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의 단절 - 사람 스트레스
나의 지나온 삶을 생각해보면, 나는 꽤나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중고등학교 시절엔 친구를 많이 사귀고자하는 욕심 덕분에 친한 친구도 꽤나 있었고 그 당시만 해도 진정한 우정이니 하는 것들을 어느정도 진지하게 생각했었기 때문에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집착 수준까지를 보이곤 했었다. 물론 이런 경향은 대학교 진학 후에도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특히 신입생땐 동문회, 학과, 동아리 모임까지 무리를 해가면서 다 열심히 하려고 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도 나는 한편으로 인간에 대해 조금씩 지쳐갔던 것 같다. 아무래도 20대 초반의 나에게 가장 큰 생각할 꺼리는 바로 삶의 순수성에 대한 질문이었는데, 뭐 지금 생각하면 참 유치하기도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그것에 꽤나 목메고 살았기에 사람들의 - 내 입장에서 판단했을 때 - 순수하지 못한, 특히 순수를 떠나 어떤 면에서는 교활하기까지 해보이는 나의 주변 사람들에게 매일매일 보이지 않는 실망을 느꼈다.
아마 이때쯤일 것이다. 사람 기피증이 조금씩 생겼던 시기는. 그후로 나는 군대에 가게 되었고 이 기피증은 더욱 심화되었다. 그 이유는 당연히 아무런 이유도 원칙도 없이 단지 계급이란 단위 하나만으로 모든 것이 합리화 되는 군대에서 보고 들은 모든 일들이 바로 나에게 인간이 얼마나 추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교육을 시켜줬기 기 때문일 것이다.(나는 지금도 군대에 가야 인간이 되니 어쩌니 하는 사람들을 보면 좀 짜증이 난다. 편하려면 줄대기를 잘해야 한다는 원칙과 까라면 까야 한다는 잘못된 조직생활을 제대로 배우는 곳이 바로 군대이다)
군 제대를 한 후 나는 어느새 꽤나 시니컬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말이 시니컬이지 뭐 속이 꼬일대로 꼬인 사람이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비관주의자라고 할까? 그래서 그때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나에 대한 평가가 바로 어둡다, 꼬였다, 회의론자, 흑백논리의 대명사 였다. 그리고 기억해보면 나는 이무렵부터 사진을 찍지 않았다. 아마도 그 이유는 바로 내 자신을 어딘가에 남겨놓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다. 이 버릇은 그로부터 한 2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조금씩 바뀌고 있다.
이렇듯 이런 과정속에서 나의 사람에 대한 꾸준한 실망은 나에게 사람에 대한 기대를 접게 만들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내가 가진 기본적이 성향, 즉 사람을 좋아하는 행위를 가로막아서 이 둘 간의 애증의 갈등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부분에서 나는 많이 힘들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내 나름대로의 순수성에 의해 전달된 의도들이 왜곡되고 또한 나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수준의 타인들의 이기적인 습성들이 아마도 끝없이 나를 상처입게 했던 부분이었다. 결국 이런 이유들로 인해 나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의도하지 않게 점점 더 견고한 벽을 세우고 세상과 나를 분리하면서 여기에 대한 나름대로의 합리성을 부여하고자 나를 더욱 비관적인 생각을 하는 자로 몰아갔다.
사회에 나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더 심해졌다. 조직 생활을 하다보니 정말 가관도 아니였다. 이곳은 전쟁터였고 개인의 이기주의를 거의 무한대로 펼치는 공간이 내 눈앞에 있었다. 그 상황에 더해서 그나마 친했던 친구들 하나 둘씩 결혼을 하면서 이들은 가정이란 무대로 자신의 삶의 경계를 좁히면서 그나마 근근히 만나던 친구들과의 교류도 그리 쉽지 않은 상황이 펼쳐졌다. 물론 나는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좀 다른 삶을 선택했기에 이런 변화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 내 자신의 문제도 컸다.
그후로도 나는 또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도 사귀고 또 서서히 잊혀지기도 하면서 지금껏 살아왔는데 그마나 유지하고 지냈었던 고등학교 동창, 대학교 동창들과의 관계가 요즘 때늦은 급격히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 뭐 실제로 요즘 같아서야 일년이 한 두번 볼 정도의 횟수이고 한달에 한 두번 문자나 통화를 하는 사이이지만 지금은 그것 조차도 그리 달갑지 않다. 아마도 그것에 대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내가 그들과 할 수 있는 대화 주제가 없다는 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년에 만났던 고등학교 친구녀석들의 이야기는 직장에 대한 불안, 좋지 않는 차를 타고 다니는 불행한 다른 친구 녀석에 대한 걱정, 아픈 가족에 대한 걱정. 이것이 다 였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나는 그들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또 삶이란 어떤 것인지를 이야기 할 수 없었다. 이미 의지에 상관없이 나이를 먹어 버린 그들의 모습은 그냥 내가 어린 시절에 봤던 그런 어른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조금씩 갈라진 삶의 궤적이 그로부터 수십년이 흐른 후 지금에 와서는 이제 서로 같은 인간인지조차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차이가 난 것이 현실로 보인다. 물론 나 역시 살아가야 하는 생명체로서 근본적인 부분은 전혀 그들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살아가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행복해하는 그 많은 우리를 인간답게 해주는 것들이 나와 그들과 공통점이 없어진 것은 사실이다.
물론 친구들과의 대화를 꼭 복잡하고 무거운 주제만을 다룰 순 없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 내 앞에서 끝없는 드라마 이야기, 자신이 관심 있는 명품에 대한 이야기, 좋은 외제차에 대한 이야기, 성공한 친구에 대한 부러움, 실패한 친구에 대한 연민만 늘어 놓는다면 그것을 참아내기가 쉽지 않다.
나는 단지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 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거기에 그 자리에 없는 남의 이야기, 연예인 이야기, 우리가 갖지 못한 물건에 대한 이야기를 빼고 나의 삶과 너의 이야기를 서로 주고 받고 싶은 것이다. 거기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이 목적없어 보이는 삶에 대한 공감과 불안한 미래나 혹은 혹시나 하는 미래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기도 하면서 좀 더 깊은 감정의 울림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그런 친구들이 없다는 것은 내가 그동안 살아온 삶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뜻이 될 것이다. 혹은 내가 그런 사람들을 찾을 만한 역량도 안되고 노력도 안했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욕심이 있는지라, 가끔 꽤나 괜찮은 글을 쓰는 어떤 이의 블로그에 오래된 지인의 공감 댓글을 읽을 때면 나에겐 왜 이런 사람이 없을까 하고 좀 부럽기도 하다.
큰 방향에서 보면 나의 삶의 목표는 사람을 좀 더 이해하고 사랑하고 보듬어 안는 것인데 이상하게 요즘은 반대로 가고 있다. 과거에 비해 요즘 마음은 더 편하고 좀 더 행복하지고 있는데 반해서 사람에 대한 부분은 점점 더 멀어짐을 느낀다. 심지어 요즘엔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 필요성 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내가 사람들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있음으로서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에 대해 익숙해지고 있는 효과인 듯 하다. 그래도 예전엔 아무리 그렇더라도 인간관계의 기본적인 행동정도는 하고 살았는데 요즘은 정말로 이것들이 무의미 하다고 느껴진다.
이게 좋은 것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단지 내가 가지고 있던 나의 기본 성향, 즉 사람과 만나는 것을 좋아하던 어떻게 보면 좀 어리석은 성향이 버려지고 있다는 점은 꽤나 좋긴 하다. 아마도 좀 더 시간이 흘러 내가 나를 좀 더 세상과 분리할 수 있다면 아마도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아예 끊고 살아가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때쯤 내가 좀 더 깊은 성찰을 할 수 있다면 그때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없는 교류가 가능하지 않을까?
아무런 기대가 없다면 아무런 실망도 없고 거기에서 사람에 대한 그리 나쁘지 않은 이해를 얻을 수 있다는 가정을 한다면 말이다. 어쩌면 실제로 이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결국 기대란 것은 절대적인 실망을 불러오기 때문에 이 기대를 완전히 버릴 때 진정한 이해가 시작될 것이란 말이다.
지금은 과도기라서 어떤 말을 결론적으로 말하기가 힘들다. 단지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앞으로 나는 좀 더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질 것이란 점이며 그것이 나를 편안하게 해 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는 내가 정말로 사랑하고 아끼는 한 사람이 있음도 부정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