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각인 현상

아이루다 2013. 9. 11. 20:52

오리를 연구했던 생물학자 중 로렌츠란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노벨 생물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꽤나 잘 나갔던 학자이며 생물에게서 나타나는 '각인' 현상에 대해 최초로 연구를 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 학자는 오리가 태어난지 얼마 안되는 시점에 자신이 처음으로 바라본 어떤 대상을 자신의 보호자인냥, 실제로는 부모로 여기는 현상을 통해 각인을 설명한 것이다.

 

물론 이 각인 현상은 과학적으로 완전히 인정된 학설은 아니다. 단지 현상적으로 볼 때, 새끼 오리들이 처음 태어날 때 그 옆을 지키고 있는 존재가 있다면 이 오리들이 그 대상을 각인이란 절차를  통해 그 후로는 그 대상을 자신의 어미로 여기고 졸졸 따라다니는 현상이 일어남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기존의 교육과는 다른 '각인' 이라는 별도의 용어로 설명되는 것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견이 분분한 모양이다.

 

이런 오리의 각인과는 다르지만 인간에게도 비슷한 내용의 현상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상이나 종교 등에 대한 것인데, 예를 들어 대한민국에 태어난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국의 안전을 위한 사고 방식이 동작하는 현상이 있다.

 

그래서 누가 그에게 나라를 위해 싸워야 하는 이유를 딱히 설명해주지 않아도 전쟁이 나게 되면 당연히 적국이 아닌 자국의 편에서 싸우게 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당연히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존재들이나 자신이 가진 것을 잃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깔려 있지만 그것은 생각해 봐야 하는 문제이고 보통은 그런것 까지 따져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현상이다.

 

그나마 이런 종류의 각인 현상은 괜찮은 편이다. 적어도 국가에 대한 충성심은 그 나라를 지키는데 꽤나 유용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좀 다른 형태의 빗나간 각인들도 꽤나 많다.

 

예를 들어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다닌 아이들, 불교의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절에 다닌 아이들, 태어난 지방에 따라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을 결정하는 사람들, 지역 연고 형태의 각종 스포츠에서 자신의 속한 지역을 기반으로 한 팀을 응원하는 사람들까지 왜 그런지에 대한 생각보다는 그냥 다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이 꽤나 많다.

 

오리가 태어나 자신이 처음으로 인식한 존재를 그냥 아무 이유없이 따라다니듯 태어난 집안이나 태어난 장소로부터 이미 정의되어 있는 것들로 각인되어서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을 해볼 기회조차도 없이 그냥 그렇게 믿고 살아가는 이들이 바로 인간에게 있어서 각인의 경험을 한 사람들이라고 가정해본다.

 

만약 이들이 성인이 되어 자신이 믿는 종교나 혹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 등을 각종 정보와 경험을 기반으로 해서 결정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면 과연 어린 시절부터 그냥 그렇게 믿었던 것들과 동일한 결론을 낼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이것은 종교를 갖기 위해 기독교와 불교와 또는 흔하지 않는 각종 종교들 까지 모두 그 기반으로 가진 철학과 원리를 제대로 공부한 후, 특정 종교를 선택할 수 있었다면 과연 얼마나 원래 자신이 믿는 종교를 다시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개인적으로 내 경우를 따져보면 이럴 가능성은 실제로 매우 낮다고 본다. 하지만 새끼 오리처럼 이들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기회 조차도 갖지 못하고 부모가 정해준 대로 세상을 보는 법을 배워버리게 된다.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에 대한 판단이나 그것에 대해 어떤 다른 문제나 혹은 또 다른 형태의 대안을 선택할 기회를 완전히 박탈 당한 채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관련없는 것을 평생을 믿고 살아가는 진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단지 문방구에서 파는 불량식품이나 어린 시절에 그리 좋아하는 만화책 정도라면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이런것들은 그냥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안먹게 되고 안보게 되니까. 그러지만 그것이 자신의 삶을 평생 지탱할 철학이 되고 신념이 되어버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것들이라면 어떤 의미에서 정말 무서운 일이라고 표현 할 수 밖에 없다.

 

가끔 보는 북한의 방송을 보면 김씨 일가 삼대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충성어린 태도에서 역시나 각인의 무서움을 느낄 수 밖에 없다. 벌써 60년이 넘은 시기를 그렇게 배우고 자란 그들에게 김씨 3대는 정말로 신적인 존재로 인식될 것이란 생각이 든다.

 

북한의 김씨 삼대는 자신의 정권을 위해 그런 짓을 하는 반면 우리나라에서 부모가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인해 그 종교가 자식에게 그대로 강요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두 가지에 속한 어린 아이들의 율동이 매우 비슷한 모습을 보여준다. 해맑은 웃음으로 자신이 믿는 것을 온몸으로 찬양하는 북한 아이들과 교회의 아이들을 촬영한 비디오 영상의 모습이 나에게만 비슷해 보이는 걸까?

 

아이는 사리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아이라고 여겨진다. 아이가 어른처럼 판단하면 이건 아이가 아니다. 그런데 어른은 그런 불완전한 존재인 아이에게 제대로 된 판단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이름과 같은 원리이다.

 

우리는 평생을 달고 살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짓지 못하고 부모로부터 받는다. 그래서 나는 가끔 개인적으로 우리 조상들이 이름 대신 썼던 '호'의 문화가 나름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부르는 호칭을 그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한 것을 통해서 짓는 것이다. 혹은 그 사람의 이룬 업적에 대한 타인들의 평가를 통해 불려지기도 한다.

 

오리가 태어난 후 처음 본 개를 따라 다니는 현상은 보기엔 매우 코믹하고 재미있는 일이다. 하지만 오리는 조금만 더 크면 바로 수영을 배워야 한다. 오리의 발은 말 그대로 오리발이며 물에 떠서 헤엄을 치는것에 매우 유리한 존재이다. 그런데 개를 따라 다니면 그 오리는 늘 뒤뚱거리면서 자신에게 익숙치 않는 육지 생활을 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엔 자신이 먹을 먹이가 아닌 개가 먹을 먹이가 있다.

 

그래서 개를 따라다니는 오리는 계속 그러다가 죽을 수도 있다. 그래서 언젠가 이 오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깨닳고 날개를 펴서 하늘을 날고 오리 발로 물에서 헤엄을 쳐야 한다. 하지만 개는 그것을 가르쳐주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개가 가르쳐주는 빠르게 달리기, 냄새 잘 맡기, 꼬리 흔들기는 오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리판단을 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 특정 종교를 강요하고 특정 사상을 주입하는 행동은 일종의 심각한 폭력이다. 실제로 그럴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해도 아이가 어느 정도 컸다면 그 스스로 다시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만약 고아를 어쩔 수 없이 절에서 동자승으로 키웠다면 이 아이가 20살 정도 되었을 때 머리를 길게 한 후 세속에 내보내어 그 자신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이 아이는 단지 어린 시절 고아가 된 후 절에 버려졌다는 이유로 인해 평생을 스님으로 살아가야 한다.

 

미국 펜실베니아에 있는 기독교 중 하나인 아미쉬 공동체는 종교를 통해 자신들의 울타리를 스스로 정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로 이 공동체 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특정 종교 교리에 복종을 하면서 살아가는데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럼스프링가라고 불리는 유예과정이 있다는 것이다. 이 기간 동안 이 공동체에 속한 청소년들은 종교적 교리에 따르지 않고 소위 말하는 일반적인 청소년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그 기간이 끝난 후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데 그때 바로 자신이 계속해서 공동체에 남을지 아니면 그곳을 떠나 또 다른 삶을 살아갈지 결정한다.

 

이런 형태의 공동체는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나라의 기독교나 특정 지역에서 강요되는 지지정당에 대한 선택보다 훨씬 각인 효과가 크다. 하지만 이들은 아이들이 어느정도 사리판단이 가능할 무렵 그들에게 그들의 삶을 선택할 기회를 준다.

 

마치 그건 교회에 다니는 아이들에게 절에 가볼 자유나 혹은 절에 있는 젊은 스님이 교회에 가 볼 수 있는 자유를 주는 것과 비슷한다. 또한 정치적인 성향도 비슷할 수 있다. 여당을 지지하든 야당을 지지하든 자신이 그동안 옳다고 믿었던 것을 뒤집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개를 따르는 오리에게 고양이나 닭이나 어미 오리를 따를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그들의 부모들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들에 대해 단 한번의 부정도 허용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들이 정말로 그것이 옳은 길이라고 믿는다면 왜 아이들에게 다른 선택을 할 기회를 주지 못하는가? 어차피 그것이 옳다면 아이는 결국 다시 그것을 선택할 것인데.

 

실제로 아미쉬 공동체에서 럼스프링가를 보낸 아이들은 대부분 다시 공동체로 돌아온다고 한다. 아무래도 부모가 있고 모든 인맥관계가 맺어진 그곳을 떠나기란 쉽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판단능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에게 그것이 설령 진리라고 스스로 믿더라도 그것을 어린 시절부터 세뇌시켜 그외의 모든 것을 부정하게 만들어버리는 부모야 말로 아이에게 있어서 가장 큰 해로움을 끼치는 존재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매우 좋지 않는 세뇌 행위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좀 웃긴 것은 북한의 아이들을 본 종교를 강요한 부모들이 그 아이들의 모습에 혀를 차고 반대로 교회에서 찬송을 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북한의 부모들이 혀를 차고 있다는 것이다. 서로가 완벽히 닮은 꼴임이데 불구하고 마치 그 유명한 유체이탈 화법처럼 다른 사람 이야기 하듯 말하고 있다.

 

가끔 개인적으로 모태신앙이나 유아세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그 안에 숨겨진 끔찍한 폭력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며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그 부모들의 모습에서 슬픔을 느낀다. 또한 그렇게 커가는 아이들이 버릇처럼 찬송가를 부르고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나도 모르게 마음 한켠이 써늘해지면서 씁쓸하다.

 

물론 그런 삶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모르고 살면 그 뭐가 문제겠는가? 북한에서 김씨 3대를 그토록 찬양하는 그 아이들도 그 스스로는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행복한 것이 최종적으로 우리가 추구할 목표지점이라면 차라리 그런 결정적 사고와 신념이 개인에게 좋게 동작할지도 모르겠다.

 

산다는 것이 알면 골치아프고 생각할수록 머리만 지끈거리는 일이니 그렇게 어린시절부터 누군가 어떤 길이 옳다고 못박아 두면 평생 단순하고 편하게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단지 아쉽다면 그런 삶이라고 해도 그 스스로 선택을 했으면 좋았을 것을 이란 점만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