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려깊은, 배려심 있는 그리고 친절함
어제 한시간 남짓 채팅으로 이야기를 한 후배가 대화 도중 이런 말을 했다. 나이를 먹어가니 자신이 점점 못되지는 것 같다고. 그 예로 오늘 어제 있었던 버스안에서의 어떤 사람들에 대한 짜증을 느꼈던 상황을 이야기 해줬다. 물론 내가 들어봐도 충분히 짜증이 날 상황이긴 하다. 더운 날씨, 많은 사람들 거기에 주변에 배려심없는 행동에 대한 분노. 솔직히 여름은 서로 맨살을 들어내는 계절이기에 조금만 실수해도 살과 살이 닿는 그리 달값지 않은 경험을 하는 계절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왜 이렇게 버스라는 좁은 공간에 모여서 서로와 서로의 간격을 거의 30cm 만큼도 안 떨어져서 붙게 되는 것일까? 물론 그 이유는 당연히 매우 다양하게 있을 것이다. 출근을 하기위해 그 버스를 꼭 타야했으며, 오늘 있을 면접에 가기 위해, 학교에 가기 위해, 친구와의 약속을 위해, 입원하신 부모님의 병문안을 위해, 버스가 타고 싶어서(?) 등등.
우리 인간 사회는 기본적으로 다수의 행동을 모아서 일종의 극대화 된 효율성을 통해 비용을 절감하는 시스템으로 되어 있다. 대중교통이 그 가장 대표적인 예인데, 택시비가 버스비보다 비싼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택시는 개인의 목적지를 자유롭게 가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당연히 비싸지게 되는 반면 가는 경로가 늘 일정한 버스는 반드시 그 목적을 위해 타는 사람들이 다수가 모임으로서 운송비를 절감해 내는 교통수단인 것이다.
결국 보통 사람들이라면 비용절감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대중교통과 같은 공동 이용장치 속에서 늘 이 사회에 있는 다른 누군가와 관계를 하게 되어 있으며 혹시나 돈이 많거나 사정에 의해 자가용을 타기 때문에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더라도 회사와 같은 단체속에서 결국 또 누군가와 같이 일을 하는 시스템에 놓여지기에 실제로는 별반 다르지 않게 된다. 심지어 백수라서 출근도 안하고 집에만 있다고 쳐도 작은 규모지만 자신의 가족과 연결되어 관계를 맺는 최소 단위의 관계맺기라도 하게 된다. 만약 그것마져 없다면.. 굶어 죽거나 자살할 지도 모른다.
아무튼 우린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매일 수 많은 사람들과 스쳐지나가거나, 몸이 거의 닿을 듯 붙거나, 언쟁을 하거나, 같이 즐겁게 웃고 행복해 하거나, 밥을 먹거나, 토론을 하거나, 실없은 농담을 하거나, 각종 채팅툴로 다양한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 받거나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되며 이것이 모이면 인생이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린 이 전체 과정에서 끊임없이 살아감을 위한 어떤 행동을 하게 된다. 그 중에서 오늘은 오늘의 주제인 긍정적인 행동부분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시작은 사려깊다는 말부터 해보자. 사려깊다는 말에 대해 단어적으로 이해 하는 사람은 아주 많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내 주변에 사려깊은 사람을 꼽아보라고 하면.. 실제로 꼽을 사람이 있는 경우가 매우 드물듯 싶다. 나의 경우도 사려깊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이은 단 한명도 없다.
그렇지만 이것은 원래 내 주변에 사려 깊은 사람이 없었다는 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단지 나이를 먹고 사람에 대해 좀 더 이해를 하다보니 예전엔 사려깊다고 느꼈던 이들도 그 안쪽으로 들어가면 실제로 그렇지 않은 다른 것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그 후보에서 빠진 것 뿐이다. 예를 들면 매우 상대를 배려하고 생각이 깊은 사람처럼 보인 누군가가 알고보니 관계성이 틀어지는 것을 두려워해서 끝없이 상대에 대한 눈치를 살피는 내면의 불안함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즉 보이는 모습이 다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제목처럼 사려깊고 배려심 있으며 친절한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전에 내가 좀 헷갈렸던 부분을 하나 이야기 해보자. 그것은 바로 배려와 눈치보기의 경계가 어디인지와 친절함과 선함의 차이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이다.
배려를 내가 이해한 단어의 의미로 설명해보자면 '타인의 속마음을 어느정도 헤아려 그것에 대해 마음 씀씀이를 해주는 행위' 를 말한다. 그럼 눈치보기란 무엇일까? 이 역시 비슷하다. '타인의 속마음을 어느정도 헤아려 혹시나 나에게 조금 더 호감을 느끼게 하거나 혹은 나에 대한 나쁜 감정을 갖지 않도록 최대한 자신의 노력을 최소하 시키려는 노력의 행위'를 말한다.
둘의 차이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배려와 눈치보기의 차이에서 가장 명료하게 들어나는 내용은, 당장 느껴지는 나에 대한 이득이나 손해 부분에 대한 고려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배려 역시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나에 대한 평가를 높여서 장기적인 이득을 얻는데 있기 때문에 반드시 눈치보기 보다 배려가 더 도덕적으로 우월한 것은 아니다. 단지 눈치보기는 정확히 이득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며, 배려는 이것과는 조금 다르게 반드시 이득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그럼 친절함과 선함의 차이는 무엇일까? 친절함은 타인이 기분나쁘지 않도록 조심스럽고 공손한 의도의 행동이나 말을 해주는 것이다. 반대로 선함은 말 그대로 착한 것인데 문제는 인간에게 선함이란 존재하지 않는 성향이란 점에 있다. 물론 우린 인간은 오랫동안 선함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긴 하다. 그래서 '누구는 참 착하고 선해' 라고 말한 경험을 가지고 있긴 한데 실제로 선하다는 것은 너무나도 상대적인 기준으로 정해진 것이다. 이것에 대한 착각에서 벗어나려면 과연 어떤 절대적인 잣대로 판단해야 이 사람이 선할까? 라고 생각해보면 된다. 경쟁을 그 생존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로 타고난 생명체가 어찌 선할 수 있으랴.
그래서 친절함은 선함과 다르다. 실제로 둘은 비교할 수 없는데 선함이 존재하지 않아서 그렇다. 하지만 우린 친절한 사람을 선한사람으로 많이 착각한다. 그래서 현재 인간사회에서는 친절함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관계정책으로 삼고 있다. 즉 친절한 사람은 마치 선한 사람으로 간주되어 그 사람이 하는 말의 신용도를 높여주는데 이것은 매우 좋은 판매전략으로 작동한다.
자, 다시 원래 질문으로 돌아가 제목과 같은 사람에 대한 존재 유무를 따져보자. 결론적으로 말하면 당연히 존재한다. 왜냐하면 사려깊은, 배려심 있는, 친절한 사람은 당연히 '선함' 과 같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착각속의 산물이 아닌 실제적인 덕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스스로 착각해서 혹시나 가졌다고 믿는 '이타심', '선함' 등과는 분명히 다른 덕목이다.
이것들은 우리가 어쩔수 없이 혹은 필수적으로 맺게되는 관계속에서 좋은 윤활류 역할을 해준다. 사려깊음은 어떤 이들에게 더 깊은 감동을 주고 배려심 있는 행동은 서로가 행복할 수 있도록 해준다. 또한 친절함은 받는 사람을 즐겁고 기분좋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물론 내부적으로 이것들은 모두 그 행위 당사자의 이득을 기반으로 한다. 누군가를 감동시킨 사람은 기회가 되면 그 사람으로부터 더 많은 이득을 얻어낼 수 있는 행운을 누릴 수 있으며 누군가를 즐겁고 행복하게 해준 배려는 그 사람으로부터 배려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 또한 친절함은 또 다른 친절함으로 보상이 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보상과 처벌의 원칙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믿는 종교적 믿음의 원론적 가치관에 숨겨진 진실을 보는 것과 같다. 과연 우리가 보상과 처벌이 없다면 어떤 원리로 세상속에서 선택하고 움직이고 있을 것이란 말인가? 실제로 그것이 바로 우리를 결정하고 행동하고 방향성을 정하게 해주는 힘이다.
그래도 이런 이타적인 이기심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매우 중요한 마음 씀씀이이자 행동이다. 조금만 노력해서 나보다 타인의 입장을 좀 더 고려하는 버릇을 들인다면 하는 나와 받는 그 상대 모두 조금 더 행복해지고 세상을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믿음이 더 높아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린 그러기엔 너무 각박해진 모양이다. 그래서 배려보다는 상처를 주는 사회가 되어 버렸으며 나를 위한 즐거움을 위해서는 타인의 불편함은 꺼리낌없이 해야만 이 시대를 잘 살아간다고 칭찬을 듣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사려깊음, 배려, 친절의 행위를 싸잡아서 남의 눈치를 보는 행위로 간주하고 타인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것을 마치 대단한 주관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결국 그 자신은 끝없는 외부자극으로부터 단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사는 것이 이 시대 대다수 사람들의 행위란 것을 그 자신은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나 역시 사려깊고, 배려심 많고, 친절한 사람이 아니다. 특히 친절함은 나와는 너무 거리가 먼 행동이다. 난 매우 퉁명스럽고 막말을 해대는 누군가의 표현에 의하면 냉소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원래 내가 그런 사람은 아니였던 것 같은데 아마도 살아오면서 계속 받은 상처가 나에게 이렇게 두꺼운 갑옷을 입혀 놓은 모양이다. 그나마 요즘 이 불필요한 갑옷을 조금이라도 벗어버릴려고 노력하는 중인데 참 쉽지 않다.
아무튼 우리는 모여서 살아야 한다. 매일 택시비를 지불하고 회사에 가고 싶지 않다면 버스와 지하철을 타야하며, 회사에서 일을 잘하고 싶다면 동료와 잘 지내야 한다. 학교에서도 공부를 잘하고 싶고 행복하고 싶다면 친구들과 잘지내는 것이 좋다. 그래서 결국 우린 늘 관계속에서 살아야만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다. 물론 예외도 있다. 그냥 숲속에서 혼자 살아가는 것. 물론 그것도 좋다. 자연에 대한 사려깊음과 배려를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조금이라도 좀 더 관심을 가지고 그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려하고 선의를 가지고(선의가 선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나와 그들에 대한 생각을 조금 더 한다면 거기에서 자연스럽게 사려깊은 행동과 그들을 위한 배려 그리고 자연스러운 친절함이 표출 될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바로 우리 스스로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아서 그렇다. 이것은 눈치보는 것과는 조금 다른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우린 눈치보기 훈련만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한다.
물론 이 눈치보기 훈련이 훗날 상대의 마음을 유추해내는 매우 중요한 교육과정임을 나는 인정한다. 그렇지만 거기에서만 머물러서는 안된다. 눈치보기는 철저하게 개인 이득을 추구하는 행위이다. 거기에서 조금만 더 자신의 이득을 포기하고 같이 사는 삶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린 정말로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물론 우리나라가 그런 사회가 되기엔 참 힘들어 보이지만.
나라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마음의 벽을 좀 허물고 싶다. 힘들곘지만 아무튼 그것도 하나의 도전과제가 될 것이다.