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삶
고대 북유럽 신화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 장르의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매혹적인 생명체가 하나 있다. 아마도 내 지식의 범주에서 판단하면 '반지의 제왕'을 쓴 톨킨이 이 종족에 대해 오랫동안 구문되는 이야기를 문학적으로 정의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종족의 명칭이 바로 '엘프'이다. 우리말로 요정이라고 번역하는 경우도 있는데 개인적으로 이것은 좀 잘못된 해석으로 생각된다. 요정이란 단어가 뜻하는 것은 물론 엘프를 포함할 수는 있지만 가진 의미가 너무 넓다.
대부분의 판타지 작품에서 엘프는 매우 아름답고 고귀한 존재로 묘사된다. 뾰족한 귀, 아름다운 금발, 하얗다 못해 창백함이 느껴지는 피부, 잘빠진 각선미에 가벼움까지 갖춘 몸, 그리고 탁월한 균형감각, 숲과 어울려 살아가면서도 거기에서 펼쳐지는 환상적인 건축물들 까지.. 아마도 엘프가 보여주는 것은 보통 인간의 영원한 로망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여기에서 언급하지 않는 정말 중요한 엘프를 엘프답게 정의하는 요소가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을 운명으로 여기지 않으며 존재의 영속성을 보장받은 영원한 삶이다.
반지의 제왕에서는 인간과 사랑에 빠진 엘프족 왕의 딸이 결국 인간을 선택하고 영생을 포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녀는 사랑을 위해 자신이 가진 최고의 특권을 포기한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런 결정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솔직히 말해서 경험한적이 없으니 나로서는 상상도 못하겠다.
영생에 대한 이야기는 또 다른 판타지 분야인 뱀파이어 이야기 쪽에서도 나타난다. 우아한 엘프족과는 달리 포악하고 인간의 피를 빨면서 강하고 빠른 몸을 가졌지만 자외선 알러지가 심해서 밤에만 움직여야 하는 반쪽짜리 존재. 이 존재가 왜 기독교 상징인 십자가를 무서워하는지에 대한 근거는 애매하지만 아무튼 마늘과 십자가, 성수등을 매우 싫어하는 보통의 경우라면 악의 대명사로서 묘사된다. 그래도 뱀파이어는 엘프와 같이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엄청난 특권을 가진 존재이다.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지만 X맨에 나오는 울버린 역시 영생을 누리는 존재로 묘사된다. 엄청나게 빠르게 회복되는 그의 능력이 그를 죽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이번에 새로 나온 영화의 예고편을 보니 어떤 이유로 이 영생의 조건을 잃어서 고생하는 듯 하다. 물론 죽지 않을 것이다. 또 영화를 찍어야 하니.
이런 존재들과는 다르게 인간은 일반적으로 필멸의 존재라고 묘사된다. '필멸', 이 말의 의미는 반드시 없어지는 존재를 뜻한다.
우리 인간은 최대 120세정도를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평균수명으로만 보면 요즘에 70대 중반 정도가 되는 듯 하다. 즉 우린 평균적으로 많이 살아야 80년을 사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영생은 과연 어느정도의 시간일까? 지구의 나이를 45억년으로 잡고 생명체 진화의 시점에서 보면 20억년, 뭐 좀 더 자세하게 하면 인간의 진화가 시작된 이래 어느정도 인간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한 무렵으로 따지면 그냥 몇 만년 전으로 보고 만약 그 시절에 어떤 사람 하나가 영생을 얻었다면 지금쯤 1만년 이상 살아온 셈이 될 것이다. 물론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은 지구가 쪼개져 없어지거나 태양이 지구를 삼키는 그날까지 수십억년이 넘을 것이다.
100년과 1만년. 딱 100배의 차이인데 그런 시간을 보냈을 때 우린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하면서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을까?
가끔 영화에서 보면 영생을 누리는 존재들이 그들이 사랑하는 이들이 늙어서 죽어가는 것을 보고 너무나 가슴이 아파 스스로 죽고 싶어하는 장면들이 연출 된다. 물론 나 역시 이런 상황에 대해 많은 공감을 한다. 우리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단지 세월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린 살아가면서 사랑하고 나누고 공감하고 슬픔을 느끼는 우리가 제어 불가능한 감정이 주는 행복과 불행속에서 살아간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할 때 어떤 행동을 하는지를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너무도 쉽게 들어난다. 우린 자신이 행복하지 못하고 또한 미래에도 행복 할 희망이 없다면 그럴 때 자살을 한다. 영생에 비해 너무도 짧은 삶이지만 그조차도 못견디고 죽는 것이다.
인간은 물론 늘 영생을 꿈꾼다. 아마도 조금 더 발달한 미래엔 장기를 부속품으로 갈아끼우면서 오랜 시간을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좀 더 발전하면, 자신의 뇌에 담긴 모든 정보를 어떤 고도로 발달된 컴퓨터에 집어 넣고서 기계속에서 영생을 살아가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또한 우린 종교적 믿음에 대한 조건으로서도 영생을 꿈꾼다. 영원한 윤회를 근간으로 하며 깨달음,해탈을 통해 긍극적 목표에 도달하는 불교나 죽은 후 영혼이 재판을 받아 천국이나 지옥에 가서 어떤 식으로든 영생을 누리는 기독교의 교리는 모두 무한한 삶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담겨져 있다.
실제로 죽음은 생명체에게는 매우 두려운 일이다. 특히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은 단지 생명의 종말이라는 본능적 두려움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렇게 생각하고 글을 쓰는 내 존재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버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는 완전한 '무'의 상태가 된다는 일이 어찌 무섭지 않겠나. 어찌되었건 모든 생명체는 본능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하게 DNA를 통해 각인되어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생존하는 이유도 되는 해준다. 즉 우린 죽음을 두려워 하기에 그 어떤 힘듬도 다 견디어 내면서 생존에 대한 끝없는 본능을 추구한다. 가끔 인간이 생명체의 삶과 죽음에 대한 다큐를 볼 때 감동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우린 살고자 하는 우리의 생명력 자체를 매우 높게 평가하고 깊이 공감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죽음의 공포가 사라진 영생이 누리게 되었을 때 우린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늙기까지 한다면 너무 상상하기 힘드니 자신이 가장 좋은 시절을 골라서 영생을 누릴 수 있다고 상상해보자.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무한대이니 무엇을 하든 급하게 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정말 많은 것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돈을 벌어야 하는 문제는 힘든 일이긴 하겠지만..
우린 그때가 되면 정말로 좋을까?
물론 좋은 사람도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왠지 그런 삶이 어떤 면에서는 좀 끔찍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당장 머리속에서 떠오르는 것은 바로 내가 끝이 없이 영원히 어떤 것을 해야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 도대체 그렇다면 내가 지금 너무도 하고 싶은 어떤 것을 꼭 지금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글 서두에서 말했던 엘프족과 인간족에 대한 평가에서 인간들은 욕심이 많고 호전적이며 변덕스럽고 시끄러우며 숲을 해치는 존재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인간은 활기차고 굴복하지 않으며 용감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존재로도 묘사가 된다. 나는 이 단점과 장점이 서로 상호보완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욕심이 많은 이유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짧아서 그렇다. 그리고 그러기에 우린 또 에너지가 넘친다.
나는 인간이 이런 열정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유한한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단순히 표현해서 만약 우리가 영생을 누린다면 정말로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그 모든 것을 지금 당장 할 필요가 있을까? 이것이 농담같아도 실제로 매우 중요한 시험이 3년 남은 시점하고 1년 남은 시점하고 1달 남은 시점하고 1주 남은 시점에 모두 동일한 재미있는 놀이에 대한 유혹을 받은 학생이 그것을 거부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상상해보자. 과연 3년 남은 시점에 그것을 거부하겠는가? 그것을 거부하기엔 너무도 먼 미래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이렇게 열정적으로 노력하는 것은 바로 역설적이게 우리 자신의 삶이 100년 내로 끝이 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열정은 사람에게 큰 행복을 가져다 준다. 물론 재미있는 놀이도 사람에게 큰 행복을 준다. 하지만 재미있는 놀이는 하면 할수록 재미가 없어지는 큰 단점을 가지고 있다.
소설, 영화, 애니메이션, 미드 등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즐기는 많은 볼거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씩 보는 그런 작품들을 접할 때 마다 감동을 하고 마음에 담아두긴 하지만 결국 모두 다 보고나면 이젠 볼게 없어지는 상황이 벌어진다. 즉 자신이 감동을 느끼던 그 멋진 작품들이 다 떨어진 것이다. 물론 그런 작품들은 기억속에 남아 가끔 그것을 회상 할 때 작은 행복을 줄 수 있지만 정말 그 작품을 보는 그 순간만큼은 절대로 되돌아 갈 수 없다.
이런 인간의 성향은 바로 우리가 느끼는 행복과 불행의 본질적 차이 때문에 발생한다. 우린 행복을 위해 살아가긴 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행복은 불행을 근간으로 하기 때문이다. 즉 우린 불행을 극복할 때 행복을 느끼는 것이지 행복을 위해서만을 위한 행복을 느낄 수는 없다.
일주일 중 5일간의 일을 했기에 주말이 행복한 것이지 백수가 되어 일주일 내내, 일년 내내 놀면 그리 행복하지 못하다. 우린 일을 하는 그 순간들을 매우 힘들고 고통스럽게 느끼긴 하지만 실제로 그 고통이 결국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병이 걸렸다가 나았을 때 행복한 것이지 늘 건강하면 자신이 건강해서 행복하다는 것 조차 잊는다. 단지 가끔 주변에 아픈 이들을 보면서 '아 나는 건강해서 좋구나' 정도나 생각 할 수 있다.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려야 산소의 소중함을 알고, 배가 고파야 음식이 소중한 것처럼 우린 부족함의 고통을 통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잠시만 머리속에서 천국과 지옥에서의 자신의 삶을 상상해보라. 물론 지옥은 영화속에서 많이 본 장면들이 떠오를 것이다. 불에타고.. 고문받고.. 벌레가 묶여 있는 내 살을 파먹고.. 그런데 천국을 상상해보자. 하늘에서 서광이 비치고 평화롭고 행복한 집에서..
만약 천국을 지옥처럼 현실과 완전히 다른 어떤 상황으로 상상했다면 당신은 천국에 갈 자격이 있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상상해도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그냥 천국은 내가 살아 생전에 행복했던 일을 무한 반복할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좀 더 잘 생각해보면 지옥은 많은 작품에서 매우 그럴듯 하게 그려지지만 천국을 제대로 묘사한 작품은 거의 없다. 실제로 CG 처리를 하는 영화에서도 천국에 대한 CG는 정말로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이 의미가 뭘까? 우린 왜 천국을 상상하지 못할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천국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 영원한 행복이란 것이 바로 불가능한 목표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영원한 불행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매일매일 경사진 돌을 굴려서 언덕을 올라가는 시찌프스의 신화처럼 우린 얼마든지 매일매일 지옥을 경험할 수 있다. 심지어 우린 현생에서도 지옥을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우린 매일매일 행복할 수 없다. 어떤 종류의 행복이든지 언젠가는 다 소모되고 지루해질 뿐이다. 만약 억지로 우겨서 정말로 영원한 행복을 만끽하고 싶다면 이런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오늘 소모한 나의 행복은 내일이 되면 모두 잊혀져 초기화 되는 것이다.
오늘 내가 너무도 좋아하는 여인과 데이트를 했다면 내일도 마치 오늘처럼 모든 것을 잊고 처음부터 다시 하는 것이다. 이런 영원한 반복, 이것이 우리의 행복의 조건이 된다. 그런데 과연 이런 행복을 스스로 선택해서 하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인간의 행복 조건은 단순하고 기억을 잘 못하면서 본능에 충실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실제로 사실이다. 우리가 잘 까먹을수록 그리고 복잡한 사고를 하지 않을수록 우린 행복하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누가 이런 삶을 살려고 할 것인가? 마치 돼지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해서 돼지가 되고 싶어하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이런 인간의 특이한 행복과 불행에 대한 성향이 만약 우리가 영생을 얻게 되었을 때 치명적으로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아까도 말했듯 매일매일 초기화 되거나 선택적 초기화가 가능하다면 우린 아마도 기억을 지우면서 행복한 영생을 누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상황으로 유추해보면 아마도 미래의 최고의 발명품은 영생이 아닌 이런 기억을 지우는 도구 일지도 모른다. 고대의 왕족들이 먹고는 싶으나 배가 불러 먹지 못하니 입으로만 씹은 후 넘기지 않고 모두 뱉어낸 것처럼 말이다. 기술이 발전한 우린 아마도 식도에 구멍을 뚫어 넘긴 음식물을 밖으로 배출시킬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우연히 읽은 좋은 말 하나가 생각난다.
"오늘은 내가 앞으로 살아 갈 날의 가장 첫번째 날이다"
나는 이 말을 인식하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우린 현재로서는 영생을 누리는 것이 불가능하니 우리에게 남은 하루는 매일매일 하나씩 줄어간다. 우리에게는 늘 죽음으로 향하는 시계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또 우린 이렇기에 오늘 나의 게으르고 귀차니즘에 빠진 자신을 일깨우고 용기를 불어 넣으면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데 좀 더 열심히 노력할 수 있게끔 하고 있다. 이런 힘든 노력이 영원히 계속되어야 한다면 모두 중간에 포기하겠지만 우린 죽음이라는 절대 벗어나지 못하는 목표 지점이 있다. 그래서 죽음은 어떤 의미에서는 축복이 된다.
영생은 물론 현재로서는 허무맹랑한 목표이다. 하지만 자신의 80년, 90년 생도 생각에 따라서는 영생이 될 수 있다. 지금 10대, 20대의 청소년들이 자신의 40대 50대를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는 그 나이가 마치 영생의 미래처럼 인식될 것이다. 물론 나 역시 나의 60대, 70대가 거의 상상이 안된다. 물론 나이가 어느정도 먹어서 청소년 시절보다는 아니지만 아무튼 아직도 나의 죽음의 순간이 다가옴을 그리 많이 공감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나에게 많은 시간이 남았다고 믿어 오늘 하루를 그냥 어떻게든 쉽고 편하게 보내려 하는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남은 날은 명확하다. 단지 내가 그것을 셀 수 없을 뿐.
조금만 자신의 삶에 대해 충실함을 보이자. 그것이 아무런 의미도 아무런 뜻도 없는 행동이라고 해도 적어도 자기를 바라보는 자신에 대해 조금 떳떳하지 않을까? 우린 영생을 누릴 수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