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과 현실
내가 공자님에 대한 전문가는 아니지만 대충 들어 본 바에 따르면 그분은 그 자신이 믿는 사상을 실천하고자 꽤나 많은 나라를 여행했다고 했다. 그 당시 중국이 워낙 작은 나라들로 나뉘어 있던 시대였기 때문이기도 했거니와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그 자신이 자신의 철학을 위해 정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였을 것이다. 아무튼 공자님은 인과 예로서 사람을 다스리고자 했지만 거의 모든 왕은 강한 군사력을 선호했다.
우리는 흔히 이상과 현실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하곤 한다. 이런 이야기는 책으로 세상을 배운 이들이 특히 많이 듣는 이야기인데 특별 할 것도 없는 우리들 역시도 학교에서 배운 것들이 실제 사회와는 다르다는 것을 살아가면서 끝없이 재교육받고 있는 형편이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처음엔 원칙론자였다가 나이가 먹어갈수록 유들유들 해지면서 좋게 말하면 현실에 적응을 하고 나쁘게 말하면 현실과 타협을 하게 된다.
실제로 '적응'이란 말과 '타협'이란 말은 차이가 크긴 하다. 적응은 이미 그렇게 된 환경이니 어쩔 수 없이 거기에 맞춰 사는 것을 말한다면 타협은 여기에서 더해서 너무 잘 적응해서 이젠 꽤나 적극적으로 그 환경을 이용하는 단계로 가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 타협보다 더 발전된 형태는 바로 '이용'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실제로 타협이나 이용 단계로 간 이들이 이제 갖 사회에 진출해서 교과서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회 초년생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차게 되는데 그것은 정말로 그 사람이 세상물정 모르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엔 그 자신의 과거 모습에 대한 스스로의 비판도 존재하고 반면에 변한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상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론과 매우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론과 현실의 차이를 보자면, 우리 중 당구장에서 공과 공이 충돌할 때 에너지와 그것을 역계산해서 내가 당구공을 치는 큐대에 얼마만큼의 힘을 실어야 하는지 그것을 계산하여 당구를 치는 사람은 없다. 물론 물리학을 전공한 어떤 이는 이것을 계산할 능력이 될지는 모르지만 그 자신이 자신의 팔로 그것을 정확히 실행해 낼 능력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이론과 실제의 차이이다.
이론과 비슷한 이상도 이와 비슷하다. 인간의 만들어 낸 가장 이상적인 제도는 바로 '공산주의' 이다. 다 같이 동등하게 일하고 동등하게 보상받아서 누가 누구를 부러워 할 필요도 없고 또한 모든 것이 사회 시스템으로부터 보장이 되니 아프거나, 집이 필요하거나, 노후의 삶에 대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즉 정해긴 기간만 사회를 위해 자신의 능력을 노력해서 발휘하면 아이시절, 노후시절 그리고 언제라도 자신의 삶이 극단적인 상황에 놓일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이다.
얼마나 좋은가. 우린 이것의 일부를 실행한 것을 복지라고 부르긴 한다. 하지만 이 공산주의 이론은 치명적인 단점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이 절대 그런것에 만족하는 착한 생명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린 수억년 넘게 경쟁을 통해 삶을 이어온 존재들의 후손이다. 우리의 피엔 기본적으로 내가 살아야 한다는, 거기에 더해 더 잘 살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욕심이 각인되어져 있다. 우린 누구나 자신의 후손을 더 많이 남기고 그러기 위해 더 좋은 자신의 경제상황을 만들어야 하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
인간의 기본 심성을 무시한 공산주의 이론은 이제 거의 끝을 보이고 있으니 실제로 이론적 제도의 한계가 극명하게 들어나고 있는 셈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나라가 선택한 자본주의 제도가 다 맞느냐? 그것도 아니다. 지금 현재 21세기 초반은 바로 이 자본주의의 단점이 극명하게 들어난 극단적 이윤추구를 위한 무한한 욕망이 결국 세계 경제를 무너뜨리고 우리 자신을 파괴하고 있다.
이제 이 이상과 현실에 대한 범위를 많이 좁혀서 개인의 영역으로 들어가보자. 일단 나의 경우 이상과 현실은 아주 단순하게 나타난다. 이를테면 나는 시골에 집을 짓고 거기에서 가서 있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이것은 일종의 이상이다. 현실로 따지면 나는 거기에 내가 가진 돈을 꽤나 쏟아 부었으며 매달매달 그 집을 유지하기 위해 일정량의 돈을 쓴다. 거기에 이동할 때마다 드는 교통비가 있어야 하고 실제로 더 현실적인 문제는 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에 나타난다.
나는 행복하기 위해 그곳을 찾는다. 하지만 그곳까지 가는 과정에서 나는 백킬로미터의 속도로 고속도로를 달려야 하는데 이것은 집에 있는 것보다 훨씬 위험한 행동이다. 물론 안전운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사고가 날 확률이 0%는 아닌 것이다. 만약 혹시라도 사고가 나면 나는 행복을 위해 불행함을 당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런 현실적인 걱정들 때문에 그곳을 가지 않지는 않는다. 당연히 그런 과정은 겪어야 할 문제이고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 또 이런 문제들 중에 잡초 문제도 있다. 멀리서 보는 풀밭은 좋은 냄새와 아름다움을 보여주지만 집과 밭에 난 잡초는 나의 노동력을 동원해 뽑아내야 한다. 마치 동물이 나오는 다큐멘터리에서 먹이를 쫒는 늑대들의 모습이 생명력 넘치는 광경일지는 몰라도 그들이 만약 그 순간 나를 쫒고 있다면 그때도 그렇게 느낄 수 있을 것인가? '아 저 늑대들은 참 영리하고 나를 몰아대고 있구나' 라고.
어떤 면에서는 우리 인간은 현실의 잔혹함을 잊고자 그 현실에 감정을 전이시켜 자신만의 근거없는 환상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공산주의 역시 이런 모습을 보이는데, 인간의 탐욕스러운 욕심을 부정하고 만들어진 이론이며 거기에 더해서 추가적인 긍정적인 논리와 반대제도의 문제점만을 부곽시켜 결국 그 이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젊은 시절, 덜 현실적인 시절에 이상적인 사고와 이 이론이 만남이 폭발을 일으켜, 그 주체인 젊은 혁명투사들로 인해 결국 소련과 중국의 공산화가 이루어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가지 꼭 집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만약 그런 이론들이 현실과 잘 맞지 않다면 그럼 이론을 다 버리고 현실에 맞게 뜯어고쳐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어 횡다보도를 건널때면 녹색등일때 건너야 한다는 것은 이론인데 보통 성인들 중 많은 이들은 차가 없는 늦은 밤엔 그 원칙을 지키지 않는 편이다. 그렇다면 교과서에 횡단보도를 건널 땐 녹색등이거나 혹은 차가 없을 때라고 적어야 하는 것을 묻는 것이다.
이것은 공산주의가 인간의 기본 심성을 무시하고 만들어진 이론이라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무조건 부정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과 이어진다. 또한 공자님이 말씀하신 인과 예로서 사람들 대하고 군자는 덕으로서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고 말하는 그 이상적인 이론을 무조건 고리타분하고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한쪽 구석에 몰아두고 사람은 역시나 패야 말을 듣는다고 생각해야 할 것인가?
또하나 개인적인 부분에서도 예를 들었던 시골에 있는 집을 위해 쏟은 많은 개인의 재원과 그곳에 가기 위한 위험한 과정등을 생각해서 처음부터 그런 짓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인가에 대한 질문과도 조금이나마 연관이 된다.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은 없다. 만약 답을 내고자 한다면 그것은 주관식 답이 될 것이고 누구도 그것을 채점해줄 수 없다. 그래도 그나마 조언이랍시고 할만한 말은 바로 그 모든 이론적 이상에 대해 해보지도 않고 그것은 단지 이론일 뿐이야 라고 사고하는 사고방식은 좀 고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론일 뿐인 점은 어느정도 맞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현실적으로 적응한 수 많은 나의 행동을 마냥 자기합리화 시킨 후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 할 필요는 없다. 그건 역시나 내가 이론을 제대로 실행한 능력이 안되서 그런 것이지 그것 자체를 스스로 현실주의자, 적응주의자라고 자신을 칭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실제로 사회를 구성하는 이론이 무너질수록 사회는 점점 더 통제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차가 없으면 횡단보도를 건너는 세상과 어떤 경우라도 녹색등에 건너는 세상에서 사고율은 다르다. 아주 미세하게 다를지 모르지만 과연 그 수많은 사람들이 몇 분 더 빨리 가기 위해 했던 행동들로 인해 어떤 결과가 생겨났을까?
사람의 자기합리화는 아주 무서운 능력이다. 우린 심지어 우리가 만인의 지탄을 받는 살인과 같은 행동을 했더라도 쥐꼬리만한 이유만 있다면 그것을 스스로 합리화 해낼 능력을 가지고 있다. 특히 여기에서 종교의 힘은 거의 무한대의 능력을 보여준다. 그래서 보통 치명적인 범죄를 저질렀던 인간들이 나중에 꼭 종교의 귀의해 종교인으로서 살아가면서 과거를 이야기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배운 이론적인 이상을 나이가 먹으면서 하나 둘씩 깨가면서도 다 그것을 스스로 합리화 해낸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밑에 따라오는 다음 세대에게 세상물정 모른다고 큰소리 친다. 하지만 정말로 우리는 그들에게 현실적으로 살라고, 그런 꿈에서 벗어나라고, 제발 책에서 나오는 소리는 그만하라고 고함을 칠만큼 스스로 떳떳한지는 생각해 봐야 한다.
커다란 제도적 관점에서 그리고 사회 시스템 안에서의 규칙에서 거기에 더 작게는 개인적인 삶까지 우린 많은 부분에서 이상과 현실의 차이와 그 둘간의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루고 있다. 하지만 웃기게도 우린 현실에 적응해야 한다는 생각 덕분에 우리가 실제로 가진 현실을 부정하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동물이며 생존을 제일 목표로 삼은 지구상 생태계의 일부이다. 이것은 절대로 변치 않는 절대적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우리 자신을 이런 존재에서 벗어난 좀 더 특별한 가치를 가진 존재로서 우대한다. 그렇고 그 누구도 이런 것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우린 실제로는 그런 생명체로의 현실인 극도의 이기주의, 자신의 생존을 위한 투쟁, 후손을 더 남길 기회등의 우리가 가진 본능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최선이 바로 우리가 실제로 현실이라고 부르는 영역이 된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해준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생명체로서 현실적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실제로 우리 스스로가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르는, 생명체에 대한 스스로의 부정행위를 통해 현실을 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그 덕분에 우린 우리가 실천 불가능 한 이상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다시 또 파괴하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어느 시점에 우리가 우리가 자신이 가진 한계점, 즉 먹고 싸고 자고 짝짓기 하는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린 그것을 위한 제대로 된 규칙을 만들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그것을 통해 우리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린 그것을 해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우리 스스로를 자연계에 있는 다른 존재들과 다르다고 출발하기에 우린 실현 불가능한 이론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우리의 방향성을 가진 현실 적응법은 이런 문제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남편이 어떤 경로를 통해 돈을 벌어오는지에 대한 아무런 비판적 사고 없이 자신이 즐기는 우아한 삶을 너무나 사랑하는 어떤 비리 공무원의 사모님 이야기가 바로 그것에 대한 적절한 예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여성은 자신을 절대로 먹고 싸고 자고 짝짓기를 하는 그런 존재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그 자신을 현실주의자 혹은 사회에 잘 적응한 자가 어떤 의미에서는 더 이론적인 사람일 수 있다. 이것은 참 아이러니 한 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