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비상식적인 사회를 상식적으로 본다

아이루다 2013. 7. 26. 16:08

 

인간의 기준으로 보자면 우린 수천년이나 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존재이다. 가깝게 우리나라 대한민국만 해도 나라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국가적인 행사나 문구에 반만년이란 용어를 매우 자주 사용하고 있으며, 예수 탄생을 중심으로 한 서기년도 표기법과는 그 시작시점이 다른 단기를 기준으로 년도를 표기를 하면서 우리의 역사가 5천년이 가까울 정도로 오래된 민족임을 틈나는 대로 강조하고 있다. 물론  현대 사회는 역사가 겨우 200년 밖에 안된 미국의 실제적인 지배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은 좀 아이러니 하긴 하지만.

 

물론 지구의 나이에 비하면 너무도 짧은 인간의 역사지만 우리 인간이 수명에 비하면 꽤나 오랜 시간인 수천년의 시간동안 우린 지역적이고 개인적인 수많은 문제들이나 혹은 우리 인간 자체가 멸종할 수 있을만큼 커다란 몇몇의 사건까지 참으로 다양한 역사적 경험을 해왔다. 그리고 어찌되었건 그게 옆으로 가든 앞으로 가든 뒤로 가든 간에, 큰 호흡으로 본다면 결국 우린 진보를 하고 있는 것이 맞다.

 

우린 눈에 보이는 것으로 따지면 스마트폰과 같이 손안의 컴퓨터시대를 열어놓은 것과 같은 기술적 진보를 이루고 있으며, 우린 좀 더 인간을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해주는 과거의 문제가 많았던 봉건사회에서 그나마 투표권 행사가 가능한 민주주의 사회로 변화되는 것 같은 사회 시스템의 진보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 흐름은 아마도 인류라는 종이 사라지기 전까지 혹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완전히 포기해버리거나, 포기할 수 밖에 없는 감당하기 불가능한 커다란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한 유지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 인류는 늘 언제나 이렇게 뒤로가거나 머물기보다는 한걸음이라도 더 아니 한발자국이라도 더 가길 원하고 바라기 때문이다.

 

하지만 큰 흐름은 진보라고쳐도 각 시대의 좁은 단위로 쪼개어 역사를 바라보면 우리의 지나온 길엔 분명히 뒷걸음 친 시기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알렉산더 대왕시절에 그리 융성했던 헬레니즘 문화가 기독교의 세계 지배덕분에 완전히 단절되어 실제로 르네상스나 그후로 영국 산업혁명 이후로 이어지기 시작한 모습을 보면 분명히 유럽의 중세는 암흑의 시대였으며 퇴보의 시대로 여겨진다. 하지만 결국 그 천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웅축된 힘은 기회가 오자 온갖 방향으로 터져나가며 급격한 진보를 이룰 수 있는 토양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과거 고조선부터 근대의 조선까지 우리는 어느 정도 평범한 국가 시스템을 가지고 오래동안 나름 평화롭게 이 땅에서 살아왔고,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후 남과 북이 갈려 각각의 나라를 세우고 서로 대립을 시작한지가 벌써 60년이 흘렀다. 그리고 이런 와중에 우린 찬란했던 20세를 보내고 벌써 21세기의 1/10 이상을 지냈다.

 

그렇다면 우린 지금 진보의 시대인가? 정지된 시기인가? 아니면 퇴보의 시기인가?

 

물론 커다란 흐름은 앞서 말했듯 언제나 진보의 흐름이 맞다. 하지만 현미경으로 보듯 최근 십수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떤 판단을 하게 될까? 여기엔 미래의 어느날 역사에 의해 판단을 받는 것이 가장 그나마 진실에 가깝겠지만 단순히 이 시점을 그냥 객관적으로 봐서 판단한다면 어떨까?

 

내가 개인적인 입장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한다면 아마도 나는 그리 좋은 평가를 안줄것 같다. 아니 좀 더 심하게 말하면  나는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서 퇴보를 의미하는 비상식의 시대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물론 이것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매우 다르기 때문에 나 역시 이것에 대한 확신은 없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신이 믿는 상식을 자신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가지고 있은 매우 공통적인 가치관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이것은 많이 틀린 생각이다. 우리는 상식을 자신과 자신이 어울리는 주변인물들로부터 결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즉 내 자신과 내 주변인물들이 그것이 상식이라고 말하면 그것이 상식이 된다.

 

또한 언론이 정해주는 상식의 힘도 엄청나다. 만약 지금부터 모든 언론이 1년동안 결혼을 하는 사람이 문제가 많다고 끝없이 표현을 한다면 우린 어느날 결혼한다는 사람을 비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누군가 주변에서 나에게 결혼을 한다고 청첩장을 보내는 날이라면 이런 비상식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얼마전 신혼여행에 다녀온 새색시에 대한 에피소드를 하나 들었다. 괌에 갔는데 자신이 너무도 아끼는 모자가 배에서 내리는 도중 부는 바람 때문에 물에 빠졌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 자신의 남편과 배를 몰아주던 두 남자가 그 모자가 물에 빠져 떠 있는 상황을 그냥 바라보더라는 것이다. 자그만치 세명의 남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너무도 소중히 여기는 모자가 겨우 허리춤도 안오는 바닷물에 빠졌는데 누구도 건질 생각을 하지 않아서 너무 화가 났었다고 한다.

 

이 새색시에겐 자신의 소중한 물건을 잃었을 때 주변에 누군가 그것을 찾아주는 것이 상식이다. 특히 자신은 연약한 여자이기 때문에 자신의 남편이라면  당연히 그것을 대신 찾아줘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자신의 친구에 대해 말을 했을 때 주변 친구들 역시 그 매너없는 남자 세명을 같이 씹어주었을 것이다.

 

내가 가진 상식 역시 이런 범주에 속한 매우 개인적인 판단이다. 나는 사람들이 길이나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의 소리를 커다랗게 틀어 놓고 다니는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매우 싫다. 그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도 싫고 자신만 들었으면 좋겠는데 왜 다른 사람까지 들리게 하는지 그 비정상적인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런 것은 마치 어딘가 들어갈때 줄을 서거나 신호등을 지키거나 하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어떤 것들은 법적으로 명백하게 지켜야 할 것이라고 정해져 있지만 솔직히 그것이 법에 관한 문제는 아니다. 그냥 매너의 문제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사람과 사람간의 지켜야 할 기초적인 예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것도 모두 상식의 범주에서 판단되는 것이 현실이다. 누구나 커다랗게 소리를 내면서 자신의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것이 상식이라면 내가 아무리 그것이 싫다고 해서 달라질 수는 없다. 이런건 버스에서 버스 기사가 라디오를 틀어 놓는 것과 비슷하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는 그 방송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나 자신도 이것에 대해서 그리 많은 불만을 갖지 않는다. 너무 싫으면 나는 버스를 이용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상식이 된다.

 

이런 타인의 상식과 내 상식이 충돌을 할 때 우린 보통 짜증을 내거나 혹은 직접적으로 그것을 지적하곤 한다. 물론 그러다가 싸움이 나기도 하지만. 하지만 또한 편으로는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 사람이 가진 상식이 나와 충돌이 난다면 나 역시 그 상식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실제로 받아들이지는 못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버스속 라디오 방송처럼 무신경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요즘 인터넷을 발달인지 아니면 원래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매일매일 인터넷 상의 가상공간에서도 실제로 현실속에서도 비상식을 경험하고 그것에 대해 짜증을 내거나 좀 기분이 나빠지기도 한다. 도대체 나와 다른 상식을 가진 이들의 생각을 이해하기가 너무 힘들어서이다. 그래서 가끔은 부처님도 이런 상황에 자비를 말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조금 다른 면에서 생각해보면, 정말 많은 이들이 믿어 의심치않는 상식조차도 시대가 달라지면  변화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지금 이순간 나는 내가 믿어 의심치 않는 상식을 아주 절대적으로 믿을 수 없다. 이것은 언제고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적인 문제는 당장 당장 내가 보고 접하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이 두세상 모두에서 내가 받는 스트레스이다. 나는 어떻게 하면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누구나 알고 있는 옛날 이야기로 모두 눈을 하나만 가진 나라에 가면 눈이 두개인 사람이 병신이 된다고 했었다. 이 말은 맞는 말이다. 우리가 지금 절대로 의심치않고 있는 눈이 두개인 사람이 눈이 하나만 있는 사람을 돌연변이라고 말하겠지만 그것은 단순히 숫자의 쏠림 현상에 불과하다. 그 수가 적절하게 남녀처럼 구분되면 그것은 하나의 다른 존재로서 인정하겠지만 너무 극단적으로 한쪽이 많으면 다른 한쪽은 순식간에 병신취급을 받는 것이다.

 

여기에서 눈이 두개인 사람이 하나를 가진 사람보다 더 물리적으로 낫다는 실제적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우린 두 눈을 통해 어떤 대상체와 우리와의 거리를 잴 수 있는 심도를 느낀다. 즉 평면으로 보이는 세상에서 거리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눈이 하나면 이런 것을 할 수도 없고 또한 그 하나뿐인 눈이 다칠 경우 바로 눈이 멀어버릴 수 있는 치명적인 문제도 있다. 그렇지만 100명 중 99명이 눈이 하나이고 단 한명만 눈이 둘이라면 그 하나가 바로 돌연변이고 충격적인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잘 상상이 안간다면 지금 이순간 눈이 세개 나 코가 두개 달린 사람을 상상해보면 된다. 코가 두개면 콧구멍이 네개라서 감기에 걸려도 아마 좀 덜 답답할지도 모른다. 냄새도 더 잘 맡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코가 두개인 사람을 보고 우리가 그 사람이 비정상이라고 느끼지 않을 수 있겠나?

 

이런 이유로 인해 나는 가능하다면 지금까지 내가 믿는 그 모든 것에 대한 상식을 내려놓고 싶다. 사람들의 모든 생각과 행동이 모두 상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나는 아마도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좀 더 맘 편히 살아가게 될 것이다. 정말 현재 대한민국의 세상은 비상식이 상식을 지배해나가고 있다. 내 입장에서만 보면 그렇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비상식인 것이다. 내가 믿고 내가 당연하다고 믿는 것을 아주 소수만 믿고 반대로 내가 정말 비상식이라고 믿는 것을 다수가 믿는다면 이젠 내가 비상식적인 사람이 될 차례인 것이다. 근데 잘 모르겠다. 한 10년전만 해도 나는 내가 꽤나 상식적인 수준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주변에서 나름 인정을 받았던 것 같은데 세상이 갑자기 변한 것인지 아니면 내가 요즘 그것을 인식한 것인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금 비상식이라고 믿는 행동을 하고 살고 싶지는 않다. 예를 들어 버스가 도착하면 뒷문으로 타거나, 지하철에서 몇정거장 후에 탈 친구의 자리를 맡아두는 사람이나, 아이들이 얼마나 떠드는지 신경도 쓰지않고 노약자석에 앉아서 자신의 스마트폰만 바라보는 아이의 엄마들의 모습이 되고 싶지는 않다.

 

당연히 이런 행동들 역시 모두 자신만의 타당한 이유를 상식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앞문은 사람들이 몰려 밀리니 빠른 승차를 위해 뒤로 탔는데 어쩌다보니 빈자리를 앉게 된 것이고, 친구와 꼭 같이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내 빈 옆자리에 앉으려는 사람에게 간곡히 양해를 구한 것이고, 아이들을 자유로운 영혼으로 키우기 위해 그렇게 하는 엄마들의 깊은 생각이 분명히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비정상적인 나는 지금으로서는 그런 상식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어려움이 있다. 그것은 분명히 누구나 그럴것이므로 나만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자신이 비상식적이라고 믿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일 것인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비상식적인 사람이 되어 버린 나, 우린 지난 오년간 너무도 상식적인 대통령 밑에서 지극히 상식적인 삶을 살았고 그것이 고마워서 이제 그 후임으로 같은 정당에 속한 사람에게 다음 5년을 맡겼다. 위로부터 전달되어져오는 이 상식의 시대. 과연 나는 어떻게 나의 비상식을 다른 상식적인 이들에게 이해받을 수 있을까?

 

너무도 상식적인 그분들에게 이순간에도 몹시 죄송하다. 나의 한계로 인해 내가 그분들의 상식을 오해하거나 혹은 좁은 나의 이해심의 한계로 인해 용납을 잘 못하는 상황이 반복이 된다. 인간은 역시나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우리의 이타적인 행동을 기대하고 있는 어리석음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어떤때 보면 나는 참 바보같고 또 어리석으며 결국 그것으로 인해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다. 정말 나도 이젠 내가 비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바로 우리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며 평균치라고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아니 부정하고 싶어도 내가 통계적으로 인정 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