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양면성
내가 읽은 책 중에서 오래된 고전 중 하나로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라는 제목을 가진 나름 유명한 책이 있다. 아마도 어린시절 책을 조금이라도 접한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읽어봤을 것이고 설령 그럴 기회가 없었다고 쳐도 커오면서 그 책의 제목만큼은 한번쯤 들어보았을 법한 책이다. 그리고 이 책의 내용은 생각보다 많이 어두운데 그것은 마치 투명인간의 결말처럼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종류의 설명하기 힘든 감정을 갖게 한다.
이 책은 지킬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과 하이드란 이름을 가진 두명으로 분리된 한명의 분열된 자아에 대한 이야기이다. 대충 이야기는 이렇게 전개된다. 지킬박사는 인간의 선악에 대한 모습을 연구하다가 어떤 약을 먹고난 후 또 다른 자아가 하나 더 생기는데 이 존재가 바로 하이드씨라고 불리는 인물이었다. 이 하이드는 살인까지 태연하게 저지르는 아주 사악한 존재로 알려지면서 경찰의 추적이 시작된다. 이렇게 전개되는 이야기는 사악한 하이드와 자신의 주체를 점점 뺏기게되는 지킬의 절망속에서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는 선한 역할을 가진 지킬박사의 이야기로 끝을 맺게 된다. (읽은지 오래되어 확신은 못한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는 1980년대 방영 된 헐크라는 존재가 있다. 분노하면 몸이 커지고 바지가 찢어지고는 했던 매주 청바지를 새로 사야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요즘 마블사에 의해 영웅으로 묘사되어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두개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의 공통된 주제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가진 두개의 인격에 대한 이야기이며 또한 그 둘이 모두 하나의 존재로부터 태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흔히 인간의 양면성을 이야기하거나 듣곤 한다. 그리고 이 양면성은 각각 우리의 선한면과 악한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즉 우리는 선악의 두얼굴을 가졌다고 하는데 실제로 자신의 모습을 좀 세밀하게 살펴볼 기회를 얻었다면 그것이 과연 틀리지 않음을 인지할 수도 있다. 아니 어떤면에서 보면 우리는 우리의 악한면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이 악함은 보통 매우 수동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며 또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 인간들 모두가 어느 정도까지는 인정해주기 때문이다.
선함에 대한 예는 꽤나 많다. 타인에게 베푸는 친절, 남을 금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돕는 기부행위, 자신의 귀찮은 무릅쓰고라도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는 우정, 목숨까지 거는 사랑 등등. 우리 사회가 무너지지 않고 버티게 해주는 거의 모든 행위가 바로 이 선함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선함이라기 보다는 결국엔 자신의 행복과 타인의 행복을 위해 하는 일종의 윈윈전략이라고 볼 수 있지만 말이다. 그래도 우린 이것을 선한행위라고 인정해준다.
우리의 다른 면인 악함에 대해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어보면, 이것 역시 매우 많다. 하지만 여기에서 악함의 종류를 구분해서 봐야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악한 행위를 하고 그것을 인지하느냐와 인지하지 못하느냐에 대한 구분이다.
첫째로 인지하는 경우는 나의 이득을 위해 강도살인을 하는 행위를 들 수 있고, 둘째로 인지하지 못하는 행위로 보면, 나를 죽일려는 강도를 방어하기 위해 정당방위 살인을 하는 행위이다. 이 둘 모두 사람을 죽였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전자는 능동적으로 후자는 수동적으로 죽였다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보통 후자의 행동은 악하다고 평하지 않는다. 그저 어쩔 수 없는 행위라고 다들 이해해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명체로서 그 자신의 삶을 연장하고자 하는 많은 행위는 소위 우리끼리 이해된다. 살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엄청난 수의 가축을 도살장으로 보내고 있지만, 살기 위해 하는 것이니 그것은 악한 짓이 아니다.
그런데 왜 우린 이런 양면성이라고 부르는 상반된 면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지킬박사처럼 그 성분을 알 수 없는 어떤 약품을 흡입한 것도 아니고 헐크처럼 고 에너지인 감마선을 쬐어 유전자 변종이 되어 버린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린 우리의 양면성을 대체로 인정하는 편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아주 오래된 동양의 철학도 있다. 그것이 바로 유교에서 오래 전 전개된 성선설과 성악설이다.
성선설은 인간은 기본적으로 착하다고 주장하는 유학의 대표적 학자인 맹자가 주장한 것이며 반대로 성악설은 역시 같은 유학의 대표적 학자로 꼽히는 순자가 주장한 내용이다. 성선설에 따르면 우린 타고나면서부터 이미 타인에 대한 이타심과 동정심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 인간의 근원이 원래 착하므로 이를 잘 지켜 수양을 잘하면 훌륭한 도덕적 존재로 발전하게 된다고 한다. 반대로 성악설은 우린 원래 이기적이고 못된 존재이므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예의를 따로 교육받고 정신을 수련해야 한다고 한다.
약간 웃기지만 이 두 가지 반대적 주장은 어떤 의미에서는 동일하다고도 보인다. 결론은 인간이 인간답게 되려면 중간에 잘 훈련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단지 시작이 착하냐 악하냐의 차이만 있을 뿐 결론은 우리를 도덕적으로 인간적으로 완성된 존재로 만들어야 한다는 점은 같은 것이다.
나는 이 두가지 학설이 모두 잘못되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실제로 좀 더 제대로 이야기를 하자면 둘 중에서는 성악설이 좀 더 현실적인 이론이지만 그 성악설 역시도 인간의 본성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중성, 양면성은 우리가 지구상에서 다른 존재들과의 경쟁을 통해 생명체로서 진화해온 과정을 겪어서 가진 타고난 본성에 더해져, 진화의 과정 중 얻어낸 뛰어난 두뇌를 사용하여 추가적으로 얻어낸 능력, 즉 공감 능력, 예측 능력 등이 작동함으로서 다수의 개체가 모여사는 사회에 적응한 우리 인간의 사회성이 본성위에 덧씌워짐으로서 발생되는 모습으로 설명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즉 우린 원래 매우 이기적인 생존본능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인간이라는 사회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말하는 소위 선한행위를 해야만 또 이 안에서 살아갈 수 있으니 결국 끝없이 다듬어져서 타인과 잘 어울리는 방법을 얻어낸 결과인 것이다. 그래서 우린 본성 + 사회성의 두가지 면을 가지게 되면 본성은 악함을, 사회성은 선함으로 보통 표현되는 것이다.
우리는 뛰어난 지능을 이용해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 내었으며 이것을 통해 집단 능력을 극적으로 발전시켜 우리를 지구의 최강의 존재로 만들어 내었으며 이때 우리가 얻은 능력인 타인과 공동의 협력을 추구하는 공동체 활동을 몸 깊이 새김으로서 우리에게 있어서 좀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하게 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우리에게 뛰어난 지능으로 얻어낸 공감능력이나 어떤 의미에서 이타적인 이기심이 없었다면 아마도 우리는 지금도 각자 자신의 동굴에서 내 가족만을 지키기 위해 창을 들고 포악한 동물들의 습격에서 매일 시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린 무엇이 우리를 더욱 낫게 해주는지 경험적으로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좋은 집을 지으려면 한명보다는 열명이 해야 더 낫고 그 때문에 열명이 각자 자신의 집을 짓는것보다 열명이 같이 열번의 집을 지어야 동일한 결과물에 훨씬 더 좋은 과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결과물 자체도 다수가 함께 한 집이 더 좋기도 하다.
이 이야기는 우리는 당장의 눈 앞의 이득을 위해 옆에 있는 친구에게 자신이 너무도 먹고 싶은 닭다리 하나를 넘겨줘야 한다는 것을 오랜 교류의 체험의 결과로서 알고 있는것과 마찬가지다. 즉 오늘 포기한 닭다리 하나는 훗날 닭 열마리의 가치가 되어 돌아올 수 있음을 알고 있으며 그래서 우리에게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은 바로 훗날 누가 닭 열마리를 가지고 오겠느냐에 대한 사람을 구분하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린아이들이 처음으로 놀이방에 가서 겪는 과정에서도 바로 이런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설명이 된다. 보통의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놀이방에서 훨씬 착해진다고 생각한다. 즉 집에서 각종 땡강을 부리는 아이들도 다수가 모인 곳에 가면 훨씬 그 정도가 덜해진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자신의 경쟁자가 있기 때문에 억지로 뭔가를 요구하다가는 손해를 보기 쉽상이란 점을 한두살 먹은 아이조차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이다. 그래서 우리가 만약 어떤 사람의 행동에 실망했다면 그것은 원래 그 사람이 그런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이 그 사람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린 어떤 사람들이 양면적 태도나 이중적 모습을 보인다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그 비난 받는 사람의 서투른 연기능력을 비난하는 것이 더 옳을 듯 해보기도 한다. 실제로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이 타인들에 비춰지는 훌륭한 연기능력은 정말 삶의 전체 과정에서 엄청난 효과를 내주기도 한다.
하지만 우린 스스로 우리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단지 마음이 편하지 않거나 혹은 이렇게 하면 행복하니까 해서 그것들을 선택한다. 이런 것들은 마치 아이들이 어린 시절 놀이방에서 보여준 모습의 연장으로 보여진다. 즉 그 아이들이 본능적으로 그런 행동을 했듯이 성인의 그런 모습 역시 어린시절 모습이 그래도 몸속에 차곡차곡 쌓인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은 당연히 매우 자연스럽다.
물론 지능이 있기에 좀 더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어떤 이들은 목적을 가지고 제대로 된 연기를 꿈꾸기도 하지만 이런 종류의 연기는 정말 전문가가 아닌바에야 금새 들통이 난다. 삶에 있어서 자연발생적인 아닌 의도된 연기는 지속하기에 그 자신이 받는 스트레스로 인해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중간한 악당은 실제로 성공보다는 실패하기 쉽다. 정말 제대로 된 이득을 챙기려면 일단 머리가 좋아야 한다는 점은 정말 중요하다. 거짓말도 머리가 좋아야 사람들을 제대로 속여 먹는 것이다.
따로 악당이 아닌 보통사람의 경우에서 나타난 문제 하나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성선설의 입장에서 보게 된다는 점이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이 원래 착한 존재인냥 착각하면서 타인에 대해서도 동일한 잣대로 측정을 하는데 여기에서 상대에 대한 기대심이 생기고 그런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착각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오래동안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 온 사람들은 세상을 무척 관대하게 보는데 그것은 개인적으로는 매우 좋은 것이나 너무 긍정적인 사고를 갖게 되어 결국 우리가 가진 문제는 쳐다보려고 하지도 않는 반쪽만 보는 삶을 주장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절대적으로 현재의 상황이 유지되어야만 한다는 조건부 선함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당연히 배불리 먹은 사자나 호랑이가 인간을 공격하지 않는 것과 유사한 상황이 된다. 우리 인간 역시 충분히 스스로 만족할만큼 행복하다면 매우 순하고 착한 존재가 되는 모습을 보인다. 조련사에게 애교를 부리는 커다란 호랑이처럼 우리 역시도 누군가에게 배를 보이면서 쓰다듬어 달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를 만족시켜주는 것들이 없어지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것은 앞서 말한 호랑이와 사자가 한달간 굶주리게 되면과 동일한 상황이 된다. 우린 여기에서 이제 이성보다는 본성의 영향을 받게 된다. 즉 내가 살아야 하기 때문에 타인의 것을 뺏는 것에 대한 도덕적 책임감을 좀 덜 느끼는 것이다. 이 과정은 매우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결국 이것은 스스로 이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을 하는 한이 있어도 극복하는 것은 정말로 힘든 과정이다.
한달을 굶어 죽게 생겼을 때 눈 앞의 먹을 것을 미래의 관계 유지를 위해 타인에게 양보하는 행위는 정말 성인이라고 불러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대단한 의지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 조차도 한정된 공기만 주어질 때 당장 숨 막혀 죽을 수 있는 상황에서 다른 이들을 위해 숨을 참을 수는 없는 것이다. 생존을 위한 육체의 요구는 호흡이나 잠과 같은 것 앞에서는 거의 이성을 압도해 버린다.
실제로 우리가 만족할만한 상황이 주어졌을 때 그 안에서 성선설적인 입장에서 지킬박사처럼 살아갈 수 있는 이유의 근원은 바로 내가 가진 이득에 대한 욕구가 두뇌의 지능의 역할에 의해 좀 더 미래적이고 현명하게 동작하기 때문이다. 즉 앞에서 말한 닭다리에 대한 욕구를 포기함으로서 미래의 닭 10마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관계성 맺기가 더 이득이란 계산을 해낼 수 있는 똑똑한 머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동물들과 확연히 다른 우리의 능력이다. 하지만 2분 후 죽을 호흡에 관한 부분에서는 우리의 지능적인 머리는 동작을 멈춘다. 그래서 그때는 완전히 본능적으로 변하게 된다.
우리는 태어남은 의지적이 아니지만 우리가 죽는 다는 것을 알고 있을만큼 충분히 똑똑하다. 그래서 당연히 살아가면 하루의 계획, 한주간의 계획, 한달의 계획, 일년의 계획, 10년의 계획, 평생의 계획등을 세워 추진하면서 살아간다. 여기에서 인간의 관계는 바로 평생의 계획 중 일부이다. 즉 잘 맺어놓은 관계는 평생에 걸쳐 자신에게 이득을 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득은 반드시 돈과 같은 실제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들 보다도 관계에서 오는 즐거움과 외로움을 멀리해주는 행복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갖기도 한다.
우린 행복을 매우 긍정적인 단어로 바라보지만 행복 역시 다른 모든 인간의 것들과 같이 개인적인 것이다. 즉 내가 행복한 건 내가 행복한 것이지 남이 행복한 것은 아니다. 물론 어떤 행복은 타인에게 잘 전파가 되어 집단이 행복해질 수도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행복해서 한 행동들을 타인들을 조금 더 행복하게 해주어서 나타나는 결과이기 때문인데, 그래서 실제로는 내 행복이 타인의 행복으로 자동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나의 행복은 타인의 불행과 자연스럽게 연결되기도 하고 타인의 불행은 내 행복으로 느껴지는 경우가 더 많다. 혹시나 남의 행복이 자신도 행복하다면 그것은 남이 행복해서 나에게 하나라도 더 베풀어줄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짐으로서의 행복이란 것을 잊지말아야 한다.
부부관계, 가족관계에서 그 중 하나가 잘되면 전체가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그렇다. 그 관계는 어느정도 경제적인 부분에 있어서 타인들과는 다른 교류가 일어날 수 있기에 그런 기대를 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잘되면 아이는 더 많은 용돈을 받을 수 있고 아들이 잘되면 아버지는 훗날 더 많은 부양의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아무튼 이런 상황으로 인해 우린 지능이 발전해나갈수록 마치 바둑에서 몇수 앞을 내다보는 냥 내가 가질 수 있는 행복에 대한 미래지향적 생각을 통해 오늘 나의 주변인들에게 호의를 베풀고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이런 선한 행동은 마치 사람이 원래 착한 사람인냥 착각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특히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가족에 대한 친절이다. 가족에게 잘하는 사람은 개인 이기주의가 바로 가족 이기주의로 좀 더 넓어졌을 뿐인데 그것을 매우 착한 사람인냥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면 언제 이런 것들이 깨어질까? 그것은 사람마다 매우 다른 편차를 보이는데 바로 내가 더이상 미래의 가치를 위해 현재의 이득을 포기하지 못하는 순간이 왔을 때이다. 즉 내가 아무래 베풀어도 미래에 저 사람들이 나를 위해 어떤 되돌림을 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린 더이상 착하지 않는 존재가 된다.
정말 누구나 선하고 착한 사람이라고 여겨지는 존재를 정말로 남의 것만을 뺏고 훔치는 존재들만이 가득한 그룹에 넣어 두면 이 사람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자신의 마지막 남은 것들을 지키려고 그를 둘러싼 다른 존재들 만큼이나 이기적으로 변하게 된다. 내가 예전에 읽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소년에게 모든 것을 다 주고 결국 남은 밑둥을 늙은이로 변한 소년에게 쉴 수 있는 의자가 되어주는 존재가 될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수운 이야기로 그랬던 나무도 '보증'을 서 달라는 소년의 부탁을 거절하는 만화가 머리속에 떠오르기도 한다.
누구나 이런 한계지점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다른 것들이 있는 사람일 수록 더 강하게 또는 더 빨리 깨질 수 있다. 자녀를 보호하고 하는 부모의 마음은 언제고 자신의 자녀가 위협을 받게되면 타인의 것들에 대해 정말로 최선을 다해 이기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단지 우리 사회는 우리가 이렇게 변할만큼 커다란 위기를 주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순한 양처럼 삶을 살아갈 수가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붕괴되고 척박하고 생존의 위협을 끊임없이 받는 원시시대로 돌아가는 경우가 생긴다면 우린 마치 좀비 바이러스가 세계에 가득 퍼진 어느 좀비들 사회에서 생존해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정말로 비참하고 잔인한 모습으로 변해갈 것이다. 이것은 물론 픽션이긴 하지만 충분히 그럴만 해 보인다.
어떤 누군가는 천원의 이득에 본성이 들어나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는 천억에 본성이 들어나기도 한다. 천억에 본성이 들어난 이도 때론 자신과 전혀 관계가 없는 어떤 아이의 목숨에 그 본성이 들어나기도 하며 반대로 천원에 연연해 하던 이는 이 부분에 있어서 매우 무심할 수도 있다.
물론 사람의 목숨에서 본성이 들어나는 존재와 돈에서 본성이 들어나는 존재들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매우 커서 실제로는 앞의 예에 속한 사람은 존경은 반대는 경멸을 받기가 쉽다. 그래서 어떤 쪽에 자신의 의미를 두고 있는지에 대한 결정으로 인해 사람들의 평가는 달라지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물론 돈은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결론으로 보는 어리석음은 있다.
곁가지로 써보자면, 누구나 바라는 돈을 벌기 위해서는 돈에서 본성이 들어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즉 돈은 원해야 버는 것이지 별로 원치 않았는데 벌었다면 그것은 단순히 돈이 잘벌리는 일을 선택했거나 운이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들은 쉽게도 말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 돈이 따라 온다고 말이다. 이것은 천만에 말씀이다. 그냥 그럴만할 수 있는 일을 골랐고 또 사회 시스템이 그것을 보호해줬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빌 게이츠는 오늘도 야근에 시달리거나 혹은 40대가 되어 퇴직을 강요받는 개발자로서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도대체 어디쯤에서 자신의 선함을 버리고 악함을 들어내게 될지는 모두 온전히 자신에게 달렸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는 양면성 혹은 이중성이라고 부르면서 이것 자체를 매우 아이러니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 양면성은 절대로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우린 원래 양면성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이며 이것을 단지 좀 더 뛰어난 머리로 숨기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양면성 중 너무 한쪽면만을 바라보면서 살아가고 있다. 물론 그것이 편하고 행복해서 그런 것은 맞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자신의 삶에 대해 그리 자신있어 하면 안된다. 그냥 그렇게 타고났고 그런 환경에 놓였으니 그 정도로 살아가고 있는 것 뿐인 것이다. 그래서 가끔 공공의 영역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끝없는 자신감을 보이는 이들에게 많은 실망을 느낄때가 많다. 정말로 제대로 자신의 삶을 바라보었다면 도저히 꺼낼 수 없는 말들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