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적으로 흐르는 삶
세상의 모든 물체는 인력이 있다고 한다. 그것에 대한 최초의 증명은 몇 백년 전 그 유명한 과학자 뉴튼이 해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만유인력의 법칙이 바로 그것인데 아무튼 그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구는 우리를 매 순간 지구의 중심으로 잡아 당겨 자전에 의해 발생된 원심력으로 인해 우리가 우주로 날라가지 않도록 해준다. 또한 우리가 지구 인력의 다른 이름인 중력에 의해 지구의 중심으로 끌려가지 않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단단한 땅과 우리가 중력과 더불어 우주의 기본 4대 힘 중 하나인 전자기적 반발을 하여 우리의 몸이 땅으로 파고 들지 않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중력의 효과는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도록 해주고, 컵 안에서 크게 흔들린 물 역시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고르게 평평한 높이를 만들면서 잔잔해진다. 세상에서 이렇듯 일어나는 많은 흐름을 주의 깊게 생각해보면 자연은 늘 불안하고 복잡한 방향에서 안정적으로 단순한 방향으로 변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기상현상은 이런 작용의 매우 흔한 예이다. 기상 예보에 등장하는 고기압, 저기압 등은 모두 공기의 밀도에 대한 차이로 인해 발생한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빠르게 공기가 이동하면서 발생하는 각종 현상들을 통털어서 기상 변화라고 표현한다. 작은 세계에서이 예로 보면 풍선이 고르게 평평한 이유 역시 풍선 내부의 압력이 어디에서나 일정하게 작용하기 때문인 것이다. 만약 이런 원리가 작동하지 않아 풍선의 일정 부분이 심하게 압력을 받아 버리면 그 풍선을 터지고 만다.
자연계에 속한 우리 인간 역시도 이 원리에 대해 정확히 영향을 받는 존재이다. 물론 그 종류는 다를 수 있지만 우리 역시도 불안하고 복잡한 상황을 최대한 안정적이고 단순하게 변화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우린 각종 문제나 사건들을 수치화 하고 어떤 일의 원인을 파악하여 이해하려 하면서 우리가 모르는 것에 대한 불안함과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것을 이해하기 쉽게 변화시킨다.
어쩌면 우리 인생의 모든 작용이 결국 안정화를 위해 흘러가는지도 모른다고 단순화 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젊은 시절의 희망과 꿈은 우리가 가진 안정에 대한 본능을 떨쳐 일어나게 만들어서, 어떤 일을 하든지 받게 되는 그 엄청난 스트레스를 견뎌내고 자신의 원하고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보통 사람은 그 시기가 지나면 안정에 대한 본능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잃게 된다.
안정적인 삶은 인간의 전 생애에 걸쳐 좋은 효과를 준다. 우리 인간은 불안정한 상태로 오래 노출되게 되면 단지 기분뿐만이 아니라 내부 호르몬 분비에 있어서 큰 문제가 발생 해 실제로 안정적인 상태로 복구되기 까지는 커다란 벽이 생기는 경우도 많다. 전쟁에 오래 노출된 군인, 아동 학대 속에서 자라난 아이, 가정 폭력에 길들여진 아내, 거칠고 폭력적인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 등등 이런 사람들은 단지 그 원인을 제거했다고 해서 절대로 일반 사람들처럼 단번에 변하기가 힘들다. 그것은 정신적인 회복 측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닌 실제로 육체 내부적인 호르몬 균형이 깨진 상태가 복구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 몸은 생각보다 잘 고장나며, 특히 육체적 문제는 매우 잘 들어나 고통스럽지만 고치기 쉬운 반면, 내부 분비계에 생긴 오류는 좀처럼 그 영향이 명확히 들어나지도 않고 그로 인해 고치기도 매우 힘들다. 우울증, 조울증, 각종 트라우마 등이 그것의 흔한 예이다. 그래서 특별한 계기가 없다면 그냥 평생 그 증상을 느끼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를 행복하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이것을 증상으로 이해한 서양쪽 가치관은 이런 문제를 적극적으로 상담과 약물 치료등을 통해 극복하는 반면 우린 매번 이것을 정신적인 측면으로만 극복하려고 해서 결국 실패를 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생명체의 근본 원리로 판단해보면 지구에서 진화하여 자라온 생명체는 근본적으로 불안함을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다. 그 첫번째 이유는 바로 우리가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죽음은 생명체의 본질이며 그로 인해서 우린 그것을 인식하든 못하든 죽음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두번째 생명체는 거의 대부분 천적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내가 언제든 천적의 먹이가 되어 제 수명대로 못살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천적의 존재는 늘 먹이가 되는 당사자를 긴장시키는 역할을 한다. 세번째 우리는 경쟁이 필수적이다. 그것이 욕심이냐 아니냐에 상관없이 우린 늘 경쟁을 통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우리를 늘 긴장되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두번째의 문제는 거의 해결했으나 아직도 첫번째의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고 거기에 더해 욕심이 많아지면서 세번째 이유가 매우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되어 버렸다.
그런 이유로 인해 이 문제점을 극복한 순간 우린 안정되었다고 느낄 수 있는데, 이때 몸에서 분비되는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는 호르몬 작동을 하고 있는 순간이 된다. 그래서 우린 안정되었다고 판단되면 그때부터는 아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매우 행복한 상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이렇게 계속 살 수만 있다면 이렇게 사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문제는 이 행복은 곧 중독이 되어 버려서 그런 상태를 유지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다행인 점은 우리는 결코 이렇게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점이다. 즉 스스로 아무리 안정된 삶은 살고 싶어도 우리의 주변 환경이 그것을 그냥 놔두지 않는다. 각종 관계, 이득과 손해에 대한 판정, 가진 것과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욕망, 예기치 못한 사고, 갑자기 찾아 온 감기, 태풍과 같이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자연 현상 등등 우린 늘 우리가 가진 안정을 잃을 수 있는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그 덕분에 우린 불안정에 의한 다급함이나 불행함을 열심히 노력해서 안정감을 되찾으려 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의 삶이 바로 이런 과정의 무한 반복이라고 볼 수도 있다. 우리가 식물인간이 되어 어딘가 누워있지 않는 한 우린 늘 주변 상황에 의해 안정함을 위협받거나 뺏기고 다시 노력해서 그 원인이 된 위협을 없애 안정을 되찾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다행스럽게도 되찾을 때 마다 우린 행복함을 느낀다. 결국 우린 우리의 삶이 연속될 가능성이 높아지면 뇌에서 주는 행복을 위한 호르몬을 얻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생의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끝없이 등장하는 위협요소들과 이것을 극복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많이 힘들다. 물론 운이 좋게 뭔가 잘 풀려가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나름 좋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아서 삶이 참 힘들다는 생각을 스스로 많이 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 사람들은 종교를 찾게 된다.
종교의 가장 큰 효과는 바로 안정감을 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특히 예정론적 삶에 대한 철학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매우 긍적적인 정신효과를 가져다 준다. 내가 무슨 이유로 태어나 어떤 과정을 거쳐 언제 죽음을 맞게 될지 전혀 이해도 예상도 못하는 삶에서 신의 존재가 바로 나를 태어나게 했으며 내 삶은 어떤 이유가 분명히 있고 또 죽음조차도 끝이 아니라고 믿게 된다면 믿지 않는 사람보다 믿는 사람이 거의 무한대의 안정감을 더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안정감은 비록 그 믿음이 실제로는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중요하지 않게 개인에게 작동한다. 거기엔 그것이 진실이냐 아니냐의 따짐이 필요한 것이 아나고 내가 얼마나 그것을 믿느냐 마느냐에 대한 차이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안정에 대한 욕구만으로 살아가는 존재라면 정말로 종교야 말고 최고의 노하우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 그 어떤 일이 장점만 있겠는가? 이 종교를 통한 강제적 안정화에 대한 역효과가 발생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앞서 말한 안정된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얻어지는 행복감의 부재가 바로 그 현상이 된다.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불안정한 상태를 덜 겪기 때문에 그것의 해소를 통해 얻어지는 행복이 줄어드는 현상이다. 또한 세상 모든 것이 바로 이미 예정되고 누군가의 의도라고 믿어지게 되면 솔직히 말해서 그 어떤 것도 감동의 대상이 되질 못하는 감성적 불구 현상도 일어난다.
그것은 마치 세계적인 체육행사 전야에 펼쳐지는 마스게임을 보는 것과 비슷한데, 이미 손발을 잘 맞춘 엄청난 인원의 사람들이 절도 있게 한동작 한동작을 맞춰서 어떤 그림이나 모양을 보이는 그 모습은 참 아름답긴 하지만 뭔가 설명하기 힘든 어색한 것이 있는 모습이다. 차라리 그 결과물을 보기보다는 그 과정을 찍은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서투른 그들의 연습과정이나 힘든 과정 속에서 서로 챙겨주는 동료애가 느껴질 때 우린 훨씬 더 깊은 공감과 감동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우리 인간의 감성은 도심에 서 있는 기하학적으로 아름다운 빌딩과 화려한 불빛과 같은 인위적인 질서나 대칭보다는 우리가 우연히 올라간 멋대가리 없는 산에서 본 한 여름밤에 쏟아질듯 한 별빛이나 산과 산을 넘실거리는 구름의 바다 등이 훨씬 우리의 감성을 더 자극하는 것과 같은 원리라고 보여진다.
결국 비슷한 원리로 종교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안정은 마치 미래 사회에 나오는 약물을 통해 감정이 잘 조절된 인간들처럼 우리가 가진 현재의 감성을 모두 제거하여 우리가 마치 기계처럼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줄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불안정한 인간이기에 얻을 수 있는 감성, 즉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보여진다.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평범한 삶을 결코 그것이 틀리다거나 혹은 왜 그렇게 사냐고 비난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안정을 추구하는 것은 생명체로서 지극히 당연한 본능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스스로가 사육되는 우리 속에 갖힌 소나 돼지처럼 주는 먹이만 먹고 자유를 잃은 삶에 대해서 스스로 안정적이니까 좋다고 머문다면 그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돼지는 그 우리에 남고 어떤 돼지는 그 우리를 부수로 자유를 찾아 나설 수 있다. 이것 역시 모두 그 본능의 욕구가 추구하는 방향이다.
단지 여기에서 우리가 꼭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 안에 남든, 우리 밖으로 떠나든 그것은 실제로 모두 현실이란 점이다. 남고 나가는 것을 각자 이론화 시키고 이것을 합리화 시키는 논리를 만들어 책으로 묶어 그것 자체를 하나의 교리화 시키는 순간 이것은 비 현실적인 사고로 변경되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가 바로 이것의 가장 흔한 예가 된다.
우리에 남은 돼지는 때가 되면 먹이를 먹고 때가 되면 자다가 언젠가 자신이 죽을 차례가 되면 죽는 삶을 산다. 반면 우리를 떠난 돼지는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힘든 고생을 해야 하고 잠자리를 만들고 자는 그 순간도 늘 자신을 노리는 천적의 공격에 대비를 해야 한다. 결국 그래서 우리에 사는 돼지보다도 훨씬 더 빠르게 죽을수도 있고 더 늦게 오래 살아갈 수도 있다. 여기에 옳고 그름은 없다. 이건 그저 선택의 차이일 뿐.
하지만 이것이 이론화 되는 순간 옳고 그름이 생긴다. 내가 살아가는 삶을 합리화 시키면 내가 옳은 삶을 사는 것이니 당연히 나와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은 잘못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 이론적인 근거가 자신의 안정적인 삶을 더욱 안정적으로 만들어주기에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들 조차도 자신만의 이론 하나 쯤은 평생에 걸쳐서 만들어 내고 그것을 타인들에게 강요하는 주장하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종교는 일종의 정신에 대한 마약인 셈이다. 수 많은 이론적 근거를 통해 인위적인 안정을 부여함으로서 결국 사람의 정신 세계를 컵 속에 담긴 물처럼 평평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세상을 판단하는 단 하나의 잣대가 바로 내가 얼마나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느냐에 대한 욕구가 되어 버린다.
* 인간에게는 누구나 마약과 같은 물질을 스스로 분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것은 바로 호르몬의 역할인데 그 당사자 호르몬의 이름은 바로 엔돌핀이다. 이 엔돌핀은 즐거울 때 나오는 호르몬이 아니다. 우리가 가장 힘든 순간을 맞아 죽음과도 같은 고통에 시달릴 때 그것을 잊게 해주기 위해 분비되는 호르몬이다. 그 효과는 일반 마약의 300배에 달하며 중독성도 없다. 이 호르몬이 분비된 상태를 '러너스 하이' 라고 부르는데 죽음에 근접할 정도로 힘든 육체활동이나 죽음에 임박한 순간에 분비된다. 쉽게 말하면 곧 죽게 생겼으니 더이상 고통이나 받지 말라는 뜻이다. 이 호르몬은 인간에게 최상의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반면 우리의 몸이 가장 힘들때가 바로 그 분비가 되는 시점이란 것이 매우 아이러니하다.
거기에 더해서 이미 사고가 그렇게 한번 고정되어 버리게 되면 정말로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경험하지 않는 한 결코 거기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는 것이 무섭다. 이것을 세뇌라고 부르는데 사람이 제대로 세뇌를 당하면 절대로 그것을 깰 수 없다. 이것이 무섭고 두려운 일이라서 우린 늘 자신의 생각이 고정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살아아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자신을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다. 아니라면 안해도 상관이 없다. 그냥 동물처럼 그렇게 태어나서 자라고 죽으면 끝이니까.
안정에 대한 욕구는 적당히 조절을 해야 한다. 아무리 우리 본능이 안정을 요구한다고 해서 나가면 위험하다는 판단으로 집안에서만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언젠가는 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멀리 가야 할 일이 생긴다. 그리고 그때를 대비해서 불안정함을 버티는 훈련도 해 놓는 것이 좋다. 그것이야 말로 어떤 의미에서 가장 좋은 해결책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