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전형적인 삶

아이루다 2013. 8. 17. 08:42

 

몇 천년 전부터 많은 사람들은 우리들 자신, 인간에 대한 정의를 하려고 애써왔다. 그것은 철학적 분야에서, 과학적 분야, 의학적 분야, 종교적 분야 등등 우리 인간이 공부하고 연구한 아주 많은 분야에서 방법은 다를지라도 목적은 동일한 다양한 형태의 접근이 이루어졌었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서도 이런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조금 차이점이라면 요즘엔 천문학, 즉 지구가 아닌 다른 곳에 있을 생명체에 대해 광범위한 연구까지 확장되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우리 지구의 범주를 넘어서려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린 왜 우리를 정의하고 싶어 할까?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타당한 혹은 정확한 이유를 알고 싶어서일 것이다. 아니 알고 싶다기보다는 증명받고 싶다고 하는게 더 맞은 표현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근본적인 노력과는 상관없이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삶을 돌이켜보고 또한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의 삶을 관찰해보면 어쩌면 우리 인간의 오래된 '나는 누구이고 나는 왜 이곳에 있는가' 에 대한 질문이 참 쓸데 없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실제로 우리가 왜 존재하는지를 생각하고 살아갈 필요가 있을까?

 

물론 이것은 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내가 왜 존재하는지 꽤나 많이 궁금한 사람이다. 하지만 내 주변에 또는 내가 모르는 많은 이들에 대한 간접경험을 통해서 보면 과연 정말로 우리가 그렇게 오랫동안 찾아온 내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진리에 대한 욕구가 참 의미 없는 생각이란 경험을 자주하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살아간다. 그것도 매우 일반적인 공식에 따른 전형적인 삶으로.

 

그래서 나에게 지금 이순간 인생을 정의해보라고 한다면 이렇게 하겠다.

 

"태어나서 자라서 학교 다니고 졸업 후 취직해서 돈벌다가 결혼하고 난 후 아이를 낳을지 말지 고민하다가 낳기도 하고 안 낳기도 하고, 낳았다면 아이를 키우고 살다가 나이 먹고 아이 결혼 시키고 손주 보여 달라고 하다가 손주 보고, 아이를 안 낳으면 아이가 없으니 부부 둘 만의 취미를 열심히 개발하고 혹은 심심하지 않게 다른 이들과 어울리면서 살다가 가끔 아이를 낳을 껄 하고 후회도 하면서 더 나이 먹고 몸이 아프고 또 아프다 보면 결국 죽는다

 

이 정의는 현실이고 어쩌면 과거에 내려진 모든 인간에 대한 정의보다도 훨씬 정확한 것이다. 그래서 과거 철학자들내린 인간에 대한 정의나 현재 21세기 인간이 화성에서 생명체의 존재를 찾아 헤매는 것은 정말로 쓸데없는 짓일지도 모른다.

 

우린 이렇게 우리 존재의 정의와는 상관없이 단 몇줄로 모두 표현되는 삶을 살아간다. 여기에서 나 역시 저 과정에서 몇몇 단어만 빠졌을 뿐 근본적 흐름은 거의 동일하다. 물론 세상엔 매우 특이한 삶을 사는 이들도 존재한다. 내가 상상해서 쓰는 것조차 어려운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전체 인간에 비해 너무 소수로 존재한다. 특히나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더 그렇다.

 

우린 어려서부터 남들과 다름이 얼마나 큰 문제인지를 교육받고 자란다. 왼손잡이, 학교교육, 학원, 취직할 기업, 결혼 절차, 아파트와 같은 집에 대한 집착, 삶의 필수가 된 아이, 돈.. 그리고 우리가 이런 것들로부터 조금 자유로워질 무렵 우린 이미 노년이 되어 몸의 자유를 잃는다.

 

이런 오래된 사회적 관습이 자신도 모르게 짖누르는 환경에서 오래 노출된 우리들은 조금이라도 다른 길을 가는 것을 두려워 하고 또한 그러기에 실제로 가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미 우리보다 더 앞선 세대가 간 후에 말해준 길만을 따라간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이라고 믿고, 같은 길을 가고 있는 다른 이들이 나보다 앞서 가는 것을 보면 나의 열등감을로 야기된 부러움을 느끼고 심하면 질투하고, 혹은 나보다 처진 이들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우월감 느끼면서 남몰래 행복을 느낀다.

 

* 물론 본인은 이럴때 왜 자신이 기분이 좋아졌을까를 모른다는 점도 우수운 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수 많은 의사소통 도구를 이용해서 끝없는 다른 사람이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거기에 그 재료가 떨어지면 너무도 좋은 재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연예인이며 유명인사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스캔들은 매일 매일 떨어지지 않고 신문기사와 방송을 통해 노출되어진다.

 

그래서 우린 그 길이 왜 그렇게 놓여졌는지, 또한 왜 누구나 그 길을 가라고 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처음부터 우리 존재가 '왜' 존재하고 있는지에 대해 관심없음과 동일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공식화 된 길이 과연 왜 공식으로 정해졌을까를 그다지 의심하지 않는다.

 

부모가 어려서부터 돈,돈 하고 살아가면 자신도 모르게 커서 같이 돈,돈 하면서 살아간다. 왜 돈이 필요한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저 돈 자체가 필요하다. 그래서 돈을 모으면 행복하다. 남자들은 경제생활을 하면서 누군가 차,차 거리면 자신도 차,차 거리고 살아간다. 여자들은 누군가 가방,가방 거리면 자신도 가방, 가방 거리면서 살아간다. 왜 그것이 필요한지 스스로 고민하지 않는다. 그저 모두가 갖고 싶어하는 것이라면 내가 제일 좋은 것을 가져서 스스로 같은 것을 원하는 이들과 비교해 잘남을 증명받고자 한다. 이것은 우월한 존재에 대한 본능적 추구가 빚어내는 현상이다.

 

이것은 그나마 어느정도 극단적인 예라고 치자. 전체 사람들 중에 30%정도만 이렇게 산다고 치고, 그럼 나머지 70%는 다를까?

 

나는 여기에서 정도의 다름, 혹은 갖고 싶어하는 것의 다름만을 인식한다. 즉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무조건적인 물질에 대한 집착을 하는 이들을 경원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우리 스스로도 그런 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점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즉 남의 돈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짜증내고 비웃긴 하지만 나 스스로도 돈에 대해 많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잘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나마 좀 돈 냄새가 덜 나는 것들에 집착한다. 거기엔 아이, 취미, 사랑, 우정 같은 것들이 있다. 그리고 이런 것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돈에 집착하는 사람들보다 좀 더 나아보인다고 여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이것은 냉정하게 말하면 어떤 의미에서 사고방식의 차이일 뿐이다. 즉 우리가 직접적으로 얻으려고하는 행복의 조건을 어떤것으로 놓느냐에 따른 차이일 뿐, 우리가 근본적으로 가진 본성을 통해 발현되는 특성은 실제로 다를바가 없다는 것이 슬픈 현실이다. 우리 본능은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고, 짝짓기 잘하고, 후대를 남기고 살아가길 바라고 있다. 그리고 가능하면 안정적으로 살아가길 원한다. 이것이 생명체의 본질이다.

 

여기에서 출발하면 돈은 이런것들을 해주는 아주 강력한 수단이다. 좋은 차, 명품 가방은 마치 내가 본능이 원하는 상태가 된 것처럼 착각을 해주게 만든다. 그리고 아이, 사랑, 우정, 취미 등 모든 행동 역시 내가 본능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어느정도 충족시킨 느낌을 느끼게 해주고 그로 인해 우린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사랑을 하는 동안 존재감, 자존감이 많이 높아진다. 이것은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는 가능성을 높여주는 것으로 이것이 높아지면 우린 행복해진다. 그렇다면 존재할 가능성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 생명체가 생명체 본연의 임무인 '존재의 연장' 의무를 해낸 것이다. 거기에 더해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을 때 나의 생존 가능성은 훨씬 높아진다. 즉 세상에서 나의 짝이 생김으로서 우리는 좀 더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위기가 없는 곳에서는 별로 차이가 없지만 위기가 닥치면 우린 이것을 제법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 그래서 위기는 가족의 화목을 불러온다.

 

결국 이 본능의 욕구가 추구하는 방향을 쫒다보니 우린 공식화 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하나가 빠졌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삶을 결정지워 줄 혹은 우리의 삶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본질적 요소가 된다. 그리고 그것의 이름은 바로 '인식'이다.

 

우리는 현실 속에서 참 추상적이 표현을 많이 쓴다. 좋은 집, 맛있는 음식, 예쁜 사람 등등.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많이 원하는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표현에 대해 누구도 정확히 정의하지 못한다. 북극에 사는 에스키모에게 이글루는 좋은 집일지는 몰라도 적도에 사는 아프리카 인에게는 한시간도 못버티는 집이 된다. 과연 우린 무엇을 '좋은 집' 이라고 칭할까? 또한 어떤 사람을 보고 '좋은 사람'이라고 칭할까?

 

여기에서 우리의 인식이 동작한다. 그리고 그 인식이 모든 것을 결정짓는다.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은 김치를 매우 좋아한다. 하지만 이 김치는 이 대한민국 땅 내에서만 맛있고 좋은 음식이다. 물론 어떤 외국인들은 그것을 좋아할지 모른다. 그런데 보통은 그렇지 못한다. 물론 우리가 외국 음식을 좋아하는 경우도 많다. 피자, 햄버거, 베트남 쌀국수, 중국요리 등등. 하지만 또 싫어하는 이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맛있는 음식은 모두 개개인의 성향에 따라 다르다.

 

누군가는 단칸방을 좋은 집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수백평은 되야만 좋은 집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기준은 늘 내가 된다. 그런데 우린 이 기준을 남으로부터 찾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어려서부터 너무도 고정된 버릇 중 하나이기 때문에. 그 스스로 어떤 것에 대한 가치를 생각하는 버릇이나 그 가치를 왜 추구하는지를 생각하고 살아본 적이 없어서 그냥 남들의 의견을 참고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 남들의 의견이 과연 정말로 그들 하나하나의 제대로 된 의견일까? 절대로 아니다. 그들 역시 어디선가 들어본 또 다른 남들의 의견이다. 결국 내가 남들로부터 들은 의견은 기껏해야 어느 신문사의 기사나 뉴스, 어떤 늙은이의 푸념, 세상에 찌든 아줌마가 원하는 삶으로 부터 나온 이야기 등등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런것들이 사람들의 입을 통해 굴러굴러 다니면서 점점 몸짓을 크게 만들면서 좋은 이야기는 떨어져 나가고 불행에 대한 이야기만 점점 더 달라 붙어서 결국 어떤 선택은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는지에 대한 정확한 공식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것의 동작원리에는 우리는 누구나 불행한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 있다. 즉 우리는 남들의 불행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상대적인 나의 행복을 느끼는 정말로 부끄러운 행복감에 취해있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으로 주고 받은 대화를 통해 만들어진 우리의 '상식'이 얼마나 옳을까를 누가 생각이나 하겠는가?

 

* 행복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다. 지금 현재의 나보다 못하다고 느끼는 곳에서 좀 같이 살면 된다. 우리의 행복은 이렇게 너무도 상대적으로 얻어짐에도 불구하고 우린 우리가 현재 느끼는 행복을 너무도 절대화 시켜서 그것의 조건을 잃으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즉 100평의 집에서 살다가 10평의 집으로 가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여길 것이다.

 

여기에서 주어 들은 이야기나 혹은 남들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들을 취합해서 자신의 행동기준으로 삼아서 살아가는 데 우리의 인식이 매우 중대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즉 인식은 어떤 의미에서는 나를 위한 정신적 필터이다. 이 인식의 방향에 따라 혹은 형태에 따라 우린 같은 이야기를 들어도 모두 다르게 판단해서 받아들이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가 있다. 우리의 모든 것을 결정 짓는 이 인식의 절차 자체도 계속 획일화 된다. 처음엔 네모 모양의 격자를 가진 인식 필터였지만 주어 듣는 정보가 계속 세모만 도착해 결국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필터가 세모 모양으로 바뀌어버리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이렇게 전형적인 삶으로 정의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일 수 있다. 아니 실제로 이것일 것이다.

 

그래서 우린 가끔 우리의 인식이 변형되지 않도록 손을 봐줘야 한다. 그래서 그 전형적인 삶이 아닌 다른 세상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하고 경험을 해야한다. 여행이란 그런 것이며, 독서란 그건 것이다. 우리가 소비하는 대부분의 문화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 하지만 우린 여행도 이미 정해놓은 전형적 절차이며, 독서도 베스트셀러를 찾으며, 영화도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면서 결국 또 다른 전형적인 절차에 빠져든다. 우린 이런 문화생활를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때울 뿐 우리의 인식 필터를 고치는 시간을 갖지 못한다.

 

아마도 30살이 넘은 대부분의 성인은 그리고 그 와중에 스스로에 대한 인식을 좀 주의깊게 지키지 못한 이들은 대부분 이미 그 모양이 이 세상의 전형적인 이야기들을 받아드리는 모습으로 변형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이가 먹을 수록 이 모습은 점점 더 굳어져 이젠 어떤 종류의 외부정보가 도착해도 맞지 않으면 흠짓조차 나지 않는 강한 고집을 갖게 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도 오랫동안 그것을 방치하여 이미 인식이 다 뭉게져서 인식이라는 절차 자체가 없어지고 모든 인식은 TV, 신문, 타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전형적인 삶에는 이런 슬픈 단면이 있음을 과연 누가 생각하고 누가 궁금해 하겠는가.

 

나는 가끔 이런 타인들의 삶이 좀 슬프다. 물론 나 역시 이런 전형적인 삶에 있어서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도 가끔 나의 틀어진 인식을 고치고 그것을 대화하며 나누고 서로의 고장난 부분을 봐주는 그런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싶다. 그런데 나이를 먹어 갈수록 내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점점 고정화되가고만 있다. 물론 그것이 우리가 선택할 가장 안정적인 길이란 점은 이해한다. (왜 안정적이라고 느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아쉽다. 단 몇명이라도 조금 다른 삶을 선택하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돈이나 사랑 그리고 아이에 대한 이야기 말고 우리들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그럴 사람들이 점점 줄어간다. 아마도 내가 더 나이를 먹게 되면 단 한명도 남지 않을 것이다. 아니 남는다면 어쩔 수 없이 결혼이란 전형적인 삶을 선택하지 못한 이들이나 남게 될까?

 

그래서 나는 또 앞으로 나의 삶에서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을 지워나가야 할지 그것도 답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