스템이 완전히 인매관계로 얽히고 설켜서 아버지는 회장, 어머니는 부회장, 아들은 실장을 맡아서 회사를 운영하는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노출되기도 한다.
따지고 들면 또 한참 나올 문제점들이 있지만 대충 이정도로 간략히 막장 드라마를 말하기로 하고 결론을 내어보자. 아무튼 그렇다고 쳐도 왜 이 문제점들로 인해 막장 드라마를 보면 안된다는 것인가? 어차피 드라마는 비현실적인 것이고 그저 재미있게 보고 잊어버리면 되는 것이 아닌가? 정말로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인데 말이다. 그런데 정말 우리는 그것을 재미로 보고 잊을 수 있일까? 솔직히 말해서 이런 류의 자기 변호 논리는 드리마 뿐만 아니라 매우 다양한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재밌다는 이유로 인해서 참 많은 것들이 통용되고 있다. 하지만 자신이 즐기는 그 모든 것들이 그 자신에게 과연 아무런 영향이 없을까?
우리 인간은 보통 자신의 신념이나 고집이 꽤나 확고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과 결정이 매우 이치에 맞고 합리적이란 생각도 한다. 그래서 자신이 주변 상황에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간단한 예로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자.
A 씨는 원래 황당한 소리를 잘 안믿는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모임에 갔다가 우연히 우리나라 태안 앞바다에 숨겨진 보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는 현실적이기 때문에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고 그냥 넘겼다. 그런데 그 후 며칠이 지나 직장에서도 친한 동료가 남들에게 절대 이야기 하지 말라면서 비슷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또 집에 가서도 아내가 어딘선가 고급 정보를 얻었다면서 보물 탐사에 투자하면 열배는 금방 벌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거기까지도 그는 그 정보를 아닐꺼야 하면서 무시했는데 어느날 우연히 도서관에서 그 지역에 정말로 과거에 청나라로 가던 조공선이 침몰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뛰는 가슴으로 몰래 그 발굴 작업에 투자를 하기로 결정을 했다.
만약 이 이야기를 듣고서 나는 그렇지 않아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과신이 심한 사람이다. 우연히 세번,네번 겹치면 우린 그것을 운명처럼 느낀다. 아니 그 횟수의 문제일 뿐 누구나 언젠가는 그것이 나의 운명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땐 그에게 전달된 정보가 어떤 것이냐가 관계가 없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 의심치 않는 우리들의 모습데 대한 실체이다. 우린 반복되어서 정보를 받게 되면 실제로 아무리 황당한 이야기도 혹시 사실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이것이 사기꾼들이 집요하게 노리는 점이기도 하다.
드라마는 딱 여기에 맞다.우리가 드라마를 보면 볼수록 우린 실제로 세상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도 모르게 그 막장 드라마의 일차원적인 세상에 익숙해진다. 선과 악이 그리도 분명하고 선은 성공하고 악은 처벌 받는다는 그 공식화 된 세계에서 머무르게 된다. 그리고 이 현실세상의 악에 대해서 언젠가 천벌이 내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애써 외면한다.
이것은 일종의 심각한 배임행위이다.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사회에 소속되어 있다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해야 할 역할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우리 스스로 모두를 행복하게 살게할 의무가 있으며 이것을 깨뜨리는 자에게 엄격한 응징을 해야 한다. 하지만 우린 늘 드라마를 통해 이것을 응징하기에 현실에서 힘든 절차를 밟으려고 하지 않는다. 매일 드라마에서 이것을 대신 해주는데 뭐하러 그런 힘든 짓을 하겠는가?
결국 드라마에 오래 노출된 사람은 뇌가 평면화 된다. 우리의 뇌는 정보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기관으로 퇴화 된다. 즉 훈련이 되지 않은 뇌는 동물의 그것과 전혀 다름이 없이 단지 생존을 위한 본능적 판단만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린 끝없이 정보를 받아들이고 걸러내고 생각하고 판단하여 자신만의 결정을 해내는 연습을 해야만 유지가 될 수 있다. 문제는 드라마에 빠져서 살아가면 그 정보란 것의 출처가 너무도 한정적이라서 우리가 상식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일종의 뇌 불구 상태를 만들어 버린다. 즉 인간의 뇌가 거의 개나 고양이 정도 수준으로 퇴보되는 것이다.
시간이 빨리 가도록 해주며, 그 안에서 울고 웃으며 간접적으로 삶을 경험하며, 세상에 대한 단 하나만의 잣대를 만들어 주는데 지대한 역할을 해주는 이 드라마의 힘은 결코 육체에 작용하는 마약의 역할에 비해 절대 모자란 성능을 보여주지 않는다. 실제로 이런 드라마들은 정신에 대한 마약이라고 까지 표현해도 무리가 아니다. 마약은 돈만 된다면 사람에게 최고의 행복감을 안겨 준다. 그런데 그럼으로서 우리의 육체는 점점 더 무뎌져가고 망가져 가게 된다. 정신에 작용하는 마약인 드라마 역시 동일하다. 우리에게 시간을 잊고 행복하게 해줄지는 모르지만 그로 인해 우리의 정신세계는 마르고 망가져 가는 것이다. 비슷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육체적 퇴보는 눈에 보이지만 정신적 퇴보는 잘 보이지 않는 다는 점이다.
1차원적인 인물만이 등장하는 그곳에서 또한 일차원적인 사건과 사고방식만이 난무하는 그 세상에서 시청자가 배울 것은 단 한가지 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기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더이상 외모만 인간이게 되는 이유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